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853화 학생회실. 소타는 턱을 괸 채 테이블 한쪽에 수북이 쌓여 있는 편지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느릿한 동작으로 손을 뻗어 편지 한 장을 들어 올렸다. <결투 도전장> <소타 프쉬케 선배님께 - 쥴 빈체레> 부욱! 그의 손이 편지지의 중앙을 갈랐다. 부욱! 부욱! 찌이이익! 편지지가 순식간에 형체도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찢어발겨졌다. 이내 갈기갈기 찢긴 잔해가 허공에 날아올라 흔들려 떨어졌다. "이것들이 진짜 단체로 미쳤나." 그가 이를 잘근잘근 갈고 있는데, 마침 학생회실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소타가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들어와요!" "네, 부회장님. 모조입니다." 문이 열리며 학생회 직속 하수인 리더인 모조가 고개를 숙였다. 소타가 시큰둥한 얼굴로 툭 내뱉었다. "어떻게 됐어요?" "시몬 폴렌티아 학생의 전갈입니다." 그녀의 입술이 열렸다. "제안이 있다면, 학생회장실로 부를 게 아니라 따로 약속장소를 마련하라고......." "뭐?" 턱을 괴고 있던 소타의 얼굴이 미끄러져 내려오고, 턱을 괸 팔은 반대쪽으로 삐끗했다. 예상치 못한 일격을 맞은 사람처럼 멍하니 있던 그의 얼굴이 점점 벌게지며 노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보고는 이상입니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모조가 얼른 학생회관실에서 빠져나와 문을 닫았다. 이내 안에서 온갖 괴성과 함께 물건 박살 나는 소리가 들렸다. 문에 몸을 기댄 그녀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누님!" 직속 하수인 두 명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왔다. "괜찮아요?" "별로 안 괜찮아." 그렇게 대꾸한 모조가 학생회관 문에 등을 기대어 햇빛이 비치는 밖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교내 정원에서 보게 된 2학년 구 학생회 멤버들. 그들은 여전했다. 늘 웃는 얼굴이었고, 화기애애하고 밝았다. 하수인에 불과한 그녀를 진심으로 걱정해 주기도 했다. "일개 월급쟁이인 내가 이런 말을 입에 담는 것도 웃기지만-" "?" 그녀가 문 뒤에서 소타의 튀어나오는 고성을 들으며 눈을 한 차례 감았다가 떴다. "하루빨리 정권이 바뀌었으면 좋겠네." "......." 후배 하수인들이 괴상한 것이라도 들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누님이 그런 사적인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는 건 처음인데." "죽을 날 다 됐어요?" 모조가 말없이 손끝에 저주를 장전하자, 후배들이 얼른 두 손을 번쩍 들며 웃어 보였다. * * * 발락과의 결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시몬은 이제 완성된 데스나이트의 본격적인 훈련에 들어갔다. 그랜드포지에서의 수업 동안 '소환 재료학 수업'과 '소환 장송학 수업'을 모두 아론의 수업으로 대체했으니, 당분간은 그레리온과 진의 수업이 쭉 진행될 예정이었다. "데스나이트의 활용과 컨트롤도 중요하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한 건 빠르고 정확한 소환이니라." 장송학 초청교수 진 아스르칼트는, 데스나이트 제작에 성공한 학생들을 세워놓고 설명하고 있었다. 시몬, 로레인, 헥토르, 기네비어, 게르문, 그리고 토토까지. 성공자 여섯 명 모두 눈을 반짝이며 설명을 듣고 있었다. "너희들도 알겠지만 듀라한이나 데스나이트 같은 상급 언데드들은 아공간에서 바로 꺼낸다고 해서 작동하지 않느니라. 추가적인 소환마법이 필요하지." 학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학기 초에 실전이나 결투평가 등에서 듀라한을 써먹느라 고생했던 기억이 있었다. "하지만 너무 걱정하진 말아라. 데스나이트는 지난 백 년간 효율적인 소환방법에 대해 가장 활발히 연구된 언데드니까. 데스나이트만큼 이상적인 소환마법 메커니즘을 가진 언데드는 흔치 않으니라." 진이 뒤로 몇 걸음 물러나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긴말 할 것 없이 바로 보여주마." 우우우웅! 그녀는 허공에 중간이 텅 비어 있는 고리 형태의 마법진 하나를 펼쳤다. 그녀가 앞으로 한 걸음 나와, 방금 펼친 마법진 앞에 또 다른 마법진을 펼쳤다. 우웅! 두 번째 마법진이 펼쳐졌다. 이번에는 원 안에 다각형이 그려진 마법진이다. 그녀가 또 한 걸음 앞으로 나와 세 번째 마법진까지 펼쳤다. '아, 이거!' 시몬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랜드포지의 근위대장, 게오르그도 이런 식으로 데스나이트를 꺼낸 게 기억났다. "이렇게 허공에 세 개의 마법진을 펼쳐 둔 뒤, 아공간을 열고 데스나이트를 꺼내면 된다." 그녀가 연 아공간에서 스켈레톤 한 구가 튀어나왔다. 그것은 나타나자마자 제 발로 걸어서 첫 번째 마법진을 통과했다. 시몬은 사소한 것 하나 놓치지 않겠다는 눈빛으로 집중했다. 데스나이트가 첫 번째 마법진을 통과하는 순간, 각종 마법진의 구성요소들이 데스나이트의 몸에 코팅되듯 녹아드는 모습이 보였다. 미리 데스나이트 작동에 필요한 '재료'들을 허공에 잔뜩 띄워놓고, 개체의 접촉과 동시에 마법적 효과를 일으키도록 하는 고난도 테크닉의 흑마법. 실전성은 당연히 뛰어나겠지만 상당한 칠흑역학적 지식이 필요해 보인다. "첫 번째 마법진은 데스나이트를 직접 작동시키는 마법이니라. 두개골 내부의 소환 마법진에 칠흑을 흘려 넣어 전원을 켜고, 다크홀을 작동시켜 오러를 일으킬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게 핵심이지." 학생들이 노트를 꺼내고 필기하려 했지만 그녀의 진도는 빨랐다. 진은 바로 데스나이트를 두 번째 마법진으로 유도했다. "기록할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보려고 노력해라. 두 번째 마법진이니라." 데스나이트가 성큼성큼 걸어 두 번째 마법진을 통과했다. 이번에는 단순한 마법 부여가 아닌 물리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데스나이트의 몸 곳곳에 마법진의 룬어가 깃들더니 그 안에서 갑옷이 나타난 것이다. 마법진을 통과하는 동시에 데스나이트의 전신에 갑옷이 입혀졌다. "축적 룬어로 데드아머를 잡아놓고, 데스나이트가 마법진을 통과하는 동시에 마법진을 인식시켜 데드아머를 착용시키는 방식이니라." 그때 말총머리의 여학생, 기네비어가 손을 들었다. "기네비어 벤너스입니다! 그냥 데드아머를 입힌 채로 아공간에 보관하면 안 되는 건가요?" "아주 좋은 질문이다." 진이 그녀를 지목했다. "데드아머는 갑옷이 아니라 엄연히 언데드이니라. 그리고 데스나이트와 데드아머는 다른 소환마법진으로 작동하지. 두 언데드를 연결한 채로 보관하면 회로와 기능이 엉켜서 성능이 크게 떨어질 위험이 있느니라." 학생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 네크로맨서들이 이렇게 하는 건 역시 이유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마법진. 간단하다. 이쪽은 장송마법으로 데스나이트를 소환과 동시에 강화하는 형식이니라." 데스나이트가 세 번째 마법진을 통과하는 순간, 오러가 무서운 기세로 불타올랐다. 데스나이트는 즉각 허공을 붙잡고 오러를 엮어서 활과 화살의 형태로 만들어 쏘아 올렸다. 후우우우웅! 주위의 풀밭이 세차게 흔들리며 화살이 날아갔다. 멀리서 수업을 받고 있던 학생들이 오오- 하고 탄성을 흘렸다. '대공의 데스나이트는 대공처럼 활을 쓰는구나.' 시몬이 감탄하고 있는데, 그녀가 학생들을 돌아보았다. "세 번째 마법진은 장송마법으로 데스나이트를 강화시키는 구성이지만, 그리 급하진 않으니라. 첫 번째인 소환 마법진과, 두 번째의 데드아머의 축적 마법진. 이 두 가지 마법진 먼저 숙달하는 게 우선과제다." "네!" 바로 실습이 시작되었다. 첫 번째 소환마법진은 사실상 반복과 노력의 영역이었다. 여섯 명의 학생이 나란히 서서 중간이 뚫린 고리 형상의 마법진을 그려놓고, 그 안으로 끊임없이 칠흑을 순환시켰다. "칠흑의 '기억하는 성질'을 극한으로 이용하는 방식이다. 너희들이 전혀 신경 쓰지 않아도 칠흑이 알아서 흘러서 마법진이 완성되도록 하거라." 이 마법진의 구조는 상당히 신기했는데, 원을 따라 칠흑이 빙빙 돌기만 하는 것 같지만 구성요소가 차근차근 활성화되고 회로와 술식이 맞춰진다. 이 기술은 익숙해지면, 나중에는 마법진을 쌓는 데 전혀 정신력을 소모하지 않고 데스나이트를 준비할 수 있게 될 거라고 진은 말했다. 듀라한이나 드래고니안 등, 다른 상급 언데드들과 함께 준비해도 문제가 없을 정도. 이건 확실히 데스나이트만의 강점이었다. '하지만 완전히 숙달하려면 시간이 걸리겠네.' 진은 하루에 2,000회씩, 똑같은 작업을 반복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학생들은 머리가 빙빙 돌 때까지 마법진을 굴려야 했다. "다음은 두 번째 마법진 훈련이다." 학생들은 핵심인 '축적' 룬어를 이용해 데드아머를 마법진에 집어넣고, 데스나이트를 통과하도록 했다. 처음에는 사고가 연달아 일어났다. 투구가 다리에 들어가거나, 데드아머가 뒤집힌 채로 장착되는 등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벌어졌다. 이 또한 실전에서 바로 쓰려면 숙련도가 필요할 듯했다. 첫날이니만큼, 데스나이트를 완성한 학생들은 이 두 가지 마법진을 집중적으로 익혔다. 그리고 남은 한 시간 정도의 시간은 드디어 모두가 바라던 '자유훈련' 시간이었다. "갈게 시몬!" "얼마든지 들어와, 토토." 시몬과 토토의 데스나이트가 오러블레이드를 뿜어낸 채 격돌했다. 키이잉! 키잉! 카아아아아아아아앙! 살짝 어두워진 오후, 형광등처럼 밝게 빛나는 두 오러블레이드가 격렬히 부딪히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저 뒤에서 수석조교에게 데몬나이트 수업을 받는 학생들은 그 모습을 힐긋거리며 부러운 듯 지켜보았다. "멋지긴 하네." "보지 마. 괜히 속만 쓰려." 카아아아아앙! 특히 시몬의 데스나이트는 그 어떤 학생들보다 화려했다. 로즈색 검광이 그어질 때마다 사방에서 장미가 터져 나오는 효과가 어두워진 저녁 하늘을 조명처럼 밝혔다. '토토도 강한데!' 토토의 데스나이트는 공략이 쉽지 않았다. 몇 분 동안 맹렬히 몰아붙였는데 승부가 나지 않았다. 사념의 접속을 더 강화한 시몬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화력을 올려, 데스나이트.' 쿠콰콰콰콰콰! 데스나이트의 오러블레이드의 굵기가 더더욱 늘어났다. 숨을 헥헥대던 토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 잠깐! 아직도 그렇게 할 수 있어?" 까아아아앙! 결국 다음 일격에 승부가 났다. 칠흑 공급이 한계였던 토토 쪽 데스나이트의 오러블레이드가 박살 나고, 시몬의 데스나이트가 목덜미에 오러블레이드를 가져다 댔다. "내, 내가 졌어 시몬." "수고했어." 두 사람이 그제야 잠시 데스나이트를 아공간에 불러들이고 풀밭에 주저앉아 숨을 헐떡였다. "두 사람 다 멋있는데?" 에슈가 헤헤 웃는 얼굴로 걸어왔다. 토토가 땀으로 푹 젖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미, 미안해 에슈. 우리만 데스나이트를 만들어서......." "아냐 아냐! 내 역량이 부족했었는데 뭘. 데스나이트 소년이 얼마나 노력했는지도 옆에서 봐왔구." 시몬은 에슈의 뒤를 응시했다. 데스나이트 제작에 실패한 대신, 그 재료로 만든 데몬나이트가 경비병처럼 그녀의 뒤에 서 있었다. "데몬나이트 쪽은 어때?" "나쁘지 않아, 조장! 티어도 낮은 편에, 가볍고 소환도 빠르거든!" 보통 데스나이트는 술사에게 어마어마하게 부담이 큰 소환수라서, 한번 꺼내면 다른 소환수들은 쓰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 반면 데몬나이트는 3~4기를 동시에 운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물론 아쉬운 점은." 챙! 에슈가 손짓하자 데몬나이트가 검을 들어 올렸다. 이내 검에 다크오러가 휘감겨 코팅되었다. "오러블레이드는 쓰지 못하고 최대가 이 정도? 그래도 그럭저럭 쓸 만한 것 같아." "그렇구나." 에슈가 쿡쿡 웃으며 뒤쪽을 바라보았다. "아론 교수님이 말씀하시길 이번 중간고사는 기사형 언데드 실기 100%라고 하셨잖아! 다들 데스나이트에 지지 말자고 독이 바짝 올라 있어." "......하하." 결국 데스나이트 제작 성공은 조금 더 유리한 조건에서 시작할 뿐이고, 이번 실기 중간고사에서 무조건 최고 성적을 받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이론상 데몬나이트를 쓰는 학생이라도 데스나이트 서머너 여섯 명을 뛰어넘는 성적을 충분히 낼 수 있었다. "음, 뭐. 그래도 난 속이 다 시원해." 에슈가 토토의 어깨를 툭툭 두들기며 뒤를 가리켰다. "1차 다이브 성공했다고 거들먹거리면서 토토 무시하던 애들, 전부 마지막에 실패했잖아. 역시 최후까지 필요한 건 근성이라니까." 토토가 민망한 듯 얼굴을 붉혔다. "으, 응." 그러다 고개를 들어 에슈를 바라보았다. "에슈, 있잖......." -헥토르의 데스나이트랑 기네비어의 데스나이트가 붙는다! 그 커다란 외침에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갔다. 에슈도 우왁! 신나는 비명을 내지르며 뛰어갔다. 풀이 죽어서 고개를 푹 숙이는 토토를 보며 시몬이 얼른 말했다. "우리도 다시 시작하자, 토토." "으, 응!" 중간고사에 이어 발락과의 교류전까지. 시간이 많이 남지는 않았다. * * * 암흑연합 서부, 이를 모를 밀림. 꾸르르르륵! 꾸르르륵! 밀림 전역이 죽음의 땅이 되어 있었다. 한때는 수풀이 무성한 지역이었으나, 현재는 독으로 인해 모든 것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휘말린 생명체는 하나같이 살이 문드러진 채 뼈를 드러내고 있었다. '대단하군.' 하수인은 침을 꼴깍 삼켰다. 입에 쓰고 있는 화학 마스크가 제대로 작동되고 있는지 몇 번이고 다시 확인했다. 이곳은 학생회장 발락의 임무지역. 그에게 시몬의 도전과 교류전에 관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직접 찾아왔다. '아직 학생인데 이 정도의 강함이라니, 커리어를 시작하면 네크로맨서 세계가 요동치겠어.' 그런데 발락을 찾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주위가 온통 독지대여서 발자국 같은 흔적도 전무했다. 거기에 화학 마스크를 쓰고 있어도 중독된 건지 몸이 아프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으윽, 마스크 수명이 다 끝나기 전에 찾아야 하는.......' "그를 죽이십시오." 그때 귓가에 파고드는 어떤 강렬한 목소리가 들렸다. 귀를 쫑긋한 하수인이 발소리를 최대한 낮춘 채 소리가 난 방향으로 걸어갔다. 주위가 온통 맹독의 지옥으로 일그러져 있는 가운데, 태연하게 걷고 있는 남녀의 모습이 보인다. '저건......!' 남자 쪽은 발락이었다. 거대한 몸집과 철제 마스크, 그리고 두르고 있는 키젠 학생회장 코트를 보니 확실했다. 그런데 옆에 있는 여자의 정체는 알 수 없었다.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처치할 생각이었다만, 왜 시몬 폴렌티아에 집착하는 거지?] 그 말을 들은 하수인은 자신도 모르게 숨이 멎는 소리를 낼 뻔했다. 죽임? 처치?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그는 즉각 은폐 마법을 자신에게 사용했다. "저희의 목적에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암흑연합 전체가 방해되겠지.]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웃는 얼굴로 손을 들었다. "당신의 몸, 다시 그 증상이 시작됐네요." 그러곤 발락의 얼굴에 손바닥을 붙였다. 발락의 인상이 험악하게 굳어졌으나 여인은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 "당신은 우리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만들어냈으니 당연하죠. 부모와 자식과도 같은 관계 아닌가요?" 덥석. 발락이 단숨에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치이이이이익! 그것만으로도 손목이 거짓말처럼 녹아내려 손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다음엔 목뼈를 무너뜨리겠다.] "성격은 여전하네요. 아끼는 팔이었는데." 그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물러섰다. "하지만 당신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습니다, 발락. 어르신께서 지켜보고 계십니다." [.......] "참, 그리고 한 명 더." 그녀가 고개를 돌려 나무 뒤에 숨은 하수인 쪽을 응시하였다. "쥐새끼가 우릴 지켜보고 있군요." 홱! 발락의 고개도 움직였다. 그가 짐승 같은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말했다. [나와라.] 어마어마한 위압감. 하수인의 몸이 자신도 모르게 옆으로 튀어나왔다. "바, 발락 학생회장! 잠깐만요! 저는......!" [키젠의 하수인인가.] 그가 쯧 하고 혀를 찼다. [보고할 게 있다면 해라.] "예, 예!" 그가 땀을 뻘뻘 흘리며 대답했다. "전 학생회장인 시몬 폴렌티아 학생이 '도전권'을 사용했습니다. 발락 학생회장님께서는 교내에 복귀하는 대로 교류전에 참가하고, 시몬 학생의 도전을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끝인가?] "예. 그리고 엿들으려고 한 게 아니라 우연히......!" 다급하게 외치던 하수인의 입에서 발음이 새기 시작했다. 그가 눈동자를 굴려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저런.] 발락이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찼다. 어느새 하수인의 얼굴을 덮은 마스크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이 녹아버린 뒤였다. 뒤이어 그의 입술이, 아니 온몸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그의 몸이 햇살 아래 노출된 아이스크림처럼 철철 녹아내렸다. [내게 소식을 전하러 왔다가, 마스크의 수명이 다 되는 바람에 안타까운 사고가 일어났군.] 철제 마스크 너머로, 발락이 비틀린 미소를 흘리는 게 보였다. [유감이다.] '아, 안 돼!' 하수인이 다급히 녹아내린 팔을 흔들며 말했다. "읍암아아아아!" 혓바닥이 녹아내려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의 눈알이 녹아내려 시야가 사라지고 기어이 뇌까지 녹아내리며 사고가 정지했다. 이내 가까이 다가온 발락이 손가락으로 툭 밀치자, 하수인의 몸이 한 줌 독수로 변해서 그 자리에 무너졌다. 원래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교류전.] 발락의 눈에 흉흉한 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마침 좋은 기회가 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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