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1292화 다들 술에 취해서인지 좀처럼 대화가 이어지질 않는다. 시몬은 특히 앞에서 펑펑 우는 알리라 헌트가 가장 부담스러웠다. “나는 정말로 유리가 나쁜 짓을 한 줄 알았어! 모두가 나쁘다고 말하니까 그냥 그런가 보다 덥석 믿었던 거야! 그러다…… 이번에 함장 시험에서 유리가 잘나가니까 다들 눈치를 슬슬 보더라구.” 알리라 헌트가 울먹울먹하면서 눈꼬리를 슥슥 훔쳤다. “내 친구들이 그런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게 맘에 들지 않아서 더 뭐라고 했어! 그런데 이게 다 백작 부인의 음모였고 내가 거기에 가담했다니!” “……그렇게 따지면 제가 더 최악입니다.” 배질 포트시가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며 자책의 말을 꺼냈다. “유리 경이 그런 짓을 저지를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비난이 옮겨오는 게 두려워 손가락질했습니다. 성인이 된 지금에도 구질구질하게 굴었던 건, 로잘린 영애와 약혼하면서 제가 열등감을 느꼈기 때문이겠죠.” “……아니, 내가 제일 최악이야.” 꿀떡 꿀떡. 술잔을 모두 비운 마일러가 휘청거리며 벽에 몸을 기대었다. “나쁜 소문에 시달리는 걸로도 힘들었을 텐데, 나는 유리에게 냉정한 말밖에 하지 못했어. 미래의 변경백이 될 남자가 고작 그 정도로 힘들어하냐고. 그 소문이 진실이 아니라면 상대 영애와 서로 죽고 죽일 기세로 여론전을 펼쳐야 한다고. 그런 노력도 하지 않으면 괴로움이 계속될 거라고……. 결국 난 유리에게 어떤 위로도 건네지 않았던 거야.” 엉엉! 크흡! 모두가 후회와 자책에 빠져 괴로워하는 광경을 보며, 시몬이 삐질 땀을 흘렸다. ‘갑자기 왜 고해성사 분위기?’ “미안해요. 제가 적당히 마시도록 막았어야 했는데.” 크리스티나가 민망한 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시몬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아까 크리스티나 님이 한 말씀, 결심했다는 건 무슨 의미인가요?” “다 같이 유리에게 찾아가서 용서를 빌 거예요.” 그녀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의 명예를 회복하고, 그가 진정한 변경백으로서 바로 설 수 있도록 도울 거예요. 물론 그가 원한다면요.” “백작 부인에게도 대가를 치르게 해야지!” 알리라 헌트가 꽥 외치며 끼어들었다. 크리스티나가 ‘그래’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모든 건 명백히 우리의 잘못이에요. 하지만 백작 부인이 에스텔라 살롱을 이간질해서 우리를 갈라놓은 대가는-” 순간 그녀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셀린 가문의 그것이었다. “톡톡히 치르게 하겠어요.” 시몬이 가만히 그 이야기들을 듣고 있는 가운데, 손 하나가 올라갔다. “그 전에 우리가 다 같이 가서 유리에게 사과하는 부분 말인데.” 바로 마일러였다. “우르르 몰려가면 유리에게 부담이 될 거라고 생각해.” 그 말을 들은 알리라 헌트가 의외란 표정을 지었다. “뭐야, 마일러. 뭔가 달라졌네? 예전이면 유리의 부담 같은 건 생각지도 않고 노력 부족 같은 소리나 했을 텐데.” “…….” 마일러가 씁쓸하게 웃었다. -왜 이 정도도, 못 하지? 어떻게 잊겠는가. 자신은 평생을 노력해도 도달하지 못할 경지에 닿은 자가 그렇게 말했을 때, 마일러는 지금까지 무신경하게 내뱉었던 모든 말들이 화살이 되어 돌아와 가슴에 꽂힌 기분을 느꼈다. “우리는 우리의 진심을 전할 뿐이지, 용서를 구걸하거나 강요해서는 안 되니까. 용서를 받아주는 건 유리가 선택할 일이야.” 시몬이 미소 지었다. ‘사람이 바뀌었네.’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는 말도 있지만, 마일러 같은 인간은 예외란 생각이 들었다. “자, 그럼 내가 먼저 유리를 만날게.” 크리스티나 셀린이 말했다. “이 중에서 가장 유리를 힘들게 한 건 전 약혼자인 나야. 내가 유리를 찾아가서 용서를 빌고, 유리가 우리 모두를 만날 준비가 되면 그때 너희들을 부를게.” “그게 좋겠다.” 일행들이 동의했다. 크리스티나도 시몬을 돌아보며 말했다. “도와주실 거죠? 군단장님.” “당연하죠.” 시몬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유리 경이 협조해 주지 않았더라면 저도 이 자리까지 오지 못했을 테니까요. 유리 경은 제 은인이기도 합니다.” 오- 모두가 살짝 감탄한 얼굴로 시몬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작게 속닥거렸다. “배신의 군단장. 무서운 사람인 줄 알았는데, 상냥하셔.” “키젠 3학년이면 우리보다 7~8살쯤 연하인 거지? 우리보다 어른스럽네.” “으윽! 내가 딱 다섯 살만 더 어렸으면 도전해 보는 건데!” 알리라 헌트의 마지막 말은 조금 섬뜩했던 시몬이 어깨를 떨었다. “다들 잘 즐기고 있나!” 그때 부제독 아그라가 목제 의족을 움직여 저벅저벅 걸어왔다. 술기운이 깬 신규 함장들이 일제히 경례 자세를 취했으나, 아그라는 웃으며 손을 저었다. “됐어 됐어! 사적인 자리에서 난리 칠 필요 없고.” 짝. 그녀가 두 손을 맞부딪히며 미소 지었다. “미스테리 킬 작전은 공식적으로 종료됐다. 너희도 선단에 남을지, 해상 지휘권을 보유한 채 각자의 영지로 돌아갈지 고민해 봐라! 나야 유능한 너희가 계속 남아 있으면 좋겠지만 말이야.” 잠시 그녀가 시몬을 보며 못 먹는 떡 쳐다보듯 입맛을 다셨다. 시몬은 두 차례 섬뜩한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너희가 영지로 돌아간 뒤에 해상 금지령은 큰 폭으로 완화되지 않을까 싶다.” 그녀가 시몬과 롤랜드가 가져온 서류를 툭툭 두들겼다. “제독께서 3군단의 감시체계를 풀고 항해에 대한 제한을 대폭 완화하기로 하셨다. 물론, 군사권에는 예외가 없다. 너희가 가진 해상 지휘권은 더더욱 가치가 높아지겠지.” 모두가 들뜬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며 기뻐했다. “그리고 시몬.” “넵.” “바다의 자유니, 제한 완화니 하면서 은근히 3군단의 영역인 바다에 7군단이 활동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만들어놨던데 말이다.” 시몬이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안 들킬 줄 알았는데.’ 그녀가 어깨를 으쓱했다. “나뿐만 아니라 제독께서도 꿰뚫어 보셨지. 그럼에도 제독께서는 7군단의 항해를 공식적으로 허가하기로 하셨다.” “정말입니까?” 시몬이 벌떡 일어났다. “그래, 3군단의 핵심 영역을 침범하는 게 아니라면, 근거지의 영역화도 허가하기로 했다.” “마, 많이 퍼주시네요. 괜찮은 건가요?” 아무리 언노운을 잡는 공을 세웠다지만 이건 엄청난 파격이었다. “뱃사람들은 눈으로 본 것만 믿는다. 알지?” 그녀가 씩 웃었다. “7군단은 바다에 우호적이며, 우리와 함께 목숨을 걸고 싸워주었다. 그 사실을 모두가 봤는데 더 이야기가 필요한가?” “그럼 그럼!” “우리는 이제 친구지!” 뒤에서 술을 즐기던 3군단 선원들이 떠들썩하게 외쳤다. 특히 바다에서 잔뼈 굵은 함장들도 모두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앞으로 육지에서 어떤 소문이 돌건, 육지 놈들이 너를 어떤 위기에 빠뜨리고 모함하건, 우리는 우리 눈으로 본 것만 기억할 것이다!” 아그라가 잔을 들어 올렸다. 다른 선원들도 일제히 잔을 세웠다. “어떤 경우에서도 바다는 너희의 편이다. 시몬 폴렌티아!” “시몬 폴렌티아를 위하여!” 건배! 모두가 잔을 부딪히며 왁자지껄하게 웃었다. 시몬도 근처의 사람들과 잔을 맞부딪힌 뒤 활짝 미소 지었다. 역시 이곳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단하세요 군단장님. 뱃사람들의 인정을 받으셨네요.” 그때 오드레시아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시몬도 반갑게 맞이했다. “아, 오드레시아. 제독과 이야기는 잘했어?” “네! 아버지와 이렇게 오래 이야기해 본 건 처음이에요!” 그녀가 수줍게 웃으며 얼굴을 발갛게 물들였다. “앞으로도 바다에서 활동하는 걸 허락해 주셨어요! 차후에는 3군단 선단에서 일을 배워보라고 제안해 주셨구요!” “다행이다.” 제독도 직위의 특성상 언제 목숨이 왔다 갔다 할지 모르는 인물. 슬슬 후계자가 될 만한 인물을 마련해 놔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오드레시아가 미래의 3군단장이 되어준다면, 시몬은 무조건 찬성이었다. “앞으로 저도 아버지와의 사이가 더 가까워질 수 있도록 노력하……!” 그녀가 그렇게 말하는데 갑자기 왁자지껄한 웃음소리와 고함이 터져 나왔다. “제독께서 또 여자 꼬신다!” “이번에는 대장장이집 딸이냐!” 휘이이익! 곳곳에서 환호성과 휘파람 소리가 들린다. 오드레시아는 웃고 있었지만 얼굴에 그늘이 졌다. “그 말은 취소예요. 조금 거리를 둬야겠어요.” 시몬이 웃음을 터뜨렸다. 바뀌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절대 바뀌지 않는 사람도 있는 법이었다. * * * 미스테리 킬 작전이 종료됐다. 유리 미그일을 찾아가는 건 조금 미뤄졌다. 랭거스틴 어딘가에 있을 유리의 소재를 찾아내는 게 우선이었으니까. 로크섬과 랭거스틴은 가까웠기에, 시몬은 학교에서 머물다가 유리를 찾아내는 즉시 랭거스틴으로 넘어갈 생각이었다. 그렇게 시몬은 바다에서의 생활을 마무리한 뒤, 텔레포트 마법진을 타고 키젠의 로크섬으로 복귀했다. ‘드디어 학교다!’ 시몬이 기지개를 쭈욱 켜며 소환학과 기숙사로 걸어가고 있었다. 짐을 정리한 뒤, 학과에 가서 복귀신고를 마치고 취업평가 완료 서류를 제출해야 했다. ‘이제 진짜 이번 학기도 얼마 남지 않았구나.’ 3학년 1학기의 끝이 보인다. 1학기가 끝나고 방학을 보낸 뒤 그다음은 키젠에서의 마지막. 3학년 2학기가 기다리고 있다. 시몬이 뒤숭숭한 기분을 느끼며 기숙사 앞마당에 들어오는데. 쿠쿠쿠쿵! 콰쾅! 곳곳에서 온갖 폭발음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뭐, 뭐야?” 시몬이 얼른 소리가 난 곳으로 달려가 보았다. 공룡을 연상케하는 거대한 언데드 뼈대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제길 또 실패야!” “이대로는 졸업은커녕 3학년 1학기도 못 넘길 거야!” 곳곳에서 동기들이 자리에 주저앉아 머리를 부여잡거나 절망하고 있었다. 똑딱 똑딱! 끼기기기긱! 작업복 차림의 소환학과 학생들이 온갖 장비들로 언데드를 다듬고 제어하고 있었다. 다시 곳곳에서 퍼엉! 하고 폭발음이 들렸다. “이게 다 무슨…….” “아, 조장!” 소환학과의 분위기 메이커, 에슈 아르젤이 휙휙 손을 흔들었다. 작업헬멧 같은 것을 벗어서 테이블에 내려놓은 그녀가 한걸음에 달려왔다. “어서 와! 무사히 복귀했구나!” “안녕, 에슈. 그런데 지금 이게 다 뭐야?” “뭐긴.” 그녀가 퀭한 표정으로 팔을 늘어뜨렸다. “졸업 논문 준비야.” 전쟁터를 방불케 할 만큼 치열했다. 다들 시몬을 반길 여유도 없는지 온갖 작품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시몬이 옆머리를 긁적였다. “논문은 그냥 우리가 연구한 내용을 문서로 쓰면 되는 거 아닌가?” “잘 모르는 소리!” 그녀가 샥 하고 검지를 세웠다. “소환학과는 단순 졸업 논문만으로는 통과하기 힘들어! 논문을 기반으로 졸업 작품 하나 정도는 갖춰두는 게 안전해!” “그렇구나.” “조장은 꽤 여유로워 보이는데?” “그야 완성했으니까.” 그녀가 부러움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시, 실례가 안 된다면 주제가 뭔지 물어봐도 될까? 겹치면 안 되는데……!” 시몬이 씩 웃었다. “신에너지 코랄을 이용한 특수 언데드.” “어, 엉?” 대륙인들 그 누구와도 겹칠 수 없는 논문 내용이었다.
Please login to track progr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