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704화 학생도시 로체스트. "건배!" "예에!" 남녀가 와인잔을 부딪히며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있었다. 늦은 밤의 주점. 딱 봐도 얼굴이 앳되어 보이는 두 학생이 정체를 숨기듯 로브를 입은 채 와인을 꿀떡거렸다. 두 사람 다 취한 듯 얼굴이 벌겠다. "쥔짜 우리 이대도 대?" 여자가 딸꾹거리며 말했다. "끄말고사 공부도 해야 흐고. 음? 즈기야." "아직 시험기간도 아니잖아! 지금이 아니면 못 마신다고!" "그릏긴 해." 두 사람은 큰소리로 웃음 지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밖은 새까만 밤이었다. 로체스트에 월담한 학생들도 기숙사로 돌아가고, 주민들도 장사를 마치고 자리를 비운 늦은 시간. 두 사람은 이것도 '청춘'이라며 연신 와인을 들이켰다. "자기야. 내가 무서운 이야기 해줄까?" "어, 지짜? 나 무스운 이야기 조아해." 남자가 두 손을 어깨 위로 들어 올린 채 으스스한 미소를 꾸며냈다. "암흑제에 들어왔던 광신도 에버 키레 말야. 네프티스 님이 죽인 걸로 알려져 있잖아." "웅웅." "근데 사실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대." 꺄악-! 여자가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지르며 남자의 어깨를 팡팡 때렸다. 주점 주민이 그 소리를 듣고 인상을 썼지만, 키젠 학생이라 어쩌진 못하고 입맛만 다셨다. 남자는 더더욱 신이 나서 말했다. "네프티스 님이 죽인 것도 사실은 에버 키레가 현실을 조작했던 거지! 그 광신도는 아직 로크섬의 지하 깊은 곳에 파묻혀 있단 말이 있어." "아, 무스워!" 스스로 몰입한 남자가 목소리를 낮추고 음침하게 말했다. "그리고 학교 내에 자신의 신도들을 만들어 부활의 의식을 치르고 있다는 거야! 막 십자가를 든 사람들이......." 쨍-! 유리잔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가 하하 웃었다. "또 깨트리면 어떻게 해? 자기야 많이 취했나 보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마시고." "저, 저저저, 저저저저......!" 그녀의 손이 앞으로 향했다. 술이 확 달아난 듯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저기 저기!" "에이, 뭐야. 놀래키려는 타이밍이 너무 뻔한 거 아냐? 안 속는다고." 남자가 키득거리며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그리고 보았다. 로브를 뒤집어쓴 사람들이 로체스트의 길거리에서 '십자가'를 들고 행진하는 모습을. "으악-! 아아아아악!" 우당탕탕! 그가 의자에서 나자빠졌다. "으! 으으으! 십자가! 뭐야! 뭐야! 여기! 여기 뭐야악!" "자, 자기야!" 남자는 여자를 내버려 둔 채 헐레벌떡 도망쳤다. 바지가 노란물로 축축했다. 여자도 울음을 쏟으며 뒤따랐다. "......나 참. 요즘 애들은." 주점을 벗어나는 학생들을 보며, 주점 주인이 한숨을 푹 쉬고는 밀대를 가져왔다. 그리고 그들이 본 창밖을 보았다. "뭘 본 거야?"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쯧쯧 혀를 차며 밀대를 빨러 나간 사이. "......." "......." 검은 로브의 사람들이 건물 뒤에 숨어 은밀히 호흡하고 있었다. * * * 다음 날 아침. 돌연변이 동아리, 지하실. "......." 시몬은 카오스 듀라한을 꺼내 놓고 앉은 채 깊은 고민에 잠겨 있었다. 에이젤과의 결투에서 패배한 이후, 그를 쓰러트릴 방법을 찾으려 골몰하고 있었다. '전세를 단번에 엎을 수 있는 신기술이 필요해.' 슬립도, 캔슬 스파크도, 연풍도, 모두 에이젤을 상대하기 위한 기본 조건일뿐, 에이젤을 이기는 역전의 한 방은 되지 못한다. 시몬은 자신이 쓸 수 있는 모든 흑마법들을 후보에 놓고 저울질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카오스 듀라한으로 생각이 모아졌다. 혼돈을 동력으로 움직이며, 전 소드마스터 '마누스'가 직접 조종하는 카오스 듀라한. '이게 내가 쓸 수 있는 최강의 카드인 건 맞아. 하지만.......' 2%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암흑제 이후에는, 실전에서 이렇다할 써먹을 방법을 찾지 못했다. 소환 준비기간이 극단적으로 오래 걸린다는 단점은 둘째치더라도, 소환에 성공한다고 해도- '에이젤 선배에게 닿는다는 느낌은 아니네.' 바닥에 놓여 있던 마누스의 두개골이 불쾌한 감정을 일으키며 시몬을 노려보았다. 시몬이 얼른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아니, 아니, 네가 약하다는 게 아니라. 듀라한의 몸으로는 한계가 있단 거야." 시몬은 우선 카오스 듀라한을 움직이기 위한 혼돈 마법진을 살펴 보았다. 파직! 그의 손바닥에 자줏빛 번개가 번뜩였다. '이미 한번 완성된 카오스 듀라한의 성능은 크게 변하지 않아. 그렇다면 혼돈을 조금 더 강화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는 건?' 새로운 혼돈 마법. 잠시 열중해서 혼돈 마법진을 끄적거려 보던 시몬이 결국 입맛을 다셨다. 역시 이 분야만큼은 감이 오지 않았다. '아니, 아니. 넓게 생각하자. 혼돈은 칠흑 쪽 바리에이션은 넓지만, 신성 쪽이 아쉬워. 새로운 신성 운용법을 배우면 뭔가 돌파구가 생기지 않을까?' 하지만 당장 새로운 신성기술을 어떻게 배울지도 고민이었다. '......신성, 신성. 혼돈을 만들어내기 위한 신성의 새로운 활용법.' 시몬이 고심하며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 그때. 방송음이 울려퍼졌다. -시몬 폴렌티아 학생회장! 시몬 시몬 폴렌티아 학생회장은 지금 바로 제인 교수님의 연구실로 와주시길 바랍니다. 다시 한번 알려드립니다! '?' 시몬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 * * 한 시간 뒤. "......." "......." 시몬과 메이린은 제인의 연구실에 불려왔다. 두 사람은 열중쉬어 자세로 꼿꼿하게 선 채 힐끔힐끔 서로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딱 봐도 학생회장과 부회장으로서 불려온 게 뻔했다. 두 사람이 눈이 슬쩍 마주쳤다. '난 잘못한 거 없어!' 메이린은 그렇게 말하듯 고개를 휙휙 흔들었다. 그러다 눈을 가늘게 뜨며 시몬을 쏘아보았다. '네가 뭐 잘못한 거 아냐?'라고 묻는 것 같았다. 시몬도 물론 짐작 가는 바가 없었기에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탁. 드디어 제인의 서류작업이 끝났다. 안경을 벗어서 책상에 내려놓은 그녀가 천천히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저 차가운 보라색 눈동자 앞에만 서면, 지은 죄가 없어도 괜히 긴장부터 하게 된다. "두 사람을 부른 건 다름이 아니라, 330기 학생회의 중간평가 보고서가 나와서입니다." 그녀가 파일철 하나를 내밀었다. 시몬이 그것을 받아서 확인했고, 메이린은 옆에서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보면서 들어도 좋습니다. 330기 학생회의 성적은 전체적으로 양호합니다." 시몬은 팔락거리며 서류를 넘겼다. 총 10개 항목으로 학생회의 성과를 평가한 자료였는데. 가장 높은 평가를 받은 항목은 외부축제운영 및 예산집행과 경영교직원 만족도 등이었다. 메이린이 옆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숨죽인 기쁨의 비명을 흘리고 있었다. '그냥 양호한 수준이 아닌데?' 전체적으로 상당히 우수한 평가였다. 즐거운 마음으로 자료를 읽어내려가던 시몬이 한 부분에서 음. 하고 침음을 삼켰다. <학생 만족도 : ★★★> "학생 만족도는 조금 낮네요." 학생자치회인 만큼, 어떻게 보면 가장 중요한 항목인 '학생 만족도'가 별 다섯 개 중에 세 개였다. "괜찮습니다. 그 점은 통계를 세부적으로 분석하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기에 감안하겠습니다." "그 말씀은......." "3학년 쪽에서 유독 불만족 평가를 많이 줬더군요." 메이린의 얼굴이 분노로 달아올랐다. 극단적으로 일희일비하는 그녀의 모습에 시몬은 쓰게 웃음 지었다. "대신 숫자가 많은 1학년들의 만족도가 높았으니, 그 부분에서 만회했다고 평가할 수 있겠군요." 1학년들 사이에서 시몬은 입학식 첫날부터 납치당한 신입생을 구해낸 영웅이었다. 거기에 1학년들은 2학년이 학생회장이라는 사실 자체가 당연하다 보니 저항감도 없었다. 오히려, 3학년 수석이 돌아왔다고 왜 지금 잘하고 있는 학생회장이 교체되어야 하는지 불만을 품는 1학년들도 많았다. "본론으로 들어가죠. 가장 아래 항목을 보십시오." <학생 소통 활동 : ★> 내용을 본 메이린이 펄쩍 뛰었다. "이, 이럴 리가 없어요 교수님!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요! 불편사항에 따라 산책로도 개선하고, 평가가 나쁜 학생식당도 교체하고......!" "그런 건 시설운영 항목에 들어가는 부분입니다, 부회장." 제인이 깍지를 끼며 메이린을 바라보았다. "학생들의 어려움과 불편사항을 해결하기 위해 학생회가 얼마나 발 벗고 나섰는가. 얼마나 학생들과 소통하고 그들의 어려움을 헤아리며 해결해 줬는가. 그런 점을 평가하는 항목이죠." "그, 그것도 분명 딕이 잘 처리했다고 했는데요!" 제인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은은하게 미소 지었다. 메이린의 두 귀가 빨갛게 물들더니 이내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푹 숙였다. "시, 시정하겠습니다." "네. 시정해야죠." 제인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330기 학생회의 1학기를 온전히 담당하고 책임지게 되는 건 여러분입니다. 만약 평가치가 나쁘게 나온다면-" 그녀가 시몬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시몬 학생회장과 에이젤 수석의 결투 결과와는 상관없이, 2학기는 물론 3학년에도 학생회를 물려받기 어려울 겁니다." '!' 외통수였다. 330기 멤버들은 1학기가 끝날 때까지 학생회를 유지하기로 약속받았다. 지금까지 모두가 힘을 합쳐 이룩한 성과를 3학년들에게 빼앗기지 않게 되는 점은 좋은 일이었지만, 동시에 책임 또한 그들의 몫이었다. '학생 소통 활동의 시정'. 아무리 학생자치회 활동이 키젠의 입김을 약하게 받는다고 해도, '낙제' 평가를 받는 학생회를 계속 유지할 만큼 키젠은 바보가 아니다. 에이젤과의 결투보다 더 급하게 처리해야 할 선결과제가 생겼다. * * * 제인의 연구실에서 나와, 학생회관으로 돌아가는 길. "아이 씨댕! 진짜아아!" 메이린이 제 머리를 부여잡고 괴로워하고 있었다. 두 뺨은 부끄러움으로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날 제인 교수님 앞에서 이런 수치를 당하게 해? 평민 진짜 잡히면 죽었어!" "진정해." 시몬이 웃는 얼굴로 그녀를 달랬다. "우릴 혼내신 게 아니잖아. 중간평가가 이렇게 나왔으니까, 시정하지 않으면 나중에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알려주신 거야." "......그렇긴 하지만." 메이린은 뚱한 표정으로 입을 삐쭉였다가, 이내 눈을 감았다. 화를 내는 것도 잠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일단 우리가 만든 학생회 상담센터를 최대한 써먹는 쪽으로 움직여 보자. 아무래도 홍보가 부족한 것 같아. 하수인들을 동원해서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그리고 또 음." 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시몬을 돌아보았다. "시몬, 너 오후 전공수업 언제야?" 시몬이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30분 뒤네." "난 아직 한 시간 반 남았거든? 그럼 내가 기숙사 쭉 돌면서 도움 편지함에 편지 같은 거 들어왔는지 체크해 볼게." "그래, 부탁해." 시몬이 굵직굵직한 일정이나 대외활동에 집중한다면, 메이린은 무척이나 알뜰살뜰하게 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다. "잘 들어! 이제 여유가 없어." 메이린이 초조한 듯 손톱을 살짝 깨물었다. "본격적인 기말고사 시즌 전까지 어떻게든 빨리 밀린 일들을 처리하고 개인성적에 집중하고 싶어. 너도 그 이상한 타도 에이젤 선배 특훈에 집중하고 싶을 거 아냐?" "특훈이 아니라 그냥 보충수업인......." "그런 게 무슨 보충수업이야? 바보도 안 믿겠다!" 메이린이 흥 하고 콧방귀를 뀌고는 다시 시몬을 보았다. "암튼 도움 편지함에 뭐라도 있으면 싹 다 하자! 문서화해서 보고하면 성과로 쳐주겠지." "알았어." "정신 바짝 차려, 시몬!" 까치발을 든 메이린이 고개를 바짝 들이밀었다. "이제 곧 수행평가에 기말고사에 온갖 일정들이 다 쏟아질 거야! 최대한 빨리 끝내는 거야! 알았지?" "아, 알았어." "그럼 좀 이따 수업 끝나고 학생회실에서 봐!" 메이린이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스커트 자락을 휘날리며 힘차게 뛰어나갔다. 시몬도 아공간에서 골렘보드를 꺼냈다. '좋아, 정신 차리자.' * * * 메이린의 말대로, 시몬은 오후수업과 보충수업을 모두 끝마친 뒤 학생회실에 들어왔다. "오우, 왔섭!" 소파에 드러누워 있던 딕이 손을 휘적거리며 인사했다. 카미바레즈는 보충수업이 아직 덜 끝났는지 보이지 않았다. 시몬은 걸어가면서 익숙한 듯 딕의 손에 하이파이브를 했다. "이야기 들었어. 메이린이랑 같이 제인 교수님한테 깨졌다며?" 딕이 말했다. 시몬은 어깨를 으쓱하며 옷걸이에 걸린 학생회장 코트를 걸쳤다. "그 문제 때문에 메이린이 너한테 화난 것 같던데." "에이, 뭘. 나는 늘 떳떳한데? 나같이 유능한 총무가 어디 있다고." 딕이 특유의 느물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안대를 꺼내들었다. "그럼, 시몬! 나 30분만 더 잘 테니까 그때 깨워주......." "지금 잠이 오냐 이 븅딱아아아!" 빠아악! 뒤이어 들어온 메이린이 풀스윙으로 교과서를 던져 딕의 얼굴에 꽂았다. 딕이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소파에서 나자빠졌다. 시몬은 놀라운 타격감을 느끼며 살짝 어깨를 떨었다. "미친, 왜 때려!" 얼굴에 자국이 생긴 딕이 벌떡 일어났다. 메이린도 지지 않고 쿵쿵거리며 걸어와 딕의 앞에 섰다. "눈이 있음 한번 봐! 우리 '학생 소통 활동' 부분에서 별 하나 받았어! 별 하나!" 그녀는 한 손은 허리에 얹고, 다른 한 손으로는 보고서를 들어서 딕의 눈앞에 흔들었다. "네가 이 부분은 알아서 하겠다며?" "......진짜 다 했는데?" 딕은 도저히 별 하나 평가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보고서를 들여다보았다. "하수인들한테 부탁해서 쓰레기 줍게 하고, 더운 날 아이스크림 뿌리고......." "하수인들한테 시킬 게 아니라 우.리.가 직.접 해야 한다고!" 그녀가 콕콕콕 딕의 가슴팍을 찌르며 벽으로 밀어붙였다. 딕이 찔끔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아니. 누가 하든 학생들이 행복하면 된 거 아닌가? 보고서가 이상하네." "못살아!" 메이린이 불같이 화를 내며 쿵쿵 걸어가다가 시몬을 보았다. "시몬. 우리 둘이서 해결하자." "그, 그래." "기숙사랑 광장에 설치한 편지함 전부 뒤져봤는데 딱 두 장 나왔어." 그녀가 편지 두 장을 꺼내 들었다. "각자 한 장씩 맡아서 고민을 전담하는 거야. 어느 쪽으로 할래?" 학생의 고민 해결. 시몬은 이것도 처음 하는 업무였지만, 학생회장으로서 당연히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시몬은 오른쪽을 가리켰다. "그럼 내가 이거." 메이린이 오른쪽의 편지는 시몬에게 건네고, 왼쪽 편지는 자신의 품에 넣었다. "오늘부터 바로 시작하는 거야! 알았지?" "알았어." "나 저녁 스터디 있어서 먼저 갈게. 경과 진행되는 대로 알려줘! 안녕!" 메이린이 다시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딕은 얻어맞은 쓰라린 부위를 매만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쟨 진짜 바쁘게 산다." "그러게." 시몬도 웃으며 학생회장 자리에 앉았다. 그러곤 편지를 위아래로 한번 훑어보았다. 별 특징 없는 하얀 편지지다. "그런데 무슨 고민일까?" "음흐흐! 뻔하지." 딕이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 또래 애들 고민거리가 뭐 있겠냐? 무조건 연애야! 연애! 좋아하는 남자애가 있는데 어떻게 하죠? 뭐 그런 내용일걸." "......그럴까?" "당연하지! 각이 딱 나오는데? 우리가 사랑의 전달자가 되는 거야." 시몬은 밀봉된 편지를 뜯어내고는 내용을 살폈다. "......!" 갑자기 몸에 닭살이 쭉 돋았다. "내 말 맞지? 연애지? 짝사랑이지?" 시몬은 진지한 표정으로 딕에게 편지 내용을 보였다. 이내 딕의 입이 딱 벌어지며 딱딱하게 굳었다. <살려주세요. 데바 여신이 저를 죽이려고 해요.> 시몬과 딕은 잠시 말없이 서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딕은 제 어깨를 슥슥 쓸었다. "와이 씨, 소름 돋네. 장난으로 보낸 거겠지?" "......그렇기엔 너무 수위가 심해." 암흑연합에서 데바 여신은 이름도 함부로 꺼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십자가나 여신의 상징물도 마찬가지. 먼 과거의 이야기지만, 만찬 자리에서 나이프와 포크를 X자로 내려놓으려다가 정 십자가 모양으로 내려놓은 귀족이 처형당한 사건은 유명했다. "편지를 보낸 건 나흘 전." 시몬이 편지의 날짜를 확인한 뒤 말했다. "다행히 그리 오래되진 않았네. 당장 가봐야겠어." "와우, 겁도 없네. 오늘 바로 가려고?" 시몬이 고개를 끄덕이며 코트 자락을 여몄다. "의뢰자의 이름은 아우로르 세룸. 프로필 조회해 줘." "오케이, 오케이. 알았어." 갑자기 흥미진진한 사건의 등장에 불이 붙은 딕이 후닥닥 뛰어가 선반에서 학생명단부를 죄다 꺼냈다. 그러고는 빠르게 팔랑팔랑 책장을 넘기며 말했다. "학생회가 열람할 수 있는 정보는 한정되어 있는 거 알지? 내 개인적인 조사도 필요해?" "응, 부탁해." "어, 찾았다. 아우로르 세룸. 이름이 특이하네." 딕이 책장을 멈추고 쭉 훑어보았다. "사령학과 2학년 여학생. 전체 184위? 공부 잘하네. 그리고...... 어, 잠깐만." "왜?" 딕이 살짝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얘, 기숙사에 사는 게 아닌데?" * * * 시몬은 바로 의뢰자를 만나러 금지된 숲을 지나 로체스트까지 내려갔다. '사는 곳이 로체스트라니.' 기숙사가 아니라 학생도시 로체스트가 그녀가 사는 곳이었다. 이들의 이야기는 들어본 적 있었다. 흔히 말하는 '자취족'. 키젠의 기숙사에서 나와 밖에서 생활하는 학생들을 말했다. 사정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기숙사 벌점이 쌓여 쫓겨났거나, 혹은 불가피한 이유로 단체 생활이 불가능하기에 떨어져 나온 학생들. 아인종 중에서도 페어리족 학생은 숙면 시 꽃가루를 마구 날리는 바람에 기숙사에서 학생들과 함께 살 수 없었다. 그리고 2학년 Top10이자 마투학 대표, 마검 사용자 '쥴'도 자취족인 걸로 유명했다. 밤마다 마검과 신체의 주도권 싸움을 하고, 잠결에 마검을 휘두르기도 한다고. 전자는 종족적 특성 때문에, 후자는 사용하는 능력의 특성 때문에 기숙사에서 지낼 수 없는 타입이었다. '이 사람은 어떨까.' 더 디테일한 정보는 딕이 학교에 남아 수집하고 있었다. 시몬은 긴장한 얼굴로 주소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데바 여신이 자신을 죽이려 하고 있다라. 믿기 힘든 일이지만 의뢰자의 정신상태가 심각해 보였으니 서둘렀다. '여기구나.' 로체스트에서도 중심지와는 한참 멀리 떨어진 다 허물어져 가는 낡은 집. 키젠 학생이 지내기에는 상당히 환경이 열악해 보였다. '2학년이랬지?' 시몬은 흠흠 헛기침 소리를 내고 문을 노크했다. 똑똑똑. "실례할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2학년 아우로르 세룸 맞지? 학생회에서 왔어." 똑똑똑. "아무도 없어?" 그 순간. 끼이익 하고 문틈이 살짝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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