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623화 시몬은 카쟌과 함께 온종일 로크섬 전역을 돌아다녔지만, 광신도에 대한 단서를 더 발견하지는 못했다. 이상해진 그 노점상 아저씨도 한 시간 뒤에는 다시 상태가 회복되었다. 그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단서가 너무 부족해.' 광신도는 이능을 썼든, 아티팩트를 사용했든, 자신의 신성을 철저히 감춘 채 가짜 신분으로 돌아다니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상대가 프리스트인지 확인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은, 신성방어학 교수 '파라한'과 그 휘하에 몇 명 있는 조교들의 조력이었다. 이들 모두 신성연방에서 전향한 프리스트들이고, 여전히 신성을 쓸 수 있다. 키젠 측 요원들이 수상한 자를 붙잡아 그들에게 데려가면, 파라한과 조교들이 탐지계열의 신성 마법을 사용해 상대가 신성을 가진 프리스트인지 확인했다. 하지만 인원이 너무 적었다. 그들 모두 탐지마법을 난발하느라 지쳐 버렸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내일 다시 수사를 재개하지. 날이 어두워지자 카쟌이 그렇게 말했다. 시몬도 그와 헤어져서 캠퍼스에 돌아왔다. 우선 학생회실부터 들려서 암흑제 관련 업무를 하는데, 좀처럼 집중이 되지 않았다. '키젠에 광신도가 들어와 있다니.' 손에 쥔 깃펜을 까닥까닥하며 시몬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럼 내가 그때 느낀 이질감도 설마.......' 돌아다니면서 광신도와 한번 마주쳤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끼쳤다. 어떻게 하면 그자가 일을 벌이기 전에 체포할 수 있을까. 일일이 '수상해 보이는 사람'을 붙잡아 파라한에게 확인받는 방법으로는 한계가 있다. '어쩌면 좋지?' 일이 손에 잡히질 않는다. 암흑제는 5일이고, 내일은 3일 차. 낙관적으로 생각해도 시간이 별로 없다. "시몬?" 시몬이 고개를 돌렸다. 서류를 품에 안은 카미바레즈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괜찮아요?" "아, 응. 괜찮아." 시몬이 이마를 짚으며 쓰게 웃었다. "조금 피곤해서 그런가 봐." 카미바레즈의 얼굴에 걱정이 묻어났다. "오늘은 일찍 기숙사에 들어가실래요? 남은 업무는 우리가......." "아냐, 아냐." 경기 뛰고 일까지 하느라 피곤한 건 멤버들 모두 매한가지였다. 시몬은 근처의 찻잔을 들고 쭉 원샷한 다음, 애써 힘이 넘친다는 제스처를 팍팍 취하며 옷소매를 걷어붙였다. "빨리 끝내 버리자!" * * * 평소보다 학생회 업무를 일찍 끝내고 기숙사에 돌아왔다. 마침 마당에서 저녁훈련을 끝낸 동기들이 떠들썩하게 웃으며 기숙사로 돌아가고 있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는 걸 보니 분위기는 최고조인 모양이었다. '그럴 만하지.' 시몬은 고개를 들어, 누군가 기숙사에 걸어놓은 나무판자를 보았다. 흑마법으로 판자에 글씨를 새겨놓았는데, 어둠 속에서도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암흑제 첫째 날 - 소환학과 1위!] [암흑제 둘째 날 - 소환학과 1위!] "어이, 회장!" 유난히 텐션이 높아 보이는 4조 조장이 시몬의 팔을 친근하게 두들기며 지나갔다. "오늘도 최고였어! 열차쟁탈전에서 저주학과 대표한테 한 방 먹일 때 속이 뻥 뚫리더라! 하하! 내일도 잘 부탁해!" 시몬의 어깨가 움찔 떨렸지만, 애써 미소 지었다. "응." 소환학과 학생들은 하나같이 시몬을 보면 환하게 웃거나 인사하며 지나갔다. 시몬도 친절하게 인사를 받아주었지만, 어쩐지 웃을 수는 없었다. 뒤숭숭한 기분으로 기숙사 안으로 들어왔다. 로비에는 신이 나서 영웅담을 늘어놓는 학생들이 보였다. "아, 진짜! 내가 한 방 먹였을 때 마투학과 애들 표정을 니들이 봤어야 했는데!" "칠흑역학과는 지들끼리 내분 일어난 것 같더라." "거긴 진짜 분위기 개판일걸." 다른 건 신경 쓰지 않고 순수하게 암흑제를 즐길 수 있는 동기들이 조금은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몬이 계단을 올라가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시몬, 잠깐만." 피츠제럴드가 불러세웠다. 두 사람은 떠들썩한 로비를 벗어나 조용한 휴게실 쪽으로 들어왔다. "오늘도 대단한 활약이었다." 서류철을 든 피츠제럴드가 반대쪽 손으로 안경을 추켜올렸다. "그럼, 내일 일정을 설명하......." "피츠제럴드. 할 말이 있어." 시몬은 차분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이야기를 들은 피츠제럴드의 얼굴에 흠칫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내일부터는 경기에 나가기 어려울 것 같다고?" "응, 아무래도." "......으음. 이런 변수는 고려하지 못했는데." 피츠제럴드가 일정표를 보며 골머리를 쓰고 있는 그때. 저벅. 저벅. 휴게실 뒤편의 어둠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이내 텁! 하고, 벽면을 짚는 크고 두툼한 손이 보였다. "지금." 이어서 흉악하게 일그러진 헥토르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 드러났다. "무슨 소릴 지껄이는 거냐?" 2학년 학과대표 헥토르 무어. 하필이면 이 사실을 가장 알리고 싶지 않은 인물이었다. 저벅. 저벅. 저벅. 헥토르가 무게감 있는 걸음걸이로 걸어와 시몬의 앞에 똑바로 섰다. 이렇게 마주 볼 때마다 마치 커다란 언덕이 가로막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똑바로 설명해라. 시몬 폴렌티아." "...아까 말했던 대로야." 하지만 헥토르 앞에서 '테러 위험을 가진 광신도가 암흑제를 돌아다니고 있다'고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외부인에게는 발설 금지다. 학생회 멤버들은 물론 교수들과 까마귀, 키젠 본부 측도 마찬가지다. -암흑연합 체계의 단점이지. 누가 정보를 흘리는 스파이일지 모르니까. 여기서는 뭉뚱그려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학교 일 때문에, 당분간 암흑제에 나가기 힘들 것 같아." 헥토르의 이마에 즉각 핏줄이 돋아났다. "하루 전에 그런 일방적인 통보가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미안해, 헥토르. 그리고 피츠제럴드도. 선배님들께는 내가―" 쾅! 헥토르가 분을 참지 못하고 휴게실 벽을 주먹으로 때렸다. 후두둑 소리와 함께 파편이 떨어지고 벽에는 엉망으로 금이 갔다. "말은 똑바로 해라." 헥토르가 짐승이 그르렁거리듯 숨을 골랐다. "학교 일이 아니라 학생회 일 때문이겠지." "헥토르." "여기서 네놈이 빠지면 모든 계획이 일그러진다. 알고 있을 텐데? 레이드 종목에서 네놈이 혼자 참여한 것처럼, 네놈이 한 종목을 온전히 맡는 대신 다른 동기들의 전력을 불리한 종목에 쏟자는 게 계획의 골자였다. 네놈도 동의했고, 심지어 네놈의 제안이었지!" "......." 시몬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 제안에 맞춰 우리는 일정과 전략을 준비했다. 네놈이 빠지면 그 구멍을 준비되지 않은 다른 누군가가 매워야 하고, 모든 게 어긋날 거다!" "......그렇겠지." "우리는 학과 우승을 눈앞에 두고 있다! 그렇게나 학과에 손실을 끼치더라도, 꼭 해야 하는 일이란 게 대체 뭔지 말해봐라." 입가가 바싹 말랐다. "말할 수 없어. 대외비야." "아, 그렇겠지." 헥토르가 비릿한 미소를 흘렸다. 냉소였다. "학생회장이랍시고 거들먹거리면서, 학과 일은 뒷전에 뻔질나게 그쪽에 붙어 다니던 것부터가 마음에 안 들었다. 정식도 아니고, 에이젤 선배가 돌아오기 전까지만 하는 예비회장인 주제에. 몇 번 일을 성공시키더니 학과 일은 우습게 보였나." "우습게 본 적 없어." 가만히 들어주던 시몬도 슬슬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학생회 일 때문에 학과는 나락으로 빠트리려는 네 행동이, 학과생들을 우습게 본 게 아니라면 뭐지?" "일이 이렇게 돼서 화가 나는 건 나도 마찬가지야, 헥토르." "그럼 선택하면 되겠군." 헥토르의 안광이 번뜩였다. "그 소꿉놀이 같은 예비 학생회인지. 아니면 학과인......." "그딴 것 좀 강요하지 마!" 시몬이 버럭 소리 질렀다. 두 사람의 싸움이 벌어지자, 말리려던 피츠제럴드의 안색도 하얗게 질렸다. "나는 두 쪽 모두 포기할 생각 없고, 어느 쪽도 우습게 본 적 없어! 나는 내가 맡은 일이라면 무엇이든 최선을 다해왔어! 하지만 이번엔 어쩔 수 없어! 어쩔 수 없다고! 학교가......!" 위험하다. 그런 말은 꺼낼 수 없고, 그렇기에 헥토르를 설득할 수 없다. 그렇기에 감정싸움이 될 수밖에 없고. 그렇기에 이야기는 평행을 달릴 뿐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시몬이 팔을 축 늘어뜨렸다. "......." 헥토르 또한 표정을 일그러뜨린 채 말이 없었다. 두 소년은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망할." 결국 헥토르가 등을 돌려 쿵! 쿵! 발소리를 내며 걸어갔다. '하아.' 시몬이 손바닥으로 이마를 덮었다. 헥토르가 로비로 걸어가자, 곳곳에서 동기들이 후다닥 뛰는 듯한 발소리가 들렸다. 헥토르의 일갈이 들렸다. "구경났나? 꺼져라. 다 죽여 버리기 전에!" 쩌렁쩌렁! 축제 분위기였던 기숙사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딱딱하게 굳어졌고, 헥토르가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털썩. 시몬은 휴게실 의자에 앉아 고개를 젖혔다. 아직도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헥토르가 주먹으로 박살 낸 벽면이 눈에 들어왔다. "괜찮아?" 피츠제럴드가 눈치를 보며 다가왔다. 시몬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거듭 미안해, 피츠제럴드." "사정이 있겠지." 피츠제럴드가 안경을 고쳐 쓰며 흠흠 헛기침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조심스럽게 제안하겠는데." "응?" * * * 다음 날 아침. 시몬은 일찍 기숙사 밖으로 나왔다. 마침 카쟌과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카쟌!" "좋은 아침이다." 시몬은 바로 마차에 올라타 카쟌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시몬의 의존도가 큰, 하루에 한 종목 만큼은 참여하기로 한 것이다. 카쟌도 쿨하게 받아들였다. "애초에 잘하고 있던 널 끌어들인 건 우리다. 도와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울 따름이지." "죄송해요. 그보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카쟌이 눈을 지그시 감고 마차의 모든 방음마법진을 재차 작동시켰다. "이번 사건의 스케일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 "네?" "신성연방에서 협력을 제안해 왔다." 시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가 지금 잘못들은 건가? "신성연방이요?" 신성연방은 당연히 이번 사태는 우리와는 일절 상관없다며 선을 긋고, 로크섬에서 큰일이 터지길 은근히 기대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쪽에서도 전쟁만큼은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시몬은 그 말에, 바로 '이스라필'을 떠올렸다. 프리스트였던 어머니 안나의 조력자이자, 시몬에게는 이모가 되는 신해의 성녀. 지금까지 그녀가 막은 전쟁과 비극만 해도 셀 수 없을 정도라고 들었다. "그들은 신도 관리를 제대로 못 해서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광신도 탐지를 위한 프리스트를 지원해 준다고 하더군. 네프티스 님도 흔쾌히 받아들이셨다." 그 말을 들은 시몬이 몸을 들썩였다. 무려 프리스트를 파견해 준다니! "그거 잘됐네요!" "물론 신성연방의 정식 제안은 아니다. 암흑연합에서도 이 사실을 아는 건 네프티스 님과 그 최측근들뿐이지." 카쟌의 말대로, 이건 신성연방과 암흑연합 간의 거래가 아니었다. 각각 전쟁을 반대하는 세력, 이스라필과 네프티스 간의 거래. 암흑제라는 물 밑에서 엄청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그 신성연방에서 온 프리스트를 만나러 간다." "아니, 벌써 여기 와 있다구요?" 의자에 앉아 있던 시몬이 펄쩍 뛰었다. 이번 암흑제는 대체 어떻게 흘러가는 걸까. 그렇게 잠시 후, 시몬과 카쟌이 도착한 장소는 소환 재료학 교수, 그레리온의 근거지인 동굴이었다. 그레리온 교수와 조교들은 암흑제 기간 동안 휴가를 받아서 나가 있고, 허락도 구했으니 이곳을 자유롭게 써도 상관없다고 카쟌이 말했다. '여기라면 괜찮겠네.' 프리스트가 넘어올 거라면 동굴 안으로 텔레포트 하는 게 정체를 숨기기 좋으리라. 시몬과 카쟌은 광차를 타고 이동해 동굴 깊은 곳까지 들어갔다. 그렇게 30분. 시몬은 몇 겹의 철저한 보안 마법진을 통과한 뒤 안으로 들어갔다. "......이건?" 쏴아아아아아― 동굴 한복판에 난데없이 탐스러운 밀밭이 자라나 있었다. 사람의 가슴까지 올라올 정도로 높고, 밀알도 탐스럽게 맺혀 있었다. 소환 재료학 수업을 들으러 몇 번 들렸지만, 이런 광경은 또 처음이었다. 아니, 애초에 여긴 밀이 자라날 수 없는 환경이었다. 파스스- 시몬과 카쟌은 밀밭을 헤치고 나아갔다. 그리고 그 밀밭의 중심. 그늘막 달린 테이블에 앉아 그림처럼 찻잔을 들어 올리고 있는 여인이 보였다. 그녀는 그 존재만으로 어두운 동굴에 빛을 틔우고 밀밭을 바람에 흔들리게 했다. 싸아아아아- 성녀들이 입는 드레스 형태의 하얀 성의를 입었으며, 얼굴을 가릴 수 있는 긴 밀짚모자를 쓰고, 등 뒤에는 낫과 갈퀴를 교차해서 메고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을 보았다. '뭐야 이 사람.' 공기가 무거워졌다. 시몬은 단번에 그녀가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차박. 그녀가 밀짚모자의 끝을 붙잡아 올렸다. 밀밭 같은 노란색 머리카락이 휘날리며, 그 아래로 얼굴이 드러났다. 그녀의 맨얼굴은 시몬이 상상하던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옆으로 길게 찢어진 눈매는 거친 실밥으로 꿰매져 있었고, 불에 달군 듯한 X자 흉터가 두 눈에 박혀 있었다. 얼굴 한쪽에는 화상 같은 게 보였는데, 끔찍한 화상은 입까지 내려와 발음에 묘하게 공기 새는 듯한 음성을 만들어냈다. "......그쪽이 학생회장이군여." "누, 누구신가요?" 그녀가 안면 근육을 구기며 음산한 미소를 지었다. "수확의 성녀. 잘 부탁드려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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