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743화 "허억! 헉!" 전투가 길어질수록 리처드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문제는 정령이었다. 정령룡 두 마리를 소환해 바다까지 갔다 오느라 마나를 너무 많이 소모했다. 지금은 불의 정령 한 마리만 운용하면서 최대한 마나를 아끼고 있지만, 여전히 버거웠다. '군단의 힘을 쓸 수만 있다면.' 군단을 부르면 어둠의 정령 따위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에게 자신이 '요나'라는 사실을 들킬 우려가 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그녀는 바힐라 영지 출신의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그런 그녀가 자신이 고향을 황폐화한 전쟁영웅이자, 악명높은 군단장 '요나'라는 걸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다지 알고 싶지는 않았다. "리처드!" 그 와중에 안나는 현란한 체술로 어둠의 정령을 쓰러트리며 저만치 앞서나가고 있었다. 오늘을 위해 준비한 아름다운 원피스는 엉망으로 찢어졌지만, 그녀는 아예 제 손으로 더 붙잡아 찢은 뒤 다리를 편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끝을 묶었다. "괜찮아요?" "난 괜찮습니다! 아일라." 리처드가 그렇게 말하며 팔을 휘둘렀다. 하나 남은 불의 정령이 이제는 별로 뜨겁지도 않은 불길을 뿜어 어둠의 정령들을 위협했다. '내가 방해되고 있어.' 리처드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고개를 들었다. "아이들이 걱정입니다! 아일라 먼저 아이들에게 가주세요!" "네? 하, 하지만 리처드를 두고 갈 수는 없어요!" 그렇게 말하는 중에도 안나는 맹렬한 움직임으로 끊임없이 몰려드는 어둠의 정령을 쓰러트리고 있었다. 발차기 한 방에 정령들이 분수처럼 나뒹구는 모습을 보며 혀를 내두른 리처드는,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내 한 몸 건사할 정도는 됩니다! 괜찮으니 아이들에게 가주세요! 이렇게 어둠의 정령이 많으면 아이들과 봉사자들이 위기에 빠졌을지도 모릅니다!" 안나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결국 리처드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는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금방 돌아올게요! 꼭 무사하셔야 해요!" "예! 나는 걱정 말고 아이들을 부탁합니다!" 안나가 눈발 같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내달렸다. 어둠의 정령의 머리를 징검다리처럼 밟으며 포위를 뚫어내더니, 바닥을 박차고 한 줄기 섬광처럼 나아갔다. 점점 멀어지는 그녀를 보며, 리처드는 그제야 후우 하고 긴 숨을 내뱉었다. '이제 실력 발휘 좀 하겠군.' -우우우우우! 안나가 사라지자 어둠의 정령들이 슬금슬금 리처드에게 몰려들었다. 리처드는 마나 먹는 하마인 불의 정령을 미련 없이 해체해 버리고는 아공간을 열었다. 우우웅! 불길한 검은 포털이 열리자마자, 어둠 속에서 사념이 일렁였다. [하하하하! 위기로군 요나! 나를 써라!] '칼.' 만에 하나의 상황에 대비해 데려온 에이션트 언데드, 역병의 마수 칼이 자신을 써달라고 종용했다. 하지만 리처드는 고개를 내저었다. '네가 나가면 역병 때문에 아이들이나 다른 사람들도 위험해져. 쉬고 있어.' [쳇!] 리처드는 군단형 스켈레톤들을 여럿 꺼냈다. 방어마법이 걸려 있는 합금 갑옷으로 무장했으며, 손에는 미늘창을 들었다. 어둠의 정령들이 겁도 없이 달려들었지만. 촤아아아아악-! 군단형 언데드들이 미늘창을 휘두르니, 그들이 몸째로 두 동강 났다. 리처드는 그중 하나의 스켈레톤을 분해해 본 아머로 입고, 로브를 걸친 뒤 해골 투구를 벌려서 얼굴을 가렸다. '귀찮은 프리스트 놈들도 없겠다. 최대한 병력을 멀찍이 우회시킨 뒤, 뒤쪽에서부터 사람들을 돕는다면 문제없어.' 군단의 병사들이 괴성을 지르며 아공간에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리처드가 선두에 섰다. '가자!' * * * "누군가 여기로 오고 있어." 시몬이 말했다. 레테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허리에 손을 얹었다. "안나 선생님이랑 리처드 아님까?" "아니. 그 두 사람은 아냐." 저 멀리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지, 어둠의 정령들이 날카롭게 베인 상처와 함께 사라지고 있었다. 이내 하얀 빛이 훅하고 이쪽으로 파고들었다. '여자?' 로브를 입은 누군가였다. 바람결에 후드가 벗겨지며, 바다색의 짧은 단발머리가 휘날렸다. "레나아아아아!" 그녀는 거친 고함성을 내뱉으며 달려들어 다짜고짜 레테를 바닥에 넘어뜨렸다. 그러곤 그녀의 멱살을 붙잡으며 소리 질렀다. "역시 넌 처음부터 수상했었어! 어떻게 이런 짓을......! 이제는 사악한 괴물들까지 불러서 날 공격하게 해?" "아니! 다짜고짜 무슨 소릴 하는 검까!" 두 사람이 뒤엉키는 모습을 지켜보던 시몬이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이, 이스라필 이모?' 레테로부터 과거의 이스라필이 안나와 함께 있다는 사실은 듣긴 했지만, 직접 보니 대단히 충격적이었다. 그 자애로운 신해의 성녀 이스라필이 과거에는 이렇게 다혈질이었다니. 이미지가 완전히 달랐다. "무슨 목적으로 안나 언니께 접근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포기해! 이미 본부에 서신을 보냈고, 곧 병사들이 올 거야!" 그렇게 말한 이스라필이 더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안나 언니를 어떻게 했지? 당장 말해!"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레테가 팔을 뻗었다. "저기 오고 계시잖슴까!" "뭐?" 이스라필이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말이었다. 퍼억! 쩍! 으적! 거리가 조금 멀긴 했지만, 저 멀리서부터 안나가 포위망을 뚫고 이쪽으로 달려오는 모습이 확연하게 보였다. 그녀가 가는 곳마다 주먹과 발길질에 어둠의 정령들이 화려하게 박살 나고 있었다. 퍽! 그때 레테가 팔꿈치로 이스라필의 턱을 가격했다. 이스라필이 큭 소리를 내며 뒤로 엎어졌고, 그사이 레테가 빠져나왔다. "그쪽이야말로 왜 여기 있는 검까!" 이스라필이 입가를 쓱 닦으며 레테를 노려보았다. "뭘 물어? 주말마다 아군진형에서 무단이탈하는 널 감시하려고......!" 레테는 잠시 멍한 표정으로 있다가 이내 하. 하고 냉소 섞인 한숨을 흘렸다. "역시 당신이 원인이었네요." "뭐, 뭐? 내가......?" "어쩐지 정보가 샜다 싶었어. 우리가 여기 온 걸 아는 사람은 당신을 포함해 다섯뿐임다." 그녀가 다섯 손가락을 펼쳤다. "고작 이런 일로 전시상황인 본부에 서신을 보내서 병력 요청까지 한 거예요? 본부 쪽에 이 일이 싹 다 소문나고, 안나 선생님을 나쁘게 보던 사람들의 귀에도 들어갔겠네요." 바로 그 사람들이 '결사'라는 이야기만큼은, 레테는 말하지 않았다. 이스라필은 어둠의 정령을 뚫고 오고 있는 안나의 모습을 우두커니 보다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내, 내 조치가 뭐 잘못됐어? 모든 건 다 안나 언니를 위해서였어! 외부인인 당신이 안나 언니에게 이상한 물을 들이는 바람에......!" "제발, 웃기지 좀 마십쇼." 레테가 싸늘하게 말했다. "지금은 전쟁 중임다. 봉사활동을 하러 온 정도로 전시상황인 전선 본부에 서신까지 보내요? 그런 식이면 날이면 날마다 툭하면 남자 끼고 밖에 놀러 나가는 당신네 선배들은 왜 신고 안 했는데요?" "......윽!" "안나 선생님을 위해서라고? 순전히 날 배제하고 안나 선생님을 독차지하고 싶어서, 건수 잡으려 미행했다가 본부에 보고한 거겠죠! 안나 선생님이 얼마나 곤란해질지는 상관도 안 하고! 당신이 안나 선생님을 위한다는 건 전부 자기 만족일 뿐이에요!" "그만해, 레테!" 시몬이 흥분한 레테를 진정시켰다. 물론 그녀의 심정은 이해가 가지만, 리처드와 안나 외의 다른 인물에게 영향을 미치는 건 좋지 않았다. 이스라필은 동공에 지진이 난 듯 흔들리고 있었다. "레나!" 그때 봉사자 한 명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큰일이야! 반대쪽에도 저 괴물들이......!" "네?" 포위당했다. 어느새 전역이 어둠의 정령들로 바글거렸다. 고아 보호소의 아이들은 겁에 질려서 서로를 끌어안았다. 원장은 괜찮을 거라며 아이들을 안심시켰지만, 정작 본인도 표정이 좋지 않았다. "내가 가서 막을게!" 시몬이 당장 앞으로 뛰쳐나갔다. 무수한 어둠의 정령들이 입을 쩍 벌리며 달려들고 있었다. '언제까지 맨몸으로 싸울 순 없어.' 시몬은 서서히 손끝에서 칠흑을 일으켰다. '무리하지 않고, 작은 힘을 사용해서 포위망만 뚫을 수만 있다면......!' 그때 시몬의 눈이 급격히 커졌다. 아직 칠흑을 쓰기도 전인데, 다른 곳에서 칠흑이 느껴지고 있었다. '설마.' 그의 시선이 움직였다. 몰려드는 어둠의 정령들의 옆으로, 어둠 속에서 한 무리의 군대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돌진하고 있었다. -케에에에에엑! 언데드들이었다. 정교한 장비를 갖춰 입은 스켈레톤들이 거대한 미늘창을 휘두르며 돌진하니, 어둠의 정령들이 뭉텅뭉텅 썰려서 사라졌다. 진을 맞추어 흩어져 방어선을 형성하고, 다른 방향에서 오는 어둠의 정령들까지 모조리 상대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고아원 쪽으로는 절대로 접근하지 않는 모습. 철저히 바깥에서 밀려드는 적만 묶어두는 움직임이다. '군단이다!' 시몬은 그 정체를 단번에 직감했다. 등 뒤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아무리 급해도 벌써 군단의 힘을 쓰시다니! 이러면 엄마가 눈치챌......!' 화아아아아아아아악! 이번에는 하늘에서 눈부신 빛이 터져 나왔다. 갑자기 밤이 지나고 대낮이 된 것만 같았다. 시몬과 사람들은 팔로 눈을 가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역시 이건 전부 사악한 암흑연합의 짓이었군요." 새하얀 빛의 향연 속에서, 신성을 개방한 안나가 천사처럼 내려오고 있었다. "그것도 악명높은 군단이 관여한 일이었다니, 절대 용서할 수 없어요." 군단의 칠흑을 감지한 그녀가 신성을 개방하며 군단이 있는 쪽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시몬이 입술을 깨물었다. '파국이야.' 상황이 꼬일 대로 꼬이고 있다. "......아일라?" 그때 충격에 잠긴 목소리가 들렸다. 팔을 뻗어 신성마법을 사용하려던 안나가 멈칫하고 시선을 돌렸다. 군단의 언데드들 속에서 사람이 한 명 보였다. 해골 투구를 쓰고, 낡은 로브를 몸에 두른 남자. '아.' 안나는 순간. 나쁜 예감이 들었다. 로브를 둘러서 체형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고 얼굴도 가렸지만, 신발까지는 갈아신지 못한 모양. 바닷물에 젖은 신발이 그대로였다. 그리고 분명 '아일라'라고 했다. 아일라라는 가명은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만들어 쓴 가명이다. 무엇보다 자신을 부른 목소리. 절대로 잊지 못할 그 목소리. 안나는 입을 벌리며 중얼거렸다. "리처드?"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한다. 바들바들 떨리는 군단장의 손이 움직여 해골 투구를 벗는다. 투구 속에서는 비탄에 잠긴 남자의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일라......." 부정해야 했다. 가능하다면 사실을 한없이 부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당신이 기적의 성녀였어?" 눈앞의 현실은 너무나 절망적으로 확실했다. 안나가 두 팔을 힘없이 늘어뜨렸다. "당신이 요나였나요?" 가장 1순위로 죽이고 싶어 했던 적장의 정체. 절망과 비탄이 교차한다. 슬픔과 분노, 혼란과 배신감으로 범벅이 된다. 두 사람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으로 할 말을 잊고 말았다. "요나!" "안나 선생님!" 그때 시몬과 레테가 다급히 달려왔다. "도망쳐요! 양측 세력의 병사들이 오고 있어요!" "이대로는 전쟁이 일어날 거예요!" 뒤늦게 정신을 차린 리처드는 섬뜩한 기운을 느꼈다. 곳곳에서 텔레포트 마법진이 펼쳐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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