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417화 휘이이이이이잉―! 시몬과 레테는 거센 혹한을 견디며 설산을 오르고 있었다. '와, 진짜 정신 나가겠다.' 한기는 옷깃을 파고들었고, 콧물은 흘러내리던 중간에 꽁꽁 얼어붙었다. 시야에 보이는 건 끝도 보이지 않는 하얗고 경사진 길. 눈밭으로 발밑이 푹푹 빠져서 걷기도 힘들다. 거기에 설산 몬스터들의 공격까지. 체력은 빠르게 떨어졌다. 레스힐 산악지방 출신인 시몬도 이렇게 위험한 산행은 처음이라고 생각했다. "레테! 괜찮아?" "예, 괜찮슴다."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레테의 씩씩한 대답이 들려왔다. 그녀의 주위는 설산 몬스터들의 시체들로 가득했다. 이쯤 되면 별의 성녀가 아니라 피의 성녀 같은 게 아닐까. 그녀가 가는 길마다 눈밭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그러면서도 본인의 하얀 로브와 머리카락은 온전히 순백의 상태를 유지했다. "진짜 끈질기게도 뒤쫓아 오네요." 두 뺨이 빨개진 그녀가 손을 모아 호호 입김을 흘렸다. "레테, 오늘은 등반하기엔 혹한이 너무 거세." 시몬은 몇 번이고 입가에 맴돌던 그 이야기를 꺼내기로 했다. "일단 후퇴했다가, 나중에 다시 오는 건 어때?" "나중에 또 언제요." 레테의 반응은 냉랭했다. "이 혹한은 몇 달 내내 이어질 검다. 돌아가 봐야 핑곗거리만 많아질 뿐이에요. 무조건 오늘! 오늘 에스카일 마을을 못 찾아내면 얼어 뒈진다는 마음으로 가야 함다." "......진심이야?" "네, 진심인데요." 시몬은 속으로 감탄했다. 사실 시몬이야 산행 경험이 워낙 풍부해서 피로감이 덜했지만, 평생을 평지에서 생활한 레테는 몇 배는 더 힘들 것이다. 그런데도 싫은 소리 하나 없이 몬스터들을 썰어 넘기며 묵묵히 산을 오르고 있었다. 퍼버버버버벅! 레테의 신성화살이 몬스터들의 머리통을 박살 내는 소리가 들렸다. "그나마 전투가 몸을 뜨겁게 해줘서 좋네요." 다시금 주위를 피바다로 만든 그녀가 호호 입김을 불며 다가왔다. "체온 올리는 축복. 혹시 더 필요함까?" 시몬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이제 내 힘으로 할 수 있어." "......뭐요?" 웜스(Warmth). 한기를 막고 체온을 유지하는 축복계열의 백마법이다. 시몬은 산행 초반에 레테가 걸어준 마법진의 구조를 면밀하게 살폈고, 혹한을 뚫고 오는 와중에 틈틈이 연습했다. 그리고 기어이. <웜스(Warmth)> 파아앗! 스스로의 힘으로 축복을 완성하는 데 성공했다. 레테가 헛웃음을 흘렸다. "아까부터 뭔 뻘짓을 그렇게 하나 했더니......." 네크로맨서가 백마법을 사용하고 있다. 지금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일이 현실임에도, 레테는 쉽게 믿어지지 않았다. 이 인간은 정말 네크로맨서인 걸까? -그럼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면 어때요? 시몬이 네크로맨서가 아니라, 그냥 별개의 존재라면? 그러고 보니 예전에 신성열차에서 잠깐 만난, 에프넬 사칭범 '엘렌' 선배는 이런 말을 했었다. 별개의 존재. 생각해 보면 맞는 말이긴 하다. 확실히 이 녀석은 네크로맨서라고 하기에는 너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시몬이 불쑥 묻자, 레테가 깜짝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까, 깜짝이야! 놀랐잖슴까!" "?" 레테가 으르렁거리며 시몬을 노려보다가, 흥 하고 고개를 돌렸다. "역시 존재 자체가 신성모독임다. 당신은." "......갑자기?" "잠깐 있어 봐요." 그녀가 다가와 시몬의 옷 앞섬을 열었다. 시몬이 얼굴을 붉히며 주춤거렸지만 그녀가 가만히 있으라는 듯 손에 힘을 주며 시몬을 노려보았다. "아까 웜스 걸었다면서요. 지금 따뜻함까?" "......어, 그러고 보니." 추웠다. 시간이 지나 웜스가 2중첩으로 줄어들어서, 스스로 하나 더 걸어 3중첩을 유지했는데 그렇게 따뜻해지지 않은 느낌이다. "눈이 있으면 한번 봐요." 레테가 시몬의 몸에 그려진 마법진을 가리켰다. 2중첩 상태. 시몬의 축복은 어디가고, 레테의 축복 효과만 남아 있다. "왜 이러지? 분명 제대로 걸었는데." "룬어 뭐 썼는데요." "켄서리움 아냐?" "수식은? 화이트 코드랑 플랫 노트는 알고 만들었어요?" "그게 뭔데?" 그녀가 조그맣게 한숨을 쉬었다. "축복을 중첩하려면 그에 정확하게 맞물리는 축복을 걸어야 함다. 당신네들 저주는 막 일부러 수식을 꼬아서 풀기 어렵게 하는 것 같지만, 축복은 달라요." 그녀가 두 손바닥을 모아서 시몬의 가슴에 가져다 댔다. 웜스가 걸려 있어서 그런지 손도 따뜻했다. 이내 그녀가 눈을 감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주문을 외웠다. '아.' 기존에 걸려 있던 2중첩의 웜스가 지워지고, 새로운 웜스가 3중첩으로 걸렸다. "그 방법을 응용한 거예요." 레테가 손을 떼고 빙긋 웃었다. "따뜻하죠?" "......." 시몬이 고맙다고 말하려는데, 레테가 빙글 등을 돌렸다. "마을에 도착하면 제대로 가르쳐 줄게요. 라 에스크림." 그 말에 시몬은 정신이 확 들었다. "......지, 진짜?" "이번 임무를 완수하면 당신도 이스라필 님께 대가를 받겠지만, 어쨌거나 신성연방을 위해 고생하고 있는 거잖슴까. 이 정도는 자비를 베풀 수 있겠죠." 그렇게 말하던 그녀가 갑자기 빠직하고 열 받은 표정을 지었다. "아! 솔직히 까놓고 말해 새벽에 썼던 당신의 라 에스크림은 너무 구렸슴다! 보는 내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고! 기왕 내 오리지널을 쓰는 거면 제대로 하라구요." 갑자기 달라진 분위기에 시몬이 뒷걸음질 치며 웃었다. "앞으론 제대로 할게." "어디서 내가 만든 백마법이라고 말하고 다니지 마십쇼! 쪽팔리니까!" 레테가 고개를 홱 돌려 걸어갔다. '챙겨줬다가, 잘해줬다가, 화냈다가. 자기 멋대로네.' 그리고 무엇보다, 시몬은 레테가 백마법을 가르쳐 준다는 게 조금 의외기도 했다. 그녀의 성격이라면 키젠의 특례 1번을 견제한답시고 더 경계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빨리 와요! 얼어 죽겠슴다!" "아, 응. 갈게!" * * * 휘이이이이이잉! 그 이후 세 시간이 흘렀고, 혹한은 그칠 줄을 몰랐다. '이래도 안 내려가? 이래도?' 혹한은 마치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시몬은 대자연과 소통하는 스스로의 재능에 감복하며, 네크로맨서 말고 드루이드를 하면 어땠을까 생각했다. '와, 그보다 진짜 얼어 죽겠네.' 보온 축복을 연달아 걸기는 했지만, 이제는 체력과 정신력에 한계가 오고 있었다. 무엇보다 눈보라 때문에 어디가 어딘지를 구분할 수 없으니, 제대로 앞으로 가고는 있는 건지도 몰랐다. 같은 장소를 자꾸만 뱅뱅 도는 기분이었다. 바스락. 시몬은 이스라필이 준 대강의 지도를 펼쳐보았다. 하지만 이걸로 찾아가는 건 역부족이었다. 눈보라가 심해서 지도에 나오는 사물을 분간할 수 없었으니까. "레테. 에스카일 마을을 못 찾아내면 그냥 얼어 죽자는 말. 아직도 변함없어?" "......큭!" 얼굴을 붉힌 그녀가 입술을 깨물더니, 결국 빼액 소리쳤다. "다, 당연하죠! 무조건 찾아낼 검다!" 그러고는 씩씩거리며 주위를 뒤지기 시작했다. "무리는 하지 마." 부드럽게 한마디 해준 후, 시몬도 탐색을 시작했다. '어?' 그런데 근처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시몬은 조용히 검을 꺼내 들고 앞으로 걸어갔다. 뭔가가 보였다. 더 가까이 다가가 보니, 누군가 자리에 앉아 눈을 뒤적이고 있었다. "엉? 뭐야?" 저쪽에서 먼저 시몬을 발견했다. 30대 초중반 정도의 털옷을 입은 남자였다. "뭐야! 당신들! 여긴 어떻게 왔어?" '사람이다!!' 시몬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호, 혹시 에스카일 마을 주민이신가요? 저희는......!" "당신들 제정신이야?" 남자가 대뜸 소리를 질렀다. "이렇게 혹한이 거친데 산에 오르면 어떻게 해! 설녀님께 잡아먹히면 어쩔 뻔했어?" "......설녀?" 그러고 보니 쿨라에서도 들은 적 있었다. 설녀의 전설에 대해. "설녀고 성녀고 간에, 아직 안 잡아먹혔으니 됐잖슴까." 레테가 시니컬하게 말하며 다가왔다. "이야기는 들었죠? 우린 에스카일의 선생님으로 왔어요. 마을로 안내를 좀 부탁드림다." "그래, 그래. 어서 따라와!" 남자가 성큼성큼 앞장서서 걸어갔다. 시몬은 속으로 크게 안도하며, 드디어 살았다고 생각했다. "어?" 그런데 이 남자. "저, 저기요?!" 눈밭인데도 엄청나게 빨랐다. 두 사람을 기다리지 않고 홀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점점 멀어지고 있다. "가, 같이 가요!" 게다가 계속 혹한과 눈보라가 몰아쳐서 그의 모습이 가려졌다 보였다가를 반복했다. 초조해진 시몬이 속도를 높이려는 그때. "잠깐만요." 레테가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왜 그래? 이대론 놓치겠어!" "뭔가 이상함다."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몸이 흐릿했어요." "눈보라 때문에 착각한 거 아냐?" 시몬이 그렇게 말하며 앞으로 한 걸음 내딛는 순간. 와르르르르! 난데없이 발밑이 아래로 쑥 꺼졌다. "!!" 휘이이이이이잉! 정신을 차려보니 바로 앞이 절벽이었다. 바닥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까마득했고, 돌조각이 후두둑 떨어지고 있었다. "크윽!" 레테가 인상을 찡그리며 시몬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그러게, 내가 말했잖슴까!" 그녀가 이를 까득 악물며 팔에 힘을 주었다. "뭔가 이상하다고!!" 부아아아아앙! 시몬의 시야가 뒤집혔다. 그의 몸이 그대로 원을 그리며 날아가 푹신한 눈밭에 떨어졌다. "하아. 하아." 시몬의 눈은 여전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목격하고 말았다. 혹한이 몰아치는 설산의 눈밭에서, 맨발에 하얀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피처럼 시뻘건 동공으로 이쪽을 노려보는 모습을. 마치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면서. '......!' 팔에 소름이 쫘아악 끼치며, 온몸의 털이 바짝 곤두섰다. 시몬이 그 정체를 확인하러 몸을 일으켰지만, 여자의 몸은 혹한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괜찮아요?" 레테가 다가왔다. "레테! 방금 봤어?" "뭘 말임까?" "흰 옷을 입은 빨간 눈의 여자!" "......." 레테가 인상을 굳혔다. "못 봤어요. 당신이야말로 눈보라 때문에 착각한 거 아님까?" "......." 시몬이 이마를 짚었다. 너무 많은 일이 한꺼번에 벌어져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주저앉아 있을 시간은 없다. "가자. 이쪽이야." "그쪽 맞아요? 또 뭐 이상한 거 보고 홀린 거면 곤란한데." "그럼 그때도 네가 구해주면 되지." "......하, 거 인생 편하게 사시네. 좋아요. 앞장서 봐요." 시몬은 레테를 데리고 아까 설녀가 있던 방향으로 똑바로 걸었다. 그렇게 눈보라를 헤치고 20분 정도를 걸었을까. "아!" 그들의 시야에 두 개의 돌탑이 보였다. "찾았다! 지도에 나와 있는 마을의 입구야!" 레테도 비로소 미소를 보이며 손바닥을 펼쳤다. "제법이잖슴까!" 짝! 두 사람은 가볍게 하이파이브하며 돌탑 앞에 섰다. "자, 어떻게 작동하는 거지?" 두 돌탑의 몸통에는 손을 넣을 수 있는 작은 공간이 있고, 그 안에는 돌멩이 두 개가 쌓아 올려져 있었다. 아래에는 글귀가 적혀있다. <사람은 녹아서 사람으로> 시몬이 턱을 짚은 채 곰곰이 고민에 빠졌고, 레테는 돌탑 안을 들여다보며 인상을 썼다. "......이런 퍼즐 같은 거 딱 질색인데." 반면 시몬은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돌탑의 사이즈를 확인하고, 그 위에 올라간 돌멩이의 형태를 파악한 다음, 직접 돌멩이를 만져보기도 했다. '매끈매끈하네. 특이한 재질.' 시몬이 만지다 보니 돌멩이 위에 올라가 있는 돌멩이가 툭 떨어졌다. 시몬이 다시 원래대로 올리려고 했으나, 미끄러지며 툭 떨어졌다. 몇 번을 시도해도 마찬가지였다. '이걸 어떻게 이 위에 올린 거지? ......아! 한 번 더 글귀를 바라본 시몬의 머리에 이채가 스치고 지나갔다. "이제 알겠다!" "풀었어요?" "응. 간단해." 시몬이 돌탑 안에 있는 돌멩이 두 개를 집었다. 옆의 레테도 눈치껏 따라 했다. "돌멩이를 중심으로 눈을 뭉쳐. 눈싸움할 때처럼 이렇게." 그렇게 두 눈덩이를 만든 다음, 붙여서 눈사람 모양으로 만들었다. 그것을 돌탑의 빈 공간에 넣어두었다. "이걸로 뭐가 되는 검까?" 레테도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똑같이 따라 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녹는다!" 돌탑에 어떤 마법적 장치가 되어 있는지, 믿기 어려울 만큼 빠르게 눈사람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거의 1분 만에 모든 눈이 녹고, 비로소 머리와 몸통에 있던 돌멩이 두 개가 딱 붙었다. 처음 발견했을 때 그대로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우우우우우우우웅! 그러자 돌탑과 돌탑 사이의 공간에 커다란 마법진이 펼쳐지며 결계의 입구가 드러났다. "봤지?" 시몬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흥, 잘했어요. 그래도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네요." 레테가 성큼성큼 걸어가 결계에 손을 집어넣었다. 시몬이 움찔했다. "조심성이 너무 없는 거 아냐?" "뭐가 두렵겠슴까. 내가 별의 성녀인데." 그녀가 결계 안에 손을 휘저어보기도 하고, 빼내기도 했다. 이내 과감하게 얼굴을 집어넣더니 빼냈다. "안전하네요. 가죠." 두 사람은 동시에 결계 안으로 몸을 던졌다. 그리고. "......!" 눈앞에 벌어진 별천지에 입을 벌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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