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444화 "말콤, 어떻게 하면 나가들을 막을 수 있는지 말해." "......." 시몬이 답을 요구했지만, 밧줄에 묶여 있는 말콤은 그저 눈을 꾹 감아버렸다. 시몬의 눈썹이 치켜떠졌다. "말하지 않을 생각이라면 나도―" "나가들은 인위적인 파장을 내는 장치에 이끌리고 있다." '뭐?' 시몬이 눈을 깜빡였다. "이 박물관에서 북동쪽으로 가면 작은 산이 있다. 그 산에 올라가서 남쪽을 내려다보면 평평한 숲이 보이는데, 거기에 장치가 있다. 나가들이 몰려 있는 곳을 체크하면 찾기 쉬울 거다." "......." 시몬의 얼빠진 표정을 본 말콤이 울컥하며 소리쳤다. "뭐! 또 뭐 이 새끼야! 목숨 걸고 가르쳐 줬더니 표정이 왜 그 꼬라진데?" "아니, 생각보다 너무 쉽게 알려줘서." "변덕이다. 이제 꺼져!" 고개를 한번 끄덕인 시몬이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갔다. 말콤은 멀어지는 시몬의 뒷모습을 보며 초조한 듯 입술을 깨물다가, 이내 그가 창문을 여는 순간 다급히 말했다. "야, 야! 잠깐!" "?" "정보 가르쳐 줬으니까 이건 풀어줘야지!" "네가 거짓 정보를 흘렸을 수도 있잖아." 시몬이 빙긋 웃으며 창문에 발을 디뎠다. "물론, 죄 없는 경비들을 때려눕힌 잘못도 있고." "야, 야! 잠까안!" 시몬은 뒤도 안 돌아보고 창밖으로 몸을 날렸다. 허탈하게 입을 벌리고 있던 말콤이 고개를 떨구며 헛웃음을 흘렸다. "......뽑을 건 다 뽑아먹었단 거냐. X발." 처음 싸울 때는 무슨 성인군자처럼 좔좔 설득해 주더니, 한편으로는 또 냉정하다. 아마도 그게 시몬 폴렌티아의 강점이리라. 지금까지 시몬의 뒤통수를 쳤다는 키젠 학생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특례 7번 엘리사 셀린도 역으로 된통 당하기만 했고. 말콤은 천장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알아. 넌 누구 못지않게 노력하고 있어. -다시 네가 올라갈 때가 올 거야. "X이이이바아알......." 말콤의 입에서 힘겨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10분. 고뇌를 거듭하던 그의 눈에 결연한 빛이 들었다. 이제는, 망할 아버지의 그늘에서 빠져나올 때가 됐다. "그래." 말콤이 입을 몇 번 달싹였다. 잠시 후 혀를 깨물었는지 입에서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새로운 맹독학 교수, 별야의 수업을 청강해서 배운 기술. "포기 안 해." 입에서 흐르는 피는 '혈독'이었다. 말콤이 입에 혈독을 머금고 고개를 숙여 어깨 쪽의 밧줄부터 질겅질겅 씹기 시작했다. '포기 안 해.' * * * 데이모스 박물관을 빠져나온 시몬은 정신없이 산을 올랐다. 물에서 사는 나가들은 지상으로 올라오면 기동성이 떨어지기에, 굳이 산으로 올라오려 하지는 않았다. 시몬은 방해받지 않고 산꼭대기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저기다!' 말콤이 말한 대로 평평한 숲이 보이고, 그중 한 곳에 나가들이 집중적으로 몰려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저기에 나가들을 조종하는 파장을 일으키는 장치가 있단 거지?' 시몬이 조금 더 가까이에서 보려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사브작하고 수풀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와." "......." 잠시 정적이 일었다. 그러다 수풀이 흩어지며 한 소년이 튀어나왔다. '이 녀석은?' 시장에서 한 번, 박물관에서 한 번. 총 두 번이나 부딪혔던 바로 그 정체불명의 빨간머리 소년이었다. 그리고 이번이 세 번째. "하, 하하핫! 아, 안녕하세요?" 소년은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또 만났네요!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요?" "......." 시몬은 대답 대신 전투를 준비하며 자세를 낮추었다. 그의 두 손에 칠흑이 일렁이는 모습을 본 빨간머리 소년이 다급하게 외쳤다. "아니, 잠깐만요! 왜 저를 경계하는 거예요?" "내가 지금 경계 안 하게 생겼어?" 시몬이 차갑게 뇌까렸다. "첫 번째 부딪힌 건 우연이라 치자. 하지만 두 번째에 부딪히는 바람에 말콤을 놓쳤어." "그, 그건......! 저도 말콤을 쫓고 있었으니까요!" 이 녀석도 말콤을 알고 있다. 시몬은 그 사실을 곱씹으며 말을 이었다. "결정적으로, 내가 말콤을 붙잡아서 들은 장소에 하필이면 딱 네가 나타났지. 랜돌프 갱단의 스파이라고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 아냐?" 빨간머리 소년이 세상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라니까요! 진짜 오해예요!" -근데, 의심스럽긴 그쪽도 마찬가지 아닌가? 시몬과 소년의 목소리가 멈췄다. 소년의 손목에 달려 있던 팔찌에서 여자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말콤을 쫓고 있다가 부딪혀서 방해받은 건 이쪽도 마찬가지야. 게다가 방금 그쪽 입으로 '말콤에게 들은 장소'라고 했지. 갱들이 붙잡혔다고 중요정보를 술술 불 놈들도 아니고. 그쪽이야말로 랜돌프 갱단과 한패일 가능성이 있지 않나? "으악! 자, 잠깐. 둘 다 싸우지 마세요!" 이대로는 대화가 평행을 달릴 뿐이다. "그럼 피차 정체를 밝히자." 시몬은 겉에 걸치고 있던 로브를 벗어서 교복 차림을 드러냈다. "내 이름은 시몬 폴렌티아. 키젠 2학년이야." 붉은 머리 소년의 눈이 커졌다. "와아아! 키젠! 키젠이셨군요!" -에이. 저 교복 가짜 아냐? 시몬은 말없이 칠흑을 일으킨 주먹으로 교복 재킷을 톡톡 때려보았다. 배리어가 정상적으로 펼쳐지는 모습이 보인다. "그럼 이번엔 저도......!" 붉은 머리 소년이 품에서 명패 같은 것을 꺼내 보였다. "제 이름은 아서 블레만! 용병왕입니다! 랜돌프 갱단으로부터 영지를 지켜달라는 파로나 영주님의 의뢰를 받았어요!" 시몬의 고개가 갸웃했다. "용병왕?" "네! 네! 들어보신 적 있죠?" "나이 드신 분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분은 제 할아버지세요. 지금은 부상으로 은퇴하시고, 제가 용병들로부터 그 자리에 추대됐죠." 그가 눈을 감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우리 할아버지의 이름을 걸고! 반드시 파로나 반도를 구해내고 말 겁니다!" "......." 여전히 미심쩍은 부분은 있었지만, 지금은 실랑이를 벌일 시간도 아까웠다. "알았으니까 물러나 있......." "시몬! 저랑 힘을 합치시죠!" 아서가 제안했다. "솔직히, 혼자서 저 나가 무리를 뚫고 들어갈 엄두가 안 났거든요! 시몬은 강하죠? 두 번이나 부딪혀 봐서 알아요!" 시몬은 고개를 돌려 우글거리는 나가 떼를 바라보았다. 아서가 랜돌프 갱단이든 용병이든 사실 상관없다. 내가 역으로 당하지 않을 자신이 있으니, 이용할 가치가 있다면 이용하면 된다. "뒤처지진 마." "핫하!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 * * -캬르륵! -캬아아아악! 랜돌프 갱단의 파장 발산기를 중심으로, 수많은 나가들이 몰려들어 있었다. 발산기에서 파장이 일렁일 때마다, 나가들은 고개를 높게 들어 울음소리를 내뱉었다. 그런데. 촤아아아아아악! 갑자기 들린 소리에 몬스터들의 고개가 돌아갔다. 이곳에서 수백 미터 떨어진 지점에서 두 소년이 달려오고 있었다. 탓! 시몬이 지면을 내려 앉히며 공중으로 도약했다. 그야말로 이상적인 투척 자세를 취한 그의 손에는 파직거리는 자색 창이 들려 있었다. <시몬 오리지널 - 카오스 스피어> 촤아아아아아악! 자색 창이 예측 불가능한 궤적을 그리며 나가들을 분쇄하며 지나갔다. "하아아압!" 뒤따르는 아서의 검이 번뜩였다. 은빛이 허공에서 여러 번 번쩍이더니, 동시에 다섯 마리의 나가가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계속 가! 아서!" "네!" 시몬이 몸의 마법진에서 카오스 스피어를 더 꺼내 연달아 던졌다. 하늘이 자색의 궤적으로 물들고, 밀집해 있는 나가들이 갈가리 찢어졌다. 측면으로 다가오는 나가의 목을 쳐낸 아서가 감탄했다. "대단해! 엄청난 흑마법입니다!" 아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쪽도 질 수 없죠!" 시몬이 카오스 스피어를 날려 화력으로 대거 휩쓸어 버리면, 아서가 정밀한 검술로 남은 자잘한 몬스터들을 베어냈다. 그럭저럭 꽤 호흡이 맞는 두 사람이었다. "흡!" "하아아아아앗!" 피가 비산하고 괴성이 난무한다. 천 기가 넘어가는 나가의 숲을, 두 소년이 힘으로 꿰뚫고 있는 모습은 가히 눈부신 장관이었다. "시몬!" 시몬이 정면으로 던진 창이 극단적으로 오른쪽으로만 쏠리자 아서가 소리쳤다. "죄송하지만 정면에만 집중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미안, 내가 조종할 수 있는 부분이 아냐." 폭발하는 창. 관통하는 창. 분리되는 창. 퍼져 나가는 창. 어떤 창은 수십 기의 나가를 휩쓸고, 어떤 창은 나가 하나의 몸을 간신히 꿰뚫을 정도로 위력의 차이가 극단적이었다. '변수에 익숙해져!' 시몬이 이를 악물고 다음 창을 던졌다. '한 기를 처치 못 해도 놀라지 말고, 스무 기를 처치해도 놀라지 마! 오롯이 내 할 일에만 집중해!' 그래도 레스힐에서 리처드와의 특훈 성과는 있었다. '꽝'은 없다. 창을 날리면 한 기는 쓰러트릴 수 있다. 그리고 지켜보던 아서는 입을 벌렸다. 세상이 자색으로 물들고, 그 중심에 이 모든 자색을 통솔하는 시몬의 등이 보인다. '이게 그 소문이 자자한 키젠 학생의 실력이구나!' 시몬이 잠시 힘에 부쳐서 속도를 늦추자, 이번엔 아서가 앞으로 튀어나왔다. 촤르르르륵! '저게 뭐야?' 아서는 쓰고 있던 검을 납도하고, 아공간에서 대형 몬스터의 뼈로 이루어진 기다란 사복검(蛇腹劍)을 꺼내 휘두르기 시작했다. "크합!" 콰콰콰콰쾅! 그 검은 여러 피스의 대형 뼛조각이 와이어로 연결되어 있고, 채찍처럼 늘어지거나 줄어들기를 반복하며 주위의 나가를 휩쓸었다. 사복검이 오갈 때마다 주위에 먼지구름이 피어올랐다. 무식하기 그지없지만 위력 하나만큼은 파괴적이었다. '역시 아서도 네크로맨서였구나.' 마치 시몬의 오버로드 다리 몇 개를 겹쳐서 휘두르는 것 같은 느낌. 복원기의 일종인 듯, 뼈와 뼈 사이에는 인력이 적용되고 있다. "허억! 헉!" 위력은 어마어마했지만, 얼마 못 휘두르고 아공간에 사복검을 집어넣는 아서였다. "여, 역시 세 번째 검은 빡세......! 허억!" '이런 게 두 자루나 더 있는 거냐.' 시몬이 헛웃음을 한번 흘리고는 옆구리의 마법진에 손을 올렸다. "나와라." <시몬 오리지널 - 서먼 카오스 리퍼> 유일무이한 혼돈의 소환마법. 시몬의 그림자에서 조커 카드를 연상케 하는 외형의 낫을 든 유령이 튀어나왔다. 처억! 리퍼가 손을 들어 올리자, 바닥에 박혀있던 카오스 스피어들이 모두 공중으로 치솟았다. 창 옆으로 기다란 날이 생성되며 '카오스 스피어'가 '카오스 사이드'로 변화한다. 스릉! 스릉! 스릉! 이내 리퍼가 낫을 휘두르자, 카오스 사이드들도 춤을 추며 나가들을 베어낸다. "시몬! 정면 1시 방향이에요!" 아서가 소리쳤다. "파장 발산기입니다!" "오케이, 확인했어." "이 거리라면 제가 깰 수 있습니다!" 아서가 검을 세워 들어 칠흑을 검신에 녹였다. 새까만 칠흑이 검에 만나는 순간 묘한 광택을 뿜는 은빛으로 변했다. <아서 오리지널 - 거궐(巨闕)> 반달형의 검기가 대지를 가르며 날아가더니 파장 발산기에 부딪혔다. 그러나. 쩡! 파장 발산기에는 결계가 쳐져 있었다. 아서의 검기가 부딪혀 사라졌다. "이런, 결계까지?" "결계는 내가 자를 테니까 호위를 부탁해!" 시몬은 지금까지 몇 번이고 아서에게 허점을 드러냈지만, 아서는 공격하지 않았다. 이제 그가 같은 편이라는 확신이 든 시몬은 처음으로 등을 맡겼다. "후읍!" 정면에서만 신경 썼다. 무수히 몰려드는 나가들을 베며 카오스 리퍼와 함께 뛰어들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손에도 카오스 사이드 한 자루를 손에 쥐었다. 키이이이이잉! 시몬이 혼돈을 부여하자, 낫에 빛이 일렁이며 크기가 점점 커졌다. 이내 리퍼가 들고 있는 낫과 똑같은 크기가 되었다. '동시에!' 왼쪽에서는 시몬이, 오른쪽에서는 카오스 리퍼가. 마치 교차하듯이 X자를 그리며 발산기를 베어냈다. 쩌어엉! 결계가 산산조각 나며 발산기가 온전히 드러났다. "아서!" "예!" 뒤이어 달려오는 아서가 은빛 궤적을 그리며 돌진해 발산기를 지나갔다. 머리 위에 세워져 있던 검이, 돌진을 마치는 동시에 바닥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정확히. 쩌어어어억! 발산기가 반으로 갈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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