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980화 불길한 예감이 치밀었다. “리사라! 어디 있어? 리사라!” 시몬은 서둘러 지하로 내려갔다. 곳곳에서 부서진 가휀의 항아리 병사들과, 사람의 핏자국이 보인다. 이미 누군가 여기를 통과한 모양. 마음이 더 급해졌다. 날 듯이 지하 계단을 뛰어넘은 시몬은 리사라가 있는 지하층으로 진입했다. ‘!’ 그러나 이미 그녀가 있는 방의 돌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리사라!”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건 리사라의 모습. 레테가 설치해 준 마법진에 우두커니 주저앉아 있는 그녀는 오른팔을 비롯한 신체 일부가 불안정하게 커져 있었다. 이미 그 괴물의 모습으로 변했다가 돌아온 것 같았다. 그리고 저 멀리 피 웅덩이 위에 쓰러져 있는 남자. 전 아크팔라딘 사냥꾼의 동료였던 바로 그 팔라딘이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검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한발 늦었네.’ 팔라딘에 의해 의식을 방해받는 바람에, 그녀는 레테가 설치해 준 마법 과정을 100% 소화하지 못했다. 남아 있는 마법진의 요소들이 먼지처럼 사라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리사라는 육체적인 상처 이전에 정신적인 충격을 크게 받은 것 같았다. “……수사관님.” 리사라가 시몬을 발견하고 고개를 들었다. “제, 제가 또 사람을 죽였어요.” “리사라.” “저분이 검으로 저를 계속 내려치면서 말했어요.” 그녀가 팔로 목을 감쌌다. “빨리 죽으라고. 너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두려움에 떨고 있는 줄 아느냐고. 네가 죽는 게 이 세상을 위한 일이라고.” 방울진 눈물이 뚝뚝 지하실 바닥에 떨어졌다. “틀린 말은 아니어서 반박할 수 없었어요.” 그녀의 감정이 격변하며 몸이 변하기 시작했다. 전신이 길쭉해지고 살갗이 달라붙는다. “여러분은 저를 위해 목숨을 걸었는데, 저는……!” “리사라!” 시몬이 버럭 소리 질렀다. 반쯤 악마로 변해가던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시몬을 보았다. “아직 안 죽었어.” 시몬은 이미 피를 흘리는 팔라딘의 몸에 ‘힐링’ 마법을 걸고 있었다. 상처를 빠르게 회복시킨 뒤 포션까지 몇 병 부었다. 그렇게 긴급조치를 마친 뒤, 팔라딘을 끌고 가 밧줄을 꺼내 기둥과 연결해 묶었다. 솔직히 조금 화가 났다. ‘간신히 리사라의 멘탈을 붙잡아놨는데 이 사람이 망칠 뻔했네.’ 시몬이 힐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진전은 확실히 있어.’ 착각이 아니라면, 이전에 그 비쩍 마른 미라 같은 몸뚱이에서 살이 조금 더 붙은 것 같았다. 변화의 징조. 희망이 보인다. 지금은 절망에 빠질 때가 아니라, 성공에 기뻐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다. “정신 차리고 들어, 리사라. 에이툴라가 여기 찾아왔어.” “네?” “다른 선발생들까지 전부 다. 널 지키겠다면서 온 거야. 지금은 밖에서 널 체포하려는 병사들과 싸우고 있어.” 시몬은 에이툴라가 했던 말을 가감 없이 들려주었다. 리사라는 커다란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에이툴라 자매님이……!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저를 위해……!” 변화가 일어난 건 그때였다. 그녀의 비쩍 마른 악마의 몸에서 조금 더 팔다리가 하얘지고 살이 붙어갔다. ‘역시!’ 시몬의 눈이 반짝였다. 리사라의 전대였던 ‘신모의 성녀’의 경우, 17세 신입생 때 머리카락이 검게 물들고 빠지면서 극단적인 우울증에 시달렸다. 이때 극복한 계기는 그녀를 사모하던 한 소년의 한마디. -왜? 네 과거의 모습은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 네 머리카락도 좋아. 그때를 기점으로 그녀의 머리는 다시 길어졌다. 즉, 이쪽 계통의 성녀들의 각성 조건은 정신적인 성장. 리사라가 더 자괴감에 빠지고 정신적으로 수렁에 빠질수록 그녀의 모습은 흉측해진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성녀로서 원래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리사라. 그쪽으로 갈게.” 시몬이 성큼성큼 걸어왔다. 리사라가 히끅! 소리를 내며 원래 크기로 줄어들었다. “선발생 10번 유클리드.” 시몬은 그녀의 앞에 정중히 무릎을 꿇고 양손을 내밀었다. “여신의 이름 앞에서 우수성사를 요청하겠습니다.” “네?” 그녀가 멍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자, 시몬이 머쓱하게 웃었다. “일단 나도 서류상 선발생이야. 하늘섬의 그 누구라도 거부할 수 없는 거 알지?” 그녀가 얼른 마주 꿇어앉고 시몬의 손을 맞잡았다. “무, 무무, 물론입니드악! 바, 받아들이겠습니다!” 이내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침묵 속에서 시몬이 먼저 입을 열었다. “리사라.” “아, 네!” “신인 예배회 ‘거리 탐방’ 때, 같이 우수성사 했던 거 기억나?” 그녀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잊을 수가…… 없죠.” -믿어. 다른 누구도 아닌 너 자신을. -신성을 일으키는 건 너야. 지금의 네게 필요한 건 여신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너 자신에 대한 믿음이야. “지금은 어때? 너 자신을 믿어?” 시몬의 물음에 그녀가 고개를 푹 숙였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가 이내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솔직히 말하면, 못 믿는다고 생각해요. 아무리 생각해도 전 성녀가 될 자격이 없어요.” 워낙 많은 일들을 겪었으니, 아마 자기 자신이 누구보다 혐오스럽고 부끄러울 것이다. 하지만 시몬은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상관없어. 우리는 너를 믿으니까.” “네?” “너를 위해 다나와 싸우고 있는 레테 성녀님도, 브로데릭 교수님도, 가휀 교수님도.” 시몬이 목소리가 이어졌다. “1번부터 8번까지의 선발생들도, 심지어 에이툴라까지 모두가 너를 믿고 있어.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성녀가 될 자격이 없다고? 그게 무슨 상관이야.” 시몬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만인의 성녀가 될 자격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면, 너를 믿는 사람들을 위한 성녀가 되는 거야. 어때?” 그녀의 동공이 크게 확대되었다. -리사라는 대단해. 우리 일족의 보배야. -높으신 곳에 있는 성녀만 성녀요? 리사라는 우리의 자랑이자, 프리즈펠만의 성녀라오! 에프넬에 입학할 때 마을 사람들이 해줬던 말들. 그때 그녀는 이 말을 받아들여서 여신이 벌을 내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몬은 긍정하고 있다. 사실 대륙이 어떻고, 신성연방의 주민들이 어떻고. 그런 건 마음에 와닿지 않는다. 하지만 내 손닿는 사람들을 지키는 거라면. “그래도…… 될까요?” 그녀의 콧잔등이 씰룩거렸다. “그렇게 보잘것없는 성녀가 되어도 될까요?” “보잘것없지 않아.” 시몬이 빙그레 웃었다. “어떤 사람들에겐 최고의 성녀잖아.” 리사라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자신을 죽이려 한 사람의 얼굴을 한 남자. 처음엔 당연히 두려웠다. 하지만 그와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따뜻한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유클리드와는 완전히 별개의 인간이라는 강한 확신. 그러자 그의 모습이 다르게 보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가 품고 있던 감정도 커졌다. “수사관님.” 리사라가 천천히 다가왔다. 그리고. “!” 시몬은 일순 주위의 세상이 하얗게 물드는 걸 느꼈다. 이내 3개의 성녀의 정수의 잔해가 남아 만들어진 왕좌. 그 옆으로 4번째 왕좌가 들어선다. 왕좌는 조각된 사람의 팔이 감싸고 있는 모습이다. ‘뭐야? 어떻게 다음 정수의 잔해가 들어왔지?’ 갑자기 다음 성녀의 정수의 잔해를 손에 넣었다. 남은 왕좌는 3개. 시몬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 하얗던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오며, 리사라의 분홍색 입술이 코앞에 보이고 있었다. 종이 한 장 차이로 닿지는 않고 있었지만, 그 숨결은 전해진다. 이내 시뻘게진 얼굴로 눈을 감고 있던 리사라가 얼른 고개를 옆으로 돌려보았다. “앗, 죄송합니드아악! 저도 모르게!” 시몬도 당황한 웃음을 지으며 물러났다. 그녀가 여전히 시뻘게진 얼굴로 입술을 삐쭉이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렇게 하면…… 반칙이니까. 레테 님을 볼 면목도 없고요.” “? 무슨 소리야?” “아, 아무것도 아닙읍니다!” 쿠웅! 그때 저 위의 지상 쪽에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여전히 전투가 계속되고 있는 모양. 시몬이 표정을 고쳤다. “그럼 다시 시작하자. 준비됐어?” “네.” 그녀가 두 손을 맞잡았다. 바닥에 남아 있는 신성이 빛을 일으켰다. “나는-” 그녀의 몸에서 눈부신 광채가 쏟아져 나오며 성녀의 권능이 발휘되었다. 시몬은 몇 걸음 물러나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내 그녀가 주문처럼 외쳤다. “뭐든지 할 수 있다!” *** “막아라! 성녀님들을 보호해라!” “저택으로 돌파해라! 악마를 잡아 죽여라!” 요새는 완전한 난전 양상으로 돌입했다. 신수들이나 선발생들뿐만 아니라, 레테가 일부러 대기 명령을 내려뒀던 그녀의 직속 팔라딘들까지 레테를 지키기 위해 일제히 전투에 합류한 것이다. 물끄러미 전황을 지켜보던 심판의 성녀, 다나가 태연히 말했다.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구나, 레테.” 하아. 큭. 흐읍. 레테의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이마에는 핏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었고, 교복이 찢어진 오른팔은 축 늘어진 상태에서 왼팔로 고정하고 있었다. 떨리는 두 다리는 금방이라도 자리에 주저앉을 것처럼 위태롭다. “처음부터 정상 컨디션이 아니던데, 그 몸으로 나를 막아세운 건 칭찬해 주마.” “닥쳐!” 레테가 버럭 소리 지르며 팔을 휘두르자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더니 혜성 하나가 쏟아져 내렸다. 다나는 흥미롭다는 얼굴로 검을 붙잡았다. “다음 최강은 네가 될지도 모르겠구나. 하지만-” 그녀의 검이 허공을 그었고. “아직은 아니야.” 쩍! 내려오는 별 하나가 커다란 단면을 그리며 좌우로 갈라졌다. 레테가 ‘빌어먹을!’ 하고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다시 오른팔을 펼쳤다. 두 사람의 전투가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전체적인 전황 또한 숫자가 많은 다나 측 세력이 점점 더 유리해지고 있었다. -크르르릉! 신수들도 결국은 힘이 빠져서 하나 둘 총무주교 측 병사들에게 포획당하고. -허억! 헉! 팔라딘님께! 우수성사 요청하겠습니다! -지, 지금? -선발생의 우수성사는 절대적이에요! 위대한 여신의 분노를 사고 싶은 건가요? 선발생도 있는 방법 없는 방법 모두 쥐어짜 내고 억지까지 쓰면서 버텨냈다. 하지만 패색이 짙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브로데릭의 결계가 깨졌다! -들어가자! 마침내 브로데릭마저 무너지고, 결계에 막혀 있던 대규모 병력이 한번에 진입하기 시작했다. 여유롭게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다나가 레테를 보았다. “다 끝났다. 지금이라도 악마를 내놓으면 목숨만은 살려주마.” “……헛소리 그만하고.” 레테가 스읍 소매로 입가를 닦으며 미소 지었다. “악마인지 아닌지는 직접 눈으로 확인하시지?” “뭐?” 화아아아아아아아아악! 레테의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저택에서 눈부신 섬광이 치밀어 올랐다. 전투 중이거나 돌입하던 병사들 모두가 멈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눈부신 머리카락에, 빛으로 몸을 덮고 있는 거대한 여성의 형체가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큰 키와 등에 난 날개, 새하얀 옥빛 피부와, 단아한 얼굴. 경전에 흔히 묘사되는 ‘천사’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녀가 두 손을 맞잡았다. [저는 악마가 아니에요. 제 이름은 리사라.] 그녀가 눈을 떴다. [위대한 여신의 인정을 받은 성녀입니다.] 병사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리사라라면 분명 토벌해야 할 ‘악마’인데…….” “저분이 악마라고? 어딜 봐서?” 순식간에 진형 전체에 혼란이 벌어졌다. “이건 안 좋군.” 다나가 검을 고쳐쥐고 리사라를 향해 휘두르려고 했지만. “어림없지!” 레테가 즉각 돌진해서 두 팔로 그녀의 칼을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베려고 하는 자와 막으려 하는 자. 두 사람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싸움을 멈추세요.] 리사라가 모아 쥔 두 손에 힘을 주자 눈부신 성녀의 권능과 깨끗한 신성이 뿜어져 나왔다. 병사들과 팔라딘들이 모두 동요했다. “저렇게 아름다고 깨끗한 신성이라니……!” “이건 역시…….” “아니야! 아니야!” 앞으로 뛰어나온 총무주교가 발악하듯 외쳤다. “저건 악마다! 악마란 말이다! 모두 공격하라!” 리사라가 하늘로 날아올라 더욱 밝은 빛을 쏟아냈다. [검을 거두세요. 더 이상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치게 하는 건 용서할 수 없습니다.] 철컥. 절그럭. 그러자 병사들이 홀린 것처럼 하나둘 무기를 바닥에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그라툴라 미 키빌리스.” “그라툴라 미 키빌리스.” 그러고는 기도하듯 두 손을 모아 쥐고 고개를 조아렸다. 한 명 두 명 무기를 버리고 무릎을 꿇는 사람들이 늘어나더니 어느새 이 근방의 모두가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여신과 가장 가까운 딸을 뵙습니다!” 리사라가 이에 응답하듯 눈부신 신성을 발했다. 공격하라는 총무주교의 발악하는 외침은 허무하게 흩어졌다.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 “하아.” 그리고. 저택의 지붕 위에 올라온 시몬은 미소를 지으며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딱 맞춰서 성공했네, 리사라.” 눈부신 광명이 어두운 새벽하늘을 밝혔다. 내전이 끝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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