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797화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다. 머리가 어지럽고, 어떤 단조로운 소리가 반복적으로 들리는 것만을 인지했다. 그러다. "......윽." 눈이 떠졌다. 정신을 차리니, 방바닥에 누워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시몬이 처음에 쉐일리 가문의 집무실에서 넘어온 그 하얀 방이었다. '그럼 그 꽃이 가득한 방은 뭐지? 꿈이었나?' 시몬이 부스스 머리를 털며 상체를 일으키는데. '아.' 꿈이 아니었다. 꽃이 가득한 그 방에서 주웠던 '정체불명의 해골'이 눈앞에 보였다. 흰 의복이 걸쳐져 있고, 손에는 깃발이 들려 있는 모습 그대로다. 보존 상태는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뼈의 표면도 희고 깨끗한 게, 아론이 가르쳐준 신성 사용자 유골의 특유한 현상들이 보인다. 출처가 불분명한 재료지만 지금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일단 그것을 아공간에 집어넣고 몸을 일으켰다. 위이이이잉- 막힌 벽 너머로 경보음이 먹먹하게 들리는 것을 느꼈다. 시몬은 이곳에 들어왔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방 밖으로 나가보았다. 위이이이이이이잉-! 경보음이 훨씬 더 커져 있었다. 일이 터져도 뭔가 제대로 터진 것 같다. -시몬! 어디 있어? 시몬! -그 자식 뭐 하는 거야? 요란한 경보음 속에서 자신을 찾는 학생들의 외침이 들렸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것 같았다. '나 대체 얼마나 여기 있었던 거지?' 얼른 정신을 다잡고 집무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아까 말소리가 들린 방향을 향해 달렸다. 정신없이 달리다가 복도의 기둥을 끼고 돌아가려는데. "우왓!" 로레인과 딱 마주했다. 전력으로 달리던 두 사람이 동시에 브레이크를 밟고 멈추었지만 완전히 멈추지 못했고, 중간에 서로 끌어안는 형국이 되었다. "시몬!" 싸늘하게 얼어붙어 있던 그녀의 표정이, 시몬을 마주하는 순간 봄눈 녹아내리듯 풀리며 안도의 기색이 어렸다. "여기 있었구나! 정말 다행이야." 그녀는 그대로 팔을 둘러 시몬은 끌어안았다. 흠칫한 시몬이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데, 그녀가 먼저 뒤로 물러나 눈에 힘을 주었다. "뭐 하고 있었어? 걱정했잖아." "미, 미안. 그게......." "일단 움직이자!" 로레인이 즉시 칠흑을 밟고 뛰었고, 시몬이 그 옆으로 뒤따라 달렸다. "이게 다 무슨 일이야?" "방금 밖에서 비상연락이 왔어." 로레인이 시야를 가리는 앞머리를 붙잡아 넘겼다. "신성연방 측에서 우리가 이 박물관에 있다는 걸 눈치챈 것 같아." "!" "그레리온 교수님이 전 인원 후퇴명령을 내렸어. 신성연방의 병력이 오기 전에 빠져나가야 해." 쿠웅! 쿵! 쿵! 하지만 그리 쉽게 빠져나갈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박물관의 맞은편에서 새하얀 괴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엔 이목구비가 오밀조밀 박혀 있고, 긴 팔이 있었다. 프리스트들이 사용하는 소환수의 일종인 '신성 크리처'였다. '이 박물관의 경비체계가 발동한 건가.' 아무래도 경보가 울리면 이런 것들이 튀어나오는 시스템인 것 같았다. "대피 상황은 어때?" 시몬이 그렇게 물으며 고개를 젖혔다. 발톱 달린 크리처의 팔이 종이 한 장 차이로 시몬의 뺨을 지나고, 시몬은 그대로 파고들어 손바닥을 몸통에 꽂았다. <시몬 오리지널 - 촉파> 터어어어엉! 크리처가 날아가고 시몬이 검지와 중지를 붙인 채 딱밤을 튕기듯 충격파를 쏘아냈다. <시몬 오리지널 - 파풍> 파앙! 파앙! 밀려난 크리처에 파풍을 연달아 적중시켜 벽까지 부딪히게 했고, 바로 조립된 '본 스피어'를 날려 가슴을 관통시켰다. 으적! 로레인도 제 몫의 크리처 하나를 주먹으로 찍어 누르고는 대답했다. "80%쯤. 먼저 나온 학생들부터 그레리온 교수님의 키메라에 태워서 보냈어. 두 기의 키메라가 출발했고 이제 남은 키메라는 하나야. 방어조인 우리도 마지막 키메라에 타고 빠져나가야 해." 대피 진행률이 100%가 아니라니. 그렇다는 건. "나 말고 아직 박물관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애들이 있어?" "응. 다섯 명 정도." 로레인이 복도 쪽을 가리켰다. "나는 3층을 돌게, 시몬은 2층을 돌아서 애들이 있는지 확인해 줘." "알았어!" "학생 여러분! 서두르십시오!" 마침 저 멀리 조교들이 뛰어다니며 학생들을 데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놔! 이거 놔! 아직 난 재료를 구하지 못했다구요!" "데스나이트가 문제가 아닙니다! 목숨이 더 중요해요!" 학생이 조교들에게 끌려가는 모습을, 시몬은 안타까운 눈으로 지켜보았다. 그러는 것도 잠시 마음을 굳게 먹고 2층 수색을 시작했다. '한 명도 놓고 갈 수 없어. 반드시 전원을 구출해야 해.' * * * 박물관 밖. 그레리온은 팔짱을 낀 채 두 다리를 벌린 포즈로 가만히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불길하군." 그러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한번 바라보았다. 고오오오오오! 청명한 하늘에 떠 있는 커다란 빛의 십자가. 그리고 그 십자가 중앙에 달린 눈동자가 움직이며 주위를 훑고 있었다. "교수님!" 조교 한 명이 그레리온이 쪽으로 뛰어 들어왔다. "두 번째 키메라를 국경으로 막 보냈습니다!" "남은 인원은?" "아직 대피하지 못한 인원은 방어조 외에 다섯 명입니다!" 그레리온이 벌컥 화를 냈다. "대피 명령이 떨어진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박물관에 있는 학생들은 대체 뭔가!" 늘 호쾌하던 그레리온이 저렇게까지 화를 내는 건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움찔한 조교는 얼른 꼿꼿하게 차렷 자세를 취했다. "아, 아무래도 욕심을 부리다가 너무 깊이 들어간 게 아닌지...... 빠르게 찾아보겠습니다!" 그레리온이 긴 숨을 내쉬었다. "시간이 없다. 저주로 제압해서라도 데리고 와라!" "예!" 잽싸게 박물관으로 뛰어가는 조교를 보던 그레리온이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식별 자체가 불가능한 고위 결계를 펼쳤는데, 어떻게 낌새를 알아차렸지?' 네크로맨서 요원들의 시설 공습에 흔들리지 않고, 한 발 떨어진 채 멀리서 관망하고 있던 프리스트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누구인가. 여러 후보들을 머릿속으로 떠올려보고 있던 그레리온의 눈이 게슴츠레 떠졌다. "슬슬 오는군." "예?" 구름 낀 흐린 하늘이 갈라지고 있었다. 이내 하늘에서 신성 마법진이 펼쳐지더니, 한 줄기 광명이 스포트라이트처럼 내려왔다. "큭!" "눈이......!" 그레리온과 조교들이 팔로 눈을 가렸다. 이내 쿠르릉! 하고 하늘이 뒤흔들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스포트라이트의 한복판에 뭔가가 떨어졌다. 지면이 흔들리고, 터져 나오는 커다란 후폭풍에 그레리온의 옷자락이 거칠게 흔들렸다. 뒤에 있는 조교 두 명은 굳은 얼굴로 침을 삼켰다. "최악이다." 그레리온의 입가에서 한탄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저벅. 저벅. 뿌연 모래 구덩이에서 번뜩이는 안광이 보였다. 거구의 남자가 느릿한 발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 그래도 한 명이네요. 최소한 소대급 병력이라도 보낼 줄 알았는데." "누구죠? 저자는." 조교들의 물음에, 그레리온은 눈을 감으며 대꾸했다. "심문청장 레이트다." "!!" 내려지는 사형선고도 지금의 이야기보다 절망적이지 않으리라. 공포와 두려움으로 떨고 있는 조교들을 뒤로 물러서게 한 그레리온이 고개를 내렸다. 그의 앞에는 여섯 개의 서류가방들이 질서정연하게 바닥에 놓여 있었다. 겉보기엔 서류가방이었지만 하나같이 꿈틀대는 살덩이로 이루어져 있었다. 겉면에 곤충 날개가 파닥거리는 것도 있었고, 껍질로 뒤덮여 있는 것도 있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나." 그가 가장 오른쪽에 있는, 시꺼먼 가방을 붙잡아 들어 올렸다. "교수님! 그 가방은......!" "물러나라." 찰칵! 봉인을 해제하고 가방을 펼치자, 그 안에 생명체의 온갖 장기들이 끓어 넘치듯 솟아올랐다. 끊임없이 맥동하는 그것은 보는 이로 하여금 극도의 거부감을 일으키기에 충분했지만, 그레리온은 망설임 없이 그 가방을 몸에 붙였다. 꾸르르르르륵! 가방의 뼈와 신경들이 그레리온의 피부를 뚫고 체내로 진입했다. 그의 눈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커다랗게 뜨였다. 키메라의 살점이 그레리온의 몸을 뒤덮으며 형태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레리온 오리지널 - 키메라 스킨> 그의 체구가 부풀어올라 순식간에 3미터가 넘는 거체의 괴물로 변했다. 등 뒤에는 칼날로 이루어진 날개가 금속음을 울리며 땅을 긁고, 여섯 개로 늘어난 눈동자가 사방을 주시했으며, 기다랗게 늘어진 두 팔은 바닥에 닿아 질질 끌렸다. 후우욱- 키메라 관련 규정과 제한을 아득히 넘어선 12종 융합체. 그것을 만들어낼 수 있는 자는 소수고, 그것과 융합할 수 있는 것은 더더욱 소수다. 입가에서 칠흑 숨결을 토해낸 풀 키메라 그레리온이 정면을 바라보았다. 키메라로 변한 지금, 모든 오감이 적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저벅. 저벅. 발소리가 그의 귓가에 민감하게 울려 퍼진다. 뒤이어 들리는 건 쇠가 바닥에 긁히는 불쾌한 소리. "이게 누구야." 날 달린 십자가를 짊어진 남자가, 늘어지는 그림자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만에 '전설'께서 국경에 오셨군." 그르르르르-! 키메라의 입가에서 그레리온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레이트, 애송이가 많이 컸구나.] "그런 반면 당신은 너무 늙었어." 레이트가 제 목을 붙잡고는 뿌득거리며 움직였다. "벽에 똥칠이나 할 것 같은 다 죽어가는 늙은이가, 여긴 무슨 일로 왔지?" 그렇게 안부를 물은 레이트가 제 자리에서 가볍게 발을 굴렀다. 그의 몸이 쏜살같이 사라지며 그레리온의 등 뒤로 돌아왔다. [!] 그레리온이 두꺼운 외골격으로 뒤덮인 팔을 들어 올렸고, 레이트가 십자가를 휘둘렀다. 콰드드드드득! 단 일격. 고작 일격에 몇 겹의 외골격으로 보호받는 그레리온의 키메라 팔이 움푹 찌그러지며 사방으로 피를 뿜어냈다. 레이트가 히죽거리며 제 십자가를 걷어차자, 키메라 팔이 완전히 박살 나며 갈라졌다. 그레리온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괴음이 울려 퍼졌다. "교수님!" 조교들도 급히 키메라로 무장한 채 달려들려 했지만. [너희들이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아니다! 물러서라!] 그레리온이 거칠게 외쳤다. 조교들이 움찔하며 멈추고, 레이트가 히죽 웃더니 음침한 눈길로 그 조교들을 보았다. [흐웁!]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던 그레리온이 즉각 몸을 날렸다. 콰아아아아아아앙! 어마어마한 충격파와 함께, 주위의 흙먼지들이 언덕처럼 솟구쳤다. 그러나 내질러진 거대한 괴물의 팔은 레이트가 뻗은 손가락 끝에 막혀 있었다. "세월이 야속하군." 레이트가 반대쪽 손에 쥔 십자가를 바닥에 툭 떨어뜨렸다. 이내 가볍게 주먹을 말아쥐고, 앞으로 미끄러지듯 전진하며 그레리온의 복부 쪽을 후려쳤다. 쩌어어어어어엉! 단어 그대로 그레리온이 터져 버렸다. 사방으로 핏덩이와 불끈거리는 장기들이 흩어지고, 키메라 안에 타고 있던 그레리온의 본체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커헉! 그의 입안에서 피거품이 터져 나왔다. 몸 곳곳에 뚫려 있는 구멍에서 피가 흘렀고, 신체 일부는 아직 인간으로 돌아오지 않은 상태로 변질되어 있었다. 장기가 더덕더덕 붙어 있기도 했다. "다시 물으마. 다 늙어 죽어가는 노인네가 굳이 국경까지는 왜 왔지?" 레이트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노망인가? 아니면 일생의 마지막은 회한이라도 들어서 내 십자가에 매달려 죽고 싶은 생각이라도 들었나? 특히 당신과 나는 상성이 극도로 불리할 텐데." 쿨럭! 쿨럭! 입에서 피를 쏟아내던 그레리온이 바닥에 떨어진 새로운 생체 가방을 손에 쥐었다. 다른 키메라를 고를 틈도 없었다. 당장 손에 붙잡힌 그것을 몸에 붙이자, 다시 한번 관절과 뼈들이 흘러나와 그레리온의 몸에 연결되며 변이를 시작했다. 푸화아아악! 그러나 레이트는 기다려 주지 않았다. 바닥에 박혀 있던 십자가 검을 뽑아 휘두르니, 키메라의 신체에 곡선이 그어지며 피분수를 뿜어냈다. 그 안에 들어가 있던 그레리온이 키메라의 등에서 빠져나와 바닥을 나뒹굴었다. "네크로맨서는 더더욱 빨리 늙는군." 레이트가 중얼거렸다. 그레리온이 입에서 피거품을 토하며 끅끅 웃었다. "......인정하마. 네놈의 말대로 내 영광의 시대는 지났지만!" 꾸르르르르르륵! 꾸르르륵! 무너지고 망가진 살점과 뼈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어딘가에 어질러져 있는 생체가방들까지 모두 봉인이 풀리고 펼쳐졌다. 그 안에서 집채만 한 살점들이 부풀기 시작했다. <그레리온 오리지널 - 키메라 필드> "!" 순식간에 주위에 뼈와 살로 이루어진 폭풍이 몰아치며 그레리온과 레이트를 휘감았다. "노병에게는 노병만의 싸움이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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