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280화 "......뭐, 뭐야 이게?!" 편지지는 공백.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빈 도화지처럼 한없이 새하얗기만 했다. "......." 편지를 둘러싼 네 사람 사이에 쌩- 하고 어색한 바람 한 줄기가 지나갔다. "우리 쫌 망한 거 같은데." 제일 먼저 말을 꺼낸 건 딕이었다. "이 편지에 파견처랑 멘토랑 다 적혀 있다고 했잖아." "어, 어쩌죠?" 딕이 휙 고개를 돌렸다. "아까 메이린이 편지 봉인 뜯을 때 뭔가 잘못한 거 아냐?" 그 말에 메이린이 펄쩍 뛰었다. "나, 난 아무 짓도 안 했어! 진짜 그냥 편지만 뜯었다고! 시몬! 봐봐아!" 그녀가 억울함을 호소하며 시몬에게 편지를 건넸다. '음.' 하지만 시몬이라고 뾰족한 수가 있을 리가 없었다. 가볍게 편지를 흔들어보거나, 손가락으로 튕겨보거나, 편지 안에 뭔가 다른 내용이 있는지 살펴보았지만 성과는 없었다. 다들 허탈한 표정으로 편지지를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우우웅! "왓!" 메이린이 비명을 질렀다. 갑자기 텅 빈 편지지 중앙에 새까만 마법진이 펼쳐진 것이다. 철커덩! 철컹! 쇠가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편지에서 새어나간 검은 막이 펼쳐져 네 사람을 감쌌다. 카미바레즈가 놀란 소리를 냈고 나머지 세 사람이 그녀를 중심으로 모이며 주위를 경계했다. -1급 보안 문서 확인. 메모리얼 마법을 발현합니다. 편지에서 청량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 설마!" 메이린이 뭔가 눈치챈 듯 소리를 높였다. "편지 내용이 외부에 발설되면 안 되니까, 이런 보안계열 흑마법으로 대체한 거야?" "그러네!" 딕도 손뼉을 쳤다. -대상자를 확인합니다. 이번엔 네 사람의 얼굴 앞으로 마법진이 펼쳐졌다. -메이린 빌렌느, 시몬 폴렌티아, 딕 헤이워드, 카미바레즈 우르슬라. -대상자 확인됐습니다. 목소리와 함께 다시 마법진이 사라졌다. "신기한데!" 딕이 탄성을 흘리며 말했다. 어느새 두려움이 사라진 네 사람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화르르르륵! 텅 빈 허공에 검붉은 불길이 치솟았다. 불길에서 종잇조각 같은 잔해들이 떨어지더니 착착 허공에 모여들며 글자를 맞추었다. 모두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그 글자를 응시했다. 「벤젼스(Vengeance)」 암흑연합 중립지대 특수요원 파견관리당국 "세상에!" 딕이 헛숨을 들이키며 소리쳤다. "벤젼스! 벤젼스라니! 우리 파견지 대박이야!" "벤젼스가 뭐 하는 곳이야?" 시몬이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중립지대의 파수꾼들." 메이린이 하늘색 머리카락을 넘기며 대신 대답했다. "중립지대는 언어 그대로 철저한 '중립'이라 키젠도 에프넬도 영향력을 끼칠 수 없잖아? 그래서 키젠의 의뢰를 받아 암흑연합을 위해 일하는 사조직이야." "그런 사조직 중에서도 벤젼스는 엄청 유명해!" 딕은 거의 입이 찢어지려 하고 있었다. "네크로맨서 요원들이 활동하면서 프리스트랑 싸우는 기관이라고! 우리도 프리스트랑 싸우러 가나 봐!" "프, 프리스트라니......." 카미바레즈가 겁먹은 표정으로 눈동자를 굴렸다. 타닥 타닥. 그때 불길에서 잔해가 떨어지며 새로운 낱말을 조립했다. 「첩보부, 연방 공인 3위계, 세이위르 그리즈만.」 메이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응, 이분이 우릴 담당할 멘토분이신가 보네." 이번에는 불길에서 불에 그을린 듯한 두루마리가 나타났다. 그것이 촤르륵! 소리를 내며 펼쳐져 지도를 보였다. 지금 네 사람이 있는 마을에서 건물 한 채가 빨간색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저기로 오라는 게 아닐까요?" "나도 접선장소라고 생각해." 화르르륵! 지도가 불살라 사라지고, 이내 네 사람을 감싼 어둠이 걷히고 다시 주위의 마을 경관이 보였다. "크으으! 역시 벤젼스야! 무슨 편지 하나만으로 클래스를 보여주냐?" 신이 난 딕이 난리를 피우는 사이, 시몬은 머릿속에서 아까 본 지도를 떠올리며 현재의 경관과 대입해 보고 있었다. "주점, 상점가, 부둣가......" 손가락을 움직이며 하나하나 짚어나가던 시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 맞아. 이쪽이야." "역시 시몬이에요!" 세 사람이 시몬의 뒤를 따랐다. 무척 기분이 좋아 보이는 딕이 휘파람을 불며 시몬의 목에 팔을 둘렀다. "으핳하! 특수요원 파견이라니 너무 설레지 않냐!" "설레지." 시몬이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발, 평민아." 메이린이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니가 젤 걱정이야. 나중에 멘토 앞에서도 막 나대고 버릇없이 굴지 마. 우리 성적을 조작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 "고럼고럼. 나도 그 정도 분간은 해." 한편, 카미바레즈는 시몬 옆에 붙어서 그의 옷자락을 살며시 붙잡고 있었다. 그녀는 마치 경계심 많은 새끼 고양이 같았다. 마을에서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나 사람들의 작은 외침에도 깜짝깜짝 놀라며 어깨를 떨거나 시몬의 뒤로 숨기도 했다. "카미, 괜찮아?" "아, 네!" 그녀가 애써 웃었다. 새로운 환경과 장소라 약간 낯을 가리는 것 같았다. "저기다!" 딕이 외쳤다. 아까 지도에서 본 나무집이었다. 주위가 대부분 흙으로 만든 점토집인 반면에, 조금 눈에 띄는 나무집이라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간판을 보니 작은 마을 주점이었다. 네 사람은 긴장한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실례하겠습니다." 조장인 메이린이 앞장서서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접선 암호 같은 것도 없어서 어떻게 멘토를 알아볼까 걱정했지만. 괜한 걱정이었다. 주점 안에는 딱 한 사람만 앉아 있었으니까. 그는 흰 치아를 드러내는 환한 미소를 보이고 있었다. 벤젼스의 유니폼인 듯, 녹색 패턴 넥타이와 잿빛 제복을 입고 있었고, 금발은 왼쪽만 길어서 눈썹을 덮었다. 마른 체형에 코끝이 아래로 뾰족하게 내려와 있고, 턱선은 날카로웠다. 전체적으로 본다면 짙은 눈썹과 느끼한 미소를 머금은 미남이었다. 그가 먼저 두 팔을 벌리며 말했다. "어-서오세요! 키젠 학생 여러분!" 소프라노에 가까운 높은 음성이었다. 네 사람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자아- 편하게 앉으세요." 그가 흐트러진 앞머리를 손등으로 올리고, 왼쪽 눈을 감으며,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티잉- 하고 빛이 튀는 듯한 효과가 나타났다. 이내 네 사람이 테이블 하나를 두고 자리에 앉았다. 다들 허리를 펴고 손을 무릎 위에 올리며 최대한 깍듯하고 공손한 자세를 보였다. "하하, 그렇게 긴장할 필요는 없어요. 내 앞에선 편하게 있어도 됩니다." 그가 가슴에 손을 올리며 말을 이었다. "편지에서 봤다시피 내 이름은 세이위르 그리즈만. 벤젼스의 첩보부에서 일하고 있죠." "아, 네! 저희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우선 저는 조장인 메이린 빌렌느라고 합니다!" 메이린이 한 명 한 명 소개를 시작했다. 특히 시몬을 소개하는 순간, 세이위르의 눈이 반짝이는 게 느껴졌다. "소문으로 듣던 키젠의 특례 1번이군요." 메이린과 딕이 부러운 시선을 보냈다. 역시 어딜 가나 특례 1번 입학생 타이틀은 대접받았다. "만족스럽습니다." 세이위르가 한쪽만 튀어나온 앞머리를 손등으로 올리며 눈을 찡긋했다. "벤젼스에서 일주일간 나와 같이 일할 학생들이니. 키젠에서 이런 훌륭한 학생들을 보내는 게 당연하죠." 시몬은 세이위르의 설명을 찬찬히 들으며 속으로 안도했다. '다행이다.' 사실 파견평가를 진행한다는 말에, 돌연변이 동아리 선배들이 잔뜩 겁을 준 뒤여서 조금은 걱정했다. 별의별 예시가 많았다. 성격파탄자에, 구타를 쓰는 사람에, 학생을 언데드로 만들려고 하는 매드사이언티스트에, 여학생들 성희롱하는 쓰레기에, 심지어는 파견평가 내내 아무 일도 안 시키고 세워뒀다가 파견 끝나는 날짜에 최하점 줘버리는 악질까지. 그래도 일단 첫인상만 본다면 세이위르는 상식인의 범주에 들어가는 네크로맨서인 것 같았다. "이렇게 젊은 네크로맨서 여러분을 보니 제 학생 시절이 생각납니다. 저도 그때 많은 교수님들이 직속제자 권유를 해왔지만......." 조금 말이 많은 편인 사람인 것 같지만 말이다. "참, 그러고 보니 편지는요?"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주시죠. 제가 가지고 있겠습니다." 시몬이 두 손으로 공손히 편지를 건네는데, 딕이 끼어들었다. "편지에서 아무것도 안 써져서 있어서 깜짝 놀랐어요! 근데 갑자기 그런 연출이! 크으!" "딕!" 메이린이 눈치를 주었지만, 세이위르는 웃는 얼굴로 말을 받아주었다. "처음 보면 놀라는 게 당연하지요." 세이위르가 앞머리를 넘기고 흰 이를 드러내며 눈을 찡긋했다. "사실 나도 그런 적이 있었는데-" 그가 폭포수처럼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시몬은 이야기를 듣다가 그가 테이블에 올려놓은 편지지를 보았다. '.......' 아무것도 안 적혀 있어야 할 편지지에, 아주 흐릿하게 뭔가가 보이는 것 같았다. 시몬이 눈을 크게 뜨고 보려는데 세이위르가 편지지를 들어서 품에 집어넣어 버렸다. "그. 세이위르...... 선배님?" "호칭은 요원으로 부탁드립니다." "아, 네. 요원님!" "물론 나도 여러분을 요원이라고 부를 겁니다. 메이린 요원." 세이위르가 앞머리를 넘기며 윙크했다. 저쯤 되면 습관을 넘어 거의 병적인 제스쳐라고 시몬은 생각했다. "여러분이 학생 신분인 건 상관없습니다. 나와 같은 일을 맡게 된 이상 우리는 서로 목숨을 믿고 맡길 수 있는 동등한 동료입니다." "여윽시! 정말 마인드가 멋지십니다! 요원님!" 딕이 양손으로 엄지손가락을 척 세웠다. 그는 세이위르의 매력에 제대로 빠진 것 같았다. "쫌." 나대지 말라는 의미로 메이린이 딕의 다리를 툭 걷어찼다. "요원님, 우리가 이번에 어떤 임무를 맡아서 하게 될지 궁금해요." "아주 좋은 질문입니다. 메이린 요원!" 세이위르가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그러자 주위가 편지를 처음 열었을 때처럼 암흑으로 물들었다. "실례, 보안이 중요해서." 그렇게 말한 세이위르가 가까이 오라는 듯 휙휙 손짓했다. 네 사람이 의자에서 엉덩이를 들고 세이위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우리의 임무는 한 중요 인물을 확보하는 겁니다." "중요 인물이라니! 어떤 사람입니까!" 딕이 얼른 물었다. "그런 적극적인 자세는 매우 좋습니다. 딕 요원. 임무 태도 점수에 반영하도록 하겠어요." "감사합니다!" 그 모습을 본 모범생 메이린의 표정에 또 부러움이 지나갔다. 그녀도 이에 질세라 더욱 몸을 기울이며 진지한 자세로 임했다. "바로." 시몬도 긴장한 표정으로 귀를 쫑긋했다. "바로 바로 바로." 다 좋은데 그만 좀 질질 끌었으면 좋겠다. 네 사람의 호기심 가득한 반응을 한 차례 확인한 세이위르가 아주 작고 은밀한 목소리로 말했다. "성녀 후보자입니다." 네 학생의 입이 동시에 벌어졌다. 바로 이런 반응을 기다렸다는 듯 세이위르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서, 성녀 후보자요?" "그렇습니다 시몬 요원! 최근 우리 벤젼스는 에프넬에 잠입한 요원으로부터 1급 첩보를 들었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은밀해졌다. "이 중립지대에, 역대급의 신성적합도를 가진 소녀가 태어났다." "!" "그리고 에프넬에서 그 소녀를 데려오기 위해 프리스트들을 움직이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그가 손바닥을 펼쳤다. "공교롭게도 키젠 학생인 여러분들과 관련된 일이군요. 정화의 성녀에 대해서는 알고 있겠죠?"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는가. 맹독학 수석조교 프란체스카의 몸에 들어가, 키젠 1학년 전체를 말살하려고 했던 성녀. 결국은 그녀의 음모는 시몬을 비롯한 학생들에게 막히고 네프티스에게 살해당했지만, 나중엔 그 '정화의 정수'가 안나의 몸에 깃들어 버리는 바람에 시몬은 신성연방까지 가는 여행길에 오르기도 했다. 정화의 성녀와는 여러모로 엮이는 일이 많았다. "에프넬은 지금 극도로 신경이 곤두서 있습니다. 정화의 성녀가 죽은 뒤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다음 정화의 성녀가 등장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죠. 이렇게 다음 성녀 강림까지 기간이 길었던 적은 무척 드문 경우입니다." 모두가 바짝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세이위르의 이야기를 들었다. "사실 정화의 성녀가 될 가장 적합한 인물은 바로 중립지대에 있었습니다. 에프넬도 이번엔 꽤 확신을 가진 것 같습니다. 바로 그 소녀를." 세이위르가 착! 두 손바닥을 맞부딪혔다. "우리가 에프넬보다 먼저 데려올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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