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1280화 저벅저벅. 시몬은 로잘린의 앞에서 통화하지 않고 조금 더 걸었다. 근처의 인적 없는 한적한 숲. 그곳으로 들어온 뒤 주위에 기척이 있는지 마지막으로 확인하고는 입을 열었다. “예. 통화 받았습니다.” -네놈은 누구냐. 덤덤한 듯하면서도 살벌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유리가 함장 시험에 합격하고 자기 함대를 꾸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시몬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약간의 반발감이 치고 올랐다가, 이내 감정을 갈무리하며 말했다. “키젠의 학생회장 시몬 폴렌티아라고 합니다. 백작님께서 예상하셨다시피 임무 중입니다.” 시몬은 변경백에게 모든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함장 자격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 중에 유일하게 협조해 준 유리 미그일. 바다에 일어난 이상현상. 그리고 그 이상현상을 해결하기 위한 임무가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사실까지. 상황을 들은 변경백은 화를 낼 법도 했지만, 의외로 그런 기색은 없었다. -그럴 줄 알았다. 유리 그놈이 그러면 그렇지. 변경백의 음성에는 분노보다는 자기 아들에 대한 한심함만이 느껴졌다. 마치 이런 결과를 이미 예상한 듯한 무미건조한 반응이었다. 시몬이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전혀 아드님을 믿지 못하시는군요, 백작님.” -자네도 만나봤을 텐데. “그렇다면 왜 유리 경을 함장 시험에 보내려 하셨습니까? 이곳엔 아드님의 절망이라 할 수 있는 에스텔라 살롱 인물들이 가득하다는 걸 뻔히 알고 계셨으면서요.” 대답은 바로 들려오지 않았고, 시몬이 힘주어 말했다. “아드님은 백작님을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놈 분장을 했다고 해서 내 아들에게 감정을 이입하기라도 하는 건가? 프로답지 못하군. 그의 음성에 노기가 실렸다. -이건 부자지간의 문제다. 개인적인 호기심이라면 묻어두고 그 임무에나 집중하지. 촤락. 시몬이 아공간에서 꺼낸 가방에서 서류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유리 경의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셨네요. 그리고 4년 뒤, 새어머니가 변경백 가문에 들어왔고, 새로운 아들을 낳았군요. 유리 경에겐 동생이겠네요.” -내 뒷조사를 했나. 딱히 분노가 느껴지는 음성은 아니었다. 그 정도야 카쟌의 도둑길드의 정보력을 쓸 필요도 없이, 귀족 사회에 충분히 퍼져 있는 소문이었을 테니까. 하지만 이어지는 내용은 달랐다. “둘째 아드님이 아주 총명하신 모양입니다.” 시몬이 뒤에 있는 나무에 등을 기댄 채 말을 이었다. “반면 유리 경은 과거의 트라우마에 시달린 채 방황하고 있구요. 후계에 대한 고민이 크실 것 같습니다.” -……네놈이 학생이 아니었다면, 아무리 군단장이라도 내정간섭을 시도한 대가를 치렀을 것이다. 그의 목소리에 노기가 섞였으나, 경험 많은 시몬이 그 정도에 물러날 깡은 아니었다. 시몬이 다음 장을 넘겼다. “후계는 가주의 단독 결정에 따라 정해지지만, 한번 정해진 후계를 바꾸는 건 쉽지 않죠. 집안 문제를 넘어서 한 지방의 운명이 달린 나라의 중대사니까요.” 이건 2학년 시절 키젠의 제왕학 시간에 배웠던 내용이었다. 새삼 이 세상에 무의미한 공부는 없다고 생각하며, 시몬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후계가 바뀌려면 아주 중대한 결격 사유가 있어야 할 겁니다. 그렇게 본다면 유리 경은…… 사교계에 소문이 좋지 않다는 것뿐이지 사실 결격 사유랄 게 없습니다. 지금 반항하는 것도 집을 나가서 그냥 떠돌아다니는 정도니까요.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결국 유리 경은 변경백 자리에 앉게 되겠네요.” 시몬이 입꼬리를 올렸다. “누군가는 그런 일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잠깐 정적이 흘렀다. 시몬은 변경백이 분노를 억누르고 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시몬은 태연히 그의 다음 대답을 기다렸다. -네놈이 어떤 추잡한 상상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아들들을 차별하지 않는다. “막아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이 백작님이라고는 안 했는데요.” 시몬이 서류의 마지막 장을 펼치며 말을 이었다. “유리 경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새로이 안주인 자리에 오르신 백작 부인.” -! 시몬의 의미심장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단히 능력 있는 분인 것 같습니다.” 때는 유리를 파탄으로 몰고 갔던 사건으로 돌아간다. -카르민시아 가문의 여식을 글쎄……. -그렇게 어린 영애의 몸에 손을 대다니! 인간쓰레기야! 유리 미그일의 몰락의 시작이었던 카르민시아 가문의 여식의 추행 미수건. 이 사건에 대해서는 이상할 만큼 수사 기록이 없었다. 그런데. “그런데 한 가지 인상적인 정보를 들었습니다. 피해 당사자인 카르민시아 가문과 백작 부인의 외가 가문이 아주 친밀한 사이였더군요.” -……네놈. 변경백의 목소리가 살벌해졌다. -키젠이라고 세상이 우스워 보이나? 말을 신중히 고르는 게 좋을 거다. “충분히 신중히 고르고 있습니다. 그 밖의 여러 정황들.” 사교계에서는 한번 휘말렸다면 매장당할 가능성이 높은, 남녀노소 모두 공분할 만한 귀족의 명예에 관한 의혹들이 짧은 시간에 동시다발적으로 유리에게 일어났다. 이 일들의 수사는 전부 지지부진하게 끌리다 증거불충분으로 종결되었으나 이미 유리의 명예는 사회적으로 말살되었고, 친우들은 등을 돌렸다. 결국 유리는 인간에 대한 믿음은 물론 모든 의욕을 잃어버린 상태가 되었다. “가슴에 손을 얹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시몬이 눈을 감고 말했다. “정말로 다른 사람의 눈이 아닌 자신의 눈으로 아들을 온전히 판단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유리 경을 이번 함장 시험에 보낸 게 순수히 백작님 자신의 판단인지.” -……. 변경백의 미그일 가문은 에스텔라강 인근에 속한 영지이지만, 바다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외곽 영지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벅차고, 워낙 영지의 땅 자체가 풍족해 세력 확장의 필요성도 없으니까. 그런데 왜 유리를 보내야만 했는가. 혹시 누군가, 그 시험에 대해 이야기하고 유리를 보내보자고 부추기지는 않았는가. -……쓸데없는 간섭이라고 했을 텐데. 이건 가문의 일이다. 그렇게 말하는 변경백의 목소리는 붕 떠 있었다. 처음의 살기도 사라져 있었다. 그 또한 뭔가 이상하다는 점을 깨달은 것 같았다. “신기하게도, 제가 와 있는 임무 지역에 사연 있는 아버지와 아들이 많아서요.” 일에 빠져서 가정을 소홀히 하다가 아들이 엇나가고, 뒤늦게 아들을 이해하기 위해 부와 명예를 버린 아버지나. 40명의 아들을 낳기만 하고 아무런 관심도 흥미도 주지 않고 자신의 의무에 얽매여 있는 아버지나. 그리고, 자신의 아들이 모함당했다는 것도 모르고 무능으로 낙인찍고 몰아붙이는 아버지까지. “부디, 좋은 답을 찾길 바라겠습니다.” 시몬은 그렇게 통신을 종료하고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달이 크게 뜬 밤. 벌레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크흐흐! 임무에 협조한 고객에 대한 서비스치고는 꽤 많이 해주는군 소년!] 시몬이 무안한 미소를 흘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제가 직접 유리 경으로서 수모를 당하다 보니까, 확실히 더 감정을 이입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보다 이제 슬슬 작전 시간이다. 유리 문제는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걸 다 했다. 다시금 언노운을 잡기 위해 집중할 때다. * * * 바다에 쭉 열을 지어 있는 수백 척의 배들, 이제 모든 배가 출항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시몬도 서둘러 오늘 함장 회의가 있는 아그라의 본선으로 향하고 있는데. “유리.” 현 약혼자, 로잘린 다르시아가 방긋방긋 손을 흔들며 웃어 보였다. “아버님이 뭐라고 하셔?” “…….” 시몬이 그녀를 가만히 응시했다. 유리의 현 약혼자, 로잘린 다르시아. ‘알 만해.’ 로잘린은 전 약혼자 크리스티나 셀린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다 크리스티나가 보물섬에서 시몬을 만난 뒤로 표정이 편해 보이니, 뭔가 초조해졌으리라. 그래서 변경백에게 직접 연락하는 강수를 두었을 것. 유리가 무서워하는 아버지의 권위를 이용해, 한눈팔지 말고 나만 보라는 뜻을 전달한 것이다. “아버지가 무척 자랑스러워하셨지? 응응?” 시몬은 로잘린에 대한 정보를 떠올렸다. -저 남자 뭐야? -지갑. 약혼자가 보는 앞에서 다른 남자와 팔짱을 끼고 ‘지갑’이라고 답했다. 사실 진지하게 생각해 보면 조금 이상하다. 귀족 사회의 영애에게 있어 남편의 권위는 자신의 권위와 직결되어 있다. 남편의 얼굴에 침을 뱉는 건 자기 자신에게 침을 뱉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왜? -널 받아줄 여자는 나밖에 없어, 유리. 네가 가진 비옥한 영지의 힘으로 내 배를 불리고, 비싼 보석으로 치장하게 하고, 행복하게 해줘. 네 쓰임새는 그것만으로 충분해. 처음엔 변경백의 백작 부인으로서 배부르게 살겠다는 이야기로 들렸다. 하지만 갑자기 다른 단서들과 종합해 보니 문득 소름이 끼쳤다. 네 쓰임새는 그것으로 충분하다라. 결국 그녀는 진심으로 남편으로서 유리를 원하는 게 아니었다. 시몬은 비로소 모든 의문들이 머릿속에서 바로잡히는 것을 느꼈다. “로잘린.” “왜애?” “방금 아버지하고 통화하고 왔는데, 전부 다 알고 계시더라.” “전부? 무슨 말이야?” “나랑 결혼하면-” 로잘린은 아직 시몬의 정체에 대해 크게 의심하지 않고 있다. 시몬이 성큼성큼 걸어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붙잡으며 섬뜩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머님께 얼마나 받기로 했어?” “!!!” 로잘린의 얼굴이 창백하다 못해 하얗게 질린 채 기겁하며 시몬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들어서 놀랐는지 두 손바닥으로 입을 가린 채 동공을 파르르 떨었다. ‘……역시.’ 그녀는 카르민시아의 여식처럼 백작 부인에게 매수된 인물이고, 처음부터 유리와 평생을 같이 살 생각이 없다. 유리를 데릴사위로 들여서 결혼시킨 뒤 ‘다르시아’의 성을 붙이면, 변경백의 후계자 자리는 텅 비게 되고 백작 부인의 둘째 아들이 변경백이 된다. 일종의 경쟁자 제거인 셈이다. 그 대가로 그녀가 백작 부인에게 받는 건 미그일 가문의 막대한 재산 일부이리라. “미안하지만 아버지는 처음부터 꿰뚫어 보고 계셨어. 내 동생을 변경백 자리에 세우려는 게 새어머니의 소행이란 걸.” 시몬이 그녀를 살벌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방금 어깨를 짚을 때 그녀에게 저주를 사용했다. 인간의 감정을 자극하여 사실을 실토하게 만드는 바힐의 정신계 저주인 ‘파테오르’. 마침 그녀의 눈에 불똥이 확 튀었다. “아니, 아니, 아니아니! 나는 그! 그그! 억울해! 난 억울해! 어머님이 아버님과도 이야기가 됐다고 해서! 두 분이 합의한 줄 알고……!” 거기까지 말한 그녀가 제 입을 덥석 막았다. 그녀 또한 네크로맨서는 네크로맨서. 지금 저주의 효과를 감지했겠지만 이미 늦었다. 시몬은 품속의 메모리얼 수정구를 한번 어루만진 뒤 미소 지었다.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 로잘린.” 시몬이 저벅저벅 걸어갔다. 그녀는 털썩 주저앉은 채 일어나지 못했다. * * * 결국 그날 밤 로잘린은 함대에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엄연히 3군단 선단의 함장이었고, 이는 군사작전을 앞둔 탈영이기에 한바탕 난리가 났다. -고거 고거, 쓸데없이 머리 굴리는 게 마음에 안 들었는데 그럴 줄 알았다. 부제독 아그라는 하는 수 없다며 자신이 로잘린의 함대까지 호위선으로 삼고 직접 지휘하기로 했다. 중요한 작전을 앞둔 지금은 찬물 더운물 가릴 때가 아니었으니까. -뭔가 아는 거 있어? 마일러가 시몬에게 그렇게 물었지만, 시몬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마일러는 땀을 뻘뻘 흘리며 이곳저곳 수소문을 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녀를 찾을 시간은 없고, 작전 시간은 다가왔다. -출항한다! 뿌우우우우우우우! 거대한 뱃고동 소리와 함께 수백 척의 함대가 항구에서 나아가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시몬도 검은 함대의 본선인 녹티스호에 복귀해서 이 광경을 보고 있었다. “음.” 배들이 일정 거리를 두고 질서 정연하게 나아가고 있다. 조금이라도 방심하거나 한눈팔면 배들끼리 부딪치거나 할 수도 있었지만 모두가 하나가 되어 나아갔다. 그만큼 훈련이 잘되어 있는 것이다. ‘드디어 시작이구나.’ 그때 함장들의 전용 통신 수정구에서부터 아그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 함장은 들어라. 현 상황에 대해 브리핑을 시작하겠다. 현재 어촌 앞바다까지 올라와 들끓던 다수의 해양 몬스터들이 갑자기 종적을 감추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3군단에서는 그 몬스터들의 움직임을 확인했고, 이내 그들이 ‘한 장소’에 집결하는 것을 파악했다. -그래, 그 장소는 우리의 작전지역. 그녀가 목소리를 높였다. -언노운의 출몰 예상지점이다. 언노운은 이성이 있고, 심지어 전술의 개념을 이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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