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608화 암흑제. 5년에 한 번 열리는 키젠에서 가장 큰 행사 중 하나다. 일종의 공개 운동회 성격을 띠는데, 로크섬 전체를 민간에 개방하고 학생들의 활약을 성대하게 대륙에 공개한다. 사실 이 행사 자체도, 키젠의 300년 역사만큼이나 역사가 길다. 기사의 시대에서 네크로맨서의 시대로 넘어가려는 계도기. 당시는 '코어 개방'을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것으로 묘사하거나, 네크로맨서들을 금단의 마법에 손을 댄 저주받은 일족이라는 인식이 팽배하던 시절이었다. 학부모들은 키젠에 입학한 자식들에 대한 우려가 심했다. 이에 네프티스는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이 운동회를 치르는 모습을 전 대륙에 공개했는데, 이는 당시 대륙민들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아이들의 땀과 열정이 가득한 운동회는 네크로맨서라고 위험한 게 아니라 결국 다 같은 사람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었고, 코어를 달면 단명한다는 소문과 달리 더욱 건강하고 활기가 넘쳤다. 무엇보다, 몇 년 네크로맨서 교육을 받았다고 압도적으로 강해진 학생들의 모습은 대륙민들의 머릿속에 깊이 각인되었고, 그제야 콧대 높은 귀족들이 하나둘 아이들을 키젠에 공부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암흑제의 선전효과는 상당히 뛰어났으며, 그 이후로 키젠에서는 5년에 한 번씩 꾸준히 행사를 개최해 오고 있었다. 바로 그 암흑제는 본래 작년에 열릴 예정이었으나. "너희들도 알다시피, 작년에 그 '성녀 사태'가 터졌었잖아?" 칠판 앞에서 설명하던 딕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학교는 준전시 커리큘럼으로 넘어갔고, 모든 행사가 싹 취소되거나 다음으로 미뤄졌지." 설명을 듣던 카미바레즈가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냈다. "그 미뤄진 행사를 올해 한다는 거군요!" 시몬이 이마에 손끝을 댔다. "그것도 하필이면 우리가 학생회일 때......." "차라리 잘됐어!" 메이린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소매를 걷어붙였다. "우리 330기 학생회의 실력을 전 대륙에 보여줄 기회야! 이번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르기만 하면 명예는 물론! 에이젤 선배가 돌아와도 우리가 학생회 자리를 굳힐 수 있을지도 몰라!" 딕이 풋 하고 얄밉게 비웃음을 흘렸다. "그건 너무 꿈이 큰 거 아닙니까? 부회장님." "맞을 각 못 보고 나대는 니 간댕이가 커진 건 생각 못 하고?" 메이린이 손의 관절을 풀자, 딕이 홱 고개를 돌려 휘파람을 부는 시늉을 했다. "알겠어." 시몬이 깍지를 꼈다. "조금 부담스럽지만 영광이네. 기왕 이런 중책을 맡게 됐으니 최선을 다하자." 모두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딕이 자리에 앉고, 이번엔 메이린이 하늘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내가 미리 암흑제에 관해 공부해 왔어. 굵직굵직한 것들만 간단히 짚고 넘어갈게." 그녀는 준비해 온 사진들을 칠판에 붙여놓았다. '신문 동아리'에서 저번 암흑제에서 찍었던 사진들이었다. '재밌겠다!' 키젠 외에 학교를 다녀본 적이 없는 시몬은 운동회라는 개념도 처음이었다. 사진에 보이는 학생들은 흙탕물에 뒹굴고 물에 빠지고, 그러면서도 어깨동무를 하며 활짝 웃고 있었다. 하나같이 즐거워 보였다. 옆자리의 카미바레즈도 시몬과 같은 생각인 듯, 등 뒤의 앙증맞은 박쥐 날개가 파닥파닥 펄럭이고 있었다. "암흑제 기간은 4박 5일이야. 민간 전체에 로크섬이 개방되고, 학생들은 로크섬 전역을 무대로 운동회를 치르게 돼." 메이린이 낭랑한 목소리로 설명을 시작했다. "도합 15개의 경기장이 있고, 종목은 50개 이상! 관중들도 팸플릿을 보고 원하는 경기장에서 시험을 기다릴 수 있어. 물론, 키젠에서 경쟁이 빠지면 섭하지?" 그녀가 학과마크들이 그려진 종이를 칠판 중앙에 딱 붙였다. "암흑제는 '학과 대항전'이야." "......오." 저칠소 사혈맹투. 2학년과 3학년이 한 팀이 되어 일곱 학과가 치열하게 경쟁한다. 총합으로 가장 높은 점수를 따낸 학과는 '올해의 우수 학과'가 되는 동시에, 막대한 학과 지원금을 타낼 수 있다. 이 비용으로 학과의 불편사항들을 싹 개선하거나 편의시설을 증설하는 것도 가능하다. 물론 마지막 날에 있을 뒤풀이 파티 때 그 격이 달라지는 건 당연하다. 암흑제에 연속으로 우승한 학과들이 부유해지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음흐흐, 여기에 성적 이야기도 빠질 수 없지?" 딕이 불쑥 끼어들었다. "사실 암흑제의 각 종목에는 수행평가 점수가 붙어! 개인성적과도 직결된 문제지." 척! 딕의 손가락 끝이 시몬에게 향했다. "나야 성적은 진작에 포기했지만, 시몬. 네가 1학년에 이어 2학년에서도 수석을 노릴 거면, 이번 암흑제에서 이 악물고 좋은 성적을 따내는 게 좋아." "그, 그래?" 갑자기 부담감이 훅 밀려들었다. "당연하지! 1학년 때는 섬 생존평가니 BMAT니, 온갖 단체 경쟁 커리큘럼으로 전체 등수를 매기고 누락되는 애들을 쳐냈잖아?" "그랬지." "2학년 때는 아무래도 학습에 집중하다 보니 전교생 단체경쟁 커리큘럼이 적은 편이야. 그러니 암흑제의 비중이 높을 수밖에." 즉 암흑제에서 전체 등수가 훅 떨어지면, 나중에 다시 복구하는 게 상당히 힘들다는 소리였다. "아우, 밥팅들아! 지금 그게 중요해?" 메이린이 탕탕 칠판을 두들기자, 시몬과 딕이 흠칫하며 그녀 쪽을 보았다. "우린 지금 학생회 멤버로 여기 온 거야! 성적 같은 건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 행사를 어떻게 잘 개최할지 고민해야지!" "미안, 그 말이 맞아." 메이린의 설명이 계속되었다. 이번 <암흑제>는 그 규모가 상당히 큰 행사인 만큼, 4명뿐인 학생회에게 모든 걸 맡겨두진 않는다. 키젠 내부에서도 본부 직원들, 교수들, 원로들, 그리고 각계의 전문가들이 참여한 '암흑제 위원회'를 출범해서 행사를 기획하고 수립한다고 한다. "참고로 위원장님은 제인 교수님이셔. 제안할 게 있다면 얼마든지 말하라고 하셨어." 카미바레즈가 손뼉을 짝! 쳤다. "제인 교수님이 협력자라면 안심이에요!" "에이, 뭐야. 괜히 긴장했네." 딕이 너스레를 떨었다. "키젠 본부가 관여하고, 암흑제 위원회도 있고. 우리가 할 일은 별로 없겠는데? 누워서 떡이나 먹고 있으면......." 똑똑똑.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메이린이 '네~' 하고 발랄하게 대답하며 뛰어나갔다. 문이 열리며 학생회 직속 하수인 리더 '모조'와 다른 하수인들이 머리까지 오는 서류뭉치를 들고 나타났다. 쿵- 쿵- 쿵- 쿵- 이내 테이블에 가득 쌓여 나가는 서류의 산들. 세 사람 모두 표정이 얼어붙었고, 메이린이 웃는 얼굴로 딕을 보았다. "다시 말해볼래? 평민." "......입이 방정이라 미안하다." 메이린이 훗 하고 웃음을 흘리며 다시 칠판으로 돌아왔다. "암흑제는 엄연히 '학생들의 축제'니까 우리 학생회의 역할이 커. 위원회 측과 긴밀히 공조해 나가면서 하나하나 차근차근 진행해 보자!" 그때 시몬이 손을 들었다. "네에~ 학생회장님. 질문 있어?" "설마 운동회 종목도 우리가 정하는 거야?" 메이린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 큰일 나지. 종목과 룰만큼은 키젠 본부에서 단독으로 처리해. 이건 운동회인 동시에 성적이 걸린 '시험'이니까." 성적이 걸려 버리면, 학생 신분으로는 절대로 건드릴 수 없는 불가침의 영역이 된다. 시몬의 생각에도 다른 말 안 나오게 본부가 공정하게 처리하는 게 맞았다. '그렇담 다행이네. 대회 개최에만 집중할 수 있겠다.' 시몬이 한숨 돌리고 있는데, 이번에는 카미바레즈가 손을 들었다. "응! 우리 서기!" 메이린이 애정 듬뿍 담긴 목소리로 그녀를 지목했다. "암흑제는 민간 전체공개라고 하셨잖아요!" "웅웅." "그럼 보안 문제가 심각하지 않을까요? 막 나쁜 사람들이 들어와서 학생들이 위험해질 수도 있고......." 메이린이 음- 하고 생각에 잠긴 듯 한쪽 눈을 감았다. "확실히, 암흑제는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키젠을 알리자는 게 행사의 의의라서 다른 행사들보다는 신분 확인이 느슨하긴 해. 물론 그만큼 본부 측의 방비도 강해질 테니까 너무 걱정하진 말고." 달칵!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번엔 하수인들이 식사 거리를 가져왔다. "밥이다!" 멤버들은 샌드위치를 사러 갈 생각이었지만, 모조가 미리 알아차리고 식사까지 신경 써서 준비한 것이다. "치킨 샐러드!" "맛있겠어요!" "일단 먹고 하자!" * * * 네 사람은 바로 굶주린 배부터 채우기로 했다. 회의를 중단하고 부산스럽게 점심 식사를 즐겼다. "아! 그리고 아까 카미가 말했던 보안 이슈 말인데." 메이린이 맛있게 샐러드를 한 점 먹으며 말했다. "기록에는 300년 내내 암흑제를 치러왔는데, 지금까지 한 번도 큰 문제가 발생한 사례는 없었대! 그만큼 본부에서 일을 잘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게 아니면-" 딕이 포크를 붙잡고 휙휙 흔들었다. "사건은 있었지만 본부에서 묻었다든가."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이 음모론자!" 딕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음모가 아니라, 마냥 본부만을 믿고 태연히 있을 수는 없단 뜻이야. 학생회 차원에서도 대책을 수립해야 해." "대책이라면 어떤 거?" 시몬이 바게트를 한입 깨물며 물었다. 바로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딕이 등을 쭉 세웠다. "선도부를 조직하자!" 키젠 본부를 믿고 있을 수만은 없다. 학생회의 직권으로 이번 행사를 관리하고, 민간인들과 학생들을 통제할 새로운 조직을 만들자. 그게 딕의 의견이었다. "암흑제 예산 살짝 끌어다 쓰면 돼. 물론, 보수는 없음. 봉사활동의 일환인 걸로." "그럼 누가 하는데 멍충아!" 메이린이 발칵 화를 냈다. "다~ 방법이 있지." 딕이 오른팔에 찬 자신의 학생회 완장을 가리켰다. "선도부 전용 완장을 만드는 거야! 사람 심리가 말이야, 애들을 관리하는 권력이 생기는 데다가 완장까지 주면 괜히 어깨가 으쓱으쓱! 이런 거 해보고 싶어 하는 사람 은근히 많다고! 그리고 자기 커리어에 한 줄 쓸 것도 생기잖아? 키젠 선도부 출신이라고 말야." 메이린은 뭘 그렇게까지 하냐는 듯한 눈치였지만, 시몬은 보안에 관련된 인력이 조금이라도 더 있는 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진짜 의도는 지금부터야!" 딕이 고개를 쭉 숙이며 멤버들에게 은밀한 목소리로 말했다. "암흑제가 끝난 뒤에도 동아리 예산 잔여금으로 살살 선도부를 유지하는 거야. 그러다가 뭔가 이슈가 터졌을 때, 뒤꽁무니로 조용히 정식 동아리로 승격시키는 거지. 그럼 우리 학생회의 권력을 지켜주는 강력한 장기말이......." "행사 후 미련 없이 해체하는 쪽으로 준비해 보자." 어림도 없었다. 딕이 아쉽다는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그 외에 다른 아이디어는 없어?" "나! 나!" 딕이 또 손을 들었다. 메이린이 인상을 확 구겼다. "개소리도 간격 맞춰가면서 해라?" "아, 이번엔 진짜 완벽한 아이디어야! 가까이 와봐!" 딕이 가까이 오라는 듯 과장된 몸짓으로 팔을 휘둘렀다. 카미바레즈가 웃는 얼굴로 다가왔고, 시몬도 고개를 기울였다. 메이린은 못마땅한 얼굴로 있다가 하는 수 없이 허리를 숙였다. 딕이 극도로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암흑제 축하공연은 '세이위르'랑 '고양이 가면'의 듀엣 뮤대로 하는 걸로." "죽어! 이 미친놈아!" 얼굴이 시뻘게진 메이린의 이단 옆차기가 딕의 안면에 꽂혔다. "너무 좋아요!" 카미바레즈가 짝짝 손뼉을 쳤다. "나쁘지 않은데." 시몬이 턱을 짚으며 동조했다. "니들까지 왜 그러는 데에!" 메이린이 얼굴을 붉히며 빽 소리 질렀다. * * * 학생회 회의는 저녁 늦게나 끝났다. 워낙 해야 할 업무량이 많았기에, 도저히 하루만으로는 정리할 수가 없었다. 당분간은 주말 내내 학생회실에 출근해서 일해야 할 것 같았다. 시몬은 메이린과 카미바레즈를 데려다준 다음, 골렘보드를 타고 소환학과 기숙사 건물에 복귀했다. 그런데. '?' 사람들이 아무도 없었다. 로비나 휴게실에는 늘 학생들이 떠들고 있었는데 텅 빈 정적만이 흐르고 있었다. 평소 시끌시끌한 곳이라서 이 정적은 더더욱 어색하게 느껴졌다. '무슨 일 있나?' "아, 시몬!" 그때 마침 토토가 후닥닥 계단을 뛰어 내려오고 있었다. "크, 큰일 났어! 3학년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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