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1342화 다음 날 오후. 시몬과 레테는 다르블렝의 중심가 최상층에 위치한 호텔 연회장에 도착했다. 돈 많은 도시의 상류층들이 오가는 장소답게 연회장은 사치와 권위가 뒤섞인 느낌이었다. 웅장한 유리온실과 생화로 장식된 크리스털 분수대, 금도금 식기와 산처럼 쌓여 있는 디저트가 보인다. 그 주위로 고급스러운 옷차림의 사람들이 와인 잔을 기울이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시몬은 턱시도의 넥타이를 고쳐 매며 긴장된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런데 꼭 드레스 코드까지 맞춰서 와야 했을까?” 또각또각. 그 말에 반응하듯, 우아한 구둣발 소리와 함께 하얀 머리칼을 올려 묶은 여성이 옆에서 걸어 나왔다. 시몬의 눈에는 상당히 어른스러운 복장이었다. 매끈한 실크로 이루어진 상아색 드레스는 움직일 때마다 스르륵 섬유 끌리는 소리가 났고, 드러난 어깨와 깊게 파인 가슴라인이 그녀의 모습에 성숙함을 더했다. 가벼운 색조 화장에, 입가에 그리 진하지 않은 립스틱도 칠했다. 그녀가 탁 하고 걸음을 멈추고는 지나가는 웨이터로부터 와인 잔을 받아 들었다. “고마워요.” 그녀가 완벽한 발음으로 인사했다. 그러곤 웨이터가 살짝 붉어진 얼굴로 목례하며 지나가자, 이내 빙글 몸을 돌려 시몬을 바라보았다. “드레스 코드는 어쩔 수 없잖슴까.”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의 말투로 돌아온 레테가 툴툴거렸다. “이런 상류층 모임에서는 옷을 제대로 갖춰 입지 않으면 출입 자체가 안 된다구요.”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당황하던 시몬이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을 본 레테가 고개를 기울이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어때요?” “뭐, 뭐가?” “이 옷이요. 모처럼 의상에 힘 좀 줘봤는데.” 레테가 몸을 돌려 드레스를 흩날렸다. 시몬은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옆머리를 긁었다. “……잘, 어울려.”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비하면 담백한 칭찬이었지만, 레테는 그것만으로도 좋다는 듯 눈웃음을 흘렸다. “고마워요. 당신도 잘 어울림다.” 시몬은 얼른 뛰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처음엔 옷에 너무 과소비한 건가 생각했는데, 괜찮네. 그리고 대여해서 다행이다.’ 이 옷은 빈트로드 탐정의 카드로 비용을 지불하고 양장점에서 빌려왔다. 전에 탐정 옷을 샀던 바로 그 양장점이었는데, 가게 주인이 피팅을 하고 온 레테를 보며 비명을 지르더니 1/10 가격으로 대여해 줄 테니 제발 입어달라며 사정사정하는 바람에 이렇게 됐다. 저 정도면 홍보 효과가 있다나 뭐라나. 레테는 옷이 마음에 드는 듯 사뿐거리는 걸음으로 돌아다녔다. 그러다 푸딩 한 접시를 들어서 가볍게 한 입 맛을 보았고, 맛있는지 ‘으음-’ 하는 감탄사를 흘렸다. 시몬의 시선도 자연스레 그녀의 드레스에 파인 등 쪽으로 향했다. 그녀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시몬이 입을 열었다. “레테.” “네?” “이번 임무 때 다쳤지?” 레테가 토끼 눈이 되어 시몬을 돌아보았다. “어떻게 아셨슴까?” “피부색이 약간 달라.” 시몬이 눈을 감으며 말을 이었다. “다친 부위는 등. 걱정 끼치기 싫으니까 스스로 치유마법을 걸어서 해결하려고 했겠지. 오른손을 등 뒤로 보내서 욱신거리는 부위에 힐링을 걸었을 테지만.” 시몬이 팔을 등 뒤로 보내는 시늉을 하며 말을 이었다. “등 뒤의 상처를 치유하려면 잘 보이지도 않고, 손과 상처 부위에 거리도 둬야 하니 자세도 불안정해. 일단 응급 치유를 마친 뒤 현장에서 벗어났을 테고, 나중에 드레스를 사면서 거울에 비친 등을 보다가 다친 부분을 발견하고 다시 치료했겠지. 그런데 이번 주는 햇볕이 유독 뜨거웠으니까, 처음에 치유한 부분과 나중에 치유한 부분의 피부색이 차이가 나게 되는 거야.” “…….” 가만히 듣고 있던 레테가 ‘오와’ 하고 감탄했다. “탐정 일 하더니 진짜 탐정처럼 말할 줄도 아심다.” 시몬이 쓰게 웃었다. ‘……추리소설을 밤새 6권이나 읽어서 그런가.’ “아무튼 늦게 말해서 미안함다. 당신 말대로 걱정 끼칠까 봐 그랬어요.” 레테가 순순히 사과했다. “다음부터는 부상 상태까지 제대로 공유할게요.” “응. 부디 그렇게 해줘.” “네.” 레테가 남은 푸딩을 모두 먹은 뒤 빈 접시를 내려놓았다. “그럼 이제 갈까요?” 레테가 손등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의뢰를 완수하러.” 시몬도 그녀의 손을 조심스레 잡았다. “그래, 가보자.” 각오를 마친 그가 레테를 에스코트하며 연회장에 중앙으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고아원을 운영하는 라벨라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라벨라가 지나가듯 이야기했던 한마디가 있었다. -정말로 마빈을 데려온다면 값은 후하게 쳐줄게요. 곧 있을 올레스티아 부인의 파티에 많은 탐정들이 참가할 텐데, 제가 여러분의 무용담을 퍼뜨릴 수도 있겠군요. 좋은 탐정이 있다고요. 그랬다. 여기가 바로 올레스티아 부인의 세례일 파티가 열리는 연회장이었다. * * * 자주색 드레스 차림의 라벨라 부인은 연회장 한쪽에서 여러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물론 이번 자리는 올레스티아 부인의 세례일 파티였지만, 아동 복지에 힘쓰는 것으로 대중들의 존경을 받는 라벨라도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고 있었다. “섣부르게 움직이지 말고, 경계 똑바로 해.” “예.” 라벨라의 지시를 들은 건장한 체격의 호텔 직원들이 하나둘 자리를 떠났다. 홀로 남은 그녀가 이어서 와인을 홀짝이고 있는데. “오, 라벨라 부인!” 한 남자가 다가왔다. “위대한 여신께서 보살피시는지 올해 사업이 아주 잘됐소! 내 후원금을 내년부터는 두 배로 늘리지!” “어머나, 정말 감사드려요. 덕분에 아이들에게 따뜻한 수프를 먹일 수 있을 거예요. 여신의 축복이 함께하시길!”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던 라벨라였지만, 남자가 떠나자마자 미소가 사라졌다. “두 배 정도로 생색내긴. 쪼잔한 인간 같으니.” 라벨라가 비아냥거리며 포도주를 홀짝이고 있을 때, 이번엔 턱시도를 입은 두 남자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다가왔다. 한 명은 멀대처럼 키가 크고 홀쭉했고, 다른 한 명은 키가 작지만 둥근 풍선 같은 체형이었다. “라, 라우스! 라벨라 부인!” 그 둘이 인사를 건넸고, 라벨라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어머나, 탐정님들. 이렇게 연회장에서 한가롭게 노닥거리시는 걸 보니, 제가 맡긴 의뢰는 아주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나 보네요?” “그, 그게……!” “마빈은 찾고 연회를 즐기시는 거겠죠?” 그녀의 싸늘한 압박에 키가 큰 탐정이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대답했다. “의뢰부터 처리하고 싶었지만, 이번 파티는 사정이 있어 참여한 거요! 엑스머스 탐정이 여기에 왔단 말이오!” 그 말에 라벨라가 시선을 돌렸다. 연회의 주인공인 올레스티아 부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의 이목이 쏠려 있는 테이블. 바로 다르블렝의 3대 탐정으로 손꼽히는 엑스머스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도 엑스머스에게 수사 협력을 요청하려던 참이오. 사실 이곳 다르블렝에 고아가 한두 명도 아니고, 콕 집어서 마빈을 찾아내는 게 쉬운 일이 아니지 않소.” “나는 그래도 나름 진실에 꽤 가까워졌는데.” 이번에는 키가 작고 몸이 풍선처럼 부푼 탐정이 한숨을 푹 쉬었다. “분장을 하고 슬래그본 길드에 잠입하려 했다가, 갑자기 네옴 기기의 폭발 사고가 나는 바람에 실패했어. 이렇게까지 운이 따르지 않다니!” “이럴 때만 나불나불. 두 분 다 혓바닥이 현란하시네요.” 라벨라가 표독스럽게 말했다. “내가 원하는 건 결과예요. 당신들에게 의뢰 착수금으로 뿌린 돈이 얼만 줄 알아요? 변명만 늘어놓지 말고 결과를 가져와요, 결과를!” 그녀의 날카로운 질타에 두 탐정은 도망치듯 물러났다. 이후로도 또 한 명의 탐정이 그녀에게 인사하러 왔다가 욕만 바가지로 먹고 물러났다. “제대로 일을 하는 놈이 없어.” 그녀가 한숨을 푸욱 쉬고 있는 그때. “라벨라 부인.” 시몬과 레테가 모습을 드러냈다. 썩은 표정으로 포도주를 홀짝거리던 그녀가 두 사람을 보고는 금방 표정을 바꾸며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어머나, 시온 탐정님. 레나 탐정님!” 그녀가 손뼉을 짝 쳤다. “두 분도 엑스머스 탐정님을 보러 오셨나요? 아니면 뭔가 의뢰에 진척이라도?” 목소리는 밝았지만 전혀 기대하지 않는 눈치. 애초에 무명인 두 사람에게는 착수금도 주지 않았기에, 의뢰를 해결하지 못해도 손해는 없었다. 그때 시몬이 입을 열었다. “마빈을 찾았습니다.” 그 말을 들은 그녀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급하게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테이블이 흔들리며 디저트가 바닥에 떨어졌다. “정말인가요? 지금 어딨죠?” 시몬이 레테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고, 레테가 태연히 말했다. “괜찮아. 이리 와, 마빈.” 그 한마디에, 파란색 머리로 염색한 어린아이가 사람들 사이에서 주뼛주뼛 모습을 드러냈다. “마빈!” 라벨라가 울먹이며 뛰쳐나와 마빈을 끌어안았다. 모두가 무슨 일인가 싶어서 하나둘 고개를 들고 이 모습을 지켜보았다. “마빈! 대체 어디 갔던 거니? 내가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 “……죄송해요.” “무사히 돌아와서 정말로 다행이야!” 이 훈훈한 장면에 곳곳에서 따뜻한 박수 소리가 쏟아졌다. 그녀의 의뢰를 받은 탐정들이 아쉽다는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제가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라벨라가 감격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 있는 다르블렝의 신인 탐정! 시온 탐정님과 레나 탐정님이 제 의뢰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제 친아들과도 같은 아이를 찾아주셨습니다!” 다시 한번 관중들의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시몬과 레테가 가볍게 주위로 목례하며 사람들의 환호에 응답했다. 바로 그때. 파박! 갑자기 마빈이 라벨라를 힘껏 밀쳐내고 도망쳤다. “아익!” 라벨라는 중심을 잃고 자리에 넘어지고 말았다. 마빈은 레테의 등 뒤로 뛰어 들어가더니 그녀의 드레스 자락을 붙잡고 바들바들 떨었다. “마빈! 너 이게 무슨 짓……!” 평소 고아원에 있을 때처럼 우악스러운 비명을 질러대던 라벨라가 뒤늦게 실수했다는 것을 느끼고는 입을 가렸다. 사람들이 환호를 멈추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마빈이 겁에 질린 얼굴로 떨고 있었다. “마빈을 데려다 드렸으니, 이걸로 라벨라 부인의 의뢰는 완수했습니다.” 시몬이 의뢰를 계약서를 꺼내더니, 만인이 보는 앞에서 북북 찢었다. “그리고 이제 다음 의뢰를 시작하겠습니다. 새로운 의뢰 내용은-” 시몬의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파르노 고아원의 고아원장, 라벨라 부인의 ‘아동 학대’에 대해 밝혀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뭐, 뭐라고?” 사방에서 폭발적인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다. 연회장 구석에 있던 사람들까지 이 소란을 듣고 하나둘 몰려들었다. 라벨라는 눈이 휘둥그레진 채 입술을 파르르 떨며 말했다. “지금 농담하는 거죠? 아동 학대라고? 무슨 근거로 그런 참담한 헛소문을……!” “발뺌할 줄 알았슴다.” 레테가 네옴 아티팩트를 작동시켜 바닥에 내려놓더니 허공에 스크린을 띄우며 말을 이었다. “다들 여길 봐주세요.” 스크린 속 사진들이 드러나자 사람들은 하나같이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고아원 벽에 붙어 있는 족쇄. 피로 물든 채찍. 겁에 질린 아이들의 모습. 심지어 아이들의 몸 곳곳에 난 생채기와 멍 자국이 또렷하게 보였다. 그 참담한 사진을 본 사람들의 낮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레테가 태연히 팔짱을 끼며 말했다. “오늘 아침 고아원에 가서 직접 녹화한 것들임다.” 라벨라가 아침 일찍 연회 준비로 자리를 비운 틈에, 레테는 직접 고아원에 잠입해 모든 증거를 수집했다. 메모리얼 수정구에 담긴 영상들은 부인하기 힘든 증거였다. “시와 유력자들의 후원을 받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던 파르노 고아원장이 이런 짓을 버젓이 저지르고 있었던 거예요.” “이, 이런 건……!”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라벨라가 말을 더듬었다. “이건 모함이에요! 이런 건 얼마든지 조작 가능해! 누군가 저를 음해하려고 꾸민 짓입니다!” “…….” 레테가 작게 한숨을 쉬더니, 마빈을 바라보았다. “미안해.” “괘, 괜찮아요.” 마빈이 작은 손으로 제 옷을 붙잡았다. 그 순간 라벨라가 산 채로 찢어 죽일 듯한 눈빛으로 마빈을 노려보자, 마빈이 흠칫했다. “잠깐! 애를 왜 그렇게 보시오!” “저러니 진짜 수상한데?” 주위에 있던 몇몇 사람들이 눈치채고 그녀를 나무랐다. 라벨라가 급히 사람 좋은 미소를 지은 채 오호호 웃음을 흘리며 입가를 가렸지만, 눈은 마빈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결국 마빈은 용기를 내어 겉에 입은 상의를 벗었고. “아……!” 몸 곳곳에 벌겋게 남은 채찍 자국과 멍이 가득 드러났다. 옷으로 감출 수 있는 부위만을 노려 학대했다는 게 분명한 흔적이었다. 워낙 충격적인 모습에, 사람들 사이에서는 입을 틀어막고 눈물까지 글썽이는 이들도 있었다. “이제 됐어.” 레테가 얼른 마빈의 옷을 챙겨 입혔다. 연회장은 정적에 휩싸였고. 살벌한 시선이 하나둘 라벨라에게 꽂혔다. “나, 나는 몰랐어요!” 위기에 빠진 라벨라가 울먹이며 말했다. “고아원 직원 중 한 명이 나 모르게 저랬는지, 아니면 마빈이 갇혀 있던 곳에서 채찍질을 한 건진 모르겠지만! 여신께 맹세코 난 정말 몰랐어요!” 그녀가 괴성을 지르며 무죄를 호소했다. 그러고는 분노에 찬 시선으로 시몬과 레테를 노려보았다. “말해요! 대체 어떤 빌어먹을 인간이 내 명예를 훼손하려고 이딴 의뢰를 한 건지……!” “저예요.” 좌중에 울려 퍼지는 단호한 목소리에 사람들의 고개가 하나둘 돌아갔다. 우아한 발걸음으로 무대로 걸어오는 한 여성의 모습이 보인다. “뒷골목의 성녀다!” “테레지아! 공적인 자리에 나오는 건 처음 아냐?” 사람들이 테레지아를 알아보고는 웅성댔다. 그녀는 다르블렝의 유명 인사였다. 자신의 전 재산을 고아들을 키우는 데 쏟아붓고 있는 진정한 선인이자, 만인의 존경을 받는 인물. 테레지아가 가슴에 손을 얹고 말했다. “탐정님들께 라벨라의 악행에 대해 알아봐 달라고 의뢰한 건 바로 저, 테레지아입니다.” 사태가 점점 더 격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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