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572화 세르네는 직감했다. 이 남자 또한 시몬 폴렌티아. 그러나 풍기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언제나 호기심에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순수하면서도 열정 넘치던 '소년 시몬'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슬픔, 고통, 증오, 분노, 혹은 그 이상의 모든 것을 다 겪으며 내재를 초월한 듯한 눈. 그리고 평소의 시몬에게 볼 수 없었던 어떤 탄탄한 안정감이 느껴진다. 조금 더 어두워진 머리카락에, 살짝 기른 수염은 멍하게 보게 될 정도로 매력적이고, 입가에는 살짝 아저씨 같은 능글능글한 미소도 있다. -오랜만인걸 세르네. 그는 그러면서 대뜸 솥뚜껑만 한 손으로 세르네의 머리를 쓸었다. -교복 차림의 10대 세르네라니, 하하! 그립네. "?!" 철이 든 이후, 감히 자신에게 이런 애 취급을 하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았기에 세르네는 잠시 벙쪄 있었다. -피어랑도 인사하고 싶은데 시몬을 지키느라 바쁘신가 보고. 그쪽은...... 시간의 유령님 맞죠? 반갑습니다! [흘흘흘! 기이한 광경이군.] 가볍게 주위 사람들과 인사를 마친 '미래의 시몬'이 바닥 아래를 바라보았다. -밑에서 시끄러운 게 오고 있네. 그 말에 세르네도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말했다. "상아탑주가 오고 있어요! 시몬이 지금 이 지경이라서......!" -걱정 마. 미래의 시몬이 파멸의 대검 손잡이를 툭 건드리며 말을 이었다. -내가 해결할게. 그의 손짓 한 번에, 탑의 구조가 변했다. 탑의 바닥이 투명한 유리처럼 바뀌며, 저 멀리 아래층도 훤히 내려다볼 수 있게 됐다. 그리고 70층 정도에서 천장을 부수며 올라오고 있는 상아탑주, 베르무드의 모습이 보였다. [세르네!!] 분노에 찬 목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미래의 시몬은 세련된 동작으로 턱을 훑으며 음- 하는 소리를 냈다. 대륙 최상위의 강자가 올라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남자에게서는 일말의 초조함이나 긴장감도 느껴지지 않는다. -원래라면 저 정도는 손가락 까닥하는 걸로 없애는데. 굳은살과 상처투성이의 손이 앞으로 올라왔다. -지금 쓸 수 있는 건 '어린 나'의 힘뿐이군. 미래의 시몬이, 어린 시몬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좀 빌릴게. 어린 시몬의 좌우로 검은 힘과 하얀 힘이 펼쳐졌다. 미래의 시몬은 그 두 가지를 망설임 없이 붙잡아 합쳤다. '방금...... 뭐야?' 눈앞에 벌어진 초자연적인 행위에, 지켜보던 세르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혼돈은 공허를 쓰기 전의 걸음마에 불과해. 미래의 시몬이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두 상반된 힘이 뒤섞이며 눈부신 광채를 뿜어내고 있었다. -혼돈에 질서를 가르치는 거야. 칠흑과 신성이 다른 요소 없이 순수하게 서로를 아우르고 받아들여 융합했을 때. 세상이 뒤흔들리며 상반된 두 힘이 합쳐진 흑청의 구슬이 탄생했다. -기적이 탄생하지. 마치 시몬의 칠흑색과 똑 닮아 있는 그것은 주위의 공간마저 흉악하게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투욱. 암청색의 구슬을 손에 든 미래의 시몬이 씩 웃으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 순수하게 웃는 순간만큼은, 어린 시몬의 모습과 똑 닮아 있었다. 화아아아아아아악! 85층. 90층. 95층. 용암을 두른 채 가속하는 상아탑주의 기세는 누구도 못 말릴 것 같았다. 모든 층을 불사르며 돌진하고 있었다. "크윽!" 세르네가 두 팔로 머리를 앞세웠다. 태양이 눈앞으로 다가온 것만 같았다. 열기에 벽이 녹아내리고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애쓴다. 미래의 시몬이 손가락을 툭 튕겼다. ─────────────! 검은 강선이 그어졌다. 검은 강선은 태양의 핵을 붙잡더니, 올라온 속도의 수백 배 이상으로 내리꽂기 시작했다.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콱! 90층. 80층. 70층. 60층. 50층. 파편과 잔해가 마구잡이로 비산한다. 상아탑주는 자신이 뚫어놓은 구멍 옆에 또 하나의 구멍을 뚫으며 상아탑 전체의 천장을 무너뜨리며 추락하고 있었다. 40층. 30층. 20층. 10층. 그리고. 쿠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웅―! 비로소 1층까지. 지면을 뚫고 지하까지 파고 들어간 뒤에야 강선이 사라지고, 자욱한 흙먼지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와 지상을 뒤덮었다. -뭐. 간단하게 대륙 최강자를 내다 꽂은 미래의 시몬이 손끝을 내렸다. -상아탑주란 이름에 걸맞은 퇴장. 잘 봤습니다. 털썩. 다리에 힘이 풀린 세르네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압도적이다. 숨을 쉴 수가 없다. 온몸에 전율이 차올라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할 수 있는 건 그저, 태연하게 아래를 응시하고 있는 푸른 머리카락의 남자를 눈동자에 담는 것뿐. '내 판단이.' 세르네의 팔이 파르르 떨렸다. '맞았어.' 미래의 대륙은 시몬 폴렌티아를 중심으로 재편된다. 저 미래의 모습이 지금, 그녀의 판단이 옳다는 것을 온전히 증명하고 있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매료될 것 같았다. 그의 모습에. 그의 힘에. -보이드의 성질은 조절해 놨어. 순수 물리력으로. 미래의 시몬이 가볍게 손을 툭툭 털며 말했다. 저런 사소한 버릇마저도 시몬과 똑같았다. -지금이 시간의 탑이라면, 혈천교의 실라지가 죽은 지 1년도 안 된 시점이겠지? 외부에서 조사해도 실라지를 죽였을 때와는 다르게 보일 거야. 그렇게 말한 시몬이 세르네를 보며 윙크했다. -나중에 뒤처리는 잘 부탁한다? 꼬마 세르네. "......아, 네." 그녀는 뺨에 홍조를 띤 채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그럼 이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미래의 시몬'이 고개를 내려, 여전히 폭주 중인 '어린 시몬'을 보았다. 자신의 마법과 피어의 제어로 어떻게든 유지하고 있었지만 이대로 두면 폭주하는 건 마찬가지다. -배우가 한 명 더 필요해. 미래의 시몬이 파멸의 대검 손잡이에 다시 손을 올렸다. 탑 전체가 그의 지시를 받아 꿀렁거리더니 이내 100층의 벽에서 뱉어지듯 누군가가 튀어나왔다. 다름 아닌 메리다였다. "......." 그녀는 다소 뾰로통한 표정이었다. 경비들을 따돌려서 이제 막 1층까지 내려온 시점이었는데, 갑자기 벽이 자신을 집어삼켜 다시 100층까지 올려 버렸다. "?" 뒤늦게 그녀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뭔가 상태가 이상해 보이는 시몬, 그 옆에 시몬이랑 똑 닮은 남자. 둥둥 떠다니는 유령. 마지막으로 보이는 건 그 유명한 세르네 아인다르크였다. -시몬의 폭주를 막기 위해선 너희들의 힘이 필요해. 미래의 시몬이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 -협조해 줄 거지? * * * 바로 작전이 시작되었다. 메리다는 판타서스 오리지널 슬립을 시몬에게 걸고, 5스택 최대치를 유지했다. 세르네는 시몬의 등이 고슴도치처럼 보일 만큼 깃털을 붙였다. "준비됐어요." 세르네가 말했다. "나도." 메리다가 말했다. 두 소녀가 시몬의 좌우에서 눈을 감았다. 미래의 시몬이 작전을 지휘했다. -내가 신호하면 메리다는 슬립의 강도를 한 번에 높이고, 세르네는 무의식까지 시몬을 떨어뜨려. 미래의 시몬이 손을 휘저었다. -시작. 샤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것을 신호로. 폭주해서 정처 없이 시간의 미로에서 헤매고 있던 시몬은 새까만 어둠 속으로 떨어졌다. "......?" 시몬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무의 공간이었다. -안녕. 그의 앞으로 '미래의 시몬'이 빛의 형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시몬은 그 모습을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 너는 설마......!" -맞아. 미래의 시몬이 부드럽게 웃었다. -미래의 네 모습이지.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시간의 힘 때문에 잠시 펼쳐진 기현상이라고 생각해. 시몬이 눈을 반짝이며 본인의 미래 모습을 한 바퀴 돌아 보았다. 그러곤 팔짱을 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사한데. 나도 언젠가 너처럼 될 수 있을까?" -아니. 미래의 시몬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넌 나보다 더 완벽해. 나보다 훨씬 대단한 '미래의 나'가 되어 있을 거야.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 -나도 그래. 두 사람은 어둠 속에서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러다 어린 시몬이 이럴 때가 아니라는 듯 퍼뜩 고개를 들었다. "참 너한테 물어볼 게 많아! 결사에 대해서! 매그너스에 대해서! 화이트에 대해서도......! 그리고 내가 본 드래곤을 잘 만들 수 있을지도 궁금하고, 이번 중간고사는......!" -미안. 미래의 시몬이 고개를 내저었다. -말 못 해. "어, 응?" -지금 이렇게 우리가 유지되는 건, 미래의 시몬과 현재의 시몬이 명확히 나누어져 존재하기 때문이야. 내가 미래의 무언가를 이야기해서 네 미래에 영향을 미치는 순간, 나는 사라지고 네 인생에도 불명확한 오류가 터져 나오겠지. 그렇게 말한 '미래의 시몬'이 어린 시몬의 목에 걸린 네프티스의 목걸이를 보며 빙긋 웃었다. 목걸이의 힘이 시몬이 시간에 잠식해 가는 것을 막고 있었다. -그 외에 이런저런 이유가 있기도 하고. "아, 응. 알겠어." -한 가지만 명심해. 미래의 시몬이 손짓하자,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파멸의 대검의 손잡이가 나타났다. -미래에 그 어떤 결말이 기다리고 있더라도. 그 어떤 좌절과 의문과 증오가 널 더럽히려 하더라도. 미래의 시몬이 어린 시몬의 손을 붙잡고 손잡이를 쥐게 했다. -흔들림 없이 너 자신을 믿어. "......." 시몬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만나서 즐거웠어. 미래의 나." 미래의 시몬이 웃었다. -나도 그래. * * * 잠시 후. 시몬이 눈을 번쩍 떴다. "아......!" 쿠르르르르릉! 콰드드드! 시간의 탑이 무너지고 있었다. 시몬이 마지막에 '미래의 시몬'과 함께 한 건 던전주의 권한으로 던전을 파괴한 것. 현재 시간의 탑은 던전주가 완전히 장악한 던전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미래의 시몬과 상아탑주의 전투로 던전의 내구도가 다 한 상황에서, 던전 파괴명령을 내리니 일제히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시간의 유령은?" 시몬이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마침 그의 모습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아......!" [흘흘흘! 그런 표정은 짓지 말게!] 시간의 유령이 웃으며 말했다. [나는 조금이라도 더 가능성이 있는 쪽에 배팅했을 뿐이네. 이제 후회는 없어.] "죄송해요, 제 힘이 더 강했더라면......." [얼어붙은 시계가 폭주하면 누구도 통제할 수 없지.] 사르르륵-! 그의 몸이 서서히 사라져 갔다. [그래도 고맙네.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으니. 후회 없는 삶이었네.] 시간의 유령이 후련한 듯 소리치고는, 완전히 사라졌다. 시몬은 잠시 눈을 감고 그의 명복을 빌었다. "그렇게 여유 부릴 틈 있어요?" 갑자기 손목을 붙잡고 잡아당기는 손길이 있었다. 시몬이 옆으로 붙었고 그가 딛고 있던 바닥이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세르네......!" 그녀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제 우린 곧 100층에서 떨어질 거예요." 시몬이 고개를 들었다. 100층의 천장과 벽은 허물어졌고, 이제는 바닥만 남아 있었다. 뻥 뚫린 벽과 천장으로 새벽을 알리는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칠흑, 다 써서 못 움직여." 메리다가 아공간을 열고는 주섬주섬 이불을 꺼냈다. "죽을 때를 정하라면, 적어도 자는 중에 죽고 싶어." "뭐 하는 거야! 메리다!" 그녀는 이 와중에 이불을 깔고 베개를 베고 드러누웠다. "죽으면 죽고 살면 사는 거겠지." 와르르르르르! 100층을 받치고 있던 기둥이 무너져 내리고, 바닥이 갈라졌다. 이내 시몬과 세르네, 메리다도 동시에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으아아아악!" 아래를 보니 무수한 돌무더기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까마득한 지상에서 쿵- 쿵- 하고 건물 무너지는 소리가 난다. "후훗, 이 순간을 즐기세요 시몬." 세르네가 공중에서 두 다리를 쭉 뻗으며 태연하게 말했다. "100층 탑의 꼭대기에서 무너져 내리는 거. 아무나 할 수 없는 경험이니까." "죽기 직전인데 어떻게 즐겨!" 그렇게 외친 시몬이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세르네도 덩달아 입을 가리며 웃었고 메리다는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큭큭거렸다. "하하." 시몬도 자포자기한 듯 웃으며 떠오르는 태양을 보았다. 밤이 가고, 비로소 환한 낮이 찾아오고 있었다. 우웅! 우웅! 세르네가 붙여놓은 깃털이 빛을 내며 떨어지는 속도를 조절했다. 세 사람은 공중에서 천천히 떨어지며 함께 밝아오는 여명을 보았다. "메리다!" 시몬이 떨어지면서 외쳤다.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미래의 내가 말하더라!" 미래의 시몬은 미래를 바꿀 수는 없지만, 미래가 변하지 않는 선에서 타인에게 힌트를 주는 정도는 가능하다고 했었다. "뭘?" 메리다는 별로 관심 없는지 시큰둥하게 말했다. 시몬이 큰소리로 외쳤다. "판타서스 선배님! 미래에 결혼하신대!" "??!!" 메리다가 입을 벌리며 번쩍 고개를 들었다. "말도 안 돼! 난 싫어!" 남녀 사이의 관계는 그녀가 싫다고 해서 어쩔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시몬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렇게도 말했어! 네가 판타서스 선배님에게 집착할수록, 판타서스 선배님은 오히려 너를 위해 더 거리를 둘 거라고!" "......." "그러니 네 삶을 살아 메리다!" 시몬이 고개를 돌려 세르네를 보았다. "세르네!" "이번엔 제 차례인가요? 그분이 뭐라고 하시던가요!" 그녀가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네 뿌리를 찾고 싶다면, 신성연방의 '가휀'이라는 사람을 찾으래!" "......." 뿌리라는 말에 세르네의 동공이 한순간 흔들렸다. 눈을 꾸욱 감은 그녀가 후훗 하고 있었다. "흥미로운 제안이지만, 이제 뿌리는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그보다 시몬." "응?" 무너지는 탑 꼭대기에서, 세르네의 상앗빛 머리카락이 자유롭게 휘날렸다. "수염, 길러보는 게 어때요?" 그 말을 들은 시몬이 키득거렸다. "죽어도 싫어." 해가 완전히 떠오르며 세상이 완연한 푸른빛으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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