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643화 눈을 뜨는 순간. "아!" 비로소 왜곡되기 전의 텅 빈 경기장의 모습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다행이다. 돌아왔어!' 곳곳에 관람객들과 학생들이 쓰러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사람들은 의식을 잃었을 뿐, 무사해 보였다. 주위를 살펴보니 사샤와 수확의 성녀도 안전하게 빠져나온 것 같았다. "괜찮아?" 곁에는 레테가 힘들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주저앉아 있었다. 땀은 비 오듯 흐르고, 흙먼지 때문에 머리카락은 부슬부슬했지만. "당신은요?" 그런 와중에도 환하게 웃는 미소는 빛이 바래지 않았다. "보다시피 숨은 붙어 있네." "다행임다." "에버 키레는?" 레테가 어깨를 으쓱했다. "죽었겠죠. 여신은 파괴됐고 그 여자도 우리 공격에 직격당했어요. 그러니 다시 원래 현실로 돌아온 거 아니겠슴까." 그렇다면 다행이겠지만. 시몬은 스멀스멀 바닥에서부터 피어오르는 살의를 감지하고 있었다. 푸스스스- 피어난 흙먼지 사이로, 에버 키레가 삐거덕거리며 고장 난 목각인형처럼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가슴 쪽에 커다랗게 혼돈이 지나간 구멍이 뚫려 있었지만, 그럼에도 움직이고 있었다. [어어어어어-] 그녀의 입이 열렸다. [여신, 여신, 여신이시여!] 그녀는 목구멍으로 손을 넣으며 겍겍거리다가 바닥에 엎어졌다. 머리를 바위에 부딪쳐 피가 철철 나는데도 벌떡 일어난 그녀는 머리를 마구 흔들며 침을 쏟아냈다. 레테가 인상을 구기며 시몬을 보았다. "어째 상태가 더 심각해진 것 같은데요." "내 혼돈에 맞아서 그런가 봐." 혼돈에는 일시적으로 이성을 어지럽히는 효과가 있었다. 레테가 지긋지긋하다는 투로 말했다. "그만 포기하십쇼, 에버 키레. 이미 당신의 계획은 좌절됐슴다. 얌전히......." [좌절?] 그녀의 눈동자가 팽그르르 돌아갔다. 혼돈에 당한 와중에도, 이때만큼은 섬찟한 느낌이 들었다. [아직! 아직이야! 내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여 이 계획을 준비했는지 알아? 너희들을 없애지 못한 건 예상 밖이지만 이제 곧 준비해 둔 성유물들이 작동한다!] 그녀가 팔을 치켜올렸다. [이번에야말로 신을......!] 그녀의 말이 멈췄다. 그녀의 몸 곳곳에 수 갈래로 금이 간 듯한 형상이 드러났다. "미안하지만 그럴 일은 없네." 저벅. 까마귀 깃털 망토를 휘날리며, 한 남자가 품에 작은 단검을 든 채 나타났다. 아니, 단검이라기보다는 과일을 깎는 과도에 가까운 크기였다. 그가 과도를 허공에 던지자, 지도처럼 펼쳐지며 마법진의 형상으로 변했다. 그가 마법진의 룬어를 작동시키는 것으로. 쩌쩌쩌쩌쩌쩌쩌적! 에버 키레의 몸이 여덟 갈래로 갈라졌다. 그녀가 고통스러운 외침을 토해냈다. "알레이스터 요원님!" 암흑제 내내 같이 일했던 네프티스의 심복인 까마귀 요원이었다. "수고했네, 학생회장. 그리고 성녀. 그대들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네." 알레이스터가 상냥한 웃음을 흘리며 말한 뒤, 손짓했다. "잡아라." 촤락! 촤라라락! 네크로맨서 요원들이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갈라진 에버 키레의 몸 조각을 칠흑으로 붙들어 당겼다. [내 몸! 이 도둑놈들이!] 에버 키레가 현실 조작을 사용했다. 마치 자석처럼 몸의 조각들이 들러붙으려고 했지만, 네크로맨서 요원들도 지지 않고 칠흑을 끌어올려 버텨냈다. "부상자 위주로 회수." 다음 알레이스터의 명령에, 사방에서 텔레포트 마법진이 진행되며 경기장 전역에 쓰러진 사람들을 옮겨갔다. 운송형 언데드들이 나타나 사람들을 태우기도 했고, 혈류마법에 사람 째로 띄워서 옮기기도 했다. 경기장 전역의 민간인들이 현장에서 대피하는 데 1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역시 대단해.' 시몬이 속으로 환호하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갈라진 자신의 몸을 필사적으로 붙들며, 에버 키레가 날카로운 비명을 쏟아냈다. [감히 신인 내게 대적하느냐!] "자신을 신으로 착각하는 광신도인가." 알레이스터가 태연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미안하지만 자네의 야망도 이제 끝일세." [하하하! 끼하하하하하! 과연 그럴까? 너희들은 내가 뭘 준비하고 있는지 몰라! 이 섬은 이제 곧!] "아까 말했던 그 성유물이라면." 그가 품에서 술잔을 꺼냈다. "이런 것 말인가." [!!] 에버 키레의 눈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맞는 모양이군." 알레이스터는 성유물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발로 짓밟아 깨트렸다. 그녀가 괴로워하며 몸을 비틀었다. "우리도 밖에서 손놓고 있던 건 아닐세. 자네의 이능을 현실에 뒤집어쓰기 위해서는, '성유물'을 이용한 광범위 술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아냈지." 2년 전, 에버 키레 보고서에서 그녀가 처음으로 조작된 세계를 현실로 만들었다고 알려진 볼렌디 마을 사태. -아무도 몰랐던 폐허가 된 마을이 존재. 마을 내의 지붕과 벽면 등에 사람의 신체가 건축자재처럼 뒤섞여 있는 것을 발견. 그리고 바로 그 마을에서, 반경 20㎞ 내에 백마법을 사용하는 데 쓰이는 성유물이 땅속이나 강바닥 등에서 발견되었다. 에버 키레가 시몬과 레테와 싸우고 있을 때, 알레이스터와 카쟌은 그녀가 일으키는 신성 파장을 분석하여 성유물의 위치를 추정해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알레이스터가 통신 수정구를 들어 올렸다. "보고하게. 카쟌." -여기는 K-1, 마지막 열 번째 성유물까지 확보했습니다. -수호병 전원 제거. 전 요원이 성유물 앞에 대기 중입니다. 알레이스터가 눈을 감았다. "파괴하라." [안 돼애애애애애!] 통신 수정구 너머로 뭔가가 깨지는 소리가 들리고, 그녀가 찢어질 듯한 괴성을 질러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레테의 눈에 이채가 발했다. "효과가 있어요. 점점 신성이 약해지고 있슴다!" 알레이스터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짜 신이 죽어가는군." [하. 하하하! 인간들이, 기껏해야 피조물들이 나를 우롱하는구나!] 그녀가 삿대질했다. [가짜는 너희들이다! 나만이, 현실이다!!] 에버 키레의 입이 괴이하게 벌어지며, 바닥까지 쥐어짜 낸 이능이 흘러나왔다. 주위의 경기장 바닥이 갈라지고 공기가 붉은색으로 변했다. 네크로맨서 요원들이 흑마법으로 에버 키레의 조각난 몸을 하나씩 붙들고 있었지만, 그녀의 이능이 현실을 왜곡하며 흑마법을 약화시키고 있었다. 그녀가 심취한 듯 소리쳤다. [나는 신이다!] "아직도 발버둥 칠 힘이 남아 있나." 알레이스터가 인상을 구기며 나서려는 그때. "!" 품속에서 통신 수정구의 수신음이 들렸다. 그는 깜짝 놀라며 수정구를 꺼내 작동시켰다. "예, 알레이스터입니다. 이제 '밖'으로 나오셨습니까?" 이 급박한 상황에, 까마귀 요원은 공격보다 통신을 우선했다. 시몬이 의아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통신 수정구의 외형도 다른 것과는 다소 달렸다. 제대로 들리진 않았지만, 대답이 들려왔다. "에버 키레를 붙잡았지만 저항이 거셉니다. 예, 좌표 말씀이십니까." 알레이스터가 통신 수정구로 좌표를 이야기했고. 우우우우우우웅! 곧바로 하늘에서 찬란한 황금빛이 쏟아져나왔다. 황금빛은 커다란 원을 엮어내고, 그 안에 수식과 도형들을 채워놓더니, 이내 눈부신 빛의 기둥이 되어 쏘아져 나갔다. 그것은 몸을 수복하고 있던 에버 키레의 가슴 중앙에 정확히 틀어박혔다. [뭐야 이건!] 에버 키레가 다시 약화되고 있다. 그녀가 만드는 왜곡된 현실이 사라졌다가 펼쳐지기를 반복한다. 화악! 이내 허공에서 문을 연상케 하는 황금의 터널이 펼쳐졌다. 그 안으로 쏙 하고 튀어나온 작은 여자아이가 있었다. 살랑거리는 은발 머리, 푸른 눈동자. 그리고 처음 보는 긴 전투 로브를 걸친 모습. "네......." 시몬의 입이 벌어졌다. "네프티스 님!" 그녀가 시몬을 보더니, 손을 쏙 들어 올렸다. "안뇽! 시몬!" "괘, 괜찮으세요?" 그런데 시몬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그가 떨리는 손으로 네프티스의 몸을 가리켰고, 그녀는 '응?' 하며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내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 이마에 핏물이 줄줄 흘러내렸고 입은 로브도 찢어져 있었다. 격렬한 전장에서 이제 막 귀환한 듯한 모습. 네프티스가 저렇게 피까지 흘리며 고전한 광경은 처음이었기에, 시몬은 가슴이 철렁했다. "별거 아냐." 그러나 그녀는 손가락을 한번 가볍게 튕기는 것으로 원래의 깔끔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 모습을 본 레테는 침을 꼴깍 삼켰다. "저 사람이......." 키젠을 세운 존재이자 암흑연합의 총수. 300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오며 모든 네크로맨서들의 꼭대기에 있는 존재. 죽음의 마녀, 네프티스. 그녀는 타박타박 걸어, 시간의 저주와 싸우고 있는 에버 키레를 보았다. "신을 자칭한다는 광신도가 너구나." [죽음의 마녀!!] 그녀의 이능이 더더욱 거세졌다. 현실을 왜곡하는 힘이 확장되고, 시간의 힘이 그것을 거두는 것이 팽팽하게 반복하고 있었다. "철두철미하네." 그녀가 쓱쓱 긴 머리를 매만졌다. "내가 나설 수밖에 없도록 판을 짜고, 당근을 던져놓은 던전을 왜곡했지만 진짜 목적은 이쪽이라. 너 같은 미쳐 있는 인간이 세울 만한 계획이 아닐 텐데." [무슨 소릴 하는 거냐!] "무슨 소리? 음, 역시 이용당하고 있던 걸까나." 네프티스가 팔을 들어 올렸다. "뭐 이젠 상관없어." 에버 키레의 가슴을 관통한 황금의 기둥이 점점 크기를 확대해 갔다. [크아아아아아!] 에버 키레도 최후의 이능을 쥐어 짜내었다. 이제는 시간마저 왜곡하고 했다. [나는, 신이다!] "글쎄." 그녀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신은 엄마 젖 안 먹고 태어나나?" 황금 기둥의 위로 초대형 칠흑 마법진이 펼쳐졌다. 회전하던 마법진은 검은 물을 담은 양동이의 모습으로 변했고, 그 안에 넘실거리는 검은 물을 기둥에 쏟아부었다. 콸콸콸콸! 황금 기둥을 타고 검은 물이 흘러내려 갔고, 기둥이 검게 물들며 금빛과 흑색이 공존했다. 네프티스가 손바닥을 맞부딪혔다. <네프티스 오리지널 - 윤회> 기둥에 꽂혀 있던 에버 키레의 몸이 점점 더 작아지기 시작했다. 아니, 점점 어려지고 있었다. 에프넬에 다니던 여학생의 몸으로. 삶의 방향을 잃고 방황하던 어린 소녀의 몸으로. 하수구를 전전하던 아기의 몸으로. 그리고 그보다 더 과거로. 츠스스스스! 그때 두 명의 사신(邪神)들이 튀어나와 에버 키레의 몸을 어루만졌다. 점점 축소되던 그녀의 몸이 한순간 부풀어 올라, 다시 원래의 나이대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역으로 늙어가고 있었다. "오호." 네프티스가 눈을 빛냈다. 그녀는 본래의 모습에서 중년 기간을 거치지 않고, 바로 주름살이 자글자글한 노파의 모습으로 변했다. 이능의 남용. 수명을 깎고 생명 에너지를 과하게 쓴 대가였다. 그녀의 수명은 애초에 얼마 남지 않았던 거였다. [그, 그만!] 에버 키레가 고통스럽게 발버둥 쳤다. 그러나 네프티스는 흑마법을 마무리했고. 싹둑! 뭔가가 잘려 나가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광신도의 몸이 허물어졌다. 로크섬 전체를 위기에 빠트리고 심지어는 신까지 만들어내는 광신도라 할지라도, 그 최후는 공허했다. 시몬과 레테 모두 벙찐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우우웅! 이능이 사라지고, 왜곡된 세상이 깔끔하게 본래대로 돌아왔다. 흐린 하늘에 빛이 일며 하늘이 밝아졌다. 네프티스는 흑마법과 이능을 모두 거두어들이고는 시몬과 레테를 보았다. "할 이야기가 많겠네. 그 전에 감사를 표해야겠는데."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두 진영의 미래들."
Please login to track progr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