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715화 사령학과 기숙사. 학과대표실. "끄으으으응." 한 소년이 의자에 앉아 다리를 쭉 뻗은 채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인상을 구긴 채 고개를 빙빙 돌리거나, 책상에 놓인 과자를 유난스럽게 부스럭거리며 입에 던져넣기도 했다. 그런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같은 3학년 동기가 말했다. "뭔가 잘 안 풀린다는 표정이네. 소타." 그는 사령학과의 학과대표, 전체 6위 소타 프쉬케였다. "그렇지 뭐." "뭐가 그렇게 불만일까? 염원하던 학과대표도 차지했고, 조금 있으면 무려 키젠 부회장 자리까지 넘어올 건데." 소타가 길게 숨을 내뱉었다. "요즘 에이젤이 내 말을 듣지 않아." "음?" "2학년 때까지만 해도 내 말이라면 껌뻑 죽던 녀석이었다고! 내가 그 자식을 키젠의 정점인 학생회장 자리까지 올려놓은 일등공신인데." "벌써 회장이 바뀐 것처럼 말하네." "에이젤이 2학년에게 질 리가 없으니까 당연하지." 소타가 의자 등받이를 최대한 기울이고 몸을 눕혔다. 그러자 그의 몸에서 영혼 같은 게 두둥실 떠오르며 자유로이 공중으로 올라갔다. [그런 것보다 장기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뒤부터 에이젤이 이상해. 내 통제를 벗어나려 하고 있어.] 동기가 소타의 과자를 빼앗아 먹으며 킬킬 웃었다. "뭐, 임무 동안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던 거 아냐?" [그런 걸지도 모르고. 아님 장기임무에 가도록 바람 잡은 날 은연중에 원망하고 있다거나. 내가 에이젤이 죽었다는 소문을 퍼뜨린 게 들켰다거나. 아, 걸리는 게 한둘이어야지.] "소타, 천장까지 넘어가지는 마." 혼령화 상태로 건물을 통과하려던 소타가 다시 내려와 몸 안으로 들어왔다. "게다가 소환학과 대표 레오나드 그 새끼." 제 몸으로 돌아온 소타가 으르렁거렸다. "요즘 그 새끼 너무 나대. 에이젤 옆에 착 붙어서 자기가 책사인 척한다니까. 부회장직이 목표인 게 뻔히 보여서 약올라 미쳐 버릴 것만 같다고!" 소타가 짜증스럽게 제 앞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이대로 에이젤이 날 거르고 레오나드를 부회장직에 앉히면 진짜 미쳐버릴지도 몰라! 내가 지난 세월 동안 에이젤을 위해 헌신한 시간은? 그 찐따 새끼를 커버 쳐주려고 애썼던 수고는? X발, X발! 이럴 수는 없어!" 동기가 어깨를 으쓱했다. "내 생각엔 시험시간이라 너무 예민해진 것 같은데. 에이젤이 절친인 널 버릴 리가 없잖아. 들어가서 좀 쉬어." "나도 단순히 내가 예민한 거면 좋겠다." 소타가 웃음기를 싹 거두고 표정을 굳혔다. "근데 그럴 수가 없다고. 최근 흥미로운 정보가 귀에 들어왔어. 에이젤과 시몬 폴렌티아가 접촉했어." "으, 응? 그 두 사람이 왜?" "몰라, 내가 직접 가보니까 도중에 하늘에 떠서 이동하다가 바다를 가르고 그 안에 들어갔나 봐." 사람들의 시선에 극도로 민감한 에이젤은 늘 주위에 감시결계를 쳐놓기 때문에, 소타라고 해도 더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에이젤이 그렇게 큰 기술을 쓸 정도로, 두 사람 간에 중요한 이야기가 오갔다는 거겠지." "음." "그리고 바다에서 빠져나온 두 사람은 사이가 좋아 보였어. 이해가 돼? 그 둘이 어떻게 사이가 좋을 수 있지? 회장직을 놓고 경쟁하는 사인데? 시몬 폴렌티아의 입장에서도 자기 회장직을 빼앗으러 오는 게 에이젤이라고." 그가 툭툭 이마를 짚었다. "만에 하나-" 그러곤 소타의 표정이 웃음기 없이 싸늘해졌다. "내가 생각하는 그 상황이라면......." 그때 동기가 성큼 다가오더니 마법진이 그려진 오른손으로 소타를 밀쳤다. 우웅! 몸은 멀쩡했지만, 소타의 신체가 혼령화 상태가 된 채로 밀려났다. 혼령화 상태가 된 소타가 화를 냈다. [갑자기 뭔 짓이야?] "너 좀 자야겠다." 동기는 그렇게 말하며 소타의 몸을 들쳐멨다. "네 몸은 방 침대로 직행할 테니까 그렇게 알아." [어이, 잠깐!] 소타는 그대로 밖에 끌려갔다. 털썩! 결국 본인 침대에 눕혀진 소타가 하- 하고 한숨을 쉬었다. 동기는 손을 흔들고 불을 끈 채 밖으로 나갔다. 정적 속에서 긴 시간, 소타는 생각에 잠겼다. "......에이젤, 너는 학생회장이 되어야 해."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던 소타의 표정이 괴이하게 일그러졌다. "설령 네가 하기 싫다고 해도 말이야." * * * 드디어 본격적인 시험기간, 기말고사 시즌에 들어왔다. 1학기의 마지막 일정이고, 기말고사 이후에는 방학이다. 모든 학생들이 마지막 스퍼트를 올리고 있었다. 도서관은 사람들로 미어터졌고, 교내 카페나 빈 강의실도 두말할 것 없었다. 교복과 잠옷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학생들의 머리는 떡 지고 눈에 그늘이 졌으며, 좀비 같은 걸음걸이로 캠퍼스를 걸었다. 특히 시몬을 비롯한 2학년들에게는 이번 기말고사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1학년 과정의 테마가 생존, 3학년 과정의 테마가 실전이라면, 2학년 과정은 습득이다. 키젠에서 가장 많은 것을 배우는 때인 만큼, 다른 학년보다 필기시험의 중요성이 컸다. "자, 다음 문제로 넘어갑니다!" 시몬의 10조도 기말고사 대비 겸 조별 수행평가를 위해 빈 강의실을 빌려서 준비하고 있었다. 에너지 넘치는 에슈가 칠판 앞에 나섰고, 시몬과 로레인, 토토는 자리에 앉아서 힘을 합쳐 문제를 풀고 있었다. "20번 문제! 3점짜리입니다! 다음 그림을 보고 정답을 맞히시오." 문제지에 마법진이 있었는데, 특정 룬어와 수식들이 검게 가려져 있었다. 세 사람이 동시에 엉덩이를 들고 그림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여기 봐! 억념의 룬이면 스켈레톤 나이트 아닐까?" 토토가 운을 띄웠다. "하지만 구성이 메인 룬어가 아냐." "그러네. 억념의 룬은 함정이고, 개변 수식이 있으면 구울이야." 로레인이 토스했고 시몬이 받았다. 시몬이 계속 말했다. "개변 수식이 구울 부패변이 공식의 핵심이니까. 이게 구울이라면 리노의 황금선 문제야." 보기를 훑어본 그가 손끝으로 허공을 휙휙 휘저어 보더니 말했다. "황금선은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갈라져야 해. 3번." "그대로 골! 역시 시몬이야. 다들 의의 없죠?" 로레인과 토토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급하다, 급해. 바로 다음으로 넘어갑니다!" 타이머의 남은 시간을 본 에슈가 황급히 다음 문제로 넘어갔다. "21번 문제입니다! 다음 중 '백공작'으로 결합이 가능한 언데드를 모두 고르시오!" "......백공작이 뭐였지?" 로레인이 고민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막강한 이능 사용자 네크로맨서였지만, 유독 이론에는 약한 모습을 보였다. 에슈가 얼른 말했다. "기억 안 나요 로레인 님? '백공처리'요! 다른 종류의 두 언데드 뼈를 붙일 수 있는 특수 제작법!" 시몬도 나섰다. "우리 같이 조별과제도 했잖아. 그때 스콜피온이랑 블레토를 섞어서 A+받았고, 중간에 떨어뜨려서 깨지는 바람에 잠복형 언데드 제작으로 방향을 틀었지만 결과는 더 좋았지." "아, 응. 생각났어." 로레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공처리는 아는데, 백공작이 생소한 단어라서 헷갈렸어." "그래서 정답은?" 조원들이 끙 소리를 내며 고민에 잠겼다. 여기서 가장 필기 성적이 좋은 에슈가 얼른 말했다. "보기를 하나씩 소거해 봐." 시몬이 보기를 보다가 말했다. "그럼 일단 레인 드레이크는 제외. 레인 드레이크는 용의 인자를 가진 개체라서 백공작 용액으로 결합이 불가능해." "대단한데! 회장!" 그렇게 말하던 시몬이 바짝 굳은 얼굴로 턱을 짚었다. "잠깐, 레인 드레이크도 괜찮은데. 고대종 레인 드레이크로 살 걸 그랬나? 레인 드레이크의 라이트닝 브레스는 충분히 대기 방어마법을 뚫고......." "회자앙! 무슨 우주로 가려는 거야? 빠져나와!" 10조의 필기실력은 총체적 난국이었다. 에슈가 한숨을 쉬었다. "특히 회장! 넌 더 집중해야지! 에이젤 선배와의 결투보다 2학년 수석 유지가 더 급하지 않아?" "아, 알았어." 기말고사에 집중해야 하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시몬도 가슴이 뛰고 마음이 들뜨는 쪽으로 신경이 쏠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빨리 보충수업 시간이 왔으면 좋겠다.' * * * 그렇게 정규수업 시간이 가고, 기다리던 보충수업의 때가 왔다. 시몬은 '용의 인자'를 컨트롤하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흐읍!" 용의 룬어를 메인으로 한 마법진을 펼치고, 바닥에 놓인 커다란 아티팩트 구슬을 들어 올린 채 유지하는 훈련이다. 벌써부터 땀이 삐질삐질 흘러나왔다. 태연하게 바위에 앉아 파이프를 입에 문 아론이 말했다. "구슬이 내려간다, 시몬. 가슴께까지 올리도록." "네, 넵!" 시몬이 이를 악물며 마법진에 힘을 주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일반적인 마법진을 컨트롤 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다른 사양의 마법을 준비하는 느낌. 하지만 해내야 했다. 그리고 지켜보던 아론은 파이프 담배를 뻐끔거리며 눈을 감았다. '이 녀석, 이상하게 집중력이 좋군.' 담당학생인 시몬에 대해서는 지난 1년 반 가까이 보고 분석해서 잘 알고 있다. 시몬은 자신이 원하고 마음이 동하는 수업과, 그렇지 않은 수업의 집중력과 역량 차이가 확연히 난다. 현재 지금 시몬이 꽂혀 있는 건, 누가 봐도 기말고사가 아니라 에이젤과의 결전. 그렇다면 시몬의 집중력은 장기 프로젝트인 본 드래곤보다는 에이젤과의 결전에 도움이 되는 저주학, 칠흑역학, 마투학 쪽에 집중되어야 정상이다. 그래서 아론도 처음에 본 드래곤 수업을 잠시 접어두고, 에이젤과의 결전에 도움이 되는 소환학 기술을 배워보겠냐고 제안한 거였다. 그런데. '왜 이렇게 열심히 하는 거지?' 이쯤 되니 슬슬 불길해졌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 같은 놈이니, 도무지 방심할 수가 없었다. '또 무슨 속셈이냐, 시몬 폴렌티아.' "윽!" 이내 시몬이 공을 떨어뜨렸다. 하악하악 숨을 몰아쉬며 수통에 든 물을 붙잡고 벌컥벌컥 마셨다. 아론이 파이프 담배를 끄고는 몸을 일으켰다. "아직 용의 인자의 컨트롤 숙련도가 떨어지는군." "더 분발하겠습니다!" "그래서 이번 수업에선 용의 인자의 전문가를 모셔왔다." "네?" 시몬이 감격으로 눈을 반짝였다. 보충 수업을 위해 전문가까지 데려오다니! "나와라." 저벅. 그리고 뒤이어 등장한 한 남자의 모습에, 시몬의 입가에 애매한 웃음이 지어졌다. 저벅. 저벅. 수업장소에 온 건 시몬도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태산같이 거대한 덩치, 흉악한 표정, 그리고 귀신처럼 이글거리는 두 눈. "쯧." 도착하자마자 혀부터 차고 있는 이 남자는 다름 아닌 헥토르 무어였다. 시몬이 얼른 아론을 보았고, 아론은 어깨를 으쓱했다. '마, 맞는 말이긴 한데.......' 언데드 드래곤인 '시룡'으로 변신할 수 있는 무어 가문. 그들은 몸에 용의 인자를 심고 있는 대륙 유일무이한 인간이었다. 그때 헥토르가 말했다. "시몬 폴렌티아. 네놈이 왜 용의 인자를 공부하려는 거지?" "아, 그게......." "뻔하군." 헥토르가 음침하게 미소 지었다. "나와의 결전을 위해서 용의 마법을 익히겠단 건가. 잔머리 하난 좋구나. 내가 최근 용언을 익히는 데 집중하고 있다는 정보를 들었나." 시몬이 쓰게 웃었다. '겨, 결전을 준비하는 건 맞지만 상대는 네가 아닌데.' "아론 교수님." 헥토르가 아론을 보았다. "절 꺾으려는 경쟁자에게 제 노하우를 반드시 알려줘야만 합니까?" 아론은 연기를 뿜으며 파이프 담배를 입에서 뗐다. "꼭 그럴 필요는 없겠지." "그럼......." 아론이 아공간을 열었다. 용의 인자가 함유된 거대한 뼈들이 툭툭 바닥에 떨어졌다. "동반 훈련이다. 준비하도록." * * * 시몬은 자신 몫의 훈련을 해내면서 헥토르의 훈련을 지켜보았다. 무어 가문답게, 움직이는 '용의 인자'의 양이 달랐다. 시몬보다 훨씬 무거운 뼈나 구슬도 자유자재로 들어 올렸다. 이어지는 실전 훈련은 더더욱 기가 막혔다. 아론이 아공간에서 대형 스켈레톤을 꺼냈고, 헥토르가 이에 맞서는 형식이었다. 촤르르륵! 촤르륵! 헥토르의 손짓에 따라 용의 비늘들이 물샐틈없이 움직였다. 허공에 다닥다닥 뭉쳐 도끼를 막는 방패가 되기도 하고, 흩어져 날아가는 암기가 되기도 했다. 스켈레톤의 몸에 달라붙어 움직임을 봉쇄하는 구속구가 되기도 했다. '그렇구나, 비늘 하나하나에 모두 용의 인자가 들어 있었던 거야.' 아는 만큼 보인다던가. 그동안은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던 헥토르의 기술이 새삼 새롭게 보였다. 촤르르르르르르! 특히 용의 비늘이 헥토르의 오른팔을 빈틈없이 뒤덮는 순간이 묘미였다. 헥토르가 함성을 토해내며 팔을 휘두르자, 마치 용의 신체 일부처럼 길고 거대해져서 일대를 단번에 쓸어버렸다. "저것도 용의 인자를 이용한 기술이다." 아론이 스켈레톤을 컨트롤하며 시몬에게 설명했다. "무어 가문은 체내에도 용의 인자가 존재하지. 체내와 비늘의 용의 인자를 동시에 활성화해서 저런 기술을 사용하는 거다." "그렇군요." 구멍 숭숭 뚫린 시룡의 날개도 헥토르의 등에 들러붙는 순간, 그 위력이 완전히 바뀌었다. 광풍을 일으킬 수도 있었고, 공중에 뜰 수도 있었다. 쾅! 콰직! 아론이 헥토르에게 제시한 목표는 비늘과 날개만으로 소환수 20기 처치. 그러나 예비로 준비해 둔 40기까지 전부 쓰러트려 버렸다. "훈련종료. 훌륭하다." 촤르르르르르! 헥토르의 비늘들과 날개가 마치 슈트처럼 벌어지고, 그 사이로 땀을 줄줄 흘리는 헥토르 걸어 나와 손등으로 땀을 훔쳤다. 슥- 그러다 파충류 같은 동공이 시몬을 향해 움직였다. "뭘 동물원에 와서 동물 보는 눈으로 보고 있나." 으르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의 입가에 열기가 피어올랐다. 시몬이 태연하게 말했다. "아니, 대단하단 생각이 들어서." 1학년 끝에 한번 붙었을 때와는 실력이 한 차원 더 상승한 것 같았다. "네놈, 이제 용의 마법까지 넘보려는 것 같은데." 헥토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 교활하고 오만한 재능으로 내 밑천까지 긁을 생각이겠지만 소용없다. 이건 재능과는 완전히 다른 영역이니까." '......글쎄 너랑은 상관없다니까.' 시몬이 쓰게 웃었지만, 어쩐지 오늘따라 말이 많아진 헥토르의 설명은 이어졌다. "헤엄에 재능 있는 원숭이가 헤엄을 잘 쳐봐야 원숭이일 뿐. 물고기를 이기지 못한다. 이건 재능이 아닌 종족과 특화의 영역이다, 시몬 폴렌티아." "잡담은 거기까지." 아론이 시계를 보며 다가왔다. "30분 정도 남았군. 마무리 훈련도 준비해라." 콧김을 뿜은 헥토르가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옮겼다. 시몬이 쓰게 웃으며 옆머리를 긁적였다. '뭐, 뭔가 이상한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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