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356화 키젠 학생 중에 제일 먼저 연단에 올라간 건 카쟌이었다. 그는 어떻게든 심사위원들에게 잘 보이려고 몸을 베베 꼬던 학생들과는 달랐다. 무덤덤한 얼굴, 고저 없는 말투로, 국어책 읽기 하듯 줄줄줄 본인이 쓴 글을 읽어나갔다. 그의 발표는 일직선 돌파를 감행하는 전차처럼 거침이 없었다. 중간에 끊고 학생들을 공격하기 바빴던 심사위원들도 당황해서 끼어들 틈을 찾지 못했다. "이상입니다." 거기에 5분도 안 되는 짧은 발표시간. 관중석은 거대한 정적에 휩싸였다. "자네는...... 참으로 당혹스럽군." 논문찢기의 빈트라가 손에 든 논문을 눈에서 멀리 떨어뜨려 보며 말했다. "소환형 몬스터 핵심 공략법? 이건 소환학이라기보다는 마투학 분야가 아닌가?" "소환학에도 필요한 정보라고 생각했습니다." 카쟌이 의연하게 말했다. 철면피를 얼굴에 뒤집어써도 이렇게 뻔뻔하게 대답하기는 힘들 것이다. "아니, 그보다! 이 논문에는 중대한 결격 사유가 있어요!" 출처지옥 칼라반이 안경을 추켜올렸다. "학생은 논문 가장 뒤편의 출처 기입란에 아무런 출처도 기입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기본 중의 기본도 안 되어 있는-" "학술적 자료 인용 시 출처를 기입하라고 쓰여 있었으니 기입하지 않았습니다." "뭐요?" "출처는 도둑길드의 정보입니다." 카쟌이 툭 내뱉듯 대꾸했다. "도둑길드를 포함한 모든 정보길드는 정보 제공자의 신분을 암호화하여 보호합니다. 정보길드에 출처를 물어보는 사람도 있습니까?" 하하하-! 관중석에서 잔잔한 웃음소리가 들리자, 출처지옥 칼라반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크흠!" 그리고 가장 왼쪽에 앉은 증명무새 라토니가 불편한 듯 인상을 쓰고 있었다. 학술적 정보에 기반하지 않은 언데드 때려잡는 이야기라 증명을 하라기도 뭣했다. "그만!" 논문찢기의 빈트라가 인상을 구기며 소리쳤다. "정보길드의 데이터로 몬스터의 약점을 구체적으로 분석한 시도는 좋으나, 결과적으로 소환학과는 상관없는 내용이오. 이것도 쓰레기야! 0점!" 이번에도 논문찢기 빈트라의 손에서 카쟌의 논문이 북북 찢어져 나갔다. 카쟌은 그러거나 말거나 같잖다는 눈으로 심사위원들을 노려보더니 등을 홱 돌려 버렸다. "저, 저......!" "요즘 젊은이들은 참!" 탕! 탕! 논문찢기의 빈트라가 테이블을 내려치며 주위를 조용히 시켰다. "시간 낭비했군! 다음!" 이번에는 세르네가 연단에 올라왔다. 그녀는 주위에 꽃밭을 배경으로 깔고 방긋방긋 웃으며 심사위원들과 관중들에게 발랄하게 인사했다. "세르네 아인다르크라고 해요~" 그 말을 들은 심사위원들이 작게나마 탄성을 흘렸다. "그 소문이 자자한 상아탑의 후계자인가." "펜타모니엄에 논문을 발표하러 온 건 의외로군." "이번에는 기대해 봐도 좋겠어요." 세르네도 다른 학생들처럼 수정구와 마나 출력기를 이용해서, 허공에 논문을 확대한 화면을 띄웠다. <세르네의 깃털 병사 만들기> 시몬이 생각하기에, 제목은 그럭저럭 봐줄 만했다. 그런데 왜 논문 배경이 족제비 그림일까? "저는 제가 가진 이능을 이용해서, '깃털 병사'라는 창작 언데드를 만들어보았답니다!" 그녀가 화면을 넘기자 엄청나게 빽빽한 글씨가 보였다. 공백 반 글씨 반이었다. 시몬은 눈이 피로해졌고, 나이가 연로한 세 심사위원은 거북이처럼 고개를 쭉 빼거나 안경을 꺼내 써야만 했다. "제가 이능으로 꺼내는 깃털은 칠흑과 100% 호환이 되어요! 깃털을 마법진으로 바꿀 수도 있죠. 그래서 이 깃털을 이용해 소환마법진을 만들면 어떨까 생각해 봤는데요! 사용한 룬어는......." 쫑알쫑알 빠른 톤으로 떠들어대는 세르네의 발표를 들으며, 시몬은 순수한 의문에 잠겼다. 근데 왜 배경이 족제비일까. "그래서 수식을 이렇게 바꿔봤는데요!" 화면을 넘길 때마다 족제비 그림의 포즈도 바뀐다. 아무리 생각해도 소환학이랑 족제비가 무슨 상관이 있는지 모르겠다. 갑자기 글씨 색이 무지개색으로 바뀌거나, 그녀가 저택에서 키우던 애완견의 사진이 올라가는 걸 보니 그냥 본인이 귀엽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마구 때려 넣은 것 같았다. 수식이 아니라 족제비에만 눈이 간다. "바로 시연해 볼게요!" 세르네가 깃털 몇 장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깃털이 분해되어 바닥에 마법진을 만들고 그 위에 깃털이 몇 장 더 들어갔다. 깃털들이 녹아 흐르더니 잠시 후, 하얀 몸체로 이루어진 기하학적인 조형미의 병사가 튀어나왔다. "사념으로 언데드를 다루듯, 저도 이 깃털병사들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답니다! 아직은 초보자라 그런지 최대 10기까지 가능해요! 바로 여기서! 제가 왜 수식에 아벨 방정식을 썼냐면-" "......." 관중들은 중간에 설명을 알아듣기를 포기한 듯했으나, 세 명의 네크로맨서 심사위원들은 눈을 빛내고 있었다. "흥미롭군!" "역시 상아탑이야!" 심사위원들이 처음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도저히 믿기지 않지만, 족제비가 귀엽다는 것 외에 알아들을 수 없는 세르네의 발표가 통하고 있다. -학술회의 미치광이 괴짜 네크로맨서들에게는 먹힐 내용이군. 앞서 세르네의 논문을 첨삭했던 아론은 예측했던 바였다. 세르네의 이능으로 깃털병사를 만드는 논문은 세르네 본인 외에 그 누구에게도 쓸모가 없다. 즉, 학술적 영양가 0에 가깝지만 심사위원들은 좋아했다. 이들은 모두 소환학 분야에서 고일 대로 고이고 썩을 대로 썩은 네크로맨서들이다. 앞서 논문이 찢겨나간 학생들의 발표 내용이, 심사위원들의 입장에선 '백 더하기 백은 이백', '단 걸 많이 먹으면 몸에 나쁘다' 같은 뻔한 소리였다면, 세르네의 이야기는 '나무늘보가 헤엄치는 방법'을 설명하는 느낌이다. 심사위원들은 '새로운 사실'에 신선함을 느꼈다. 본인들은 영원히 나무늘보가 될 일이 없는데도 말이다. "쓰지 않고 있던 뇌근육이 꿈틀거리는 기분이군요." "내용이 새로웠소." 그렇게 세르네는 논문을 멀쩡히 가져갈 수 있는 두 번째 학생이 됐다. 심사위원들은 좋아했지만, 관중들과 학생들은 납득하기 힘들다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이번 발표회의 마지막 차례. "시몬 폴렌티아라고 합니다." 시몬이 연단 위로 올라왔다. 모든 시선이 집중되었다. "키젠의 특례 1번이라." 심사위원들이 시몬의 프로필을 보았다. "폴렌티아 가문?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군."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말고 찬찬히 지켜보는 게 좋겠소." "음. 그렇지." 시몬은 고개 숙여 심사위원들에게 인사하고는 세 사람에게 논문 복사본을 나누어 주었다. "시작하겠습니다." 시몬의 시선이 심사위원 세 사람에게로 향했다. 출처지옥의 칼라반, 논문찢기의 빈트라, 증명무새 라토니. 상대해야 할 세 명이 눈앞에 들어왔다. "제가 발표할 내용은-" 학생 논문 발표회의 마지막 차례. 나이가 있는 세 심사의원은 집중력이 떨어졌는지, 혹은 앞선 세르네의 신선한 발표에 감명받고 흥미가 시들해졌는지, 피곤한 눈으로 턱을 괴거나 등받이에 등을 깊게 기대고 있었다. "시체폭발을 사용하는 스켈레톤 메이지입니다." "뭐?" 빈트라가 깜짝 놀라 스프링에 튕겨 나오듯 몸을 세웠다. 관중석에도 떠들썩한 울림이 있었다. "학생! 여긴 학술회요! 공상 소설 낭독회가 아니라!!" 빈트라가 잠이 확 달아난 표정으로 소리쳤다. 두 심사위원들도 날카롭게 말했다. "언데드가 언데드에게 자폭명령을 내린다는 게 말이 되나요?" "시체폭발 같은 복잡한 흑마법을 어떻게 스켈레톤 메이지가......!" 시몬이 씩 웃으며 서류를 세웠다. "가능합니다." 시몬이 아공간을 열고 좀비와 스켈레톤 메이지 한 구씩을 꺼냈다. "설명 전에 시연부터 하겠습니다." 시몬이 뒤를 돌아보며 신호를 주자 세르네가 손가락에 껴 있던 깃털을 날렸다. 깃털들이 연단의 바닥 착착 꽂히더니 좀비를 덮는 보호막을 만들었다. 보호막이 안전한지 가볍게 손등으로 두들겨 본 시몬이 뒤로 한 걸음 물러나 스켈레톤 메이지에게 명령했다. "시체폭발." 처억! 스켈레톤 메이지가 지팡이를 뻗었다. 이내 지팡이 끝에서 마법진이 펼쳐지자, 갑자기 좀비가 움찔하며 몸을 바로 세웠다. 이내 동공과 입에서 빛이 일렁이는 듯하더니. 꽈아아아아앙! 정말로 폭발했다. 난데없는 굉음에 관중들은 기겁한 아우성을 토해내며 자세를 낮췄다. 심사위원들도 움찔하며 몸을 뒤로 뺐다. 쿠구구구구! 시몬이 폭발연기로 자욱해진 보호막 내부를 보며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이런 느낌입니다." 이내 세르네가 깃털 한 장을 더 날려 환기 마법으로 폭발 구름을 다른 곳으로 없애 버리고 보호막을 해제했다. 웅성 웅성 웅성! 모두가 당황해서 떠들고 있는데 논문찢기의 빈트라가 보채듯 소리쳤다. "빠, 빨리! 이걸 대체 어떻게 한 건지 설명해 보시오!" "네. 심사위원님." 시몬은 바로 최근 공성전 테마에서 괴공을 시체폭발로 터뜨린 것에서 힌트를 얻었다. 원래는 괴공에게 시체폭발을 걸 때 스켈레톤 메이지를 보조용으로 사용했으나, 그냥 스켈레톤 메이지 본연의 힘으로 시체폭발을 쓰게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재료로는 무스펠이라는 몬스터를 선정했습니다. 용암지대에 서식하는, 폭탄처럼 펑펑 터지는 화염계 몬스터죠. '화염계 스켈레톤 메이지'의 재료로 자주 쓰여서 잘 아실 겁니다." 시몬이 소유한 메이지들 중 두 기도 무스펠이었다. 그가 주위를 천천히 걸어 다니며 설명을 늘어놓았다. "바로 이 무스펠로 좀비와 스켈레톤 메이지 한 쌍을 만드는 겁니다." "오호!" "좀비 무스펠은 또 처음 들어보는군!" 원리는 어렵지 않았다. '스켈레톤 메이지'와 '좀비'의 소환 마법진에 동일한 룬어를 새겨 넣는다. 바로 「전달의 룬」. 시몬이 아론의 마기스테 시스템 수업을 들었을 때, 사용했던 바로 그 룬어였다. "전달의 룬이 무스펠 시체폭발의 핵심입니다." 용암지대에서 탄생하는 무스펠의 수명은 성체가 된 이후로 1~2년이 끝이다. 수명의 끝에는 몸의 열을 이기지 못하고 폭발하는 운명을 맞게 되어 있다. 다만 무스펠을 죽여서 좀비나 스켈레톤으로 만들면, 폭발효과는 완전히 사라지는 것으로 세간에는 알려져 있으나. "저는 생전에 가졌던 이 '폭발효과'를, 시체폭발 마법으로 일으키는 데 주목했습니다." 시몬의 이론은 파격 그 자체였다. 일반적인 시체폭발은 언데드의 코어나 소환 마법진만을 과부하로 폭발시키는 원리지만, 시몬은 무스펠이라는 몬스터의 특징에 주목했다. 학문적 지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롭고 창의적인 사고. 시몬이 사용한 룬어와 수식을 하나씩 공개할 때마다 관중석에 앉아 있던 네크로맨서들의 탄성을 흘렸다. "파격적이군!" "천재적인 발상이오!" "생전 몬스터의 생리학적 특징을 이용한 폭발이라니......!"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지?" 관중석이 흥분하기 시작했고, 세 심사위원들도 땀을 줄줄 흘리기 시작했다. "이상입니다." 시몬이 발표를 마치고 빙그레 웃었다. 모든 수식과 원리를 공개하진 않고, 적당히 끊었다. 왜냐하면 이 논문을 팔아먹어야 하니까. 발표가 끊기고 곳곳에서 아쉬움 가득한 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원래 펜타모니엄은 이런 곳이었다. "보관 중인 무스펠 좀비가 먼저 폭발해 버릴 위험성은 없소?" 논문찢기 빈트라가 의문을 제기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무스펠은 좀비화하면 폭발 옵션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무스펠 스켈레톤 메이지의 시체폭발 마법이, 없던 폭발 스위치를 강제로 만들어 누르는 원리고요." 이번에는 출처지옥 칼라반이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논문 뒤편에 출처를 기입하지 않은 이유는요?" 시몬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이디어는 전부 제 머릿속에서 나왔으니까요." 이미 칼라반도 훑어보았지만, 시몬의 논문은 기존의 연구와 단 한 줄도 겹치는 부분이 없었다. 그녀의 입이 쑥 들어가고 이번에는 증명무새 라토니가 벌떡 일어섰다. "이건 대사기극이오! 펜타모니엄을 모욕하려는 의도가 틀림없소!" "네?" "전달의 룬으로 보낼 수 있는 칠흑 신호는, 일반적인 중추신경계와 완전히 다른 영역이오! 무스펠의 폭발이 인위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소?" "원하신다면." 시몬이 근처에 있던 바퀴 달린 칠판을 가지고 왔다. "증명하겠습니다." 그리고는 전달의 룬의 증명식을 칠판에 쭉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타닷. 탓. 타악. 타악. 탁. 숨죽인 듯한 정적 속에서 시몬의 분필 움직이는 소리만이 들렸다. 머리카락과 셔츠 자락이 흔들리며, 시몬은 신들린 듯한 모습으로 수식을 써내려갔다. 이론적 통찰(洞察). 이미 시몬은 그 과정을 마쳤고, 칠흑역학적으로도 분석을 완료했다. 룬어의 폭발과정을 수식으로 나열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감사합니다. 에릭 아우라 교수님!' 모두가 시몬이 분필을 움직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내 타악- 하고 시몬이 분필로 방점을 찍으며 손을 늘어뜨렸다. "이제 됐죠?" 그야말로 완벽한 증명. 할 말이 없었다. '이건 정말.......' 논문찢기 빈트라는 등골이 찌르르 울리는 것을 느꼈다. 파격을 넘어선 혁명이다. 저 17세 소년의 창의성과 의외성이, 기존의 경직된 네크로맨서 세계에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 머리가 굳어져서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들, 원래 그렇게 돼야 한다고 생각했던 찌든 상식들이 무너져서 바닥에 나뒹굴고, 새로운 성이 눈앞에 떡하니 세워져 있다. 짝. 빈트라가 손뼉을 쳤다. "훌륭하오!" 짝. 짝. 관중석 곳곳에서 손뼉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내. 짝짝짝짝짝! -와아아아아아! 우렁찬 환호와 박수갈채로 바뀌었다. 몇몇 프로 네크로맨서들은 흥분한 얼굴로 기립박수를 보내기까지 했다. 그 까다로운 출처지옥 칼라반과 증명무새 라토니도 얼빠진 표정으로 손뼉을 쳤다. 시몬은 모두에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바로 이런 걸 원했소!" 흥분한 빈트라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많은 사람들이 '학생 논문 발표회'의 수준과 의의에 의문을 품고 있었소. 그러나 오늘 시몬 폴렌티아 학생이 그 필요성을 입증한 거요! 학생들의 새로운 접근! 젊음에서 오는 파격적인 시도! 우리는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을 같이 공유한 걸지도 모르겠소. 아주 훌륭하오!" "영광입니다." "이 논문은 펜타모니엄에 등록할 생각이겠지?" "아, 네." "이리 오시오!" 시몬은 빈트라가 무슨 의도로 부르는지 몰랐지만, 일단 그의 앞으로 걸어갔다. "받으시오." 그리고 빈트라가 내민 건 하얀 종이였다. 힐긋거리며 그 종이를 본 양옆의 심사위원들이 기겁을 넘은 경악성을 토해냈다. "빈트라 위원님!" "지금은 논문 발표회 시간입니다! 갑자기 이런......!" "꼭 발표회 시간에 논문을 구매하지 말란 법은 없지 않소." 빈트라는 이미 탐욕으로 정신이 반쯤 나간 듯, 두 눈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시몬이 당황한 표정으로 종이를 들어 올렸다. 이건 수표였다. 그런데 지급자 서명에 빈트라의 이름이 적혀 있는데 금액란은 텅 비어 있었다. "심사위원님. 이건......." "백지수표요." 웅성 웅성 웅성! 그 말에 관중석에서 한바탕 난리가 났다. "이, 이게 무슨 짓이오!" "심사위원이란 자가 부끄럽지도 않소?" "구매하고 싶다면 입찰을 통해 정당히 경쟁해야지!" 프로 네크로맨서들이 얼굴이 시뻘게져서 소리치자 빈트라가 비릿하게 웃었다. "입찰이든 뭐든 나는 최고 금액으로 구매할 것이오. 시장논리란 게 그런 거잖소?" 시몬은 잠시, 눈앞의 이 인간이 뼛속부터 네크로맨서라는 생각을 잠시 했다. "자! 편하게 원하는 금액을 쓰시오! 얼마가 되든 상관없소!" 그가 두 팔을 펼치며 큰소리로 외쳤다. 그러고는 시몬에게만 들릴 듯 작게 말했다. "소환학을 공부하는 네크로맨서 학생은 언제나 돈이 급하잖소. 자네도 그런 이유 때문에 학술회에 참여했을 테고." "......." 백지수표. 금액을 적으면 그 금액이 모두 내 것이 된다. 리치의 라이프베슬 심장도 살 수 있게 된다. 어떻게 보면 영광이라고 할 수 있다. 인생을 살면서 언제 이런 걸 받아볼 기회가 있을까. 시몬의 손이 천천히 움직였다. "자, 옳지 옳지. 어서 금액을-" "심사위원님." 시몬이 백지수표를 집었다. 그리고 천천히. 빈트라에게 잘 보이도록 세로로 들어 올렸다. "왜 그러는......." 지이이이익- "!!!" 순간 발표회장 전체가 정적에 휩싸였다. 누구도 움직이지 못했고, 누구도 숨 쉬지 못했다. 지이이이익- 이 공간의 모두가 멈춰 있는 가운데, 오로지 백지수표를 찢는 시몬의 손만 움직이고 있었다. 지익- 찍. 마침내 백지수표를 완전히 반으로 갈라 찢은 시몬이, 황망한 표정으로 덜덜 떨고 있는 빈트라에게 향했다. "기분 나쁘시죠?" 시몬이 빙긋 웃으며 반으로 찢어진 백지수표 조각을 포개었다. "저를 생각해서 성의를 보이신 건데, 이렇게 되니까요." 그리고 이번에는 가로로 찢기 시작했다. "우리 학생들도 그랬습니다." 지이이이이익- 모두의 귓가에 종이 찢어지는 소리가 길게 남았다. 알란드, 시에라, 모이란까지. 모든 학생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눈을 부릅떴다. "바쁜 학사일정에서도, 이 발표회에 참여한 모두가 온 힘을 다했어요. 노력의 크기가 다를지언정, 노력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최소한의 준비도, 정성도, 고민도 없이, 뻔한 내용 채우기. 먼저 펜타모니엄을 무시한 건 바로 당신입니다. "펜타모니엄을 무시하는 행위라고요? 미친 게 아닌 이상, 일개 학생이 어떻게 펜타모니엄을 무시할 수 있겠습니까?" -요즘 애들은 격이 너무 떨어져. -시에라에서는 대체 뭘 가르치는 거야?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어요.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들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심사위원분들은 처음부터 잘하셨습니까?" -쓰레기 같군. 0점. 그리고 마침내, 시몬은 완전히 표정이 무너져내려 입술만 파르르 떨고 있는 빈트라를 보았다. 부욱. 부욱. 부욱. 부욱. "우리는-" 논문찢기 빈트라가 했던 그대로. 시몬은 갈기갈기 찢은 백지수표를 빈트라의 앞에 떨어뜨렸다. "쓰레기가 아닙니다. 심사위원님."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열심히 노력한 사람을 비웃을 권리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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