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433화 판타서스는 리처드의 조건을 흔쾌히 승낙했다. 다행히 판타서스는 다음 모험까지 일주일의 시간이 있다고 했다. 그 기간 동안 직접 슬립 저주를 시몬에게 전수해 주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다음 날 오후. 바로 수업이 시작되었다. 시몬은 판타서스와 나란히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판타서스 회장님의 오리지널을 전수받을 수 있다니!' 어제 아버지 리처드의 행동은 조금 부끄러웠지만, 결과적으로는 최강으로 소문이 자자한 판타서스의 슬립을 배울 수 있게 됐다. 기대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리라. "여기가 좋겠군! 음!" 판타서스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아주 좋은 산이야! 마나 농도도 높고 나무도 쭉쭉 자라 있고 치명적인 몬스터도 없어." "마음에 드셔서 다행이네요." 간단한 잡담 후에, 바로 교육으로 넘어갔다. 판타서스가 레스힐에 머무를 수 있는 기간은 일주일. 사실 그의 오리지널을 배우기에는 빠듯한 일정이었다. "지금부터 내가 후임에게 가르쳐 줄 흑마법은 슬립(Sleep)." 그가 손가락을 뻗어 어딘가를 가리키자, 나무에서 뭔가가 툭 떨어졌다. 뭔가 싶어서 보니 다람쥐 한 마리가 쿨쿨 자고 있었다. "자네도 알다시피 수면 저주일세!" 빠른 시전 시간.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운용. 시몬은 반짝이는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판타서스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가볍게 손뼉을 짝! 쳤다. 벌떡! 자고 있던 다람쥐가 잠에서 깨더니 화들짝 놀라며 도망쳤다. "내 입으로 말하기 그렇지만, 나는 이 저주 하나만으로 키젠 최강이 됐지! 음!" 시몬이 눈을 깜빡였다. "이능 사용자 아니셨어요?" "하하! 그런 이야기를 주위에서 많이 듣지. 하지만 전부 오해야!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 슬립 저주 하나만으로 버텨온 학생이네! 음!" 키젠에서는 이능을 가진 네크로맨서가 유리할 수밖에 없다. 로레인 아크볼드. 세르네 아인다르크. 두 사람 모두 이능이 주력이다. 물론 이런 이레귤러들 외에도, 다른 이능 사용자들의 성적도 좋은 편이다. 남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무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플러스 요소인데, 키젠에 입학한 이능 사용자들은 대부분이 이능이 칠흑과 호환된다. 네크로맨서로서의 강함이, 이능의 강함으로도 이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염세주의자들은 노력보다는 선천적인 이능에 따라 등수가 정해진다며 혀를 찼지만, 그런 편견을 보란 듯이 뒤엎어 버리며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인물이 바로 판타서스였다. 그는 기초지식이나 사전학습 없이 키젠에 입학했고, 오로지 수면계열 저주만을 극한으로 갈고닦아 다른 모든 이능 사용자들을 때려눕히고 최정상에 군림한 인물이었다. "지금부터 일주일간, 내 오리지널 슬립과 노하우를 우리 후임에게 전수해 주겠네!" "네!" 시몬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부터 3학년들의 반응이 기대되는군! 음! 2학년이라며 자네를 무시하던 그들이, 내 슬립을 사용하는 장면에 놀라는 모습이 말이야! 으하하하!" 리처드의 압박에 저주를 가르치는 꼴이 됐지만, 판타서스도 이를 승낙한 나름의 이유는 있는 듯했다. 한바탕 큰 소리로 웃어젖힌 그가 팔짱을 끼며 시몬을 보았다. "그럼 시작하기 전에 질문하나 하지! 오리지널 흑마법이 뭐라고 생각하나?" 시몬은 바로 답했다. "내가 직접 개발한 흑마법입니다!" "거의 비슷했지만 틀렸군! 사실 이건 사람마다 정의하는 바가 다르다만, 이 판타서스가 정답으로 생각하는 개념은 '나만이 쓸 수 있는 흑마법'이라네!" 그가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자! 먼저 내 슬립 저주의 룬어와 수식을 보여주지." 시몬이 눈에 바짝 힘을 주었다. '드디어 키젠 최강의 주력기를!' 시몬은 수식 하나 놓치지 않고 훔칠 생각으로 집중했다. 화아아악! 그러나 그런 결심은 한순간에 무너졌다. 판타서스의 손바닥에는 2차원을 넘어선, 3차원의 괴기한 마법진이 펼쳐져 있었다. "무슨......!" 핑 하고 현기증이 돌았다. 이 마법진의 모든 것을 알 수 없었지만, 네크로맨서로서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상태가...... 가능해요?" 기존의 상식을 비웃는 듯한, 불가능한 수식조합이나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불가사의한 공식도 섞여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걸 일주일 만에 익힐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하하하! 너무 낙담 말게 후임! 궁금한 게 있다면 뭐든 물어보도록! 시간을 들여 찬찬히 살펴봐도 좋네." "......." 시몬은 잠시 눈을 감고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현기증이 가라앉자 다시 눈을 부릅뜨고 마법진을 살폈다. "여기, 오른쪽 회로는 왜 스프링처럼 구불구불하게 만드신 거예요? 직선이 더 효율적이지 않나요?" "아아! 그건 1학년 2학기 결투평가 때의 일이었지!" 판타서스는 보기보다 말이 많은 타입. 이야기가 길었지만, 요약하자면 결투평가에서 상대의 계산저하 저주를 뚫고 슬립을 써야 하다 보니 이렇게 됐다는 것 같았다. "이쪽 수식은 왜 만들다 만 것처럼 끊어놨어요?" "하하하! 그건 실수일세! 코나 공식을 써보려고 시도했다가 잘 안 돼서 다른 쪽으로 선회했는데, 잠깐 정신 놓고 보니 이런 수식이 습관처럼 굳어져 버렸지 뭔가!" "그럼 이쪽은요?" "이쪽은 내 파견평가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겠군! 마법진 준비 중에 몬스터의 공격을 받았는데, 몬스터가 내 수식을 할퀴고 지나갔다네! 그런데 대충 수습만 하고 그대로 마법을 썼는데 의외로 이게 또 괜찮아서......." 이야기는 길었지만 알 수 있는 건 하나. 이 저주는 무수한 시행착오와 변수가 겹쳐져 만들어진 결정체란 것이다. "이제 알겠나?" 판타서스가 진지하게 말했다. "내가 왜 오리지널이 '나만이 쓸 수 있는 흑마법'이라고 했는지." "네. 그리고 이렇게 마법진이 마구 꼬인 이유는......." "칠흑의 기억하려는 성질 때문이라네!" 칠흑의 기억하려는 성질은, 네크로맨서의 본질이기도 했다. 특정 룬어와 수식을 이용한 마법진을 반복적으로 사용하면, 칠흑이 그 과정을 기억한다. 나중에는 그냥 마법진의 이름만 떠올리면서 초입 단계만 신경 써도, 룬어와 수식까지 알아서 완성되는 식이다. 이 성질이 굳어지면 나중에 수정하기가 상당히 어려운 편인데, 그래서 키젠에서는 마법진 수정을 원칙적으로는 금지하고 있다. "기억하려는 성질은 양날의 검이지!" 판타서스가 그 복잡한 삼차원 흑마법을 꺼트리더니, 다시 한번 펼쳐 보였다. 아까 봤던 그대로. 빙빙 스프링처럼 꼬아놓은 회로와, 만들다 말았던 수식 등. 비효율적이고 지저분한 잔해까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우리 네크로맨서들은 이를 이용해 빠른 시전이 가능하나, 이런 불필요한 흔적까지 남기도 한다네." 그가 주먹을 쥐어 마법진을 흩트렸다. "그렇다고 좌절할 필요는 없어! 흑마법은 흉터가 가득한 전사의 몸이라고 생각하게! 끊임없이 상황과 조건에 맞춰서 변화하고 진화하지." "......오, 뭔가 로망 있는 비유네요." "하하하!" 판타서스가 호탕하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후임도 곧 이런 걸 가질 수 있을 걸세! 자, 그럼 기본부터 시작하겠네. 기본에서부터 차근차근 업을 쌓아나가고 변주를 가해 자네만의 것으로 만드는 거지." 판타서스는 눈을 감고 뭔가 의식을 치르듯 중얼중얼하더니, 이내 왼손을 펼쳤다. 펼치자마자 마법진이 나타났다. "이건 후임이 2학년 과정에서 배우게 될 가장 기본적인 슬립 저주라네. 그리고!" 이번에는 반대쪽 오른손을 펼쳤다. "바로 이것이! 후임에게 제안하는 내 오리지널 슬립 저주라네!" 시몬이 눈을 크게 뜨고 두 마법진을 살폈다. "차이를 알겠나?" "교과서의 슬립 저주는, 수면의 룬을 이용하네요. 그리고 판타서스 회장님의 저주는......." 시몬의 눈이 커졌다. "......그냥 진정의 룬?" "바로 그렇네!" 시몬은 분석을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수면의 룬을 쓰는 슬립 저주는 구성이 심플해요. 사용한 수식들도 룬어의 힘을 100% 이끌어내는 데 집중하고 있어요." 시몬의 고개가 오른쪽으로 돌아갔다. "반면 진정의 룬을 쓰는 쪽은 구성이 몇 배는 더 복잡해요. 그야 당연하죠. 진정효과만으로 사람을 재울 수 없으니까. 다른 보조수식들이 수면 효과를 내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네요." "음! 아주 정확히 봤네!" 판타서스가 고개를 휙휙 끄덕였다. 대답이 만족스러운 눈치다. "그렇다면 문제! 이 내가 효율적인 수면의 룬을 포기하고, 진정의 룬으로 슬립 저주를 만들어 쓰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 시몬이 턱을 짚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판타서스는 고뇌하는 시몬을 두고 가만히 기다렸다. "이것까지 맞춘다면 100점 만점에 1,000점이다만." "저주 효과로 직접 발동하는 수면은 인위적이지만." 시몬의 눈에 총명한 안광이 일렁였다. "진정의 룬은 '진짜 수면과 같은 효과'를 만들어낸다는 게 차이점이라고 생각합니다." 판타서스의 얼굴에 폭풍과도 같은 감격이 몰아쳤다. 그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퍼펙트!!" 푸드드드드드득! 주위의 산새들이 놀라서 하늘로 날아올랐다. "바로 그거야! 역시 이 판타서스의 후임! 다음 키젠 학생회장의 재목!" 그가 극도로 흥분하며 입에서 침을 튀겼다. "잠! 잠! 잠을 뭐라고 생각하나! '주기적으로 되풀이하는 생리적인 의식상실 상태'라네!" "......아, 네. 그쵸." "인간은 인생의 삼 분의 일 정도를 이 생리적 의식상실 상태에 빠져 산다네! 저주학자의 견해에서 보면 대부분의 생명체들이 생명 활동 유지를 위해 제 몸에 저주를 거는 셈이지! 재미있지 않나? 슬립 저주는 바로 그 점을 확실히 인지하고 착안해야 하는 걸세! 사실 인간은 늘 수면이란 저주에 걸려주길 기다리고 있지." "그, 그러네요." 시몬이 진정하라는 듯 웃었지만, 판타서스의 설명은 멈추지 않았다. "물론 수면의 룬으로 저주를 쓰면 빠르겠지! 하지만 저항이 있을 걸세! 네크로맨서들은 저주저항을 둘둘 두르고 있고, 프리스트들은 정화마법을 가졌네! 그러니 우리는 굳이 무리해서 상대를 재울 필요가 없네! 인간은 언제든지 잘 준비가 되어 있고, 우리는 그저 그런 부분을 살살 긁어주는 걸세! 근육을 이완시키고, 혈압을 안정시키고, 심박동과 호흡의 템포를 늦추는 식으로 말일세!" 그가 이런저런 과정된 동작을 취하며 설명을 이어갔다. "슬립은 다른 저주들과는 결이 달라야 하네! 다른 저주들이 상대를 악랄하게 후벼 파는 데 집중한다면! 슬립은 상대가 얼마나 편안하고 안락하게 느끼느냐에 따라 성능이 달라지네!" 뒤척이고 힘들고 겉잠을 자게 만드는 슬립(Sleep) 저주는 쓰레기. 적이 만족하는 단잠을 자게끔 도와주는 슬립이야말로 좋은 슬립이라는 게 평소 판타서스의 지론이었다. "그렇게 상대를 만족스럽게 단잠으로 몰아넣어, 완전한 무방비로 만든 뒤." 판타서스가 검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어떻게 할지는 저주술사의 몫이니 말일세." "무, 무섭네요." 전장에서 수면은 곧 죽음이었다. '근데 확실히 유익한 수업이긴 하다.' 시몬은 만족스러웠다. 오로지 슬립만 파고든 사람의 강의라서 그럴까, 노하우도 관념도 모든 게 달랐다. 절대 학교 수업에서는 배우지 못할, 아니 돈을 주고도 못 배울 수업이란 생각이 들었다. "자네는 바로 이것부터 시작하지." 판타서스가 '진정의 룬'을 쓴 저주를 보이며 말했다. "사용한 마법진과 수식, 회로를 통째로 암기하게! 처음 배울 때는 암기로 무작정 머릿속에 때려 박는 게 가장 빨라!" "넵!" 판타서스를 키젠 최강의 학생회장으로 만든 이 힘. 반드시 손에 넣고 말겠다고 시몬은 다짐했다. "딱 한 시간이면 충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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