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1004화 -7군단이 1군단까지 먹게 해야 하나? 네프티스의 이 한마디. 1군단과의 갈등을 감수하는 한이 있더라도, 네프티스는 어떻게든 7군단을 끌고 갈 의지를 강하게 표출하고 있었다. 그녀가 저렇게까지 말하니 제독이나 왕녀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더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대신 군단장들끼리 모였으니, 군단 사이에 일어나는 여러 문제와 갈등에 대해 이야기했다. 군단 간의 영역 문제, 의무를 어디까지 적용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 에이션트 언데드 문제까지. 다양한 논의들이 오갔고, 네프티스가 적절하게 중재했다. 군단장들은 기본적으로 서로가 경쟁 관계다. 본래는 소규모 국지전을 벌여서 결정해야 할 문제들도 있었지만, ‘결사’라는 공동의 적이 떠오른 이상 조금씩 양보하며 합의점을 맞춰 나갔다. “참, 참! 그러고 보니!” 제독으로부터 근교 해양 통제권을 따내 기분이 좋아진 4군단의 유령왕녀가 미소 지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다들 6군단, ‘섭정’의 소식은 들었어?” “?”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모였다. 왕녀가 빙글빙글 웃었다. “살짝 그 아저씨한테 문제가 생긴 것 같은데 말야. 관리자와의 불화라나 뭐라나~” 제독이 모자챙을 붙잡아 내렸다. “관리자는 군단장의 의지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왕녀. 6군단의 관리자가 비틀려 있다는 건 동의한다만, 외부인의 괜한 걱정이다.” “그럴까나.” 제6군단장, 통칭 ‘섭정’. 왕국의 통제를 벗어난 다섯 군도와, 협곡을 끼고 있는 도시국가 벨른을 영역권에 둔 군단장이다. 본래 군단장이란 존재가 네크로맨서들에게는 우상일지 몰라도 일반 주민들에게는 그리 평가가 좋지 않은데, 영웅이라 칭송받는 2군단의 진과 더불어 6군단의 섭정은 상당한 인격자로 소문이 자자했다. 특히 벨른의 통치자는 병들어 죽기 전에 6군단장에게 자신의 자리를 물러주려고 했으나, 그는 친구의 자리를 뺏을 수 없다며 통치자의 어린 아들에게 그 자리를 이어받게 했다. 그 뒤에는 스스로 대부를 자처했다. 이게 바로 사람들 사이에 불리는 호칭이 ‘섭정’으로 굳어진 계기였다. 그만큼 섭정은 사람들을 위한 일을 하고, 인격적으로 완성된 네크로맨서라는 평가가 많았다. 네프티스도 ‘음! 음!’ 하고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할 필요 없어! 이번 펌킨 사태는 섭정이 기꺼이 지휘봉을 잡아줬는걸. 직접 가줬으니 안심이야!” “…….” 진은 굳은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네프티스가 동그랗게 뜬 청안을 깜빡이며 물었다. “왜 그래? 진.” “……아무것도 아닙니다.” 진이 손깍지를 꼈다. “저도 당연히 섭정이 이길 거라고 믿고 있지만, 만에 하나. 만약에 섭정마저 패배한다면-” “?” 입을 달싹이던 그녀가 마침내 마지막까지 떠오른 생각을 지우고는 말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때는 제가 직접 나서도록 하죠.” * * * 시몬의 방학 기간 동안 암흑연합은 두 차례 커다란 재난에 맞닥뜨렸다. 첫 번째 재난은 벨하이츠 사태. 두 번째 재난은 펌킨 사태. 샤헤드의 국왕 부부가 결사에게 피랍됐던 벨하이츠 사태는 시몬과 7군단이 해결했다. 그리고 드레스덴 왕국 곡창지대 로베스크에 떡하니 나타난 ‘던전’과, 이 던전이 일으킨 이상현상으로 주변이 초토화된 펌킨 사태. 벨하이츠는 ‘회색벽’이란 물리적 장벽으로 막혀 있었지만, 펌킨 사태는 그런 장애물이 없었기에 사람들의 대처가 빠른 편이었다. 1차 원정대, 20명의 네크로맨서로 이루어진 소대가 던전으로 출발했고 그들은 돌아오지 못했다. 2차 원정대, 무려 그 다섯 배인 100명의 정예 네크로맨서들과 용병들, 던전 전문가들과 학자들까지 합류한 전문팀이 출발했고, 그들 또한 돌아오지 못했다. 생각보다 던전의 규모가 크거나, 던전을 지배하는 던전주가 강력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사람들 사이에서 돌았다. 그러나 당사국인 드레스덴 왕국은 이미 주위의 다른 결사 사태를 해결하느라 행정과 군사력이 마비된 상황. 결국 암흑연합, 더 나아가 키젠이 움직일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바로 그때. -2차 원정대의 리더인 내 친우 바르메로가 던전에 갇혀 있소! 내 친히 가서 그를 구해내리라. 무려 현역 군단장, ‘섭정’이 직접 나섰다. 역시 섭정이 유일한 희망이라며 사람들은 그를 칭송했고, 이에 감명받은 각지의 강자들이 구름같이 모여들며 단일 최대 규모의 ‘원정대’를 이루었다. 3차 원정대는 6군단 섭정이 이끄는 무려 500명의 병력. 이들 전원이 칠흑을 다루는 네크로맨서들이었고, 그중에는 이름 높은 고위계 네크로맨서들과 전쟁 전문가들까지 합류했다. 가히 초호화 군대였다. 그리고 10일이 지난 시점. 섭정이 직접 들어갔으니 사흘 안에 끝날 거라 전망했던 던전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었고, 기다리던 주민들은 초조함과 두려움에 빠졌다. -섭정이 직접 갔는데 이상현상이 끝나질 않고 있소! -이제 고작 열흘째요!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 봅시다! 오래 걸리는 종류의 던전일 수도 있잖소! -드레스덴 왕국은 해당 지역을 버릴 생각까지 가지고 있더군. -그 비옥한 곡창지대를 잃으면 많은 사람들이 배를 굶주릴 거요! 안 그래도 세상이 흉흉한데 식량난까지 겹치면 끝장이오! 그렇게 사람들의 여러 이야기가 오가는 가운데. 펌킨 사태의 중심지. 가칭 C-556번 던전. 쿠구구구구구구구구! “물러나! 물러나라!” 그곳은 생지옥이었다. 괴이한 공간, 정체불명의 고철들이 떠다니는 던전. 이곳은 복잡한 구조나 법칙이 존재하는 던전은 아니었다. 다만 이곳에는 대륙의 역사에 기록될 만한 강력한 ‘던전주’가 존재했다. “온다!” 하늘에서 거대한 팔이 내려오고, 수십 명의 원정대원들이 언어 그대로 삭제당했다. 구름을 휘감고 하늘에 떠 있는 괴물. 던전의 하늘 전체가 구름으로 뒤덮여 있었기에, 지상에서 올려다보면 푸른색 두 눈만 보인다. 그것이 바람을 일으키거나, 거대한 팔을 지상에 휘저을 때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3차 원정대 500명 중 200명이 단 하루 만에 궤멸했다. “흑마법이 닿지 않소!” “던전주가 내려오는 타이밍을 노려!” 네크로맨서들이 사용하는 온갖 저주나 흑마법은 하늘로 날아가는 와중에 위력이 크게 줄어들었다. 비행 능력을 가지고 있어도, 저 던전주는 대기를 마음대로 조종했다. 던전의 안과 밖은 차단되어 있다. 완전히 별개의 공간. 정보를 밖으로 전달한다면 저 던전주를 상대하기 걸맞은 전력을 데려올 수 있겠지만, 던전주를 파괴하지 않는 한, 밖의 사람들에게 정보를 제공할 수 없다. 무엇보다 절망적인 사실은. “섭정! 대체 섭정은 어디 있나!” “보이지 않습니다! 어제부터 쭉!” “혹시 섭정이 당한 건 아닙니까?” “말이 되는 소릴 해라!” 총사령관이자, 비행 전력의 대부분을 담당하며, 이번 원정대의 정신적 지주이기도 한 섭정이 보이지 않게 됐다는 점이었다. 원정대의 사기는 땅에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 * * ……. ……한때. 나는 나 자신이 인생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던 적이 있었다. 배경도, 역량도, 마인드도 충분했다. 준비는 잘되어 있었고, 언젠가 이 학교를 지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녀석을 만나기 전까지는. -잘한다 헥토르! -역시 무어 가문이야! 특례 1번은 무슨! 거품이었네! 키젠에 와서 첫 저주학 수업, 많은 사람들이 나를 응원했다. 그리고 아무런 배경 없이 특례 1번을 달고 나타나 주위의 관심을 받았던 그 녀석. 녀석은 아홉 번의 이그저스트를 받아냈고, 단 한 번 이그저스트를 완성해 나를 무릎 꿇릴 뻔했다. 다행히 그 싸움은 10번의 이그저스트를 완성한 나의 승리였다. 그리고 사실상. 그 승리가 그 녀석에게 따낸 마지막 승리나 다름없었다. -이제 됐지? 첫 소환학 수업, 스켈레톤을 만들어 겨루는 수업에서 패배한 이후, 놈을 꺾는 건 내 지상 과제이자 인생의 목표가 되었다. 한때는 제대로 된 ‘적수’의 등장에 고양된 적도 있었다. 녀석의 성장을 방해하는 자들을 나서서 차단하기도 했다. 실제로 그놈과의 경쟁은 나를 강하게 만들었고, 그의 존재에 감사하다고 여기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깨진 계기가 있었다. -네놈, 이제 용의 마법까지 넘보려는 것 같은데. 적수가 ‘용의 마법’까지 배웠을 때였다. -그 교활하고 오만한 재능으로 내 밑천까지 긁을 생각이겠지만 소용없다. 이건 재능과는 완전히 다른 영역이니까. 자신만만했다. 수십 년간 쌓아왔던 나 자신의 영역. 가문의 정수. 이 영역만큼은 아무리 적수라도 정복하지 못할 거라고 확신했고, 처음으로 느껴보는 우월감과 자만감에 휩싸여 그에게 조언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네가 이 몸을 상대하고자 하는 게냐? 드래곤을 흉내 내는 인간이라니. 우습구나. 적수가 용의 마법으로 만들어낸 그 ‘본 드래곤’과 대면한 그 순간. 가지고 있던 모든 프라이드, 최후의 밑천마저 무너져 내렸다. 벽을 느꼈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시룡으로 변신하는 무어 가문의 힘은, 진짜 ‘용’을 가진 적수를 상대하기엔 턱없이 모자랐다. 이제 그 적수는 너무 높은 하늘로 날아가 버린 것이다. ‘강해지고 싶다. 어떤 더러운 수단과 방법이라도 좋다. 지금보다 더 강한 힘이 필요하다.’ 그렇게 결의했다. 방학이 시작되었고, 아버지에게 찾아가 조언을 구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강해질 방법이 필요하다고. 그 말을 들은 아버지는 내 뺨을 때렸다. 무차별적인 폭행이 이어졌다. -글러먹은 놈. 아버지의 싸늘한 시선이 향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는 놈이, 강해질 방법을 이 아비에게 물어본 것부터가 실격이다. 가주인 나를 죽이고, 무어 가문 최고의 시룡 파츠를 빼갈 생각은 왜 하지 못하였느냐! 잠시 침묵을 지켰다가 솔직히 고했다. -그 생각도 해봤습니다. 그 말에 아버지의 손찌검이 멈췄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파츠를 가져온다고 한들, 그걸로도 결국은 이기지 못할 적수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자리에 앉아 고민했다. 오랜 시간 고민했다. 그러고는 말없이 신문 하나를 붙잡아 내게 넘겼다. <제6군단 섭정, 펌킨 사태의 던전을 공략할 원정대 모집.> <세상을 구할 사람이라면 누구든 좋다. 구름같이 몰려드는 강자들.> 나는 그 기사를 읽은 뒤 아버지를 보았고. 아버지는 말없이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대화는 없었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아버지에게 깊이 고개 숙여 작별 인사를 하고는, 섭정의 원정대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만만의 준비를 마치고, 키젠 학생이라는 신분까지 숨긴 뒤, 무어 가문에 고용된 네크로맨서로 원정대에 합류했다. 사실 긴가민가했다. 스스로도 현실성이 없는 계획이라고 생각했다. ‘섭정’은 현역 군단장이며, 강했으니까. 가만히 있으면 초조함에 미칠 것 같으니 뭐라도 해봐야겠다는 생각에 들어온 것뿐이다. 그런데 막상 던전에 들어간 뒤. “…….” 두 가지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첫째는 ‘던전주’가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들 만큼 끔찍하게 강하다는 점이었고. 둘째는 내 손으로 만들어야 했을 광경이- 지금 내 눈앞에 꿈결처럼 펼쳐져 있다는 것이었다. -자, 자네……! 제6군단장 섭정이 쓰러져 있었다. 복부에 피가 흐르고 있다. -자네는 누구지? 원정대원인가? 쿨럭! 쿨럭! 눈이 흐려서 잘 보이지 않는군. 심각한 중상이다. 그는 더 싸울 수 있다고 말했지만 살아남기 어려워 보인다. 아니면 나의 추악한 욕망이 그렇게 보이게 한 것일 수도 있다. 그를 사람들에게 데려가면 일말의 확률로 살릴 수 있을지 모른다. 다시 물러나 전력을 재정비하고, 다음 원정대가 들어왔을 때 함께 싸운다면 승산이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하지만 그런 생각과는 달리 몸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 모습을 본 섭정은 뭔가를 직감한 듯,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 나는 이미 틀렸네. 뱀의 혓바닥을 조심하게. 푸우우우욱! 나는 아공간에서 꺼낸 대못 형태의 아티팩트를 그의 가슴에 처박았다. -커헉! 아티팩트가 발동하며 섭정의 눈이 흐릿해진다. 이것은 타인의 칠흑을 유지한 채 이성을 빼앗고 일종의 식물인간으로 만드는 아티팩트. 더 쉽게 말하면. ‘군단장의 교체’. 그것을 위해 발명된 아티팩트다. [네크로맨서들은 참 어리석다니까.] 그러자 속삭임이 들린다.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인다. 섭정의 복부에서 피어난 검은 꽃 한 송이, 그것은 형태가 서서히 길어지며 새까만 뱀의 형상으로 둔갑했다. [그저 군단장을 죽이기만 하면 자기가 새로운 군단장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어림도 없어. 바로 나 관리자의-] “인정을 받아야 하지. 알고 있다.” 헥토르가 피를 줄줄 흘리며 말했다. “나는 무어 가문의 헥토르 무어다. 자신 있다. 뭐든지 하겠다.” [뭐든지?] 뱀의 혓바닥이 튀어나오더니 헥토르의 목을 한 차례 휘감았다. [뭐든지? 정말로 뭐든지? 뭐든지?] 꽈악! 목이 조여온다. 숨이 턱 막힌다. [오, 오. 보이는구나. 네 기억들이.] 뱀의 혓바닥이 이마를 쓸어내린다. 놈은 머릿속의 기억을 강제로 끄집어내고 있다. [시몬 폴렌티아? 재미있는 이름인걸.]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심장이 벌렁벌렁 뛰고. 눈의 혈관이 벌게진다. [시몬 폴렌티아를 뛰어넘는다라, 군단장이 되려는 자가 참으로 시시한 야망을 가졌구나.] 뱀의 몸뚱이에서 손이 점점 늘어나 치덕치덕 전신을 붙잡는다. [하지만 그 야망을 이루겠다는 ‘결의’만큼은 진짜구나. 마음에 들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했지?] 뱀의 입꼬리가 쭉 찢어졌다. [섭정을 먹어.] 그 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다. 뭘 하는지도 모르겠다. 시몬 폴렌티아라는 이름이 스위치를 켰고. 그저 움직였다. 피가 튀었다. [훌륭해.] 뱀의 목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울려 퍼진다. [혹시 섭정의 젊은 시절을 알아? 대단한 남자였지. ‘광객’이라고도 불렸어. 야망은 크고, 심장은 뜨겁고, 그 어떤 강적이라도 물불 안 가리고 덤벼들던 사내였지. 내가 선택한 남자다웠어. 그런데 지금은 어떻지?] 뱀의 목소리에 분노가 실렸다. [노화. 인간은 늘 노화가 문제야. 아무리 젊은 시절 전설적인 존재라고 해도, 노화가 진행되면 축 처진 살덩이에 불과해. 더 이상 그이의 가슴은 불타지 않아. 실패에 분해하지도, 성공에 환호하지도 않아. 생명은 죽을 때가 다가오면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사람들에게 자신의 것을 베풀려고 하지. 더 많은 힘을 쥘 기회에도 힘을 우정이라는 가치에 내려놓고 ‘섭정’이라는 불명예한 별명을 얻었을 때, 그가 미소 짓던 얼굴이 기억나.] 눈을 떴다. 눈앞에 이제 쓰러진 섭정은 없었다. [얼마나 혐오스럽던지. 너는 다르겠지?] 그때 귓가에 한 비명소리가 들렸다. “으, 으아아! 아아아아!” 시선이 돌아갔다. 한 남자가 멀리서 털썩 주저앉은 채 벌벌 떨리는 손으로 헥토르를 가리키고 있었다. “너, 너! 설마……! 섭정을……!” 뿌드드득! 뱀이 움직이자, 그 남자의 몸에 칠흑이 철사처럼 휘감기더니 전신이 으스러졌다. [계속하자.] 뱀이 빙긋 웃었다. 그러고는 제 가슴을 열어젖혔다. 고오오오오오! 그것은 본 적이 없는 거대한 코어. 이것이 군단장을 만드는 관리자의 코어. 헤아리기 힘든 힘이 느껴졌다. 이제 망설임 없이 손을 그 안으로 집어넣었고. 콰아아아아악! 코어의 힘과 자신의 힘이 합쳐지는 걸 느꼈다. * * * 쿠구구구구구구구! 6군단의 관리자와 결합한 헥토르를 중심으로 검은 기둥이 하늘 높이 솟구쳐 올랐다. 던전주와 싸우던 네크로맨서들이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방금 뭐지?” “소름이 쫙 끼쳤는데.” 스스스스- 구름 속의 눈동자, 던전주도 반응했다. 이내 구름에서 거대한 손이 내려왔다. 손이 내려오는 방향은 다름 아닌 이질적인 칠흑이 느껴지는 곳. 헥토르가 있는 방향이었다. 꾸드드득! 꾸드드드득! [자, 시험해 봐.] 헥토르의 등이 벌레가 기어가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네가 얻은 새로운 힘을.] 퍼억! 그의 등이 찢어지며 몸보다 수십 배 거대한 날개가 펼쳐졌다. 이내 전신이 검게 일그러지더니 커지고 작아지기를 반복하며 용의 형태로 변모했다. 더 이상 시룡의 파츠들을 몸에 붙여 인위적으로 변하는 힘이 아니다. 몸 전체가 헥토르가 원하는 형상으로 맞춰지고 있었다. 터엉! 새까만 악룡이 무릎을 굽힌 뒤, 이내 지면을 박차고 하늘로 쏘아졌다. 지면이 박살 나고 주위에 맹렬한 후폭풍이 휘몰아쳤다. 휘오오오오오오오! 헥토르의 몸이 점점 더 가속한다. 날아가는 순간에도 형태는 계속해서 끊임없이 변화한다. 몸통이 유선형으로 가늘어지고 주둥이가 전면으로 길어지며 날카로운 이빨이 드러나 고속 이동에 적합하도록 변했다. 이내 헥토르가 점점 더 가속하더니. 우웅! 하늘의 어느 기점을 통과한 순간. 결계 같은 것을 박살 내며 솟구쳤다. 펄럭! 악룡이 된 헥토르가 비로소 비행을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구름에 파묻힌 뚱뚱한 거인의 등과 볼기짝이 보인다. 팔을 구름 아래로 휘적거리고 있는 모습. 아래에서 올려다볼 때는 극도로 공포스러웠으나, 위에서 내려다보니 이리 볼품없을 수가 없었다. 키기기기기기기기긱! 헥토르가 두 팔을 세워 들었다. 손안에서 발출된 에너지가 살아 숨 쉬는 그의 앞으로 모여들었다. 그것은 점점 더 커져가며 헥토르의 체구보다 큰 크기로 변했다. 등 뒤에서의 기척을 감지했는지, 던전주의 뚱뚱한 육체가 몸을 돌려 헥토르를 응시한다. 하지만 헥토르가 그 힘의 결정체 앞에 손끝을 대고는. <군단기 – 일악(一惡)> 후콰아아아아아아악! 가볍게 손가락으로 튕기는 것으로 날려 보냈다. 그것이 던전주의 거구와 부딪히며 굉음과 빛을 일으켰다. 거대한 던전주의 몸이 비로소 구름을 뚫고 지상으로 낙하하기 시작한다. 펄럭! 헥토르도 두 날개를 넓게 펼치고는 던전주를 향해 돌진한다. [미약하구나. 미약해.] 그때 뱀의 목소리가 들린다. [역시 섭정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힘이야. 그래도 나는 힘보다는 네 결의와 집착을 높게 평가하마. 그럼 마지막 시험이다. 아가.] 일순 악룡의 얼굴이 마치 두건처럼 벗겨지더니 헥토르의 얼굴이 드러났고, 그 뒤로는 뱀이 일그러진 얼굴로 웃는 모습이 보였다. [한 번 죽어.] 푸우우우우우우욱! 던전주가 팔을 내질러 손가락 끝으로 헥토르의 몸에 구멍을 냈다. 둥근 구멍이 생긴 헥토르의 몸이 순식간에 허물어지며 공중에서 추락했고 뱀의 깔깔깔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살짝 힘을 맛보여 줬을 뿐인데 일체의 망설임도 없이 내 명에 따르는구나! 무섭구나! 무서운 집착이야! 이 의외성! 바로 이 맛에 우리가 인간과 계약하는 거지!] 쿠웅! 쿠콰콰콰콰쾅! 고공에서 떨어진 헥토르의 몸이 비탈길을 따라 굴러떨어지다가 이내 평지에서 멈춰 섰다. 그의 몸이 알아보기도 힘들 만큼 일그러져 있었다. [나는 인간이 좋아. 하지만 인간들의 ‘노화’는 혐오해.] 스스스스. 무너진 헥토르의 몸에 뱀의 몸이 흘러가 수복하기 시작한다. [말해두지만 너는 제대로 된 군단장이 될 수 없어. 자질도 부족하고, 너를 따르는 에이션트 언데드도 없지.] 뱀이 음침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하지만 이 방법은 네게 힘을 줄 거야. 네 몸에 내 몸을 섞어서 반은 언데드가 되는 거지.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가 되는 거다. 헥토르 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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