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889화 신성으로 정화된 뒤의 해적선 갑판. 그곳에는 시몬만이 멀쩡히 서 있을 수 있었다. 펄럭! 새하얀 빛의 힘을 휘감은 채, 머리카락과 옷깃이 떠오르고 있는 시몬의 모습은 형언할 수 없는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가 주먹을 천천히 쥐었다 폈다. '확실히 달라졌네.' 무려 세 개의 성녀의 정수를 손에 넣은 뒤, 시몬의 신성 운용량은 방대해져 있었다. 집에서는 어머니인 안나, 학교에서는 신성 방어학 교수 파라한에게 받는 훈련 외에는 따로 백마법 공부를 하지 않았기에, 수준 자체가 크게 향상된 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대한 신성량으로 밀어붙이는 시몬의 신성공세는 가공할만한 위력이었다. 시몬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힘에 압도당해 쓰러져 있는 해적 선장 에크레시가 보였다. [대체...... 어떻게 네크로맨서가.......] "잠시 이쪽 세계로 와보니 알겠어." 하늘에 살짝 떠 있던 시몬의 두 발이 갑판에 포근히 내려앉았다. 펄럭이며 하늘로 올라가 있던 앞머리가 차분히 내려와 이마를 덮었고, 옷깃도 다시 원래대로 자리를 잡았다. 방금의 상황이 꿈이라도 되는 것처럼, 시몬의 몸에 신성이 깨끗이 사라지고, 다시 칠흑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시몬이 에크레시를 보며 말했다. "당신, 이미 죽었어." [뭐?] "죽었다고. 네크로맨서라 혹시나 했는데, 지금은 언데드 상태야." 결국 해적 선장 에크레시도 누군가에게 조종당하고 있다. 전혀 결이 다르긴 하지만, 굳이 묘사하자면 흑마법을 쓰는 '리치'에 가까운 상태다. [내가 죽었다고? 그럴 리가 없다!] 에크레시가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이 배의 주인인-!] 콰앙! 시몬이 다가와 왼팔로 그의 목을 붙든 채 나무벽에 처박았다. 그가 양손으로 시몬의 팔을 붙들고 버둥거렸지만 시몬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 상태에서 시몬이 천천히 눈을 감고, 오른손으로 에크레시의 가슴에 손을 올린다. 심장의 박동도 느껴지지 않고 코어도 느껴지지 않는다. 코어의 위치는 어디인가. 시몬은 조금 위에 손바닥을 대고는 자신의 칠흑을 흘려 넣었다. 언데드를 군단화시키는 기술이었다. [커헉!] 에크레시가 고통스럽게 칠흑을 토해냈다. 시몬이 집중력을 끌어올리고 있는 그때. "!" 에크레시의 사념에 순간적으로 연결되는 순간. 그의 기억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왔다. -선장! 지금 이런 곳에 있을 때가 아니잖아! 그의 기억 속에는 아직 해적 언데드 모두가 살아 있던 상태였다. 언데드들을 쓰러트릴 때 그들이 입고 있던 몇몇 옷가지는 눈에 익기도 했다. -귀족들이 우리 바다에 함대를 끌고 왔어! 놈들이 아직 항구에 있을 때 가서 쳐야 해! -그럼, 도망칠 순 없지! 여긴 우리의 바다야! 해적들의 상태나 분위기는 그리 좋지 않아 보였다. 저렇게 열을 올리는 해적들은 별로 없었고, 대부분 힘없이 바닥에 걸터앉아 있거나 럼주를 마시기 바빴다. 부상자도 많았고, 함선의 상태도 부분부분 박살 나 있었다. 이미 큰 패배를 겪은 뒤인 것 같았다. -이기고 싶나? 그때 선장 에크레시가 동료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 순간 주위가 어두워지며 배가 바다 동굴 안으로 들어왔다. -모두에게 다시 묻겠다. 이기고 싶나? -다, 당연히 이기고 싶지! -그런데 지금 우리 힘이 부족한 걸 어떻게 하냐고. 저쪽이 배도 더 크고, 칠흑 사용자들도 많은....... 에크레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힘을 얻을 방법이 있다. 그 순간, 기억을 읽고 있던 시몬은 똑똑히 보았다. 비공정의 위치를 알리던 그 청소부에게 봤던 것처럼, 에크레시의 한쪽 동공이 금색의 삼각형 형태로 일그러져 있는 모습을. 쿠구구구궁! 갑자기 선체가 크게 흔들렸다. 선원들이 비명을 지르며 갑판 위로 쓰러졌고, 이내 선체가 시커먼 문어 다리를 연상케 하는 것으로 휘감기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비명과 놀란 음성이 교차했다. -서, 선장! 우릴 어디로 데려온 거야! -이 방법밖에 없다. 에크레시가 두 팔을 벌리며 광인처럼 웃어댔다. -모두 내 언데드가 되어줘야겠다! 너희들의 복수는 내가 반드시 해주마! 그리고 이 동굴의 끝에서, 거대한 아가리가 튀어나와 함선을 집어삼켰다. "......!" 이어서 시몬이 강렬한 두통을 느끼며 뒤로 물러났다. 시몬에게서 풀려난 에크레시가 바닥에 주르륵 주저앉았다. "알 만하네." 시몬이 한심하단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전쟁에서 이기려고 동료들을 팔아넘긴 거야?" [아니다!] 그가 고개를 내저으며 거칠게 부정했다. [동료들은 나와 함께다! 모든 건 귀족 놈들에게 이길 힘을 위해......!] 시몬은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지 않았다. 대신 제 오른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중이었다. 군단화를 사용하려고 했는데 결과는 실패. '북신 때와는 달라. 숙주와 너무 강하게 연결된 상태라서 그런 건가.' 혹시나 군단화시킬 수 있다면 몰랐겠지만, 완전히 미련을 버린 시몬이 등을 돌려 걸어갔다. [멈춰라, 키젠! 승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키이이이잉! 에크레시가 손바닥에서 마법진을 펼쳤다. 시몬은 여전히 등을 돌린 채 시선만 살짝 돌려 그를 응시했다. "그만두는 게 좋아." 말을 들을 상대가 아니었다. 빠르게 마법진을 완성한 그가 함성을 부르짖으며 외쳐댔다. [죽여 버리겠......!] 으적! 그의 목덜미에 이빨이 꽂혔다. 퍼억! 콰직! 그의 복부에 검이 튀어나오며 구멍이 뚫리고, 뒤이어 무기와 손톱들이 틀어박혔다. 뒤늦게 에크레시의 고개가 돌아갔다. "아까 내 신성 마법에 당했을 때, 당신이 언데드들을 움직이던 마법진도 정화되어 사라졌어." 시몬이 태연히 말했다. "당신이 진짜 네크로맨서였다면 마법진이 없어도 소환수를 통제할 수 있었겠지만, 그게 아니니까." [자, 잠깐!] 자업자득. 그렇게 생각하며 시몬은 고개를 돌렸다. 전에는 동료였던 언데드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언데드가 된 에크레시를 다시 한번 물어뜯었다. '그럼.' 시몬은 갑판 바닥의 문을 열었다. '그 플레이그란 녀석을 보러 가볼까.' * * * 시몬은 신성을 사용했던 주위에 맹독 포션을 뿌려서 깔끔하게 신성의 흔적을 없앤 뒤, 함 내로 들어갔다. 그러는 사이 엘리사도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는 쓰러진 함장 대신 비공정 조타석에 자신의 유령을 심어두어 대신 운전하도록 했다. 그러곤 갑판 위로 나와보니, 해적 몬스터들의 공세는 한풀 꺾인 상태였다. 그래도 저 언데드 함선의 포격은 계속되고 있었다. 이대로 유령선들로 섬멸 포격을 해야 하나 고민했지만, 언데드 함선 안에 있는 시몬의 연락이 끊겨서 망설여졌다. -아, 진짜아! 결국 엘리사가 직접 유령선을 타고 언데드 함선에 올라탔다. 이미 갑판 위의 언데드들은 깔끔하게 정리된 모습. 그리고 갑판 아래에 함 내로 들어가는 입구가 열려 있는 게 보였다. 주위의 흔적을 보니 시몬이 이리로 들어간 게 틀림없었다. 그녀 또한 안으로 뛰어들었다. -와앗! 뭐야? 아래로 들어갈수록 온통 괴상한 문어 다리 같은 게 튀어나와 있었다. 어떤 부분은 나무가 아니라 언데드의 살점 같은 것으로 덮여 있는 끔찍한 형태이기도 했다. 하지만 시몬이 싸운 흔적은 확실히 남아 있었다. 엘리사는 잔뜩 긴장하며 그 흔적을 따라 함선의 내부 깊은 곳까지 들어왔다. '으윽, 토할 것 같아.' 이제는 기관실 내부까지 들어온 것 같았다. 동물의 내장에 들어온 듯한 고약한 냄새 때문에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그렇게 정신없이 내려가고 있는데, 저 멀리서 챙! 챙! 하고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야, 시몬! 거기 있냐?" 그녀가 그렇게 말하기 무섭게, 기다란 촉수들이 그녀에게 쇄도했다. 엘리사가 헉! 하고 칠흑방패를 펼치려는데 물컹한 바닥에 신발이 미끄러졌다. "꺄아악?" 그녀가 실수에 당황하며 넘어지려는 순간, 눈앞에 검은 코트가 펄럭이며 시야가 가려졌다. 이내 휘날리는 코트가 바닥에 내려올 즈음, 촉수들이 깔끔하게 단면을 보인 채 잘려나가고 있었다. "괜찮아? 엘리사." 그 앞에 푸른 머리카락의 소년이 일반 대검을 짊어진 채 중얼거렸다. "바닥이 미끄러우니까 조심해." "어...... 땡큐." 멍하니 눈을 끔뻑이던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가 '힉!' 하는 소리를 냈다. 전방에 커다란 뭔가가 보였다. "으아악! 저, 저 징그러운 건 뭔데?!" 선내에 거대한 괴물 언데드의 입 같은 게 벌어져 있었다. 돌기가 무수히 돋아나 있는 바다 불가사리의 입을 연상케 했다. 함선의 조타실을 바로 저 언데드가 점령하고 있었다. "플레이그. 이번 일의 원흉이야." 시몬이 태연히 대답했다. "결사의 지시대로 움직이는 감염계 언데드인 것 같아. 에크레시 해적단도 저 언데드에게 조종당하고 있었지." -키잉. 그리고 전면에는 시몬의 데스나이트가 싸우고 있었다. 깃발과 오러블레이드를 휘두르며 솟구치는 촉수들을 모조리 베어내는 모습. 엘리사는 속으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백 개의 촉수 속에서도 자유자재로 돌파하는 데스나이트의 모습은 검술의 극치를 보는 듯했다. "데스나이트." 마무리를 위해 시몬이 데스나이트 쪽으로 팔을 뻗었다. 그의 손에 일렁이던 칠흑이 손잡이처럼 변해서 붙잡혔다. "다음 공격으로 끝내자." 시몬과 데스나이트가 동시에 자세를 잡았다. 팟! 데스나이트의 움직임이 순간적으로 빨라졌다. 모든 촉수를 베어내며 돌진한 데스나이트가 이내 검을 크게 휘둘러 본체에 긴 검상을 남겼다. 촤아아아악! 검은 피가 쏟아져 나오며 괴물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질렀다. 쿠웅! 쿵! 주위에 솟구쳐 있던 다른 촉수들도 모두 내려앉았다. 시몬이 가볍게 손바닥을 털었다. "나이스, 수고했어." 적을 쓰러트리자마자 데스나이트가 이마 부딪히기를 하러 후다닥 시몬에게 달려왔다. 시몬이 진정하라는 듯 두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야! 저거 아직 움직이잖아!" 엘리사가 식겁하며 말했다. 그녀가 즉시 주위에 유령 포대를 연달아 꺼냈다. "방심하지 마! 내가 폭사시키......!" 그렇게 말한 그녀의 눈이 스르륵 감기기 시작했다. '어......? 갑자기 졸립.......' 그러다 털썩 바닥에 쓰러졌다. "미안." 슬립을 건 시몬이 손바닥을 떼며 말했다. "지금부터는 보면 안 되는 거라, 잠깐만 자고 있어." [크흐흐흐! 수고했다 소년!] [군단장니임!] -삐융! 피어와 에르제베트, 라미아까지 다가오고 있었다. 시몬이 그들을 돌아보았다. "마침 잘 왔어요." [쓸 만한 언데드를 잡았군!] 피어가 축 늘어진 플레이그를 보며 킬킬 웃었다. [이 녀석이 언데드 함선을 조종했다고 했나? 잘하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뮤르의 함선에 연동시키는 데 써먹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네, 그렇게도 되겠네요." 시몬이 플레이그를 살피며 말했다. 결사에게 조종당하던 언데드 개체. 쓰임새를 떠나서 연구할 필요성이 있어 보인다. [군단화시킬 수 있겠나?] "해봐야죠." 데스나이트를 아공간으로 불러들인 시몬이, 결사에 한 방 먹일 생각에 잔뜩 의욕을 내며 팔을 걷어붙였다. "바로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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