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747화 암흑연합 드레스덴 왕국령 남부 전선. 요나는 한 군막에 불려와 있었다. "와줘서 고맙네, 요나." 그리고 그의 앞에는 한 중년 남자가 깍지를 낀 채 요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 유명한 7군단장이 이리로 넘어와 주다니, 마음이 든든하군." "잘 부탁드립니다." 남부 전선의 총사령관이자 숱한 전쟁을 겪은 베테랑 중 베테랑, 트라건 제드워드. 그가 지도를 펼치며 입을 열었다. "현재 상황을 설명하자면, 봉서의 냄새를 맡은 프리스트들이 몰려들었다네. 벌써 다섯 군데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지." 그가 지휘봉으로 지도의 각 지점을 표시했다. "우리의 역할은 하나. 봉서를 로크섬까지 무사히 옮기는 걸세." "진짜 봉서입니까?" 리처드가 심드렁하게 물었고, 트라건은 웃는 얼굴로 손가락을 튕겼다. "긴말 할 필요 없이 직접 보여주지." 뒤이어 병사들이 군막 안으로 수레를 끌고 왔다. 수레에 올려진 물건을 본 리처드의 눈빛이 변했다. 누가 봐도 불길한 기운을 풀풀 풍기고 있는 그것은 틀림없는 진품이었다.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천이 바스러지고, 물건의 색이 바랬다. "이 긴 전쟁을 끝낼 위대한 병기, '봉서'는 우리가 맡고 있네. 그래서 자네와 7군단을 부른 거고." "가장 중요한 임무군요." "아주 골치 아픈 임무지." 트라건이 검지와 중지로 제 콧대를 붙잡았다. "신성연방 놈들이 로크섬으로 향하는 텔레포트를 막은 건 알고 있나? 괜한 짓일세. 저 이질적인 마력 때문에 룬어를 이용한 텔레포트 자체가 불가능해. 당연히 아공간에 넣을 수도 없지. 무식하지만 직접 마차에 실어 옮길 수밖에 없네." "음." "우리는 철통같이 봉서를 지키면서 이동할 걸세. 연합군이 이곳으로 속속 집결하고 있어. 그들의 보호를 받으며 해상봉쇄를 뚫고 봉서를 로크섬에 전달하면 우리 암흑연합의 승리일세." 리처드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헌데." "?" 트라건이 의자를 움직여 리처드 쪽으로 조금 더 가까이 붙었다. "이 긴 전쟁에서 중요한 임무를 앞둔 가장 결정적인 시점에, 자네에 대한 묘한 소문이 돌더군." 리처드가 피곤한 표정으로 머리를 쓸어넘겼다. "안 좋은 소문 따위야 하도 많아서 뭐." "바힐라 영지에서 기적의 성녀와 접촉했다던데." 리처드의 동작이 멈칫했다. "고아원에서 봉사활동을 하다가 만났다고 했나? 아, 그럴 수 있지. 이 미쳐 버린 세상에 그 정도야 작은 해프닝이 아니겠나.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이후의 자네의 행동은 의심을 살 여지가 있었어." 트라건이 손을 깍지꼈다. "눈앞에 있는 기적의 성녀를 내버려 두고, 아군 병력을 물리며 후퇴했다지." "......." "해프닝은 해프닝으로 끝내고 그대로 싸웠으면 좋았을 것을.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친 자네에 대해 상부에서 말이 나오고 있는 모양이야." 리처드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나는 승산 없는 전쟁은 하지 않습니다. 고아원에서 아군의 병력이 그들보다 적었고, 나도 에이션트 언데드를 다수 가져오지 못한 상태였으니 굳이 싸울 필요가 없었죠. 그뿐입니다." "정말 그뿐인가?" "예." 트라건이 굵직한 제 손가락을 쓱쓱 훑었다. "나야 물론 자네를 믿지만, 알지 않나?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원로들의 상상력이 불쾌할 만큼 풍부하단 걸." "......." "봉서 운반 임무를 맡은 자네에 대한 사상검증이 필요하다는 명령이야. 하지만 난 그렇게까지 하기는 싫고." 촤락- 그가 사유서 한 장을 내밀었다. "번거롭겠지만 상부에 올릴 보고서를 쓰게. 왜 자네가 당시 그런 판단을 내려야만 했는지 상세히 서술해." "......." "그리고 함께 봉서를 옮겨 큰 공을 세우고, 이 전쟁을 연합의 승리로 끝내자고." 툭툭. 트라건이 리처드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천막을 나섰다. 사유서 앞에 어두커니 있던 리처드는 이내 긴 한숨을 토해내며 자리에 앉았다. "빌어먹을." 촤락- 깃펜을 쥐고 서류를 써내려갔다. 그래도 로크섬의 늙은이들의 명령이 들어온 것치고, 트라건의 재량으로 이 정도로 끝나는 걸 감사해야 할 상황이었다. <분장했던 기적의 성녀와는 우연히 그 자리에 함께 있었을 뿐, 말 한번 섞은 적이 없습니다.> 그 문단을 끝맺자마자 떠올랐다. -멋진 이름이네요, 리처드! 그녀의 목소리가. 그 날의 공기가. 그 날의 온도가. 말하면서 부드럽게 웃던 그녀의 미소가 생명처럼 살아나며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제기랄." 리처드는 상념에서 빠져나오며 다시 글을 써내려갔다. <봉사활동 중에는 고아들을 돌보는 일을 했습니다. 밥을 짓고 청소를 하고 아이들과 놀았습니다.> 봉사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으려니 다시 떠올랐다. 그녀와 정령룡을 타고 바다에 간 일을. -하지만 딱 한 번 엇나간 오늘은, 평생을 똑같이 살아온 제 인생에서 가장 특별하고 빛나는 날이었어요. 웃으며 이야기하던 그녀의 얼굴이 무엇보다 선명했다. 리처드는 잠시 깃펜을 내려놓고 고개를 젖혔다. "후우." 심경이 복잡했다. * * * 리처드가 돌아간 뒤, 군막 안에는 사유서와 깃펜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안으로 트라건이 들어왔다. "......." 트라건은 리처드가 쓴 사유서는 보지도 않고 그가 건드린 깃펜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고개를 돌렸다. "이 정도면 됐나? 정령사." 사르르르르-! 바닥에서 칠흑과는 다른, 묘한 마력이 올라와 뭉치더니 사람의 형상을 이루었다. 검은 망토를 두른 남자였다. "충분합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리처드가 건드린 깃펜에 저주를 걸기 시작했다. 트라건이 자리에 앉으며 무겁게 말했다. "전시 중에 상부 명령 사칭죄는 상당히 큰 중죄일세." "만약 문제가 된다고 해도, 배신자를 솎아내기 위한 일이었으니 상부에서도 이해해 줄 겁니다." 남자가 저주를 건 깃펜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총사령관님도 보셨지 않습니까." "그래." 이곳으로 넘어오기 전, 바힐라 영지에서 리처드가 머물던 군막. 남자는 그곳에 있던 물건들을 트라건에게 보였다. <전쟁을 멈추는 방법> <이 전쟁을 끝내야 하는 이유> 리처드는 전쟁에서 이길 생각을 하는 게 아닌, 이 전쟁을 멈출 방법을 연구하고 있었다. 각종 서적들과 평론, 그리고 노트의 기록까지. "그는 성녀에게 감화되었고, 끝내는 암흑연합을 배신할 겁니다." 저주를 건 깃펜이 날아올라 빈 편지지 위에서 춤을 추었다. "그 전에 먼저 움직여야 합니다. 연합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 * * 안나 또한, 리처드가 있는 드레스덴 왕국령 남부 전선에 와 있었다. 신성연방의 경우 아직까지 대규모 군세를 갖추지는 못했다. 소대 규모의 게릴라 병력을 구성해서, 남부 전선에서 빠져나오는 암흑연합의 병력이라면 모조리 공격을 감행했다. 어느 누가 봉서를 가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으니 빈틈없는 공세만이 해답이었다. 안나도 다른 프리스트들을 따라 정신없이 움직여야만 했다. "......." 그날 밤. 수차례의 전투를 거치느라 잠 한숨 제대로 자지 못했던 안나는 간신히 눈을 붙일 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것도 꺼진 모닥불 앞에서 담요를 덮고 야영하는 정도에 그쳤다. 하지만 마음이 복잡하여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불침번을 서던 동료도 너무 지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밤, 안나는 그를 깨우지 않고 불침번을 대신할 겸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그분은 뭘 하고 있을까.' 안나가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리처드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는 그때. 파삭- 파스스- 주변의 수풀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짐승? 그게 아니면 적? 안나는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나 수풀이 흔들리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아!' 그것은 틀림없이 '정령룡'이었다. 리처드가 처음으로 자신에게 바다를 보여줄 때 사용한 바로 그 정령룡이다. 정령룡은 안나를 빤히 보더니 등을 돌렸다. 마치 따라오라는 듯 뒤를 돌아보고 나아가기를 반복했다. '......리처드?' 안나는 황급히 정령룡을 따라갔다. 숲을 가로질러 꽤 멀리까지 나온 뒤에야, 정령룡은 자리에서 멈춰 섰다. "아, 안녕. 무슨 일이니? 혹시 리처드가 보냈니?" 정령룡은 제 발로 귀를 슥슥 훑은 다음, 고갯짓으로 땅을 가리켰다. 안나가 그곳을 보자, 편지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안나가 편지를 집자, 정령룡은 허공에 녹아 사라졌다. "아." 갑자기 심장이 두근두근 빠르게 뛰었다. 안나는 주위에 누가 있는지 다시 한번 확인한 뒤, 조심스럽게 편지를 펼쳤다. "......!" 그녀가 감격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정말로 리처드의 편지였다. 그녀는 목걸이로 만들어 소중히 보관하고 있던 소라껍데기를 꺼냈다. 소라껍데기 겉면에 적힌 리처드와 필체와, 편지의 필체는 완전히 동일했다. 급박하게 썼는지 날린 글씨체였지만 리처드가 보낸 게 확실해 보였다. 그녀는 집중해서 편지를 읽었다. -나는 봉서를 파괴하고, 이 불합리한 전쟁을 끝낼 생각입니다. 나와 함께 해주시겠습니까? 편지에는 만날 기일과 장소가 적혀 있었다. 안나는 편지를 소중히 접어놓고는 걸음을 옮겼다. 물론 동료들의 야영지가 있는 방향은 아니었다. * * * 같은 시각. 이스라필의 도움을 받은 시몬과 레테도 텔레포트 마법진을 타고 넘어왔다. 거리가 워낙 멀어서, 리처드와 안나가 있는 남부 전선까지 한 번에 도착한 건 아니었다. 여기서 한 번 더 텔레포트 마법진을 탔어야 했지만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기에, 전선까지는 말을 잡아타고 이동하기로 했다. "그런데 말임다." 레테가 말을 걸어왔다. "역사대로라면 이제 곧 '배신의 군단' 사태가 벌어지지 않겠슴까." "그렇겠지." "그냥 하나의 생각일 뿐이니까 화내지 말고 들어요. 만약-" 레테가 진중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배신의 군단 사태를 막고, 안나 선생님과 리처드를 구할 수 있다면 어떻겠슴까." "......." 물론 시몬도 그 생각을 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시몬의 인생에서 가장 큰 난관이 바로 배신의 군단 사태 그 자체였다. 22년 전의 일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배신의 군단 사태라면 치를 떨었고 7군단을 증오하고 있다. 만약 그 일이 없었더라면, 지금쯤 자신은 키젠에 다니면서도 군단장으로서 떳떳하게 생활할 수 있지 않았을까. 아버지도 더 이상 숨어 살 필요가 없고, 어머니의 명예도 복구할 수 있다. 아버지의 군대와 에이션트 언데드들도 온전히 물려받을 테고, 친구들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정체를 숨길 필요도 없다. 무엇보다 당시 배신의 군단 사태 때 두 사람이 겪어야 할 고통과 어려움이 해소된다. 솔직히 과거를 바꿀 생각이 조금도 없다면 거짓말이었다. 시몬은 눈을 꾹 감았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후회를 해. 나도 가능하다면 안 좋은 과거를 바꾸고 싶어. 하지만 우리는 과거를 바꾸려는 게 아니라 미래를 지키러 왔어." 시몬이 고개를 돌렸다. "난 결국 모든 후회도, 슬픔이나 좌절도, 결국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시련이라고 생각해. 그런 어려움들이 있었으니 지금의 우리도 있는 거야. 배신의 군단 사태는 일어나야 해." 레테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멋진 생각임다." 더 이야기는 오가지 않았다. 두 사람은 진중하게 표정을 굳히며 사태가 벌어질 현장으로 달려갔다. 이제 곧, 대륙의 운명을 바꿀 역사적 사건이 일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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