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932화 화이트의 말대로, 중앙연구소는 도시 하나를 방불케 할 만큼 거대했다. 이렇게 거대한 연구시설이니 암서나 이상증상 물약, 호문쿨루스 화이트 같은 생체 흑마법 기술들이 끊임없이 튀어나오는 것도 이상할 게 없었다. 기회가 왔을 때 전부 파괴해야 했다. '시설 파괴는 바힐 교수님께, 화이트 구출은 세르네에게 맡기고......!' 달리던 시몬이 고개를 들었다. 연구소의 한쪽 벽면을, 5군단의 언데드들이 벌떼처럼 새까맣게 뒤덮은 채 이동하고 있었다. '군단은 내가 맡는다!' 무형의 망토를 휘날리며 시몬이 공중으로 치솟았다. 파멸의 대검을 연달아 휘두르자, 대검을 따라 일어난 흰색 빛줄기가 새까만 배경을 가로 지으며 그어졌다. 이어지는 섬뜩한 절단음이 귓가를 채우고, 찢어진 뼈와 썰린 살점이 공중에 비산했다. 몰려들던 언데드 무리가 썰린 파이처럼 바닥에 눌어붙었다. 타악. 한바탕 연격을 퍼부은 시몬이 바닥에 내려와 전황을 훑었다. 강적을 만나면 방향을 바꾸라는 명령이 내려져 있는 걸까. 5군단의 언데드들은 매그너스 특유의 불길한 칠흑을 흩뿌리며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통제된 군단병답게 모든 인간을 공격하진 않았다. 도망치는 결사의 일원들은 노리지 않는 대신, 갈라져서 두 방향으로 달리고 있었다. 한쪽은 바힐이 버티고 있는 메인 홀. 다른 한쪽은 홀에서 조금 앞으로 더 나아간 방향. 아무래도 화이트와 세르네의 위치를 파악하고 그쪽으로 가려는 것 같았다. 정확하게 목표물에 대한 설정이 이루어져 있다. 역시 군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흐읍!" 물론 저들이 화이트와 세르네 쪽으로 가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시몬이 파멸의 대검을 기둥과 벽을 향해 휘두르자, 천장 한쪽이 즉각 무너져 내리며 몰려가는 언데드들을 깔아뭉갰다. '이런 것도 임시방편, 원인을 제거해야 해.' 시몬은 다시 바닥을 박차고 언데드들이 쏟아져 나오는 방향으로 달렸다. 위잉! 위잉! 달리는 내내 연구소 전역에서 경보음이 귀가 터질 것처럼 울려 퍼졌다. 서두르는 시몬의 심장도 쿵쿵 뛰었다. 가끔 보이는 결사의 연구원들은 도망치기 바빴고, 가끔 흑마법이나 아티팩트 따위로 덤비는 자들도 있었지만 피어를 입은 시몬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벽을 박차고 연달아 도약하며, 5군단의 언데드들을 뭉텅뭉텅 썰면서 달리던 끝에 마침내. '찾았다......!' 연구소 한쪽에 '포탈'이 보였다. 허공이 벌겋게 갈라진 채 새로운 공간으로 이어져 있는 모습. 바로 저 공간에서 5군단의 언데드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저기가 확실하네.' 포탈은 이어지는 공간의 광경을 비추고 있었는데, 어떤 성처럼 보이는 건축물이 불쑥 솟아 있었다. 저기가 바로 제5군단의 새로운 본거지인 것 같았다. 저 안에서 살을 찌르는 듯한 매그너스 특유의 끔찍한 칠흑이 풀풀 흘러나오고 있다. 대놓고 이리로 들어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선택의 여지가 없어. 여길 막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위험해.' 아마 시몬이 가지 않으면 매그너스가 직접 나오리라. 고민은 잠시뿐이었고 행동은 빨랐다. 시몬은 허공에서 쏟아져 나오는 5군단의 언데드들을 한 차례 갈라낸 뒤, 시뻘건 공간 안으로 몸을 던져 넣었다. * * * 타악. 열린 포탈을 통과하니 별다른 저항감 없이 다른 공간으로 넘어왔다. '......넓다.' 드넓게 펼쳐진 회색 바닥 위, 연기가 뿌옇게 날리고 있고 주변은 온통 어둠이다. 알고 보니 이곳만 '섬'처럼 암벽 덩어리가 공중에 떠 있었다. 고개를 돌려 보면 끝없는 낭떠러지. 주위에 작은 바위들이 떠 있긴 하지만 여기만큼 큰 곳은 없었다. 그리고 이 섬 위에 우뚝 솟아 있는 거대한 목각성. 성 뒤에는 붉은 달이 펼쳐져 형언하기 힘든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성으로 올라오는 텅 빈 계단 위. 한쪽 다리를 계단에 얹은 채 눕듯이 앉아 있는 하얀 머리카락의 소년이 보인다. "왔나." 평소의 무표정한 모습이 아닌, 삐딱하게 웃는 모습에는 감정이 느껴지고 있었다. "화이트, 아니." 시몬의 입이 열렸다. "매그너스." "그래." 타악. 한쪽 계단에 올려두었던 다리를 편하게 내려놓은 그가 깍지를 끼고 시몬을 응시했다. 보아하니 결국 다른 화이트의 몸을 차지한 것 같았다. "내가 이 순간을 얼마나 고대했는지 모를 거다, 시몬 폴렌티아. 군단과 군단 간의 전쟁. 더 강한 자가 모든 걸 손에 넣는 결전. 아주 가슴 떨리는 일이지 않나?" "......." "여기는 '그늘성'이라고 한다. 던전이지. 듣자 하니 던전주의 힘을 빼앗는 능력을 가지고 있던데, 성안에 던전주를 봉인해 놨으니 네가 이기면 이 성채까지 네 차지다. 꽤 괜찮지 않나?" 매그너스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자, 그럼 주연들을 불러 모아볼까." 그러고는 딱! 소리 나게 손가락을 튕겼다. 저벅. 저벅. 저벅. 계단에서 어마어마한 존재감을 뿜어내는 언데드들이 하나둘 내려오고 있었다. 시몬이 바짝 긴장한 얼굴로 파멸의 대검을 붙잡았다. [펜타모니엄 사태 이후 오랜만에 뵙습니다. 7군단장.] 말끔한 집사복을 차려입고, 손에는 쟁반과 찻주전자를 들고 있는 남자. 그러나 셔츠 너머로 보이는 창백한 피부와 몸 곳곳에 벌어진 상처는 인간이 아님을 짐작하게 한다. 제5군단 백귀 부대의 대장, 좀비집사. [전부 우리 자기의 예상대로네. 정말로 순순히 들어오다니.] 스스스스스스- 상반신은 여성, 하반신은 뱀으로 이루어진 언데드가 긴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나타났다. 뼈가 드러난 꼬리가 땅에 맞닿아 스칠 때마다 기괴한 소리가 울려 퍼졌고, 그녀의 칠흑에 반응해 떨리는 대기는 마치 뱀이 위협하는 듯한 소리처럼 들렸다. 제5군단 데드나가 부대의 대장, 뱀공주 라미아. [나는 알라제. 형제 탈라제의 복수. 반드시 실행.] 꾸르르륵! 꾸르르륵! 바닥에서 살점이 일어나더니 순식간에 살점괴물의 형태로 솟구쳤다. 그리고 하늘에서 떨어진 로브가 그 살점의 몸을 감쌌다. 마법 언데드 디바우러 부대의 대장, 알라제. [살육! 분쇄! 찢어 죽이자! 하하하하하하!] 각기 다른 다섯 개의 팔에 거검을 든 거구의 언데드. 스워머(Swarmer) 부대의 대장, 브루트. "너도 나와야지, 애버리스(Avarice)." 카작! 카작! 카작! 카작! 카작! 매그너스의 한마디에, 그의 발밑으로 눈코입이 달린 그림자가 일어났다. 그것은 사람의 형상으로 변해 허리 숙여 인사를 한 뒤 사라졌다. 이제 매그너스가 천천히 일어나 팔을 들어 올렸다. "와라, 5군단." -게에에에에엑! -끼리리리리릭! -아아아아아아아아! 그늘성 전체가 들썩였다. 수많은 언데드들이 비명을 지르며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섬 전체가 언데드로 들끓었고, 이들이 각 에이션트 언데드들 뒤에 섰다. 연구실 밖으로 빠져나간 5군단의 언데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대영지 몇 개 정도는 눈 깜짝할 사이에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는 병력이 이곳에 집결했다. 매그너스가 두 팔을 벌렸다. "우리에게 대항할 수 있겠나. 시몬 폴렌티아." 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크르르르르르르르륵! 귀곡성을 연상케 하는 외침에 대기가 뒤흔들린다. 네프티스와 키젠 측에 크게 공격당해서 병력은 많이 없을 줄 알았는데, 매그너스는 벌써 이 정도까지 5군단을 회복한 상태였다. 후우. 시몬은 숨을 길게 내뱉은 뒤 고개를 들었다. "대항이 아니라 이길 생각으로 왔다." 이번엔 시몬이 하늘을 향해 팔을 뻗었다. "나와라." 시몬의 뒤로 허공에 긴 선이 그어지더니, 그것이 괴물의 입처럼 위아래로 쩌어억 벌어졌다. 쿵-! 그리고 그 안에서. 쿵-! 군단이 진군한다. 쿵-! 쿵-! 쿵-! 7군단의 언데드들이 새까맣게 몰려들어 시몬의 옆으로 다가왔다. [무슨 준비 했을까 걱정했는데, 별거 아니네요. 군단장님.] -끼리리리리리! -키리릭! 크고 작은 송장거미 사이로, 몸에 달라붙는 스파이 복장 차림을 한 분홍색 머리카락의 여성이 걸어왔다. 7군단 거미 부대의 대장, 에르제베트. -어어어어어. 좀비 하나가 어슬렁거리며 시몬의 앞으로 걸어왔다. 시몬이 가볍게 터치하자 검은 벼락이 떨어졌고, 이내 좀비의 모습이 값비싼 귀족 옷차림에 작은 왕관을 삐딱하게 쓴 귀공자 아이로 변했다. [7군단의 히든카드 등장!] 어린 좀비가 시몬과 하이 파이브 한 뒤, 5군단의 군세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좋은데! 바로 이런 전투를 기다렸어!] 데스랜드의 지배자이자 7군단 좀비 부대의 대장, 프린스. 쏴아아아아아아아아-! 이번에는 한쪽에 모래로 황금색 카펫이 깔렸다. 그 위로 집들이 솟구치더니 창문과 대문이 열리며 붕대로 몸을 감싼 언데드, 미라들이 하나둘 튀어나왔다. 그 앞으로 지팡이 하나가 쌩하고 날아오더니 모래가 모여들며 지팡이 위에 앉은 긴 머리의 여성의 형상을 이루었다. [얼마든지 말만 해, 꼬맹아.] 7군단 미라 부대의 대장, 헤르세바. 후우우우우우웅-! 7군단의 머리 위를 호위하듯 날아다니는 하피 언데드, 스컬윙들이 상공을 빼곡하게 메웠다. 그리고 스컬윙들이 좌우로 물러나자, 여섯 쌍의 날개를 펄럭이며 중년 남자의 형상을 한 거구의 언데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소신, 주군의 부름을 받고 당도했습니다.] 스컬윙 부대의 대장, 아케뮤스까지. 뒤이어 크고 작은 언데드들이 끝도 없이 우르르르 쏟아져 나왔다. 시몬이 지금까지 키젠에서 만들거나 개발했던 수많은 언데드들은 물론, 피어가 수집한 언데드들로 구성된 증원 병력, 시몬이 예전에 손에 넣은 크리스탈 스켈레톤 등의 희귀 언데드, 거기에 북부의 네임드 언데드들까지 있었다. -삐융! 삐유융! "아, 참. 너도 있었지." 통통 튀어 올라 시몬의 머리 위를 차지한 새끼 데드나가, 어린 라미아가 주위로 물벼락을 뿜어내며 등장했다. [.......] 저 멀리 어린 라미아의 원본이라고 볼 수 있는 5군단의 라미아가 경악하는 눈으로 지켜보는 모습이 보였다. 그르르르르르! 키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 성 위는 제5군단이, 성 아래의 공터는 제7군단이 차지했다. 서로 맞상대하듯 으르렁대며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일촉즉발, 폭풍전야의 상황. 이내 서로의 군단 앞으로 두 군단장이 걸어와 팔을 들어 올렸다. [전군.] [전군.] 전장에 울려 퍼지는 양측의 절대명령. 두 목소리가 서로 경쟁하듯 크고 강하게 울려 퍼지며 끝없이 메아리친다. 언데드들은 군단장의 의지를 행하기 위해 몸을 팽팽하게 당기며 돌진할 준비를 했다. 시몬이 새하얀 파멸의 대검을, 매그너스가 새까만 그림자 검을 들어 올렸다. [진군하라!] [돌격하라!] 끼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엑! 캬르르르르르르르륵! 구워어어어어어어어어어! 거대한 발소리와 흙먼지가 전장에 가득 울려 퍼졌다. 기다렸다는 듯 수를 셀 수 없는 무수한 언데드들이 서로를 향해 돌진했다. 이내 두 군세의 선두가 중앙에서 맞부딪히며 검은 피와 살점이 튀었고, 흑마법이 사방에서 터져 나온다. 하늘에는 스컬윙들과 비행형 디바우러들이 맞부딪혔다. 그리고 한발 물러나 있던 시몬과 매그너스는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기다리마.' 입 모양으로 그렇게 말한 매그너스가 턱짓하더니, 웃음을 흘리며 성 쪽으로 걸어갔다. 시몬도 힘차게 파멸의 대검을 붙잡았다. "잡으러 갈까요? 피어." [크하하하하! 물론이다! 이런 사냥감을 놓칠 순 없지!] 드디어. 미래 암흑연합의 행방을 뒤바꿀 군단 간의 전쟁이 시작됐다.
Please login to track progr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