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871화 터벅. 터벅. 포탈 안에서 그믐달처럼 창백한 회색 피부의 남자가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피부색보다 더 짙은 회색 롱코트를 갑옷처럼 둘렀으며 손은 코트 주머니에 넣은 채 삐뚤빼뚤한 걸음걸이로 발을 디뎠다. 재색 머리카락은 물결무늬처럼 베베 꼬였고, 허리는 굽었으며, 목소리는 앳되면서도 성대가 마찰한 듯한 쉰 목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이야, 그리모와르." 남자가 고개를 젖히며 말했다. 허리를 쭉 펴자 2미터 가까이 되는 장신이 펼쳐진다. 그리모와르는 바짝 긴장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킬로바니안. 당신이 직접 여기까지 올 사안은 아니었다." "그건 어르신이 판단할 일이고. 뭔데?" 킬로바니안이 턱짓으로 공중에 둥둥 더 있는 발락을 가리켰다. 그녀는 조금 굳은 얼굴로 이야기했다. "실험체 BC1." "아, 키젠에 굴러 들어갔다는 그? 이제야 회수하는 거야?" "아직 이건 쓰임새가 있다. 폭주한 암서를 조정하고 있을 뿐이다." 킬로바니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너 설마." 꿀꺽. 그리모와르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한동안 정적이 느리게 흘렀다. 이내 킬로바니안이 피곤한 얼굴로 앞머리를 쓸었다. "내가 신경 쓸 바는 아니겠지. 배신의 군단장은?" 이때 그리모와르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천 번은 더 쉬었다. 1초라도 빨리 저 미친 괴물을 이 자리에 벗어나게 만들고 싶었다. "내 공간에 가둬놨다. 위치는 잘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빠져나갈 방법을 궁리하고 있을 거다." "좋아." 그가 오른발을 들어 구두 앞쪽을 지면에 향하고는, 가볍게 두어 번 툭툭 두들겼다. "오랜만에 이쪽에 넘어왔는데 산책이라도 해볼까. 아, 참." 그가 동작을 멈추고 포탈 쪽으로 휙 손짓했다. "일을 끝내기 전에 네가 먼저 당해 버리면 안 되니까 말야. 박사의 깜찍한 지원군들을 불러왔어." 구르르륵! 구르륵! 포털 안에서 피처럼 빨간 괴물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여섯 개의 다리에, 몸통이 세로로 길쭉한 변종이었다. 그러나 몸통에는 사람이나 몬스터들의 몸이나 눈깔이 뒤섞인 형태였다. 그리모와르가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박사의 실패작들을 왜 여기서?" "내 모든 창조물에 실패작이란 없다. 다음으로 향하는 계단이 되어줄 눈부신 부산물이 있을 뿐이다." 두 팔을 벌리며 중얼거린 킬로바니안이 그녀를 돌아보며 히죽 웃었다. "박사의 말이지. 너무 그렇게 싫어하진 마. 그래도 꽤 잘 싸우니까." 꾸르르르르르르! 킬로바니안의 지시에 따라 빨간 거미괴물들이 무서운 속도로 흩어졌다. 그 또한 터벅 터벅 걸어갔다. "조금 있다 보자. 그리모와르." 가볍게 한쪽 발을 떼는 듯하더니, 그의 몸이 흔적도 없이 자리에서 사라졌다. 잠시 멍하니 앞을 바라보던 그리모와르는 이내 다급히 몸을 돌려 발락의 몸에 마법진들을 펼쳤다. "고비는 넘겼어. 조금만 더 참아요, 발락." * * * 휘이이이이이잉-! 킬로바니안은 순식간에 도서관의 가장 높은 꼭대기까지 올라왔다. 여기는 모든 것이 거울세계처럼 뒤바뀐 그리모와르의 공간 속. 근처에는 그리모와르의 방어체계인 듯 책장들이 미로를 형성하고 있었고, 몬스터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 포탈에서 빠져나온 빨간 괴물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보자, 보자, 어디쯤 있을까." 그의 안구는 다소 특이했다. 눈동자 하나 속에 자리 잡은 수많은 동공들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며 주변 경관을 파악하는 모습은 기괴하기까지 했다. 가만히 관찰하고 있으려니, 여러 미로중에서 유난히 시끄러워 보이는 곳이 있었다. 몬스터들도 그쪽으로 몰려들고 있다. "저기네." 킬로바니안이 제자리에서 구둣발을 바닥에 툭툭 두어 번 쳤다. 이내 자세를 낮추며 그쪽으로 날아가려는 순간. "!" 그의 몸이 마치 억눌린 것처럼 한 차례 떨리며 자세가 무너졌다. 그가 완전히 몸을 돌려 뒤쪽을 응시했다. '이 감각은...... 포탈?' 틀림없다. 이곳으로 들어오는 또 하나의 포탈이 열렸다. 결사의 다른 지원 병력이 이쪽으로 넘어오기로 했나? 그럴 리가 없다. '본가'에서 자신 말고 여기로 오는 사람은 분명히 없다고 했다. 그렇다는 건. 살랑- 살랑- 킬로바니안의 빛바랜 눈동자가 돌아갔다. 그의 옆으로 나비 한 마리가 지나가고 있었다. '나비?' 쐐애애애애액! 갑자기 하늘을 뒤덮을 만한 거대한 검보랏빛 참격이 내려앉았다. 킬로바니안이 즉시 팔을 들어 그 공격을 받아냈다. "오우." 그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무슨 원리인지는 모르겠지만, 뒤쪽의 건물 꼭대기와 옥상이 모조리 갈라진 채 공중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착. 이내 그의 앞에서, 보라색 낫을 든 줄무늬 정장 차림의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농담이지?" 킬로바니안이 피곤한 표정으로 뒷목을 짚으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갑자기 키젠 부총장이라. 이거 너무 수지타산이 안 맞는데." 제인은 묵묵히 낫을 옆으로 세웠다. 근처의 나비들이 살랑거리며 낫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일단 물어는 보겠습니다." 그녀가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결사의 일원입니까?" "맞아. 구원자 킬로바니안. 물론 소개해도 잘 모르겠지만-" 그가 두 손을 코트 속에 찔러넣으며 본인 피부처럼 창백한 미소를 지었다. "미래의 왕 중 하나지. 곧 너희들도 알게 될 거야." "왕?" "이야기는 여기까지. 그런 것보다......." 제인은 갑자기 시야가 붉어지는 걸 느끼며 손을 들어 이마를 닦았다. 피가 흐르고 있었다. '어느 틈에.' "제인 올리비아. 네가 죽으면 죽음의 마녀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파아아아아악! 킬로바니안이 제인의 앞으로 쏟아지듯 나타났다. "궁금해 미치겠는데." 그녀도 이를 악물고 낫을 내질렀다. 허공에서 강자들의 공격이 맞부딪히며, 하늘을 뒤흔드는 굉음이 일어났다. * * * 같은 시간, 키젠 중앙 도서관. "안 되잖아요!!" 소녀들이 합창하듯 소리 질렀다. 이 시간 동안, 레오나드와 일행들은 무려 도서관 안에서 30바퀴를 빙글빙글 돌았다. 앞장서서 걷던 레오나드는 세상 진지한 표정으로 주의사항을 늘어놓았다. 안에 들어가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위험하다. 돌아갈 거라면 지금이 유일한 기회다. 교수님께 허가도 받지 않았으니 최소가 중징계다. 손 벌릴 데가 없어서 후배들을 데려가는 내가 죄인이다. 안에 들어가면 그리모와르는 강력하니 절대 혼자 맞서지 말아라. 시몬을 구하는 게 우선이다. 그런데 잔소리만 많을 뿐, 실속이 없었다. 아무리 도서관을 돌아도 주위가 어둡게 바뀐다든가 올빼미가 나타난다거나 거울에 비친 세계처럼 글자가 바뀐다거나 하는 레오나드의 이야기는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청문회가 열렸다. "선배님 말씀만 믿고 왔는데!" "이럴 시간에 차라리 경기장을 뒤졌으면 단서라도 얻었을 거라구요!" 시몬의 안위와 목숨이 달려 있는 문제였기에 그녀들 모두 한계치까지 예민해 있었다. 결국 레오나드는 메이린, 카미바레즈, 로레인, 세르네에게 둘러싸였다. "자, 잠깐만 얘들아. 진정하고......."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요!" 시몬을 내놔! 진상 손님이 항의라도 하는 분위기였다. 그나마 선배라 꼬박꼬박 존댓말을 쓸 뿐이지 사실상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였다. 레오나드가 도와달라는 듯 딕을 보았지만, 딕도 어깨를 으쓱한 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보였다. "시몬은 무사하겠죠? 무사하겠죠?" 옆으로 빠져나간 카미바레즈는 분리 불안증이라도 걸린 듯 자그맣게 중얼거리고 있었고. "우후후, 이대로 깃털을 꽂고 발가벗겨서 여자기숙사에 보내면 퇴학당하지 않을까요?" 세르네는 진지하게 레오나드의 인생을 골로 보낼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레오나드는 뒷목이 오싹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아, 생각할수록 바보 같아!" 메이린이 제 머리채를 쥐어뜯었다. "만약 이 방식으로 그쪽에 넘어갈 수 있다고 해도, 그리모와르가 그냥 내버려 둘 리가 없잖아! 당연히 넘어오는 입구를 차단했겠지!" "......." 그나마 이들 중에서 가장 냉정하게 고민하는 사람은 로레인뿐이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가 뚜벅뚜벅 레오나드에게 걸어왔다. "선배님." 레오나드는 침을 꿀꺽 삼키며 대답했다. "그, 그래." "그리모와르가 줬다는 그 목걸이. 잠깐만 보여주시겠어요?" 레오나드가 얼른 목걸이를 벗어서 공손히 그녀에게 건넸다. 그리모와르처럼 공간을 조종하는 힘을 가진 로레인은 목걸이를 붙잡고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말했다. "우리가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묘사하자면 두 가지야." "?" "문의 열쇠구멍이 바뀌었거나, 열쇠에 문제가 생겼거나. 하지만 그리모와르가 사용한 흑마법은 상당히 복잡한 고차원적인 흑마법이고, 방문객을 들일 때마다 일일이 문의 열쇠 구멍을 바꾸기에는 수고가 지나치게 많이 들어. 흑마법의 틀을 다 뜯어고쳐야 할 테니까." "그 말은 즉!" 가만히 듣고 있던 딕이 벌떡 일어났다. "그리모와르가 뭔가 손을 쓴 게 아니라, 그냥 열쇠에 문제가 생겼단 소리네!" "잠깐 내가 볼게요~" 세르네가 로레인의 손바닥에 들린 목걸이를 홱 빼앗듯 가져갔다. 이내 바닥에 마법진을 깔고, 그 위에 아티팩트를 올린 다음, 사방으로 보조 마법진들을 촤르르 허공에 펼쳐냈다. "와아." 곳곳에서 감탄성이 쏟아졌다. 역시 사실상의 현 상아탑주다운 실력이었다. 아티팩트에 칠흑을 부여하고, 마법진의 변화하는 수치를 확인한 세르네가 혀로 제 입술을 핥았다. "재밌네요." "뭔데? 결과가 어떻게 나왔는데?" 세르네가 상앗빛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넘기며 입을 열었다. "여러분의 수준에 맞춰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 아티팩트에는 딱 출입 1회용의 칠흑만 들어 있던 것 같아요. 출입에 성공하면 내부에 들어 있던 칠흑이 소모되겠죠? 그러면 이 아티팩트 내부의 수식과 좌푯값이 든 자료들이 스스로 무너져 내리도록 설계된 거예요. 일종의 보안책이랍니다." 곳곳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딕이 물었다. "그럼 이걸로는 죽어도 못 들어간단 거네?" "아니에요." 세르네가 비릿한 미소를 흘렸다. "내가 누구라고 생각해요? 1년 뒤 상아탑의 상아탑주가 될 사람이에요." 메이린이 '누가 상아탑주라는 거야!'하고 소리 질렀지만, 세르네는 무시하며 두 손을 펼쳤다. "무너진 흔적을 토대로 무너지기 전의 수식값을 재현해 볼게요. 시간의 탑에서 절대봉인도 풀었는데 이 정도는 쉽죠." "역시!" 이내 세르네가 허공에 마법진을 펼쳐놓고, 무너지기 이전의 값을 복원하기 시작했다. 메이린은 수식 몇 개를 살펴보다가 이 정도면 자신도 할 수 있겠다며 돕겠다고 끼어들었다. 상당히 든든한 모습. 두 상아탑의 네크로맨서들이 아티팩트 앞에서 나란히 작업하는 사이, 레오나드는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이제 내가 알몸으로 여자기숙사에서 체포될 일은 없는 거지?" 딕이 실실 웃었다. "저게 제대로 완성되냐 마느냐에 따라 달렸네요." 쿵! 쿵! 쿵! 그때 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다른 학생들이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안에 누구 계십니까! -문이 잠겨 있어! 누구야? 아무래도 경비병들이 들어온 것 같았다. 딕이 슬쩍 웃으며 앞을 가리켰다. "시간을 벌어야 해. 나머지는 경비들을 막으러 가죠!" * * * 시몬과 카쟌은 미로를 돌파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 미로는 복잡한 걸 떠나 규모가 지나치게 방대했다. 하루가 아니라 며칠을 달려도 빠져나가기 힘들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끄윽, 하아." 시몬의 상태가 점점 악화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카쟌이 뒤를 돌아보았다. "조금만 더 참아라, 시몬. 외부에서 이곳으로 한 명은 넘어온 것 같으니." "네." 쩌저저저저저저정! 두 사람의 고개가 위로 올라갔다. 아까부터 하늘에서 울려 퍼지는 요란한 소리. 방대한 칠흑의 흐름이 느껴지는 게 어마어마한 강자들의 싸움 같았다. 아무래도 카쟌이 말한 그 '넘어왔다는 사람'이 결사 측과 싸우고 있는 모양이었다. '누군진 모르겠지만, 결사 측도 강해 보여.' 이런 곳에서 더 꾸물거릴 시간이 없었다. 시몬은 이마에서 흐르는 식은땀을 닦아내며 자세를 다잡았다. "시간이 없어요. 억지로라도 미로를 넘어야겠어요." "넘는다고 했나? 위로 올라가려고 해도 미로도 같이 높아질 텐데." 시몬이 가볍게 제자리에서 스트레칭을 했다. "미로가 높아지는 것보다 더 빨리 오르면 돼요. 해보죠!" "......무모해 보인다만." 시몬이 책장을 툭툭 발로 두들겨 보고는, 이내 섬광과도 같은 속도로 위로 쏘아져 올라갔다. 동시에 촤르르르! 하고 미로의 책장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 * * 시몬과 카쟌은 미로에서 헤매고, 제인과 킬로바니안이 서로 싸우고 있는 사이. 그리모와르는 마지막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이제 거의 다 끝나가.' 그녀는 기계로 고정해 둔, 벌어진 발락의 입에 손을 집어넣었다. 파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암서의 뱀들이 붙잡혀 밖으로 끄집어져 나왔다. '조금만 더!' 암서를 뽑아내는 데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리모와르의 동작이 멈췄다. 그녀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누군가 내 결계 안으로 들어왔어?'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니었다. 그녀가 급히 고개를 돌렸지만, 포털은 유지된 그대로 있었다. 결사 쪽이 아니라 키젠에서 넘어온 침입자인 게 틀림없었다. '안 돼, 안 돼! 이렇게 끝날 순 없어!' 여기서 방해받으면 모든 게 끝장이다. 자신도, 그리고 발락의 인생도. 그리모와르는 급히 두 팔을 들어 올렸다. 도서관의 배치가 빠르게 바뀌기 시작했다. '시간, 조금만 더 시간이 필요해.' 그녀가 열심히 흑마법을 움직이고 있는 가운데. 파르르. 공중에 떠 있던 발락의 눈꺼풀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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