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413화 휴양지에 혹한이 몰아치고 있다. 거리에는 눈발이 날리고, 뼈가 시릴 만큼 차가운 냉기에 몸에 으슬으슬 떨렸다. 어깨를 살짝 감싸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레테가 입을 열었다. "뭐어, 조용하네요." "응." 추위 때문일까. 이 도시의 규모와 휴양지로서 명성을 생각하면 사람이 바글거려야 정상인데, 가게 문은 죄다 닫혀 있고 거리에는 옷을 꽁꽁 싸맨 몇 명만 걸어가고 있었다. '뭔가 문제가 터진 게 틀림없긴 한데.' 턱을 짚고 곰곰이 생각에 잠겨있던 시몬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레테, 이쪽으로!" "?" 시몬이 몰아치는 한기를 뚫고 거리를 내달리기 시작했다. "아, 갑자기 왜 뛰는 검까!" 레테도 투덜거리면서 뒤따라왔다. 여러 건물을 지나서 구불구불 복잡한 골목을 빠져나오자 마침내 탁 트인 광경이 펼쳐졌다. "아......!" 바다가 얼어붙어 있었다. 시야 내로 보이는 바다 전체가 꽝꽝 언 빙판이었다. 레테의 표정이 굳었다. "우리가 들었던 것보다 상황이 훨씬 심각하네요." 그녀는 여행자 가방에서 주섬주섬 책자 같은 것을 꺼냈다. "원래는 이런 곳이었어요." 눈부신 해변과 모래사장, 수영복 차림으로 뛰노는 사람. 그 위로 보이는 설산. 이 모든 게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지만, 이제 책자에 나온 그 광경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시몬이 고개를 들었다. 눈 덮인 설산의 모습.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이 웅장하고 경이로운 모습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어이, 어때? 다음 주에는 좀 출항할 여지가 보여?" 시몬과 레테의 고개가 돌아갔다. 선착장에 앉아 있는 뱃사람이 뭐라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동료로 보이는 선원은 꽝꽝 얼어붙은 빙판을 손등으로 툭툭 쳐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음 주는 무슨, 한 달은 걸릴 것 같슈." "골치 아프네. 이번 물동량도 처리 못 하면 파산인데." "라우스(Laus). 잠시 말씀 좀 묻겠슴다." 눈 같은 흰 머리카락을 흔들며, 레테가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이렇게 혹한이 불고, 바다가 얼고 한 거. 언제부터 이랬슴까?" "언제부터? 글쎄다. 최근 날씨가 계속 오락가락하긴 했는데, 이렇게 바다까지 얼어붙은 건 6개월 정도 됐나." 뱃사람이 대답하며 한숨을 푹푹 쉬었다. "예전에도 이런 적 있었슴까?" "쿨라의 항구는 부동항이야. 겨울에도 해면이 얼지 않는 천혜의 항구란 뜻이지. 지금 도시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사태가 쿨라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야." "형님 말이 맞슈." 까무잡잡한 피부의 선원이 사다리를 타고 선착장으로 올라왔다. "마을의 보리가 전부 얼어 죽었슈. 유일한 통로인 바닷길도 막혀 버렸고, 우리는 꼼짝없이 이 도시에 갇혀 굶어 죽을 판이유." 이번엔 시몬이 입을 열었다. "바닷길 외에 식량이 들어올 만한 다른 루트는 없을까요?" "한번 보슈. 저 험난한 산맥을." 선원이 손으로 가리켰다. 도시 주위는 전부 눈 덮인 산맥이다. 유일한 평지인 이 도시를 제외하면 사방이 산맥이고 남쪽은 바다였다. "천금을 준다고 해도 저 산맥을 넘어 식량을 가져와 줄 상단은 그 어디에도 없슈." "암. 암." 그 옆의 뱃사람이 말을 받았다. "그것만 문젠가? 한겨울에만 나타나던 설산의 몬스터들이 혹한 때문에 더 왕성하게 활동 중이야. 지금 쿨라는 지옥이라고." 한탄하듯 이야기를 늘어놓던 그가 레테의 차림을 쓱쓱 살피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처음 보는 얼굴인데, 관광객?" 레테는 안색 한번 안 변하고 둘러댔다. "이 상황에 무슨 관광객이 있겠슴까. 그냥 모험가예요." "그렇구만." 그가 휙휙 손을 휘저었다. "혹시나 몬스터의 공격을 피해 산맥을 넘을 실력이 있다면, 하루빨리 쿨라를 빠져나가는 게 좋을 거요. 지금은 언뜻 평온해 보이지만 일촉즉발. 언제 갑자기 식량난 때문에 무법지대로 변할지 모르니까." "조언 감사합니다." 시몬이 반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뱃사람은 쩝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쪽들이야말로 생판 남 신세 한탄 들어줘서 고맙수다." * * * 그렇게 도시를 둘러보며 정보를 수집했지만, 선착장에서 들은 이야기와 대충 비슷했다. "내가 아는 바로는, 쿨라는 관광과 특산물로 먹고사는 동네예요."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걷고 있던 레테가 입을 열었다. "무슨 특산물인데?" "성수잎." 시몬이 처음 듣는다는 표정이자, 레테가 느긋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큰 신성 행사나 예배에 쓰이는 식물임다. 깨끗하게 씻어서 물에 동동 띄워두면 불순물을 정화해 주고, 특히 이파리의 성분이 물을 하얗게 만들어서 최고급 성수의 상징이죠. 대성당 같은 곳에는 반드시 쓰여요." "비싸겠네." "그쵸. 근데 이런 날씨면 성수잎 농사도 다 망쳤을 검다."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쿨라의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그때 시몬의 입가에 따뜻한 입김이 흘러나왔다. "슬슬 춥네. 우리도 위에 뭐라도 걸치자." "그게 좋겠슴다." 두 사람은 동시에 아공간을 열고 로브를 꺼냈다. 이스라필이 준비한 복장대로 입고 왔지만, 역시 모험가 패션의 완성은 '로브'. 모험가인데 이걸 걸쳐주지 않으면 어색하다. 시몬이 하얀 로브를 꺼내 걸치고 있는데. "음?" 마침 레테도 시몬과 똑같은 디자인의 하얀 로브를 입는 중이었다. 시몬의 입에 반가움 가득한 미소가 걸렸다. "어, 그 로브! 내가 저번에 신성연방에서 사준 그거 맞지?" "!!" 레테가 뜨끔한 표정으로 시몬을 돌아보더니, 얼굴을 화아악 붉히며 황급히 로브를 뒤로 숨겼다. "뭐, 뭐뭐 이 새꺄! 그냥 수많은 로브 중에 우연히 꺼낸 게 이 로브였을 뿐이야!" "그래?" 시몬이 슬쩍 웃자 레테가 더듬거리며 소리쳤다. "오, 옷 뒤집어!" "응?" "검은색으로 뒤집으라고 인마! 내가 흰색으로 입을 거야!" "왜 그래? 내 옷을 어떻게 입든 내 마음이지." "아니! 이대로는 그......!" 바로 그때. 지나가던 두 여자가 두 사람을 보고 쿡쿡 웃었다. "얘, 저기 애들 봐. 대놓고 커플룩이야." "어우~ 재수 없는데 귀여워." 작은 속삭임이었지만, 그 이야기를 귀신같이 알아들은 레테는 귓불까지 붉어졌다. 그녀가 시몬에게 와락 달려들어 그의 옷을 벗기려 했다. "아, 아니 갑자기 왜 이러는데?" "빨리 검은색으로 바꿔 입으라고요!" 시몬이 자꾸 저항하자, 레테가 이마로 그의 가슴을 쿵! 들이받았다. 시몬이 윽 소리를 내며 한 걸음 물러났다. "아니, 같은 옷인 게 신경 쓰이면 그 수많은 로브 중에 다른 걸로 꺼내 입으면 되잖아!" "시, 싫슴다! 나한테 지시하지 마! 네크로맨서 따위가!" "자기도 지시해 놓...... 으악!" 두 사람은 한동안 거리에서 옥신각신했다. "하아. 하아." 격렬한 몸싸움 끝에, 시몬을 벽까지 밀어붙인 레테는 기어이 로브를 벗겨냈다. 몸싸움이 원체 격렬해서 시몬은 다리를 벌린 채 흐트러지듯 앉아 있었고, 레테는 그 사이에 무릎을 꿇은 채 강탈한 시몬의 로브를 손에 꼬옥 쥐고 있었다. 색색 거친 숨을 내쉬는 두 사람의 숨결이 가까웠다. "이 추위에 밖에서 이상한 짓 하면 얼어 죽는다!" 푸하하하하! 럼주에 취한 아저씨들이 껄껄대며 지나갔다. 목덜미까지 새빨갛게 물든 레테가 후다닥 뒤로 물러났다. "아오! 진짜 유치하게! 그냥 좀 바꿔 입어주면 되지 뭐 하는 짓임까!" 시몬이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무작정 달려드니까 놀랐잖아. 그리고 거리에서 사람 옷을 강제로 벗긴 성녀가 할 소리야?" "입 닥쳐! 너는 성녀의 성 자도 꺼내지 마!" 레테가 시몬의 로브를 뒤집어 검은색으로 바꾼 다음, 떠밀듯 가슴에 팍 던져 버렸다. "빠, 빨리 입고 가요. 장난할 시간 없슴다." 그러고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성큼성큼 저만치 걸어가 버렸다. 시몬도 하는 수 없이 검은색으로 뒤집은 로브를 걸쳐 입었다. 기왕 신성연방에 왔고, 프리스트인 척도 해야 하니 흰색 로브로 돌아다닐 생각이었는데. "아, 수사 안 할 거야? 그만 미적대고 빨리 따라와요." 그래도 미안하기는 했는지 시몬 쪽을 힐긋거리며 말하는 레테의 모습에, 시몬은 조용히 웃으며 그녀를 뒤따랐다. * * * -마을에 먹을 게 없어서 정말 큰 일이에요. -어젯밤에 산맥에서 떼로 이동하는 몬스터들을 봤어! 불길한 징조 같은데. 두 사람은 탐문으로 얻은 정보를 수첩에 정리했다. 그렇게 정보수집을 위해 계속 길가를 돌아다니던 중. 콜록콜록!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노파가 돗자리에 앉은 채 거적때기를 두르고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돗자리의 앞에는 수정구가 놓여 있었다.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장사하는 점집인 것 같은데, 관광객도 없으니 벌이도 없을 것이다. 초췌한 얼굴로 추위에 벌벌 떨면서 손님을 기다리는 모습을 보니, 조금 딱하단 생각이 들었다.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요." 레테는 노파의 모습을 보고는 성큼성큼 근처에 문이 열린 가게로 향했다. 그녀가 그곳에서 뭐라 뭐라 이야기를 하더니 뭔가를 지불하고 빵이랑 육포를 얻어 가지고 왔다. "죄송하지만-" 레테가 노파의 돗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아 빙그레 웃었다. "저희가 돈이 없어서 그런데, 혹시 음식도 받아주시나요?" 레테가 봉투를 찢어서 빵과 육포를 늘여놓자, 노파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고마워! 정말 고마우이!" 그러곤 많이 배고팠는지 허겁지겁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당신도 드십쇼." 레테가 육포를 질겅질겅 씹으며 말했다. 조금 늦은 점심 식사였다. 옆에 앉아서 빵조각을 든 시몬이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봤어. 역시 성녀다운 모습도 있......." 퍽! 바로 레테의 주먹이 시몬의 팔뚝을 때렸다. 진심 어린 힘이 담겨 있었는지 엄청 아팠다. 시몬은 팔을 붙잡고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질러야 했다. 그렇게 식사가 끝나고, 한결 나아진 표정의 노파가 일을 하러 수정구를 들었다. "흘흘흘! 그럼 어떤 점을 봐줄......." "아뇨. 점보다는 여쭙고 싶은 게 있어서요." 레테는 쿨라에 벌어지고 있는 이상기후와 혹한에 대해 물었다.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조금 새로운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이 모든 게 에스카일의 저주 때문이야." 에스카일이라는 말에 시몬과 레테가 동시에 눈을 빛냈다. 에스카일은 두 사람이 이제 곧 가정교사로서 방문하게 될 바로 그 마을이었다. 노파의 주름살 가득한 손가락이 설산의 한복판을 향했다. "쿨라 사람들에 대한 에스카일의 원한이 저주가 되어, 쿨라를 혹한의 지옥으로 몰아가고 있는 게지." "원한이요?" "에스카일 사람들도 원래는 쿨라에 살았지. 자그마치 수십 년도 더 된 일이네." 하지만 이 이후의 이야기는 그냥 가십거리 같은 내용이라, 큰 참고가 되지는 않았다. "자, 그럼 점값도 받았으니 점을 봐줘야겠지." 노파가 시몬과 레테의 얼굴을 번갈아 훑으며 슬쩍 웃었다. 그녀는 직업이 직업인 만큼, 관광객을 상대하는 요령이 있었다. "그럼 커플점을......." "정 봐주셔야겠다면 따로따로 부탁드림다." 레테가 딱 잘라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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