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1257화 시몬은 우선 스카우터 롤랜드와 함께 배를 한 척 타고 이동했다. 어디에 가나 했더니, 로크섬 바로 앞에 있는 대도시 랭거스틴이었다. 그곳에서 시몬은 한 귀족 후계자와 약속을 잡았다. “변경백의 후계자요?” 커피를 마시며 롤랜드의 설명을 듣던 시몬이 그만 놀라서 커피를 흘리고 말았다. “그렇습니다. 드레스덴 왕국의 미그일 백작이라고 들어보셨는지요.” “네, 본 적은 없지만 소문 정도는…….” 드레스덴 왕국의 변경백, 미그일 백작. 왕국의 변경(邊境)을 지키는 의무를 다하는 대신 강력한 군사권을 쥔 자들. 변경백들이 어지간한 후작이나 공작 못지않은 권세를 누리고 있는 건 시몬도 잘 알고 있었다. 북부대공으로 이름 높은 아르스칼트 가문도 먼 과거엔 변경백으로 시작했으니까. 특히 미그일 백작은 몬스터와 외적을 완벽하게 물리친 건 물론, 변경의 영지를 극도로 부유하고 부강하게 만든 것으로 유명했다. 드레스덴 왕국에서 언젠가 미그일 백작이 독립을 선언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하지만 시몬이 놀란 점은 다른 부분에 있었다. “왜 변경백의 아들이나 되는 사람이 중요한 시험을 저한테 양보한다는 건데요?” 미그일 백작의 입장에서도 암흑연합의 해상 지휘권은 너무나 가지고 싶은 떡일 터. 그래서 아들을 직접 보냈겠지만, 아들은 너무나 순순히 시험을 포기하고 시몬에게 협조하려 하고 있었다. “아, 그게…….” 땀을 삐질 흘리며 손수건으로 머리를 닦던 롤랜드가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조금 특이하신 분이라…….” “저기요.” 시몬과 롤랜드가 얼른 고개를 돌렸다. 나른하다 못해 귀찮음마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키젠에서 오셨단 분들 맞죠?” 시몬과 롤랜드가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몬은 얼른 그의 얼굴을 살폈다. 진한 흑발에 갈색이 일부 섞인 듯한 머리카락, 오랜 시간 손질하지 않은 탓에 머리카락은 뭉치고 기름기로 번들거렸으며, 콧등과 턱 밑은 수염이 지저분하게 자라나 있었다. 목이 다 늘어나고 검은 얼룩이 가득한 셔츠를 입었고, 바지는 바닥에 끌렸는지 끝부분에 흙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옷의 겨드랑이 쪽에는 불쾌한 냄새가 났다. ‘이 사람이 변경백의 아들……!’ “유리 미그일입니다.” 그가 피곤한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한 뒤 먼저 털썩 자리에 앉았다. 스카우터 롤랜드가 얼른 입을 열었다. “어서 오십시오 유리 경! 저는 말씀드린 키젠의 임무를 받아 일하고 있는 롤랜드입니다! 그리고 여기 있는 분이 시몬 폴렌티아 학생회장님이십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유리 경!” 그래도 도움을 주러 온 사람 아닌가. 시몬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고, 유리는 앉은 채로 그 손을 붙잡아 악수했다. 무례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 사람에게는 지독한 피로와 무기력함만 느껴질 뿐. 동물이 예의를 차리지 않는다고 화가 나지 않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어, 시몬 폴렌티아? 어디선가 들어봤어요.” 유리가 멍하니 말을 이었다. “어디서 들었더라.” “…….” 스카우터 롤랜드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굳어졌다. 어디 시골의 나이 든 농부면 모를까, 젊은 귀족이 제7군단장이자 룬 리그의 영웅을 모른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그래도 롤랜드가 시몬을 떠올린다면 분위기 환기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기에, 얼른 힌트를 주었다. “룬 리그에 참여하신 분입니다!” “그게 뭐예요?” 롤랜드는 할 말을 잊고 말았다. 시몬이 웃는 얼굴로 롤랜드에게 이제 앉자는 신호를 보낸 뒤 자신도 자리에 앉았다. “뭔가 결례를 범한 느낌인데 미안합니다. 내가 계속 방에 처박혀 사는지라.” 흐아음- 입을 크게 벌리며 하품을 한 유리가 쩝쩝거리며 눈에 눈곱을 뗐다.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변경백 가문의 품격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모습.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서 죄송스럽지만.” 시몬이 두 손을 깍지 끼며 말을 이었다. “함장 자격시험을 치를 권한을 왜 저희 키젠에 양보하겠다는 건가요? 만약 제가 가짜 신분으로 시험에 통과해도 미그일 가문에는 도움이 되지 않을 겁니다.” “그 시험, 아빠가 시킨 거예요.” 유리가 의자에 축 늘어지며 말했다. “어차피 합격하지도 못할 거 아빠도 알면서, 그냥 내가 개고생하고 굴욕당하는 걸 원하는 거겠죠.” ‘굴욕?’ “그럴 바에 연방을 위해 일하는 분들에게 협조해야겠다고 생각한 겁니다. 나는 고생을 피하고, 키젠은 임무를 수행하고. 둘 다 이득 아닙니까.” 그건 그렇긴 했다. “단, 조건은 있습니다.” 유리가 검지를 쓱 세웠다. “나중에 키젠에서 아버지한테 잘 말해줘요. 내가 연락해 봐야 욕만 먹을 테니까요.” 시몬은 잠시 생각한 뒤 웃는 얼굴로 말했다. “좋습니다.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게 변경백 아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뒤 헤어졌다. 시몬과 롤랜드는 유리가 피곤한 걸음걸이로 사람들 틈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본 뒤 시선을 마주했다. “죄, 죄송합니다. 유리 경 외에는 아무래도 임무 협조를 구하기 어려워서…….” “중요한 시험이니까요. 그래도 이렇게 사람을 구해주신 게 어디에요.” 롤랜드가 제 이마를 꾹꾹 누르며 한숨을 푸욱 쉬었다. “요즘 랭거스틴 같은 대도시에 저렇게 무기력감에 빠져 일하지 않는 젊은이들이 부쩍 급증하고 있다니 참으로 걱정입니다. 우리 아들도 사실…….” ‘개인 가정사를 물어보진 않았는데요.’ 그렇게 롤랜드의 아들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는데, 롤랜드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말했다. “참! 말이 나온 김에 그거 하셔야 합니다.” “그거요?” 롤랜드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분장입니다.” 이번 함장 자격시험은 가짜 신분으로 참여한다. 임무를 수행하기 전에, 만약 시험 단계에서 가짜 신분이 들통나 버리면 당연히 주최 측에서 탈락시켜 버릴 게 뻔하기 때문에 시몬은 유리 미그일을 완벽하게 연기할 필요가 있었다. 시험 전에 롤랜드가 유리 본인을 직접 만나게 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바로 분장 작업에 들어갔다. 다행히 이곳 랭거스틴은 대륙에서 손꼽히는 대도시인 만큼 온갖 특이한 재료들도 구할 수 있었다. 본래는 에르제베트의 거미줄을 뒤집어쓰면 한 방에 변신이 끝나지만, 바닷물에 들어가면 거미줄은 녹아버리니 문제가 생길 우려가 있었다. 알라제의 단백질 얼굴도, 결국은 언데드 기반이라 바닷물이 문제가 될 수 있었기에 이번만큼은 수작업이 필요했다. 시몬은 잡화상과 도둑길드, 연극 분장실, 뒷골목 등을 들렀고 점점 완성되어 갔다. “오오오, 그럴듯합니다!” 분장을 거의 완료했다. 은퇴한 마법사로부터 흑색 머리로 염색한 뒤, 잡화상에서 산 가짜 콧수염과 턱수염을 붙이고 다시 지저분하게 깎아서 듬성듬성한 느낌으로 만들었다. 거기에 분장실의 아티스트에게 요청해 물에 지워지지 않는 재료로 디테일을 살렸다. 마지막으로 유리가 착용한 것과 거의 비슷한 사각 안경을 썼다. “이런 느낌인가요?” 시몬은 자신의 동기 중 한 명인 피츠제럴드를 떠올리며, 안경을 고쳐 쓰는 시늉을 했다. 롤랜드가 고개를 저었다. “너무 지적인 느낌입니다. 유리 경답지 않아요.” “음, 그러면.” 흐흠- 흠- 크흠- 음! 시몬이 몇 차례 목을 푼 뒤에, 표정을 싹 바꾸었다. 눈에 힘을 빼고, 무기력하게 팔을 늘어뜨리고, 느릿느릿한 톤으로 말했다. “어차피 합격하지도 못할 거 아빠도 알면서.” 롤랜드는 소름이 쭉 돋는 것을 느끼며 제 어깨를 폭 감쌌다. “그냥 가서 내가 개고생하고 굴욕당하는 걸 원하는 거겠죠.” 롤랜드가 멍하니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시몬이 표정을 풀고는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잘 안 되네요.” “너무나 대단하십니다! 학생회장님! 이런 분장이나 연기에 능하시군요!” 멋쩍어진 시몬이 고개를 돌리며 옆머리를 긁적거렸다. “여러 임무로 이제 익숙하거든요.” 원래부터 잘한 게 아니라, 노력과 경험의 결과였다. 어쨌거나 시몬과 롤랜드는 랭거스틴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연기를 계속해 보았다. 진짜 유리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라는 등 롤랜드로부터 피드백을 계속 받았다. “다 좋습니다만.” 롤랜드가 땀을 삐질 흘리며 시몬을 바라보았다. 시몬이 만사 피곤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해 보였다. “학생회장님의 그 눈빛 말입니다.” “네?” “그것 때문에 괴리감이 일어난다고나 할까요. 무력감에 찌든 사람이 아니라 묘하게 참…… 으음……. 총명한 느낌인지라.” 시몬이 머리를 긁적였다. “잘 모르겠지만, 최대한 눈에 힘 빼고 해볼게요.” 시몬이 눈을 흐리멍덩하게 떴지만, 롤랜드는 역시나 괴리감을 피할 수 없었다. 왜 저런 힘없어하는 모습까지 근사한 느낌으로 보일까. 내 고객이라 콩깍지가 씌었거나, 혹은 정체를 알고 있으니까 그렇게 보이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롤랜드는 말을 아꼈다. “그리고 이건 유리 경의 인간관계를 정리한 파일입니다.” 롤랜드가 파일을 넘겼고, 시몬이 그것을 받아 들어 읽었다. “말수가 적은 분이니 사람 간의 접촉은 적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준비했습니다.” 시몬은 빠르게 자료를 팔랑팔랑 넘겼다. 자료를 확인하던 시몬의 얼굴빛이 흐릿해졌다. “스카우터님, 여기 동그라미 친 인물들이 이번 함장 자격시험에 참여할 수도 있는 사람인가요?” “맞습니다. 제가 체크해 뒀습니다.” “상당히 인맥이 방대하네요.” “예! 최근에야 방황하고 있지만, 변경백의 아들분인지라 어린 나이부터 핵심 귀족 사교계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번 함장 자격시험이 가문 간의 자존심 대결 같은 분위기라 아마도 이들이 다수 참여하지 않을까…….” 자료를 확인할수록 시몬의 얼굴빛이 흐릿해졌다가, 급기야는 안타까운 듯한 표정이 되었다. ‘처음엔 유리가 아버지 속을 많이 썩이는 아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변경백 아버지도 문제는 문제란 생각이 들었다. 유리가 이 시험을 포기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 * * 함장 자격시험 당일. 시몬과 스카우터 롤랜드는 텔레포트 마법진을 타고, 3군단의 영역인 ‘에본포트(Ebonport)’라는 도시에 도착했다. 애본포트는 암흑연합 남부 항만의 중심으로, 막대한 물동량과 배들이 오가는 곳이다. 3군단의 핵심 영역이자, 중심지라 불리는 곳이다.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한 방대한 수평선을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있는 이곳. 시몬과 롤랜드는 그 도시 중앙에 있는 3군단의 해군 사령부에 도착했다. ‘와……!’ 우글 우글 우글 우글! 시험 두 시간 전인데 줄이 무척이나 길었다. 다들 서류 예선을 통과한 수험자들이었는데, 하나같이 이름 있는 네크로맨서들이나 귀족들이었다. 연령대가 무척 다양했지만, 가장 많은 건 2, 30대 청년들. 기량이 전성기에 접해 있거나, 직위를 받아 일하기 직전의 젊은 네크로맨서들이 많이 보인다. 향후 수백 년 해상 지휘권을 따내기 위해, 그리고 지금 대륙의 바다에 벌어지고 있는 일확천금을 노리기 위해, 어떤 식으로든 바다에 연관성이 있는 귀족들은 모조리 후보를 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시몬도 긴 줄을 서서 시험장 앞에서 대기했다. “수험증을 확인하겠습니다.” 시험 관리직으로 보이는 여성이 상냥하게 말했다. 시몬은 여기서부터 제대로 마인드 컨트롤을 시작했다. ‘나는 유리다. 나는 유리다.’ 몇 번이고 되새긴 뒤 눈을 뜬 시몬이 피곤한 표정으로 슥 하고 수험증을 건넸다. 수험증을 확인한 여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유리 미그일 님. 확인되셨습니다.” 그 말을 들은 주위의 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시몬을 바라보았다. 다들 얼굴에 ‘니가 미그일이라고?’ 하는 표정이 드러나 있다. 미그일 가문을 대표하는 인물이 이런 볼품없는 몰골이라 놀란 모양. 시몬은 안경을 추켜올리며 수험증을 받아 품에 넣은 뒤 피곤한 걸음걸이로 들어왔다. ‘크네.’ 안으로 들어오니 엄청나게 넓고 방대한 시험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학교 운동장만 한 게 8개쯤 붙어 있다. 바로 그 구역 안에 사람들이 바글거리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진짜 바다에 인접한 영지를 가진 귀족이라면 다들 온 건가.’ 시몬은 적당히 구석진 곳으로 걸어가 벽에 등을 기대고 섰다. 정보나 수집할 겸 사람들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있는 그때. 저벅 저벅 저벅. ‘아.’ 긴 붉은색 머리를 포니테일로 땋아 올린 정복 차림의 여성이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어깨에는 긴 백색 코트를 둘렀다. ‘우연도 이런 우연이 없지.’ 처음에 자료를 봤을 때 키젠의 엘리사 셀린과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정확했다. “당신이 왜 여기 있는 거지? 유리 미그일.” 크리스티나 셀린. 셀린 가문의 장녀이지만, 셀린 가문이 비좁다며 스스로 가문을 떠나 아버지의 정치적 능력과는 별개로 순수히 자신의 힘만으로 공작 가문의 장남과 약혼한 여성. 현재 그 공작의 하나뿐인 장남은 병약해서 누워 있고, 사실상 그녀가 안주인을 넘어서 공작가를 이끌 거라 여겨지고 있었다. 놀라운 건 그녀가 유리 미그일의 ‘전 약혼자’라는 사실이다. “대답해, 유리.” 웅성 웅성! 다름 아닌 셀린가의 거물이 볼품없는 차림의 남자에게 접근하자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쳐다보았다. 시작부터 정체를 들켜서는 안 되니까, 시몬은 외면하듯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신경 꺼.” 콰직! 연기가 제대로 통한 걸까, 그녀의 눈에 힘이 바짝 들어가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시몬은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를 심경이었다. ‘정보에 따르면…….’ 먼저 파혼을 요청한 건 유리 미그일 쪽이었다. 결국 분노를 참은 그녀가 더 말하기도 싫다는 듯 휙 돌아갔다. “…….” “…….” 수많은 시선이 시몬에게 향하고 있었다. 시몬은 긴장한 얼굴로 안경을 추켜올렸다. ‘조심해야겠네.’ 물론, 시몬은 유리와 엮인 이들에게 흔들리기만 할 생각은 없었다. 유리와의 대화에서 시몬은 이렇게 물었다. -만약 지인분들을 만나면 제가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제대로 된 대답을 듣지 못했지만 유리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을, 시몬은 잘 느낄 수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시몬이 씩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유리 미그일의 미소를 본 몇몇 이들이 움찔했다. ‘재미있겠네, 이번 시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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