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989화 시몬은 1왕자의 천막으로 들어왔다. 국왕 부부를 구하러 간다는 말을 들은 1왕자는 친히 본인이 가진 왕가의 문장을 주겠다고는 했지만, 시몬은 여전히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어딘가 꿍꿍이가 있어 보였으니까. “자, 자. 앉으시오.” 여우처럼 눈꼬리가 긴 1왕자가 빙글빙글 웃으며 자리를 권했다. 시몬은 의자에 앉은 뒤 무덤덤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차 한잔하시겠소?” […….] “별생각이 없는 듯하군, 알겠소.” 1왕자가 두 손을 깍지 낀 채 미소 지었다.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되겠소?” 시몬은 대답하지 않았으나, 1왕자는 멋대로 말을 이어나갔다. “화제의 7군단이 결사를 쫓고 있다는 사실이야 잘 알고 있소만, 대륙에는 결사를 잡을 만한 장소가 여러 군데 있지 않겠소? 왜 굳이 이리로 온 게요?” 시몬이 피어의 목소리를 빌려 내뱉었다. [결사가 있는 곳에 내가 갈 뿐이다. 그 외에 다른 이유가 필요한가.] “샤헤드에서 내려진 척살령이 문제라면 내가 해결해 줄 수 있소.” [문장을 내놓지 않을 생각이라면 가겠다.] 드르륵! 의자를 빼고 자리에서 일어난 시몬이 등을 돌리려는데. 철컹! 무게감 있는 뭔가가 테이블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시몬이 뒤를 돌아보았다. 테이블에는 주머니에 든 무수한 금화가 보였다. “30배.” 1왕자의 혓바닥이 움직였다. “7군단이 이대로 조용히 돌아가 주는 것에 대한 내 대가요.” […….] “나쁘지 않은 제안 아니오? 저 회색벽을 넘는 건 지금까지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이오. 이건 당신이 벽을 넘는 걸 ‘시도하지 않는 것’에 지불하는 내 배팅이오. 그만큼 당신을 높이 평가한다는 거지. 거기에-” 그가 입꼬리를 올렸다. “내가 왕이 되면 7군단에 걸려 있는 척살령을 해제하고, 외교정책도 7군단에 대한 우호책으로 바꾸겠소. 이것은 그대가 내 미래에 거는 배팅이 되겠소만, 승률이 지극히 높은 도박일 거라고 힘주어 말할 수 있겠소. 어떠시오?” 시몬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얼굴을 가린 피어의 투구 덕분에 표정 관리가 필요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낳아준 부모를 죽게 둘 셈인가.] “나 또한 아바마마와 어마마마를 가족으로서 진심으로 사랑하오. 하지만 이것은-” 그의 눈이 게슴츠레 떠졌다. 일순 삼각형으로 일그러진 동공이 보였다. “나랏일이오.” 콰앙! 흥분한 시몬이 1왕자의 멱살을 붙잡고 천막 기둥에 거칠게 밀어붙였다. 그가 큭! 소리를 내며 신음했지만 입가에는 웃음이 걸려 있었다. 촤아아아아악! 동시에 천막이 종잇장처럼 찢어지며, 천막 뒤에 숨어 있던 병사들이 검을 겨누고, 네크로맨서들은 저주를 장전한 채 시몬을 겨냥했다. 하지만 시몬은 눈 한번 꿈쩍하지 않고 으르렁거렸다. [결사에게 놀아났군. 이번 사태가 네놈과 일체의 관련도 없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할 거다!] “아까 말씀드리지 않았소. 나랏일이라고.” 시몬과 눈을 마주친 1왕자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왕궁 점령, 군권 장악, 병력 집결. 이미 너무 많은 사람들이 관련되어 버렸소. 만약 두 분이 살아 돌아온다면 왕국에는 끔찍한 피바람이 불겠지. 왕국의 여러 대신들 중에 누구도 두 분이 돌아오는 걸 원치 않소. 그게 현실이오.” […….] “두 분은 이미 실패했소. 결사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무능한 왕과 왕비지. 나는 인간적으로 두 분을 사랑하고 존경하나, 이제는 누군가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왔소.” 시몬의 눈에 경멸이 섞였다. [감히 결사 사태의 대처를 논하는 자가, 결사의 약물에 심취하여 이런 일을 벌인 건가? 이제 해독제 정도야 쉽게 구할 수 있었을 텐데, 왜 그 상태에서 벗어나지 않은 거지?] “내가 할 말은 하나뿐이오. 모든 것은 대의를 위해서요.” 쿵! 시몬이 1왕자의 멱살을 거칠게 놓으며 바닥에 내팽개쳤다. 그러고는 등을 돌려 저벅저벅 걸어갔다. 시몬을 향해 무기를 겨누던 병사들이 외쳤다. “멈춰라! 어딜 감히……!” “보내주시오. 키젠의 임무를 수행하러 온 자를 건드리면 골치 아프오.” 1왕자가 휙휙 손짓했다. 그러고는 시몬의 등에 대고 외쳤다. “이거 하나만 기억하시오! 그대가 실패하면 벨하이츠 하나에서 끝나겠지만, 그대가 성공하면 왕국 전체가 피바다로 물들게 될 거요! 결사와 그대! 어느 쪽이 더 세상에 이로울지, 잘 한번 생각해 보시오!” 1왕자의 음침한 웃음소리가 군막에 울려 퍼졌다. *** 1왕자와 이야기한 직후, 시몬은 언덕 바로 근처에 개인 군막을 설치했다. 이제는 안으로 들어와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물론 주변은 빈틈없이 물리 방어 결계와 방음 결계를 쳐둔 뒤였다. [크흐흐! 인간들의 세계는 심오하군!] 시몬의 맞은편에 앉은 피어가 몸을 들썩이며 웃었다. [어떤 아들은 부모 세대의 책임을 덤덤히 짊어지는데, 어떤 아들은 부모가 가진 것을 원하여 부모를 죽이려고 하는군! 어떻게 이런 차이가 나는 거지?] 에르제베트가 시몬의 어깨를 주물주물하며 미소 지었다. [인간들의 일은 어찌 돼도 좋사와요. 우리 군단장님이 좋다면 소녀도 좋사옵니다.] “아파, 에르제.” 강한 압력에 시몬이 힘겹게 웃으며 말했다. “그보다 거미들 준비는?” [끝났사와요. 계획이 시작되면 군단장님 모습을 한 자들이 수십 명 튀어나와 진형을 혼란시킬 거예요.] “좋아. 날이 어두워지면 바로 출발할게.” 1왕자의 말은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는 궤변이었다. 자신은 그저 임무에 따라 결사를 막고 사람을 구할 뿐. 1왕자 개인이 단정 지은 이야기를 고민하고 망설이기에는 시간이 아깝다. 상대할 가치가 없었다. 그때 어깨를 주무르던 에르제베트의 손이 멈췄다. [군단장님.] “?” [누군가 이리로 오고 있사와요. 무장하지 않은 사람이라 내버려 두긴 했는데, 쳐낼까요?] 시몬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냐, 내가 직접 이야기해 볼게.” 즉시 피어가 시몬의 몸에 연결되었고, 에르제베트도 결계를 살짝 열어젖힌 후, 본인의 기척을 지우고 모습을 감췄다. 이내 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저기, 실례합니다. 시몬이 바로 피어의 해골투구를 눌러쓰고 목소리를 바꾸었다. [무슨 일이지?] -시, 심부름입니다. 전해 드릴 물건이 있어서요. 경고장 같은 건가? 시몬은 침묵을 지켰고, 이내 천막 너머로 물건 하나가 슬쩍 들어왔다. 시몬의 눈이 커졌다. ‘왕가의 문장!’ 틀림없는 왕가의 문장이었다. 시몬이 에르제베트에게 그것을 넘겼고, 에르제베트가 쓱쓱 요리조리 긴밀히 살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진품이라는 뜻이었다. -그럼 가보겠……. [누가 보냈지?] 잠시 천막 밖에서 침묵이 이어졌다가 이내 답변이 돌아왔다. -……3왕자님이십니다. 사정을 듣고 이렇게 제게 심부름을 보내셨습니다. 2왕자님에게 억류되어서 나가지 못하는 처지시라. 꼭 두 분을 구해주셨으면 한다고……. 시몬은 조용히 왕가의 문장을 목에 걸었다. 샤헤드의 일은 샤헤드의 일, 관여할 생각은 없다. 3왕자가 정말로 부모를 위하는 건지, 그저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에서 정치적인 판단을 내려 이것을 보낸 건지는 알 수 없다. 그래도. [도움을 받았군.] 그 사실만큼은 맞긴 하다. 이내 심부름꾼이 천막 밖에서 꾸벅 고개를 숙인 뒤 멀어져 갔다. 시몬이 말했다. “에르제, 저 사람 무사히 돌아가도록 도와줘. 감시가 붙어 있을 거야.” [알겠사와요.] 에르제베트가 사라졌다. 시몬은 고개를 들어 밖을 살폈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이제 곧 움직여야 할 때였다. *** 그날 밤, 시몬은 바로 가파른 절벽을 올랐다. 당연히 방해가 있었다. 국왕 부부를 구하는 것을 막기 위해 1왕자와 2왕자가 절벽 곳곳에 병력을 배치해 둔 것이다. 물론 그 정도로는. [군단장님! 왼편으로 가면 매복군이 있사와요.] [크흐흐! 6시 방향에 적이다!] 시몬을 막을 수는 없었다. 에르제베트가 병력의 위치를 파악해 놓았고, 피어의 감지 능력도 유용했다. 군막에서는 이미 군단장으로 변신한 송장거미들이 적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었다. 그사이 시몬은 언덕 정상을 향해 쭉쭉 치고 나갔다. [여기서 너무 시간이 끌리면 왕궁 네크로맨서들까지 상대해야 할 거다, 소년!] “네, 빨리 벽 안으로 들어가죠!” 그렇게 한 시간 넘게 가파른 절벽을 타고 올라 마침내 꼭대기에 도착했다. 뒤를 돌아보니. -잡아라! 저쪽이다! 왕자 측 병사들이 절벽을 올라오고 있었다. 이제는 네프티스의 눈치를 볼 생각도 없는 건지 저쪽도 이판사판이다. ‘들어간다.’ 집중력을 끌어올린 시몬이 앞에 회색 연기로 이루어진 벽을 응시했다. 간단한 방법으로는 들어갈 수 없다. 좀비집사의 말대로 공간을 베면서 가는 건 한계가 명확하다. ‘군단기인 비월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 내부에 시몬의 소중한 사람이 있으면 모르겠지만 저 도시에 갇힌 자들은 전부 모르는 사람들이다. 억지로 쓸 수는 있겠으나, 워낙 저 회색벽의 범위가 방대해서 짧은 거리를 통과하면 그대로 갈가리 찢겨 죽는다. 그러니. ‘생각보다 빨리 다시 쓸 때가 왔네.’ 시몬이 두 팔을 들어 올렸다. ‘오른손에는 칠흑과 피.’ 우우웅— 검은 기운이 시몬의 오른손에 흘러나왔다. ‘왼손에는 신성과 피.’ 하얀 기운이 왼손에 뭉쳤다. 이내 시몬이 두 힘을 움켜쥔 채 중앙에 모았다. ‘핵심은 공존.’ 합치려 하지 않는다. 유지하는 의지. 유지하는 믿음. 두 힘을 극한으로 공존시키며 회전시킨 끝에. 두 힘을 가르던 경계인 ‘피’가 옅어져 사라진다. <시몬 오리지널 – 왜곡(歪曲), 소용돌이> 우우우우우우우! 시몬의 두 손에서 피어난 검푸르고 창백한 눈이 주위의 모든 것을 일그러뜨리며 나타났다. 시몬을 그것을 천천히 앞으로 보냈다. 회색 연기가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됐다!’ 시몬은 그 상태에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소용돌이는 시공간을 일그러뜨리지만, 시몬의 몸은 소용돌이 속에서 유지할 수 있었다. 콰콰콰콰쾅! 퍼어어엉! 뒤에서 굉음이 울려 퍼진다. 왕자들의 네크로맨서들이 어느새 따라잡아 흑마법을 퍼붓고 있는 것이다. 시몬의 시선이 잠깐 뒤로 쏠렸고. [집중해라 소년!] 퍼뜩 정신을 차리고 다시 정면을 바라본 시몬의 몸 일부가 실처럼 가늘게 변하고 있었다. [집중력이 흩어지면 네 몸도 빨려 들어간다! 등 뒤의 방어는 내게 맡겨라!] ‘네! 부탁해요, 피어!’ 다시 집중력을 끌어올린 시몬은 앞만 보고 한 발 한 발 신중하게 걸어갔다. ‘끙, 역시 정신력 소모가……!’ 공존할 수 없는 두 힘의 공존. 이것을 유지하는 일 자체가 머리가 아득해질 만큼 힘들었다. ‘유지한다. 합쳐지게 두면 안 돼!’ 두 힘이 합쳐지면 필연적으로 충돌이 일어난다. ‘혼돈’이 되는 것이다. 오로지 서로 갈라져서 확고히 영역을 유지해야만 이 공간이 뒤틀리는 기적을 유지할 수 있다. 입술을 깨문 끝에 피가 철철 흐른다. 머리는 점점 더 아득해진다. 대체 얼마나 깊은 걸까. 만약 이 공간 전체가 이 연기로 가득 차 있다면, 시몬은 이 자리에서 죽을 것이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내가 아는 결사는-’ 시몬이 허억 허억 웃으며 미소 짓는다. ‘순수한 파괴를 선호하지 않아. 목적이 있기에 움직여.’ 결사를 믿기에 역설적으로 힘을 낼 수 있다. 어느새 회색뿐이던 시야가 옅어지며 전방에 건축물 같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반대편으로 나온 것이다. 마침내. 촤아아아아-! 시몬이 밖으로 빠져나왔다. 허억 헉! 숨을 내뱉은 시몬이 몸을 천천히 뒤로 돌리고는 소용돌이를 손에 쥔 채 회색벽 방향으로 밀었다. ‘해제.’ 회색벽 안에서 굉음이 울려 퍼진다. 무사히 벽에서 빠져나온 시몬이 숨을 헐떡이며 마침내 도시의 경관을 바라보았다. ‘자, 무사히 들어오긴 했는데.’ 여기가 바로 벽의 내부, 영지 벨하이츠였다. ‘세상에.’ 베일에만 싸여 있던 벨하이츠의 경관이 드러나는 순간, 시몬은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동안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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