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368화 1학년 학생들은 키젠 입학 이래로, 가장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역대급 난이도라고 소문이 자자한 '5차 BMAT + 2학년 진급시험'이 다가오고 있고. 통합 2학기의 유일한 필기시험인 '기말고사'일정도 코앞이다. 그렇게 두 큰 시험을 준비하면서도, 당장 발등에 붙은 불인 수행평가도 소홀할 순 없었다. 키젠 교수들이 앞다투어 숙제나 레포트에 수행평가 점수까지 넣기 시작하니 학생들은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그리고 이번 주말. 학생들의 입장에선 정말 중요한 주말이었다. 굵직굵직한 일정들을 앞두고 이 공백의 시간을 최대한 활용해야 했다. 시몬과 7조 조원들도 수행평가 준비 겸 기말고사 공부를 위해 모이기로 했다. 장소는 언제나처럼 빈 강의실 하나를 대여했다. "안녕하세요 시몬~" "안녕, 카미." 제일 먼저 도착한 두 사람이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일찍 오셨네요." 카미바레즈가 가방을 내려놓으며 배시시 웃었다. 시몬도 마주 웃어 보이려는데, 그녀가 고개를 샥 돌리며 민망한 듯 뺨을 긁었다. "......디, 딕은요?" "사업 때문에 로체스트에 내려갔다 오느라 조금 늦는대. 메이린은?" "아! 도서관에 가 있다가 이제 바로 올 거예요!" 두 사람은 책상 네 개를 붙여놓고 한 자리씩 앉았다. 오늘 해야 할 공부와 숙제 분량을 쭉 꺼내놓은 시몬은 잠시 팔짱을 끼고 그것을 감상했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마, 많긴 하네." "아하하! 열심히 해요!" 가디건 소매 사이로 드러나는 앙증맞은 두 주먹을 꼭 쥐고는 귀엽게 흔들어 보이는 카미바레즈. 그러나 여전히 시몬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자, 자꾸 그때 시몬의 얼굴이 떠올라.' 불과 어제 있었던 일이다. 카미바레즈는 라이프베슬 실습을 받는 시몬을 응원하러 소환학관에 혼자 찾아갔었다. 실습이 끝나고 아론이 빠져나온 뒤, 그녀는 흰 수건과 생수통을 들고 쪼르르 실습실에 들어갔다. 그리고 목격하고 말았다. -아. 시몬의 얼굴에 핏방울이 묻어 있는 모습을. 지친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아 코밑의 인중에 튄 핏방울을 슥 훔치던 시몬은, 뒤늦게 카미바레즈를 발견하고 민망한 듯 웃었다. -카미.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안 그래도 반쪽짜리 우르슬라라서 피에 민감한 체질인데, 피가 잔뜩 묻은 얼굴로 자신에게 보여주는 미소는 그녀에겐 미칠 듯한 자극이었다. 하마터면 또 시몬을 덮칠 뻔했다. 비록 그 피는 실습 도중에 튄 심장의 피였지만, 시몬의 땀과 체취가 섞여 더없이 자극적이었다. -고마워, 잘 마실게. 특히 그녀가 가져다준 생수를 꿀떡꿀떡 마시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교복 넥타이를 풀고 셔츠를 팔락팔락하며 땀을 식힐 때 드러나던 그 날렵한 목덜미. 그녀는 그야말로 이성을 잃을 뻔했다. '앗.' 또 그 모습을 떠올린 카미바레즈의 얼굴이 퐁 하고 붉어졌다. "왜 그래? 카미?" "아, 아무것도 아녜요!" 허둥지둥 대답하며 어설프게 웃어 보이는 그녀의 귀 끝은 살짝 빨개져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첫 페이지를 펼 즈음에, 힘찬 드르륵! 소리와 함께 강의실 문이 열렸다. "안녕!" 메이린이었다. 경쾌한 걸음걸이로 들어온 그녀는 긴 가방끈을 어깨에 메고 있었고, 머리카락은 질끈 묶어서 리본으로 마무리한 모습이었다. "어서 와, 메이린." 시몬이 웃는 얼굴로 인사했다. 그런데 그녀 또한 흠칫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홱 돌리며 '아, 응. 안녕' 하고 다소 떨떠름하게 말했다. '......다들 반응이 왜 이러지?' 시몬이 옆머리를 긁적였다. * * * '......후우우.' 메이린은 가방을 열고 짐을 풀어놓는 척하며 슬쩍 곁눈질로 시몬을 살폈다. '평소와 다를 것 없어 보이지만.' 그녀의 예리한 시선이 시몬의 포인트 곳곳을 훑고 지나갔다. '목소리 텐션이 높아. 얼굴도 활짝 폈네. 기분 좋아 보이는 표정.' 그녀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쥐고 있던 종이가 바삭! 하고 구겨졌다. '좋아 죽는 표정이네 아주!!' 신경 쓰였다. 공부에 100% 집중해야 하는 이 중요한 시기에 더럽게 신경 쓰였다. 문제의 발단은 어젯밤이었다. 주말을 앞두고 오후 맹독학 수업까지 끝나서 기분이 좋은 그때. -시몬은요? -아름다운 여선배의 손목을 잡아끌고 어디론가 달려가던데? 딕의 말대로, 정말로 시몬이 2학년인 벤야 선배의 손을 잡아끌고 달리고 있었다. 그 방향은 변명의 여지 없이 로체스트 쪽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몬은 그날 밤 기숙사에 돌아오지 않았다!' 메이린의 두 주먹에 힘이 꽈악 들어갔다. 물론 시몬이 발랑 까졌다거나 여자를 밝힌다거나 그런 성격과 거리가 먼 건 잘 안다. 하지만. 하지만! '신경 쓰여어!!' 주말을 앞두고. 여선배랑 단둘이. 로체스트에 가서 밤새 돌아오지 않았다. 이건 신경 쓰지 않는 게 이상한 거 아닌가? 물론 친구로서. 그것도 입학하고 1학년 내내 같이 붙어 다닌 친구인데. '그, 그런 짓은......! 중대한 교칙 위반이기도 하고.' 키젠에선 연애는 허용하지만, 미성년자로서 선을 넘는 행위는 철저히 엄금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일 분한 건, 자신은 끙끙 앓으며 신경 쓰고 있는데, 시몬은 속 편하게 웃는 얼굴로 문제나 풀고 있다는 점이었다. '지금 문제가 눈에 들어오냐고오!' 깃펜을 쥔 메이린의 손이 분함으로 부르르 떨렸다. '어쩌지? 티 나지 않게 물어보는 방법이 없을까?' 슥슥슥. 집중이 될 리가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교과서에 낙서만 늘어났다. 혹시나 카미바레즈 쪽에서 먼저 물어봐 주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지만. "시몬~ 저 이거 잘 모르겠어요!" "어떤 거?" ......그냥 공부하기 바쁜 것 같다. 특히 세상 태연한 표정으로 문제를 설명하고 있는 시몬을 보니 돌연 화딱지가 울컥 치솟았다. 왜 나만 이렇게 신경 쓰고 스트레스받아야 하는데? 어차피 난 일편단심 피온 님뿐이잖아. 솔직히 피온 님 외 다른 남자는 어찌 되든 상관없기도 하고. 그래, 그냥 딱 까놓고 물어보자. "야, 시몬!" 메이린이 있는 용기 없는 용기 다 긁어모아 소리쳤다. 콕 붙어서 문제를 연구하던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응?" "......." 분명히 말하려고 했는데......! 막상 시몬과 눈을 마주치니 거짓말처럼 말문이 턱 막혔다. 턱 끝까지 나온 외설스러운 물음이 그대로 목구멍으로 돌아 들어가며 두 뺨이 화아악 달아오른다. "그......!" "?" 어깨를 파들파들 떨던 메이린이 결국 풀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 나도. 이거 잘 모르겠어." 대충 아무 문제나 가리킨 그녀가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네가 모르는 문제를 물어볼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시몬이 씩 웃었다. "일단 카미 거 먼저 봐주고 알려줄게." "......아, 응응." 시몬과 카미바레즈가 다시 교과서로 시선을 옮겼다. 메이린은 화끈거리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열을 식혔다. '이 바보! 멍충아아!' 메이린은 시몬과 눈을 마주하는 순간 깨달았다. 자신은 때려죽여도 시몬 앞에서 '벤야 선배랑 밤에 로체스트에서 뭐 했어?'라고 물어볼 수 없다는 사실을. 하지만 이렇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어젯밤 무슨 일이 있는지 시원하게 알아야 했다. 내 마음의 평화와, 멘탈관리와, 앞으로의 시험공부를 위해서라도! '그래, 작전을 변경하자. 내 입으로 외설적인 이야기를 꺼내는 게 아니라, 시몬이 자연스럽게 대답하도록 유도하는 거야.' 잠시 세 사람 모두 자기 문제를 푸느라 소강상태가 된 사이, 메이린은 기지개를 쭈욱 켰다. "으으~ 하루 종일 도서관에 콕 박혀서 공부만 하니까 지겨워 죽겠어." "저도 그래요." 카미바레즈가 사근사근하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그래도 조금만 더 힘내요! 다 같이 2학년으로 진급해야 하잖아요!" "응, 그치. 근데 좀 공부 환경이 맨날 똑같아서 능률이 떨어지는 것 같아. 그래서 그런가? 요즘은 또 캠핑 스터디가 유행이더라구. 카미는 알아?" "캠핑 스터디요?" "웅웅! 반장이랑 클라우디아랑 주말에 캠핑 갔는데-" 메이린은 일단 자연스럽게 카미바레즈와의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녀와 여자기숙사 탕비실에서 틀어박혀 수다 떠는 건 일상이니 시몬 쪽에서도 자연스럽게 보일 터였다. "결국 몬스터 보고 무서워서 울면서 도망치다가 그냥 로체스트에서 외박했대!" "아하하! 전 절대 그렇게 외박은 못 할 것 같아요!" "참." 메이린의 고개가 시몬 쪽으로 돌아갔다. "시몬, 너는 로체스트에서 잔 적 있어?" 완벽했다! 캠핑에서 숙박에서, 로체스트 외박으로 이어지는 삼단 연계! 그럼 이제 뭐라고 대답할......! "잔 적 있지." 쿵! 메이린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진짜 잤다고? 그 선배랑 둘이서? 메이린의 머릿속에 한 침대에 누운 두 사람의 외설적인 모습이 필터링 없이 떠올랐다. "다 같이 잤잖아?" 방금 상상하던 두 사람의 침대에, 자신과 조원들의 모습까지 추가됐다. 메이린의 얼굴이 화아아악 달아올랐다. "미, 미미미미 미친놈아아아!!" 그녀가 두 팔을 허우적거리며 의자째로 엄청난 속도로 멀어졌다. 시몬이 얼굴에 물음표를 띄웠다. "저번 3차 BMAT 기억 안 나? 시험 테마가 바다라고 해서, 대책회의 할 겸 로체스트 숙소에서 같이 잤잖아. 다음 날 수영복 사서 바닷가도 갔는데." "아! 기억나요! 그때 진짜 진짜 즐거웠어요!" 그거였냐! 머리가 부글부글 끓던 메이린은 입술을 삐쭉이며 시몬을 노려보았다. 어느새 자연스럽게 바다 화제로 넘어가서 떠드는 시몬과 카미바레즈를 보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런 방식으론 안 돼!' 벤야 바닐라를 직접 언급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이밍은 금방 왔다. 바다 이야기가 끝나고 다시 공부에 집중하는 두 사람에게, 메이린이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아, 단 거 땡겨. 바닐라! 아이스크림 먹고 싶다!" 일부러 바닐라를 살짝 강조해 보았다. 드르륵. 그러자 시몬이 의자를 빼며 일어났다. "매점 가서 사 올게. 카미는 무슨 맛 먹을래?" '그게 아니라고!!!' 메이린은 각혈할 것 같았다. "저도 같이 갈게요!" 카미바레즈도 덩달아 드르륵 의자를 빼며 일어났다. "아, 그런데 시몬~" 카미바레즈가 수줍게 웃으며 본인의 머리카락을 살짝 매만졌다. "바닐라 아이스크림이란 말이 나와서 그런데요~" "응." "저 바닐라 브랜드 스켈레톤 메이지를 구매하려 하거든요." "아, 소환학 수행평가 준비하는 거야?" "네! 혹시 바닐라 쪽에 아는 사람 있으세요? 조금 비싸서 저렴하게 구하고 싶어서요." 그 말에 메이린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잠깐만. 너 설마. "벤야 바닐라 선배님 소개해 줄까? 조금 싸게 해주실지도 몰라." 설마! "네! 그런데......." 카미바레즈의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였다. 그러고는 달달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그그그그, 그그, 벤야 선배님이랑...... 시몬은...... 무, 무슨 관계예요?" '카미이이!' 메이린은 마음속으로 울부짖었다.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사실 카미도 엄청 궁금했던 게 틀림없다! "내가 가입한 동아리 회장이셔. 말 안 했던가?" "......." "......." 메이린과 카미바레즈가 동시에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둔해.' '둔해요.' 이 정도면 대놓고 물어본 건데 그걸 이렇게 반응할 줄이야. 두 소녀가 입술을 깨물고 엄지를 물어뜯으며 고민하는 사이 시몬은 눈을 끔뻑거리고 있었다. "시, 시몬......!" 카미바레즈가 다시 입을 뗐다. 학교 생활 전체에서 가장 긴장되는 순간. 그녀의 어깨가 아기 펭귄처럼 파들파들 떨었다. 두 손은 꼼지락꼼지락, 얼굴은 토마토처럼 빨개져 있었고 올망졸망한 두 눈동자 끝에는 살짝 눈물마저 맺혀 있었다. "베, 벤야 선배님이랑 시몬은! 혹시......!" 메이린은 카미바레즈의 용기에 감격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순간, 시간이 무척 느리게 가는 것 같았다. 그녀는 초조하게 뒷말을 기다렸다. 잠시 뜸을 들인 카미바레즈가 이내 눈을 질끈 감으며 쉰 목소리로 외쳤다. "혹시이......!!" 드르르르륵! 그때 강의실 문이 열리며 딕이 튀어나왔다. "야아아아아 시몬! 어젯밤에 벤야 선배랑 재미 좀 봤냐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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