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719화 '됐군.' 에이젤의 이름을 대니, 이제야 저 괴물이 대화를 할 준비가 된 것 같았다. 혼령화 상태의 소타가 빙글빙글 웃으며 목소리를 냈다. [그전에 딱 한 가지만 물어볼게, 발락. 왜 학생회장 쟁탈전에 참여하지 않는 거야? 키젠 최강은 늘 네 목표였잖아.] 끓는 독극물 속에서 몸을 뉜 발락이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그 자리는 에이젤의 것이다.] [흐흠.] [내키는 대로 뒷골목의 들개처럼 살아온 나에게, 그는 전사로서 마땅히 갖춰야 할 격과 기품이 있음을 알려주었다.] 발락은 에이젤과 무수히 싸웠다. 부딪히고 깨지고, 승리도 패배도 많았다. 질수록 더 악착같이 덤벼들었고, 비열한 수도 써보았지만 에이젤은 어떤 경우에도 발락을 탓하지 않았다. -발락에게는 죄가 없습니다. 제가 임무 도중 방심한 탓입니다. 심지어 징계위원회에서 그를 감싸주기까지. 에이젤에게는 어떤 격이 있었고, 그 고매한 격에 발락조차 감화되었다. -내 라이벌은 너뿐이야, 발락. 같이 위로 올라가자. 그 목소리를 떠올리며, 발락의 흉흉한 눈동자가 치켜떠졌다. [놈이 학생회장직을 차지할 때까지 기다린 뒤에, 도전할 것이다.] [그래, 그래. 역시 그런 생각이었네. 그런데 말야.] 소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에이젤이 네가 생각하는 그런 녀석이 아니라면 어때?] [.......] [너도 참관자로 선택받지 못했지? 멍청한 그레리엄 가문 놈이 준비한 결계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너도 알면 깜짝 놀랄걸.] 소타의 입에서 뱀 같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짜고 치는 게임.] 발락의 눈썹이 꿈틀했다. [에이젤은 처음부터 학생회장을 할 생각이 없었어.] 부글부글부글부글부글부글! 잠잠하던 솥 안의 독극물이 갑자기 격렬하게 들끓기 시작했다. 금속 마스크에서 살벌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 앞에서 에이젤 브링어를 모욕하지 마라, 패배자.] [그래그래. 방금 에이젤한테 지고 와서 이런 소릴 하니 설득력도 없고 뒷담화하는 것처럼 들리는 것도 이해해.] 소타가 팔을 휘젓자, 바닥에 떨어져 있던 사진 몇 장이 스피릿에 휩싸여 올라왔다. [하지만 사실이야.] 그건 최근에 에이젤과 시몬이 함께 있는 모습을 찍은 사진이었다. 둘은 퍽 사이가 좋아 보였다. 웃으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굳이 접촉할 필요가 없는 이 둘이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나눴을까? 에이젤은 굳이 바다를 파내고 따로 장소까지 만들어서 시몬을 데려갔어.] [고작 사진 몇 장 따위로-] [넌 에이젤에 대해 처음부터 다시 알아야 해, 발락.] 파라라라락-! 이번에는 전과 비교도 안 되는 양의 사진과 기사들이 발락의 눈앞에 펼쳐졌다. [에이젤이 어떤 인간인지.] 모두 에이젤의 숨겨진 실체를 폭로하는 내용들이었다. 발락이 충혈된 눈으로 사진을 살폈다. 과거의 일들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에이젤에게는 '대본'까지 존재했다. 그중에는 징계위원회에서 어떻게 발락을 감쌀 것인지에 대한 내용까지 있었다. 발락의 얼굴에 핏줄이 서고, 전신 곳곳에 혈관이 올라왔다. 부글부글부글부글부글부글! [에이젤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른 자신을 연기하고 있을 뿐이야. 너와의 라이벌 관계도, 선의의 투쟁도, 같이 올라가자는 약속도 전부 거짓. 에이젤 브링어에게 있어 인간관계란 그저 자신의 겉모습을 굳건히 유지시킬 장치일 뿐이지. 그래, 놈은 널 아무렇게도 여기지 않았어.] 소타가 입꼬리를 올렸다. [넌 농락당한 거야. 발락.] 투화아아아아아악! 솥에서 들끓는 맹독들이 공중으로 치솟았다. 핏발 선 눈의 발락이 거칠게 팔을 휘두르자 맹독의 파도가 전면으로 쏟아져 벽을 들이받았다. 단단한 벽이 모래성처럼 간단히 부서졌다. 뿌연 흙먼지 속으로 독의 파도는 계속 나아갔다. 꽈악! 발락이 주먹을 움켜쥐더니 힘차게 자신 쪽으로 잡아당겼다. 그러자 독으로 이루어진 주먹에 소타의 본체가 붙잡혀 있었다. "하, 하하하! 지, 진정해 발락!" 치직! 치이이익! 키젠 교복의 배리어가 붉은색으로 정신없이 깜빡거렸다. 단 두 벌뿐인 교복인데 오늘 하루 모두 박살 나게 생겼다. [알고 있는 걸 모두 말해라.] 발락이 성큼성큼 다가와 소타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방금 그 말이 거짓이라면, 지금 이 자리에서 산 채로 뼈까지 녹이겠다.] 소타가 억지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래, 좋아, 알았어. 일단 이것 좀 놓고 이야기할래?" * * * 그날 새벽. "......." 시몬은 깊게 잠이 들지 못했다. 설렘에 뜬 눈으로 천장을 보면서 잠이 들었다가 깼다가를 반복하니 어느새 약속시간이 다 되어 있었다. 토토의 미약한 코 고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시몬은 조용히 일어나 씻으러 갔다. 가볍게 씻고 머리를 단장하고 키젠 교복으로 갈아입었다. 이후 필요한 물건들을 챙겨 밖으로 나갈 즈음. "시, 시몬. 힘내애." 비몽사몽 한 토토가 희미한 목소리로 응원했다. 저거 한마디 해주려고 일부러 깬 건가. 시몬이 빙긋 웃었다. "고마워 토토. 다녀올게." 시몬은 불 꺼진 복도를 살금살금 지나 기숙사 로비로 내려왔다. 늦은 시간. 대부분의 학생들이 자거나 로체스트에 가 있어서 텅 비어 있었다. 중간에 기숙사 관리원들과 마주했지만, 그들 또한 소리 없는 음성으로 시몬을 응원하거나 못 본 척해주었다. 덕분에 시몬은 무사히 기숙사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하아." 시원한 새벽바람을 받으니 잠이 확 달아났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저 멀리서 익숙한 실루엣들이 보였다. "여기에요! 시몬!" 카미바레즈가 손을 붕붕 흔들었다. "이럴 때만 빨리 일어난다니까." 팔짱을 낀 메이린이 툴툴거렸다. "헤이! 마이 베프! 컨디션은 좀 어때?" 딕이 흥분한 얼굴로 말했다. "너희들......!" 시몬이 참관자로 등록한 학생회 멤버들이었다. 그들이 시몬의 앞으로 달려왔다. "기다리고 있었지!" "응원할게요 시몬!" 멤버들과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하니 긴장감이 거짓말처럼 풀렸다. 그렇게 선선한 새벽바람을 받으며 걸어서 약속장소인 바닷가에 도착했다. 철썩- 철써억- 주위는 어두웠고 파도가 절벽에 부딪히는 고즈넉하게 울려 퍼졌다. 메이린이 조금 당황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지, 진짜 여기가 결투 장소 맞아?" "그냥 낭떠러지처럼 보여요." 이미 경험이 있는 시몬이 그 낭떠러지 너머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맞아. 내가 먼저 갈게." 시몬은 망설임 없이 절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자, 잠깐만!" 메이린이 손을 뻗기 무섭게, 그의 모습이 절벽 너머로 깨끗이 사라졌다. "?!" 모두가 움찔거리며 입을 벌렸다. 그런데 허공에서 시몬이 다시 나타나며 손바닥을 펼쳐보았다. "걱정할 필요 없어. 자, 내 손 잡아." "아, 응." 메이린이 살짝 얼굴을 붉히고는 시몬의 손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시몬은 에스코트하듯 그녀를 부드럽게 끌어당겼다. 눈을 질끈 감은 채, 펭귄 걸음으로 뒤뚱거리며 결계를 통과한 메이린이 다시 눈을 떴다. "와아!" 절벽 너머에 드넓은 땅이 더 있었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에드닉 그레리엄과 3학년들이 웃어 보였다. "시몬 폴렌티아와 참관인이 왔군." "어서 와라!" 뒤따라 시몬의 도움을 받아 넘어온 카미바레즈와 딕도 눈을 큼지막하게 떴다. 딕이 와하하 웃었다. "개쩌는데! 여기서 싸우는 거야?" 깎아지른 듯한 언덕. 그리고 주위는 주홍색 결계가 빈틈없이 둘러싸고 있었다. 근처에는 다른 참관자들 외에, 그레리엄 가문의 의료진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치료기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다들 잘 왔어." 이 경기의 주최자 에드닉 그레리엄이 웃는 얼굴로 맞아주었다. 그는 교복이 아니라 가문 전통의 금색 제복을 입고 있었다 그런 그의 옆에는 지금 이 결계를 조작하는 마법진이 둥둥 떠 있었다. "시몬 폴렌티아, 그리고 참관자 메이린 빌렌느, 딕 헤이워드, 카미바레즈 우르슬라. 모두 결계를 무사히 통과했네. 당사자가 아니면 튕겨 나가게 설계했거든. 자, 여기." 에드닉이 세 사람에게 다가와 서류를 내밀었다. 경기에 대해 본 대로 진실만을 말하고 승자를 학생회장으로서 인증하겠다는 내용이 담긴 서류였다. 세 사람이 서명하는 사이 시몬의 앞으로 잘 아는 얼굴 한 명이 뛰어들어왔다. "학생회장 선배님!" 유일한 1학년 참관자인 몰리 공주였다. "아, 몰리. 잘 지냈어?" "네! 선배님." 두 사람은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 그리고 약소하지만 이거." 그녀가 수줍게 꽃다발을 내밀었다. "왕국에서 전해 내려오는 승리와 행운의 꽃말을 가진 꽃들만 모아 만들었어요. 실전룰이라 걱정이 많네요. 부디 무사히 경기를 치러주세요." "고마워, 몰리." 시몬이 꽃다발을 손에 들고, 그중 한 송이를 뽑아서 조심스레 교복 안 주머니에 넣었다. "학생회장." 또 다른 사람이 불렀다. 고개를 돌려보니, 소환학과 대표인 3학년 레오나드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시몬도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레오나드 선배님." "긴장할 줄 알았는데, 표정이 좋아 보이네." 레오나드는 특유의 왕자님 같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었다. "난 에이젤 쪽 참관자로 참여해서 너와는 적이겠지만, 그래도 결과와는 상관없이 훌륭한 경기를 보여줬으면 해." "네, 물론이죠." 시몬은 레오나드와 가볍게 악수하고는 학생회 멤버들 쪽으로 돌아왔다. "자, 그럼 결투 30분 전!" 에드닉 그레리엄이 시계를 보며 말했다. "에이젤이 늦네. 주인공이라 이건가? 하하! 다들 그렇게 뻣뻣하게 있지 말고 자유롭게 이야기하면서 돌아다녀. 시몬도 컨디션 조율하고." "알겠습니다." 시몬은 바로 자리에 털썩 앉아서 눈을 감고 호흡과 칠흑상태를 점검했다. 홍펭이 전수해 준 명상법. 폭포 속에서 이 자세로 몇 시간 동안 있을 때는 추워죽는 줄 알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도움이 된다. '집중. 집중.' 에이젤이 올 때까지. 잠시 이러고 있기로 했다. * * * 그렇게 시간이 흘러. 경기 시작 5분 전. "에, 에이젤 이 자식 왜 이렇게 안 와?" "무슨 일 있나?" "불길한데." 시몬이 명상을 마치고 눈을 뜨니, 난리가 나 있었다. 참관자들은 하나같이 심각한 얼굴로 말을 주고받았다. '걱정', '문제', 그런 단어들이 반복적으로 들렸고,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레오나드는 외투를 챙기며 당장이라도 나갈 의사를 표출했다. "내가 에이젤 방에 가보고 올게." "기다려, 레오나드." 에드닉 그레리엄이 그를 막았다. "참관자가 자리를 비우면 곤란해. 방금 사람을 기숙사로 보내놨으니까 이제 곧......." "에드닉 도련님." 그때 결계 너머에서 그레리엄 가문의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칠흑역학과 기숙사에 다녀왔습니다. 문의해 보니 에이젤 학생은 이미 두 시간 전에 기숙사를 떠났었다고 하더군요." "두 시간 전?" "그럼 진작에 도착했어야 하는데." 다들 혼란에 빠져 있는 가운데, 에드닉이 손뼉을 짝짝 치며 앞으로 나왔다. "자, 일단 경기시작 시간이야. 시몬 폴렌티아? 결투의 징표를 가슴에 매고 앞으로 나와." "네." 시몬이 앞으로 나와 섰다. 에드닉은 손목에 찬 시계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합의한 룰에 의거하여, 도착 유예 시간은 10분." 그렇게 말한 에드닉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10분 안에 도착하지 않으면 에이젤의 기권으로 간주. 시몬 폴렌티아의 승리를 선언하겠어. 2학기도 키젠의 학생회장은 시몬 폴렌티아다." 그게 뭐야! 말도 안 돼! 레오나드를 제외한 에이젤 측 참관자들이 불같이 화를 냈지만, 이건 당사들끼리 합의한 내용이었다. 항의해도 바꿀 수가 없는 문제다. 이제는 다른 참관자들 사이에서 온갖 혼란스러운 추측들이 쏟아졌다. "이게 다 무슨 일이야 대체." "설마 그 이상한 소문대로 에이젤이 겁쟁이라는......." "아뇨." 시몬이 한 참관자의 말을 끊으며 내뱉었다. "에이젤 선배님은 반드시 올 거예요." 에이젤은 자신의 목숨보다 품위가 몇 배는 더 중요한 사람이다. 그리고 이건 키젠의 전교생이 주목하는 결투다. 아무리 학생회장직을 맡기 싫다고 해도 경기 시간에 지각해서 학생회장직을 2학년한테 빼앗긴다? 그런 바보 같은 결말을 에이젤이 원할 리가 없다. "기다려 보죠." 10분이란 시간은 점점 빠르게 흘러갔다. 특히 레오나드는 10분 동안 10년은 늙어진 듯한 얼굴이었다. 5분이 흐르고 8분이 흘렀다. 남은 시간은 2분. "이것 참." 에드닉이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존경하는 판타서스 선배님의 뜻을 받들어, 이 세기의 결투를 위해 갖은 준비를 했건만. 이런 결말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 또한 결말이라면 받아들여야 했다. 명예로운 그레리엄 가문의 일원으로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새로운 학생회장이 탄생했다는 사실을 인증하는 것뿐. "아무래도 안 오는 것 같으니...... 음?" 그때 에드닉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옆에 결계를 유지하고 있던 대형 마법진. 그 대형 마법진이 색깔이 주황색에서 우중충한 진흙색으로 변질되고 있었다. "이런 미친!" 주르륵 주르륵- 마법진의 구조가 강제로 바뀌고 있었다. 당황한 에드닉이 자신의 마법진을 붙잡고 흔들었다. "마법진 해킹이라고?" 에드닉이 어떻게든 통제권을 되찾으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마법진은 통제 불능으로 치달으며 뒤엉키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본 참관자들이 웅성거렸다. "에드닉 선배님! 무슨 일이에요?" 몰리 공주가 다가왔다. "자, 잠깐만 있어봐, 공주님! 별거 아냐. 결계에 좀 문제가......!" 꾸르르르르르륵- 꾸르르르르륵! 문제가 점점 심각해지고 있었다. 마법진이 해킹당하고, 뒤이어 경기장 전체를 감싸고 있던 거대한 결계 전체가 변질되어 거무죽죽한 색상으로 변했다. 그것이 녹은 아이스크림처럼 흘러내렸다. "독이야!" 콸콸콸콸콸콸콸콸! 이내 결계가 독의 폭포처럼 변해 쏟아져 내렸다. "꺄아아아악!" "가까워지고 있어! 물러서!" 참관자들이 겁에 질려 물러섰다. 레오나드는 1학년인 몰리부터 챙기면서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막도록 했고, 메이린과 몇몇 3학년들이 칠흑 원소 마법을 일으켜 날려보았지만 소용없었다. 모두가 혼란에 빠진 그때. 쿠구구구구구구구구! 독의 폭포 한쪽이 유난히 솟구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내 얼굴의 형상이 되었다. 마치 고무판에 얼굴을 들이민 것처럼 쭈우우욱 이목구비가 드러나더니, 이내 폭포를 뚫고 모습을 드러냈다. "저 기술은......!" "진짜 환장하겠군." 레오나드와 옆의 3학년이 낭패감 가득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고오오오오오오! 독의 폭포를 뚫고 형용하기 힘든 거대한 독의 거인이 튀어나왔다. 그것은 시몬과 참관자들을 굽어보았다.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유독가스가 발생하고 독극물이 흘렀다. 맹독학 교수 별야에게 배운 '면역계'를 활성화한 시몬은 전신의 몸이 극도의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것을 느꼈다. [여기 있었나.] 쿠르르릉! 독의 거인의 얼굴을 뚫고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굉음을 일으키며 바닥에 착지한 남자는 거대한 덩치에 금속 마스크를 쓴 남자. 키젠 차석이자 에이젤의 라이벌. "발락!!" 발락은 음침한 눈으로 궁지에 몰린 참관자들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손에 쥐고 있던 진흙 덩어리 같은 뭔가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물론 진흙이 아니라 독극물이었다. [실망을 금할 길이 없다.] 그의 목소리에 짙은 감정이 깔렸다. 분노, 회한, 증오, 슬픔. [에이젤이 내가 생각하던 남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에 실망했고, 내 진심이 닿지 않았음에 낙심했으며, 나를 속이고 능멸했음에 분노했다.] "발락!" 레오나드가 시뻘게진 눈으로 뛰어들었다. "에이젤을 어떻게 어떻게 했냐!" [무엇보다.] 발락은 레오나드의 말은 가볍게 무시하며 내뱉었다. [나보다 약한 것에 실망했다.] 모두의 눈에 튀어나올 듯 커졌다. 발락이 떨어뜨린 진흙 뭉치가 흘러내리며, 에이젤의 머리카락이 보였다. 꺄아아아아아악! 메이린과 몰리가 입을 틀어막으며 비명을 질렀다. 한쪽에는 그가 쓰던 안경이, 다른 한쪽에는 그가 신던 신발이 보인다. "이런 개자식이......!" 레오나드가 아공간을 열었다. 그 안에서 괴물 소의 머리가 튀어나오려는 그때.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레오나드. 네놈만은 이 독이 뭔지 알 텐데.] 레오나드가 움찔하며 동작을 멈췄다. 말만으로 간단히 전체 4위를 묶어버린 발락의 음침한 시선이, 주최자인 에드닉 그레리엄에게로 향했다. [이 징표를 가진 자들끼리 전투한다. 그게 네놈이 말하는 룰일 터.] 발락이 '결투의 징표'를 들어 보였다. 금속 마스크에서 독성 숨결이 흘러나왔다. [나는 키젠 최강을 꺾고 이 징표를 손에 넣었다. 이제는 내가 키젠 최강이고, 학생회장직을 건 결투에 참가한다. 문제 있나?] "......발락." 에드닉이 한숨을 쉬었다. 이내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에드닉에게로 향했다. 에드닉이 한 차례 더 긴 한숨을 내쉬고는 픽 웃으며 가운뎃손가락을 내밀었다. "엿이나 먹......."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독의 파도가 쏟아져 나와 에드닉을 휩쓸어 버렸다. 곳곳에서 경악성이 튀어나왔고, 에드닉은 초록색 독극물에 뒤덮인 채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굴러다녔다. [나는 부탁을 하지 않았다, 에드닉 그레리엄. 이건 명령이다.] 모두가 겁에 질린 채 뒷걸음질 쳤고, 발락의 눈이 살벌하게 빛났다. [에이젤의 명예를 위해 그가 돌아올 때까지 이빨을 드러내지 않고 기다렸다. 내 안의 욕망과 충동을 억누르고 참았다. 하지만 돌아온 건 기만이고, 능멸이었다. 더 이상 나를 속박할 수 있는 건 없다.] 금속 마스크 너머로 찢어질 듯한 미소가 걸렸다. [이제는 다시, 내 마음대로 하겠다.] 에이젤에 가려져 있던 진정한 공포가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가 발락이 일으키는 위압에 전의가 꺾이는 것을 느꼈다. [그럼 에드닉 그레리엄 놈 대신 새로운 주최자를.......] 그 순간. 검은 인영이 발락의 옆으로 치솟았다. "당신." [?] 뻐어어어어어어어억!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발락의 고개가 거칠게 돌아가며 그대로 공중에서 두어 번 회전한 채 바닥을 굴러다녔다. 콰콰콰쾅! 근처의 나무들을 모조리 무너뜨리며 발락의 몸이 멀찍이 날아갔다. 타악. 그리고 착지한 한 소년이 천천히 다리를 내렸다. "당신은 선배 대접받을 생각은 마." "시몬!!" 메이린이 경악하며 소리 질렀다. 카미바레즈가 뒤따랐다. "안 돼요, 시몬! 도망치세요!" "뭐 하는 거야 바보야!" 쿠르르르― 먼지 구덩이 속에서 큭큭큭- 하는 발락의 음침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시몬 폴렌티아.] 발락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인상적인 일격이었다.] 투웅. 발락의 몸이 독웅덩이가 피어오르는 것과 함께 사라졌다. "시몬! 뒤!" 딕이 쉰 목소리로 외쳤다. 시몬은 잠자코 서 있다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고개를 가볍게 기울였다. 부아아아아앙! 살벌한 발락의 주먹이 시몬의 뺨에 실선을 그리며 지나갔다. 시몬은 지나간 그의 팔뚝을 붙잡고는 허리를 비틀며. 쩌어어억! 다시 한번 다리를 뻗어 그의 턱을 걷어찼다. 맹렬한 굉음과 함께 발락의 두 발이 잠시 공중에 떴다가 내려왔다. [이놈이.] 2학년 애송이 따위에게 몇 방을 허용하는가. 발락의 눈이 벌게졌다. <발락 오리지널 - 데스 아머> <발락 오리지널 - 데스 터치> 허공에서 일어난 독극물이 발락의 몸을 휘감았다. 동시에 반대쪽에서 나온 독극물이 시몬의 몸을 잠식하려는 순간. 시몬은 강하게 발을 굴렀다. <홍펭 오리지널 - 연풍> 푸화아아아아악! 발락의 갑옷이 벗겨지고 마법진이 흩어졌다. 발락이 눈을 부릅떴고, 다시 돌진한 시몬이 주먹을 움직였다. 퍼버버버버벅! 그의 주먹이 잔상을 그리며 발락의 몸을 무차별적으로 가격하기 시작했다. 발락이 급히 방어자세를 취했지만 가드를 뚫고 시몬의 주먹이 사정없이 내리꽂혔다. 그의 고개가 좌우로 정신없이 돌아갔다. "!!" 발락이 시몬에게 얻어맞고 있다. 모두가 지금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비현실적인 현상에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후읍!" 연타를 끊은 시몬이 몸을 회전시키더니 다시 한번 그림 같은 돌려차기로 발락의 안면을 강타했다. 발락의 몸이 거칠게 날아가 머리가 바닥부터 떨어졌다. [이게 어떻......!] 그 순간. 떨어진 머리가 다시 공중으로 치솟으며 발락의 몸이 시몬의 앞까지 끌려왔다. [?!] 어느새 그의 턱이 시몬의 주먹 앞에 스스로 도달해 있었다. "일단 좀 맞자." 두 눈에서 귀기를 일렁이며, 시몬이 주먹을 내뻗었다. <연풍 연계기 - 인거> 쩌어어어어억! 발락이 쓰고 있던 금속 마스크가 반으로 뜯어져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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