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1315화 터어어어어어엉! 갑자기 전면에서 쏟아지는 돌풍에, 시몬의 몸이 피할 틈도 없이 떠밀려 아래로 떨어졌다. 높은 계단에서 날아가는 바람에 위험했지만, 시몬은 몸을 한 바퀴 빙글 회전하며 다시 바닥에 사뿐히 착지했다. “방금 그 발언.” 쏴아아아아아- 아스페리아가 하얀 수증기와 함께 마침내 욕탕에서 몸을 일으켰다. 물에 젖은 등과 나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간과할 수 없는 이야기로군요.” 키이이이이이잉! 그녀의 전면으로 신성이 모여들더니 ‘극진’이 펼쳐졌다. 그것으로부터 신성으로 이루어진 빛의 베일이 일어나 그녀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먼저 베일이 성녀의 전신을 부드럽게 감싸고 그 위로 옷의 형태가 둘러진다. 어깨와 등을 드러낸 디자인에, 폭이 커 보이는 치마는 발목까지 덮는다. 면사포가 머리를 감쌌으며, 팔을 휘감은 또 하나의 베일이 선녀옷처럼 나풀거렸다. 뒤이어 유리 구두가 자연스럽게 신겨졌다. 은은하게 빛의 왜곡을 일으키는 이 의상은, 성녀가 환상처럼 물결치는 것같이 보이게끔 만들었다. [아아.] [그라툴라 미 키빌리스!] 모든 성녀의 집행자들이 일제히 경배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 장엄한 모습에 시몬도 숨을 죽인 채 그녀의 외견을 눈에 담았다. 뾰족한 귀와 두툼한 입술, 비정상적으로 긴 팔, 얼굴선은 단단하면서도 곡선미를 이루었고 광대뼈는 높게 솟아 있어 카리스마와 권위가 느껴졌다. 전형적인 대륙의 미와는 달리 조금 이질적이었지만, 그 독특함이 그녀의 존재를 더욱 아름답고 강렬하게 만들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아록을 지배해 온 것을 미루어본다면 나이는 꽤 많겠지만, 역시 성녀는 겉으로 보기엔 전혀 세월이 느껴지지 않았다. 기껏해야 20대 중반 정도의 외견. 또각 또각. 아스페리아가 직접 계단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하얀 계단에 그녀가 발을 디딜 때마다 홍색 잿가루가 뿜어져 나와 공간을 채웠다. “운반자.” 맑은 음성이 좌중을 짓눌렀다. “친히 본녀가 정체를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방금 그 발언은 나 아스페리아의 명예와 성녀의 좌를 부정하는 것으로 들렸어요.” 그 말을 들은 모제와 하미엘이 눈을 크게 뜨고 시몬을 쳐다보았다. “제대로 설명해 주시겠어요?” 스릉! 승! 성녀의 물음이 끝나기 무섭게, 성녀의 집행자들이 뛰어들어 창끝을 시몬에게 겨누었다. 수십 자루의 서늘한 창끝이 시몬의 목 주위 곳곳에 어지럽게 얽혔지만, 시몬은 창끝을 목전에 두고도 태연히 말했다. “저는 성물의 운반자로서, 반드시 수령자 본인의 손에 직접 물건을 전해 드려야만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그의 눈동자가 계단을 내려오는 아스페리아를 비추었다. “저는 제 본분에 충실했을 뿐, 당신이 아스페리아 성녀 본인이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입니다.” [무엄하다!] [성녀님! 이 불경한 자를 갈기갈기 찢어버리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성녀의 집행자들이 격노하며 외쳤다. 계단을 모두 내려온 아스페리아가 손바닥을 펼쳐 집행자들을 제지한 뒤 말했다. “왜 그리 생각했나요?” 그녀의 물음에 시몬은 당당하게 말했다. “직감입니다.” 그 한마디에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특히 성녀의 집행자들은 얼이 빠진 얼굴로 시몬을 바라보았다. ‘미친놈인가?’, ‘목숨이 아깝지 않나?’ 그런 의문들이 모두의 얼굴에 드러났지만, 모제와 하미엘은 의미심장한 시선을 주고받고 있었다. 특히 모제는 확신하고 있었다. ‘이건 성자님의 신호다!’ 시몬이 아스페리아를 부정한다는 건, 지금 저 아스페리아에게 ‘성녀의 정수’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의미. 그녀는 가짜다. 시몬이 그 사실을 알았다고 해도 일단은 넘어갔다가 나중에 설명하는 게 상책이겠지만, 그는 냅다 아스페리아를 부정하며 정면으로 들이받아 버렸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모제의 눈동자에 불똥이 튀었다. ‘이건 다 뒤집어엎자는 의미겠지? 해볼 만해. 성자님과 나 둘이라면 충분히…….’ 모제는 결심한 듯 오른손에 신성을 끌어올렸다. 그때 하미엘이 냅다 달려와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안 됩니다!’ 하미엘은 시몬을 본 지 오래되진 않았지만, 그가 생각 없이 무대포로 일을 저지르는 사람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가 입을 뻐끔거리며 의사를 전달했다. ‘시몬 형제님이라면 뭔가 의도가 있을 거예요! 싸우려는 게 아니에요!’ ‘…….’ 그 말을 들은 모제가 잠시 고민하며 시몬의 등을 바라보았다. 결국 오른손에서 힘을 뺐다. “감이라…….” 아스페리아는 눈썹을 내리깔며 고민에 잠긴 듯 눈을 감았다. “안타깝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 성녀의 좌를 부정하는 것은 심각한 중죄예요. 저자를 감옥에 가두세요.” [예!] 그녀가 등을 돌렸다. “다른 두 운반자들도 아록에서 즉시 추방하도록 하세요. 다시는 아록에 발을 들이지 못하도록.” * * * 쓰르르- 쓰르르르- 아록에 밤이 찾아왔다. 감옥에 갇힌 시몬은 태연한 얼굴로 쇠창살 밖을 보고 있었다. ‘궁전과는 꽤 멀리 떨어진 곳인가 보네.’ 아록에는 죄라는 개념이 없고, 전부 행복한 사람들만 사는 낙원이라 들었다. 그런데 이렇게 버젓이 감옥까지 있다니. 의복이 없는 세계에서 옷을 입은 자들, 주거지가 없는 세계에서 궁전을 지은 자들. 시몬은 이곳 아록이 모순의 결정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 그럼.’ 절그렁. 시몬이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탈출해 볼까.’ 두 손목에는 구속구가, 그리고 오른발에는 사슬이 벽에 연결되어 있었다. 당연히 보통의 구속구는 아니었다. 신성을 차단하는 효과가 깃들어 있었다. ‘마법진을 펼치는 것도 힘드네.’ 마나를 운용할 수는 있지만, 결집시켜 ‘진’을 만드는 게 어려웠다. 시몬이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니 마나의 파장을 흩뜨리는 장치가 붙어 있었다. 아록은 나름대로 철저했다. 하지만 시몬은 배운 게 많았다. 배워둬서 나쁠 건 없다는 가치관하에 흑마법과 백마법의 메인 분야는 물론 온갖 잡다한 기술을 닥치는 대로 습득해 두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대처할 자신이 있었다. 그가 털썩 자리에 앉아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아, 음. 아아.” 목을 몇 차례 가다듬고는 이내 노래를 불렀다. “아- 아아아- 아-” 배에 힘을 준 시몬이 같은 음을 반복해서 냈다. 룬어를 이용한 마법진을 쓰지 않아도 마법적 효과를 낼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샤아아- 샤아아아아- 정령술이다. 정령술은 마법 체계가 제대로 잡히기 전에도 존재했던 고대의 힘. 룬을 쓰지 않고도 전개가 가능하기에 ‘정령마법’이 아닌 ‘정령술’이라고 불리고 있는 것이다. 시몬의 노래에 이끌려 아록에 사는 정령들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감옥의 쇠창살을 통과한 정령들이 호기심에 시몬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었다. ‘노래는 정령을 부르는 매개. 하미엘이 악기를 주력으로 쓰는 이유가 이거였지.’ 마침내 시몬이 눈을 떴을 때 주위에는 오색찬란한 정령들이 꺄르르 웃으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시몬이 정령들에게 말을 걸었다. “여기서 나가고 싶은데 다른 사람들의 눈이 신경 쓰여. 도와줄 수 있을까?” 그 말을 들은 정령들이 꺄륵거리며 주위로 날아올랐다. 우웅! 웅! 정령들이 주위의 벽면이나 창살에 찰싹 달라붙더니 자신의 몸을 마나로 바꾸어 벽처럼 펼쳐 나갔다. 정령들이 스스로 마나의 벽이 되어 감옥의 안과 바깥을 차단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백마법이나 흑마법의 결계의 원초가 된 ‘정령결계’였다. ‘역시 세상에 무의미한 배움은 없지.’ 이제 들킬 염려가 없어졌다. 시몬이 씩 웃으며 눈을 감고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나와라.’ 아록에서 또 하나 간과한 사실은, 이 감옥은 프리스트를 가두기 위한 곳이지 네크로맨서를 가두는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칠흑.’ 쿠구구구구구구! 시몬이 눈을 치켜뜨자, 시몬의 몸에서 신성이 사라지고 코어가 박동하기 시작하며 칠흑이 몸 곳곳으로 퍼져 나간다. 어느새 시몬의 몸 곳곳에 검은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마투기의 비기인 ‘칠흑 체내 분화’를 뛰어넘은 ‘칠흑 체내 격화’였다. “하압!” 빠각! 격렬한 소리와 함께 구속구가 박살 나며 바닥에 떨어졌다. 팔이 자유롭게 된 시몬이 손목을 가볍게 돌리며 스트레칭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 목 아래 문신에 손을 댔다. 이 문신도 네프티스가 준 초대형 아공간을 여는 열쇠였다. “일할 시간이야.” 우우우웅! 아공간이 열리고, 평범한 좀비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시몬은 그 좀비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반지를 뽑은 뒤 자신의 손가락에 끼웠다. “도와줘, 프린스.” 그리고 반지를 시몬의 칠흑으로 활성화한 뒤, 좀비의 머리에 올리자. 콰르르르릉! 창살 안으로 검은 번개가 날아와 좀비의 몸에 꽂혔다. 이내 벽에 나뒹군 좀비의 형태가 변화하며 도련님 같은 옷차림에 왕관을 쓴 어린 좀비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아이, 뭐야.] 7군단의 에이션트 언데드, 좀비 왕자 프린스가 귀찮은 얼굴로 머리를 박박 긁었다. 성역 아록에 에이션트 언데드가 강림한 역사상 첫 순간이었다. [야, 시몬! 코랄 리치 재료 모으는 중이었는데 막 부르면 어떻게 해!] “미안, 미안. 몇 분이면 돼.” 시몬이 그렇게 말하며 앞의 쇠창살과 다리의 사슬을 가리켰다. “이것들 좀 끊어줄래?” [그 정도야 뭐.] 꽈득! 빠직! 프린스는 어렵지 않게 맨손으로 쇠창살을 박살 내고, 사슬을 끊어주었다. 그러나 정령들이 슬슬 힘에 부치는지 결계가 흔들리고 있었다. 시몬은 프린스와 가볍게 핸드 세이크를 마친 뒤 그를 돌려보내고, 좀비도 회수했다. 그리고 즉시 칠흑을 갈무리하고 프리스트로 돌아왔다. 타이밍 좋게 정령들의 힘이 떨어지며 결계가 해제되었다. 잠깐의 소란 끝에 드러난 건 박살 난 감옥과, 바닥에 나뒹구는 구속구, 그리고 자유의 몸이 된 시몬이었다. 시몬은 마지막으로 신성을 일으켜 주위의 칠흑 흔적을 정화하는 것으로 뒤처리도 말끔히 끝냈다. ‘자, 가볼까.’ 시몬이 손목을 빙빙 돌리며 밖으로 나왔다. ‘진짜 아스페리아를 찾으러!’ * * * 시몬이 예상하기에, 자신의 탈옥 사실이 밝혀지는 건 식사가 오는 다음 날 아침이었다. 즉, 다음 날 아침이 오기 전에 아록의 비밀을 알아내고, 진짜 아스페리아의 위치까지 파악해야만 했다. 아마 저 가짜 아스페리아의 호감을 사서 궁에 머문다고 해도, 그녀의 감시 때문에 자유롭게 돌아다니지는 못했을 터. 여기서는 감옥에 갇힌 뒤 탈출하는 게 최선의 판단이었다. 하하하! 오호호호! 밤에도 여전히 아록은 시끌벅적했다. 벌거벗은 사람들이 행복에 취한 듯 끊임없이 웃음소리를 토해내고, 풀밭에 아무렇게나 엎어져 잠들거나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배가 고프면 나무 열매를 따 먹고, 잠이 오면 그저 잠들기만 하면 되는 동물 같은 삶. 그저 행복에 취해 웃는 사람들. 시몬은 기괴하다고 생각했다. ‘일단 정보 조사부터 해보자.’ 시몬은 가장 가까운 아록의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알몸인 그들은 부끄러움이란 감정이 없는지, 얼굴을 환하게 편 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저, 실례합니다.” 시몬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세 아록인이 시몬의 말을 듣고는 고개를 돌리더니, 갑자기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실례? 실례합니다라니! 하하하하!” “오호호호호! 말씀이 너무 재미있어요! 행복해요!” 그냥 한마디 건넸을 뿐인데 배를 잡고 웃어대고 있다. 삐질 땀을 흘린 시몬이 말을 이었다. “혹시-” 아하하하하하! “아스페리아 님이-” 깔깔깔깔! “어디 계신지 알고 계신가요?” 그들은 집중력이 전무했다. 시몬의 말에 반응조차 하지 못하고 서로 껴안은 채 풀밭을 나뒹굴었다. 웃다 지쳐 학학거리다가 행복에 겨운 얼굴로 잠들어 버리는 사람도 있었다. 행복한 사람들이라기보다는, 그 외의 모든 감정이 거세되고 행복만 남은 사람들 같았다. ‘이걸 보고도 아록에 오고 싶다고 말하고 싶을까요? 아리우스.’ 더 대화가 통하기 힘들다고 생각한 시몬은 고개를 돌려 주위를 돌아보았다. 아하하하하하하! 곳곳에서 불을 피우고 시끌벅적하게 노는 아록인들이 보였다. 다들 행복에 겨운 얼굴로 과일을 먹고, 입을 맞추고, 웃었다. 유의미한 교류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앞사람이 웃으면 따라 웃고, 옆 사람이 누우면 같이 누워 무의미한 대화를 반복한다. 행복을 누리기 위해, 그 외에 인간이 해야 할 복잡한 감정이나 행동들이 사라진 것이다. 시몬은 이번 현장 조사가 생각보다 어려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 그런데 모두가 어울려 놀고 있는 가운데, 저 멀리 유독 혼자 동떨어진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중년 정도의 연령으로 보이는 그는 나무에 등을 기댄 채 쪼그려 앉아 멍하니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행복해 보이지 않아.’ 다른 아록 사람들과는 달리, 그는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옷을 입었어!’ 그는 하반신을 나뭇잎 같은 것으로 덮고 있었다. 시몬이 그쪽으로 다가갔다. “실례합니다.” 시몬의 목소리에 남자는 흠칫 놀라며 경계하는 눈빛을 보냈다. 다른 아록인들처럼 웃기만 하는 게 아니라, 처음으로 낯선 타인에 대한 정상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말씀 좀 묻고 싶습니다.” “하, 하하하하!” 갑자기 대뜸 그가 웃음소리를 크게 내질렀다. “말씀! 하, 하! 하하, 하하! 아, 행복하다!” 딱 봐도 연기톤. 시몬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을 걸었다. “저는 아록 사람이 아닙니다. 아록 밖의 속세에서 왔어요.” “!!!” 그 한마디에. 남자의 표정이 180도 돌변했다. “저, 정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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