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1107화 <유령궁에는 언제나 왕녀가 있어야 한다> 역사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첫 유령왕녀는 유령궁 사태가 벌어지고 5년이 지난 뒤에야 나타났다. 당시 유령궁 인근은 극도로 황폐해졌고, 사람들은 망령 들린 채 미쳐 있었으며 언데드가 들끓었다. 이런 현상은 유령궁을 중심으로 대륙 전체로 번져 나갈 조짐을 보였고 당시의 모든 지배자들이 심각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대륙을 뒤덮을 듯 확장하던 유령궁의 기세가 다소 꺾이던 때가 있었다. 인류에겐 이때가 반격의 기회였고, 미래에 1대 유령왕녀가 되는 젊은 여성 네크로맨서가 동료들과 함께 유령궁의 던전주를 없애러 떠났다. 에이션트 언데드와 계약한 그녀는 강력했으며, 수많은 난관 끝에 5층인 던전주의 방에 도달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곳에 있는 건 던전주가 아니었다. -어으으! 어어어어억! 비짝 마른 몰골의 사람이었다. 대륙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낡고 해진 옷을 입은 그 여성은 사슬로 두 팔이 묶여 있었다. 살펴보니 놀랍게도 스스로 제 팔을 묶은 것이었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이 사람 외에는 던전주로 보이는 존재가 없었다. 1대 유령왕녀는 의문을 품은 채 그 사람을 살해하였고. 그 순간 깨달았다. 자신이 유령궁의 새로운 던전주가 되었음을. 역대 유령왕녀가 왕녀로 즉위하는 순간 단 한 명도 빠짐없이 느낀다고 말한 바로 그 감각이었다. 이어서 1대 유령왕녀는 모든 사실을 깨달았다. 유령궁은 처음부터 ‘던전주가 없는 던전’이며, 궁에서 망령을 쏟아내는 건 던전이 던전주를 갖기 위해 벌이는 행위였다. 이곳에는 강력한 규칙도 존재했다. 첫째, 던전주가 밖으로 나가면 유령궁은 던전주를 찾기 위해 폭주하여 망령을 보낸다. 둘째, 던전주가 죽으면 다음 던전주는 유령궁 안에 있는 가장 강한 여자가 선택된다. 셋째, 유령궁 안에 아무도 없다면 유령궁은 새로운 주인을 찾기 위해 폭주하고, 망령을 보낸다. 결국 누군가는 반드시 이곳에 남아 있어야 했다. 그리고 그녀는, 제 팔을 묶고 죽어가던 이 사람이 아직 제정신일 때 쓴 일기장을 보게 되었다. 본래는 망령이 들려서 유령궁에 왔지만 자신과 같은 피해자가 더 늘지 않게 하려고 스스로를 사슬로 묶고 이곳에 버티고 있던 거였다.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다.> 마지막 일기의 한 문장을 보고 큰 감명을 받은 1대 유령왕녀는 이 사람의 일기장에 나와 있는 성 ‘에체베리아’를 자신의 성으로 삼은 뒤, 선언했다. -내가 이분의 의지를 이어서, 유령궁에 남아 이곳을 억누르겠습니다. 제대로 된 유령왕녀가 궁에 앉자, 유령궁은 빠르게 안정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혼자만의 힘으로 이 유령궁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었다. 유령궁은 자기 몸의 일부 같은 느낌이었지만, 마치 자신의 의도와는 다르게 생겨나는 암세포처럼 망령들이 끊임없이 생성되었다. 그래서 뜻있는 자들을 모아 별동대를 조직하고, 그들과 함께 유령궁의 망령들을 억제해 나갔다. 이후 왕국에 상황을 알렸다. 다만 자신이 던전주라는 사실을 밝히면 여론도 나쁠 테고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이 꼬일 수 있기 때문에 조금 다르게 이야기했다. -소녀가 이 한 몸 바쳐 유령궁을 억제하고 있사오니, 폐하께서는 심려치 마십시오. 왕은 그 말에 감복하며 막대한 재정적 지원을 유령궁에 약속했고, 인근 영토들을 그녀에게 하사했으며 세금을 걷을 징수권까지 주었다. 그렇게 긴 시간까지 대륙은 안정화되었다. <이곳에 들어온 건 내 운명이었다. 나는 내게 주어진 영광스러운 의무를 다한 것에 큰 행복감을 느낀다.> 1대 유령왕녀는 대륙의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행복하게 웃는 얼굴로 임종을 맞이했다. 하지만 그런 의무를 명예롭게 생각하는 건 2대를 넘어 3대까지였다. 4대와 5대는 자신의 의무에 대해 의문을 가졌고. 6대부터는 이런 의무를 속박이라고 느끼는 자들도 생겨났다. 그들은 유령궁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세상을 돌아다니고 싶었기에 호문쿨루스를 만들어 자신의 영혼을 담고 밖으로 돌아다니곤 했다. 그렇게라도 자유를 얻고 싶었다. 그러다 10대에 이르러. -왜 궁에 갇혀 평생을 썩어야 하는데?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극단적으로 의무를 부정하는 왕녀, 테네리페 에체베리아가 태어났다. 궁의 충신들과 네크로맨서들은 그녀를 잘 타일렀다. -테네리페 님, 왕녀로서 유령궁을 지키는 것은 초대 때부터 이어져 온 명예롭고 숭고한 일입니다. -갇혀 사는 게 명예라고? 헛소리! 이건 저주야! 이런 가문에서 태어날 거면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게 나았어! 초대 왕녀님한테야 명예였을지도 모르지! 나는 아니야! 내 의견은 어디 있는 건데? 나는 내 운명을 증오해! 테네리페는 늘 서적을 보면서 바깥 세상에 나가 여행하는 꿈을 키웠다. 끔찍한 궁에 갇혀서 망령이나 잡아야 하는 자신의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그러다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당시 유령왕녀는 대외적으로 보여지는 이미지를 위해, 그리고 보안상의 문제 때문에 왕녀 후보와 똑 닮게 생긴 아이를 ‘왕녀 대역’으로 삼기 위해 대륙 전역에서 찾아 데리고 온다. 그녀의 이름은 라우라. 빈민가 출신이었던 라우라는 테네리페와 닮았다는 이유로 유령궁에 들어와 예절 교육을 받고 귀족의 몸가짐에 대해서도 배웠다. 라우라는 유령궁의 생활에 완전히 매료되고 말았다. 인류를 위한 유령왕녀의 의무를 명예롭고 위대하다고 생각했으며, 비록 대역이라지만 자신도 유령궁의 일원으로서 힘을 보탤 수 있다는 사실에 큰 자부심을 느꼈다. 테네리페는 그런 라우라를 데리고 몰래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좋은 생각이지 않아? 2년 뒤에 승계식이 있어! 넌 진짜 유령왕녀가 되는 거고, 나는 네 대역이 되어서 생활하다가 조용히 궁에서 떠나는 거지! 어때? -하, 하지만 어떻게 제가 감히……! -너는 이 일을 하고 싶어 하잖아! 심지어 사령학 공부도 네가 나보다 더 잘하구! 정체를 들키는 건 걱정 마! 우리 몇 번 바뀐 채로 회의에 나갔을 때 어른들 아무도 못 알아본 거 기억나지? 라우라는 처음엔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거절했다. 하지만 집에 와서 침대에 누워 곰곰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로 내가 유령왕녀가 되면 어떨까? 자신은 대륙을 위해 얼마든지 이 한 몸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를 평민 출신이라 업신여기던 사람들도 모두 내 앞에 고개를 숙일 테고, 전 대륙민이 나를 존경하고 우러러볼 것이다. 상상의 나래를 펼칠수록, 라우라는 욕심과 욕망이 무럭무럭 생겨났다. 결국 라우라는 테네리페의 계획에 동의했고, 두 사람은 승계식까지 절대로 들키지 않도록 합을 맞추며 서로가 서로를 치밀하게 연기했다. 그렇게 2년 뒤, 유령왕녀 승계식이 시작되었다. -테네리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궁에서 나가주십시오. 당시 유령왕녀였던 테네리페의 할머니가 그렇게 지시했다. 사람들은 궁에서 빠져나가 새로운 유령왕녀를 맞을 준비를 했고, 테네리페는 할머니의 손을 잡고 유령궁에 들어갔다. 유령궁의 메인홀에 들어온 뒤가 계획의 핵심이었다. 테네리페는 너무 긴장해서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는 핑계로 달려간 뒤, 화장실에 혼령화 상태로 숨어 있던 라우라와 바톤 터치했다. 라우라가 테네리페 대신 나갔고, 할머니는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라우라의 손을 잡고 웃으며 5층으로 이동했다. 그렇게 던전주의 방인 5층. 할머니는 인지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눕고는 독약이 든 잔을 꺼냈다. -테네리페, 이제야 너를 믿고 편히 갈 수 있겠구나. 어릴 때는 그렇게 유령궁을 싫어해서 어쩌나 했는데, 결국 다시 이렇게 마음을 다잡고 의무를 위해 살겠다고 맹세해 줘서 고맙구나. 라우라는 양심의 가책이 찔리는 것을 느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제게 맡기세요, 할머니. 유령궁의 숭고한 의무를 다하기 위해 이 한 몸 바칠게요. 그렇게 할머니는 독약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라우라는 할머니가 먹은 게 독약인지도 모르고, 그녀가 죽은지도 모른 채 눈을 깜빡이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유령궁의 1층 메인홀에 남아 라우라와 바톤터치를 한 채 시시덕거리며 웃고 있던 테네리페. 짐도 다 싸두었고, 여비도 마련했고, 여행 계획도 문제없다. 이곳을 떠나면 어디부터 돌아다닐까. 어떤 디저트를 먹을까, 그녀가 행복한 상상에 휩싸여 있을 때. 쏴아아아아아아아아아! 갑자기 유령궁의 힘이 5층에 있는 라우라가 아닌, 1층에 앉아 있는 테네리페에게 모여들었다.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의 몸이 근본부터 변하기 시작했고. ‘!!’ 지금까지 역대 유령왕녀들이 빠짐없이 느꼈던 바로 그 순간. 자신이 ‘던전주’가 되는 감각을 느끼고 말았다. 그리고 모든 걸 깨달았다. 그 누구도 이야기해 주지 않았던 유령궁의 비밀을 유령왕녀가 된 뒤로 자연히 깨달았다. ‘아.’ 현 유령왕녀가 목숨을 끊었다. 그리고 유령궁은 궁에 있는 인간들 중에 라우라가 아니라 테네리페를 선택했다. 그러나 이건 명예로운 일도 숭고한 의무 따위도 아니었다. 그냥 던전의 인질이 되는 일이었다. 생체 결계가 되는 일이었다. 모든 건 자신이 죽어야 끝난다. 아마 밖으로 도망쳐도 유령궁은 폭주할 테고, 암흑연합에서 사람을 보내 자신을 다시 유령궁으로 끌고 와 집어넣으리라. 모든 계획이 망가졌다. 그 생각에 테네리페는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절망했다. ‘라우라!’ 뒤늦게 라우라가 떠올랐다. 만약 자신이 죽고 라우라가 왕녀가 되어도, 라우라에게는 못할 짓이었다. 관련 없는 제3자에게 이런 불행을 떠넘길 수는 없었다. 차라리 내가 전부 짊어지겠다. 그래서 어안이 벙벙한 채 어떻게 됐냐고 묻는 라우라를 만나 매몰차게 말했다. -내 궁에서 나가. 테네리페는 라우라를 소중하게 생각했기에, 그녀가 아예 유령궁에 미련을 가지지 못하도록 차갑게 대했다. 이 끔찍한 저주는 내가 뒤집어쓸 테니 너는 자유를 가지라는 생각이었다. 테네리페는 라우라를 유령궁에서 끄집어내 사람들 앞에서 ‘반역자’라고 선언하고 이곳에서 쫓아내도록 했다. 왜 그러냐며 엉엉 우는 라우라 쪽에는 시선도 주지 않았다. 그리고 독약을 삼키는 심정으로 선언했다. -오늘부터 제가…… 이곳의 왕녀네요. 새로운 유령왕녀의 등장이란 소식에 대륙 각지에서 구름처럼 몰려든 사람들의 환호성과 격려를 받으며 테네리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지옥이 시작되었다. * * * “이야기는 잘 알겠습니다.” 시몬이 눈을 감았다가 떴다. 고개를 돌려보니 바닥에 쓰러져 있는 테네리페의 호문쿨루스가 보인다. “그럼 저건…….” “내 발버둥.” 왜소한 본체로 돌아온 테네리페가 씁쓸하게 말했다. “어떻게든 밖에 돌아다니고 싶어서, 여행을 다니고 싶어서, 조금이라도 이 운명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나는 본체보다 더 많은 시간을 호문쿨루스에서 보냈어.” 지금까지의 전대 유령왕녀들은 호문쿨루스를 특정 상황에서만 사용했지만,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 테네리페는 본래의 몸을 부정하기까지 했고, 호문쿨루스의 삶이 자기 자신의 진짜 삶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그녀의 활동 기간 동안 저 호문쿨루스가 진짜 유령왕녀라고 믿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아졌다. “죄책감은 있어. 내가 그냥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고 갇힌 삶에 만족하며 지냈다면 털갈이 같은 것도 필요없을 테고, 왕녀 후보로서 털갈이 시즌 중에 나를 도우려다 죽은 사람도 없었을 거야.” 그녀가 고개를 젖혀서 천장을 바라보았다. 시몬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라우라가 돌아온다는 건…….” “유령왕녀 자리가 목적일 거라구 생각해. 오해는 풀렸을 거야. 아마 지금쯤이면 모든 인과를 이해하고 있겠지. 하지만 나에 대한 원망과 분노는 똑같을 거라고 봐. 그녀는 완전히 타락했고, 결사에 들어가 있어. 그녀의 목적은 하나.” “설마…….” “맞아. 유령왕녀가 된 뒤, 유령궁에서 빠져나가는 것.” 테네리페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그러면 유령궁은 라우라를 찾을때까지 폭주해서 망령들을 쏟아보낼 테고, 대륙은 이제…….” 거기까지 말한 그녀가 움찔하며 말을 멈추었다. 이내 사시나무 떨듯 떨기 시작했다. “……왔어, 왔어! 느껴져.” “?” 그녀의 동공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라우라가 5층에 왔어! 그녀는 유령궁에서만큼은 차원이 다른 강자야! 이대로 내가 죽으면 유령궁은 반드시 그녀를 선택할 거야!”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메리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최대한 막아볼게요.” 메리다가 앞으로 걸어가며 파멸의 대검을 바라보았다. “시몬. 내 생각엔 그 방법밖에 없어.” “…….” [저도 가겠습니다.] [저도 가지요.] 메이드 복장의 마코와 좀비집사도 걸음을 옮겼다. 시몬은 잠시 손에 든 파멸의 대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가 테네리페를 바라보았다. “저에게 한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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