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567화 "하아, 하아." 시몬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원형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시몬과 메리다가 도주한 뒤, 마법진 엘리베이터는 즉각 작동이 중지된 상태였다. 시몬은 며칠 전에 시간의 유령이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상아탑주가 뭔가 흉계를 꾸미고 있는 건 틀림없네. 탑 외부에 있는 제3의 인물 때문에 미래가 바뀌는 건 나도 막을 수가 없어! 혹시 자네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위로 올라오게. -위요? -그래, 아래로 내려가 봐야 상아탑 측에 붙잡혀 주는 꼴일세. -위라면, 얼마나 위로 가야 하는데요? 시간의 유령이 손가락 끝으로 천장을 가리켰다. -당연히 100층이네!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과거고 뭐고 100층에서 모든 계획을 실행하기로 했다. 그때 옷에 매달려 있던 피어의 분신이 말을 걸어왔다. [크흐흐! 그 시간의 유령이란 자를 신뢰할 수 있나?] "아직 100% 신뢰할 순 없죠. 그가 날 이용해 무슨 짓을 할진 모르니까." 시몬이 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제가 상아탑 측에 잡히는 걸 원하진 않아 보여요. 상아탑주와 적대관계인 것도 맞는 것 같고." 상아탑주는 시간의 탑을 이용해 뭔가 위험한 짓을 벌이려고 한다. 시간의 유령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시간의 탑을 지키고자 한다. 이 둘의 목표는 상반되어 있다. "아래로 내려가면 붙잡힐 거라는 조언도 맞아요. 일단은 위에서 그를 만나보죠." [좋아! 좋아! 무슨 소린진 잘 모르겠지만-!] 쿵! 방금 시몬에게 소환된 에이션트 언데드, 프린스가 두 주먹을 맞부딪혔다. [닥치고 계속 올라가면 된다는 거지?] "맞아. 프린스." [근데 이 교복은 왜 나한테 준 거야?] 프린스는 지금 시몬의 키젠 교복을 겉에 입었고, 후드로 얼굴을 가린 채였다. "잘 들어, 프린스." 시몬이 진지한 눈으로 말했다. 잠시 그를 구워삶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지금부터는 일급 기밀이야. 다른 언데드 동료들에게도 말하면 안 돼. 오로지 네게만 맡기는 비밀임무야." [!] 프린스가 콧김을 뿜었다. [비.밀.임.무?] "그래. 지금부터 넌 키젠 학생인 시몬 폴렌티아야." 시몬이 그의 어깨를 툭 짚었다. "시몬처럼 말하고, 시몬처럼 행동해야 해. 그렇게 탑을 쏘다니면서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줘." 프린스의 표정이 시시하다는 듯 식었다. [아, 뭐야. 그냥 전형적인 시간 끌기 아냐?] "하지만 그런 네겐 말 못 할 사정이 있어. 사실 네 진짜 정체는 데스랜드의 지배자 프린스인 거지." [?!] 프린스의 표정에 살살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좀비왕자이자 데스랜드의 지배자라는 사실을 사람들 앞에서 철저히 숨기고, 너는 고독하게 일반 학생인 척을 해야 하는 거야." [네가 지배자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숨겨야만.......] "맞아.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누군가 인정하지 않아도 어쩔 수 없어. 그게 바로 비밀임무니까." 탁. 시몬이 프린스의 등을 때렸다. "가라, 프린스." 프린스의 두 눈이 놀이할 때처럼 초롱초롱 빛났다. [나는-!] 프린스가 바닥을 강하게 걷어차며 날아올랐다. 전면에는 70층으로 향하는 입구를 막아놓은 벽이 보였다. [시몬 폴렌티아다아아!] 콰아아아아앙! 프린스가 돌풍처럼 날아올라 천장을 박살 냈다. 잔해가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그 사이로 프린스가 번뜩이며 올라왔다. "뭐야!" "저 검은색 옷은......! 키젠 교복이다! 시몬 폴렌티아다!" 차악. 프린스가 바닥에 착지하며 왼손을 기이하게 꺾어 얼굴을 가리는 시늉을 했다. [......그래, 다들 날 시몬 폴렌티아라고 부르지. 그래도 상관없어.] "잡아!" 상아탑의 경비들이 일제히 흑마법을 쏴댔다. 프린스가 심취한 표정으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상관없어! 그게 내 임무니까!] 그러고는 있는 힘껏 주먹을 당겼다. [친위대애애-] 그의 손등에 검푸른 칠흑이 모이는 순간, 앞으로 내질렀다. [펀치!] 투콰아아아아앙―! 주먹으로부터 뻗어져 나온 충격파가 경비들의 마법을 날려 보냈다. 벽에 커다란 크레이터가 생기고, 경비들의 몸이 풍압과 후폭풍만으로 날아다녔다. "이, 이게 무슨 괴력이야!" [한 번 더!] 이번엔 왼 주먹이 올라왔다. [오버로드 펀치!] "크아아악!" [이번엔 본 아머 펀치다!] 프린스가 경비들을 헤집으며 혼란을 일으키는 사이, 시몬은 무사히 옆으로 빠져나갔다. '......너무 바람을 불어넣었나?' 뒤를 돌아본 시몬이 무안한 웃음을 흘렸다. [크흐흐! 어엿한 군단장이 다 됐군 소년! 원래 에이션트 언데드는 그렇게 다루는 거다!] 프린스가 소란을 일으키니, 곧바로 지원 병력이 도착했다. 벽면에 부딪혀 나가떨어진 경비들을 본 경비들의 표정이 사납게 굳었다. "역시 키젠의 학생회장인가." "투항해라, 시몬 폴렌티아! 파견생 신분으로 이 이상의 말썽을 일으키는 건 용서하지 않겠다!" [훗. 훗. 훗.] 프린스가 오른손을 꺾어 이마에 대는 시늉을 하고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내가 아닌 나로 지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아까부터 뭔 소릴 중얼대는 거야!" "잡아!" 경비들이 사방에서 불과 얼음, 전격을 만들어 흑마법을 쏴댔고, 프린스는 키득거리며 바닥을 박차고 달렸다. "절대로 놓치지 마라!" 경비들도 우르르 프린스를 뒤쫓았다. 그런데 한 경비가 손을 들었다. "아, 아니. 보고를 받고 오긴 했는데...... 시몬 폴렌티아의 키가 좀 작은 것 같지 않아요?" "니가 여기서 말할 짬이야? 달리기나 해!" "잡아! 무조건 이곳 70층 안에서 잡아야 한다!" 한 신입 경비의 물음은 그렇게 가볍게 묻혀 버렸다. * * * 프린스가 일으킨 난리 통을 틈타 시몬은 아케뮤스와도 합류했다. 아케뮤스는 인적없는 빈방에 메리다를 내려놓고 왔다고 보고했다. 슬립의 지속시간을 짧게 설정해 놨으니, 지금쯤이면 깨어났을 것이다. "......무사했으면 좋겠는데." [틀림없이 무사할 겁니다, 도련님.] 시몬이 고개를 끄덕이며 앞을 보았다. "100층으로 가려면, 결국 원형계단으로 올라가야겠죠?" [예.] 상아탑의 원형계단은 두 가지 라인이 있다. 1층부터 70층까지 오갈 수 있는 라인, 그리고 70층부터 90층까지 오갈 수 있는 라인이다. 상아탑에서 70층부터 차단한 것도 방어에 용이하기 때문이었다. 프린스가 시몬인 척 상아탑의 경비전력의 시선을 붙잡아주고 있지만, 70층부터 90층까지의 원형계단의 경비는 따로 남아 있을 것이다. "90층까지 얼마나 걸릴까요?" [5분이면 충분합니다.] 아케뮤스를 믿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아케뮤스가 커다란 날개를 펼쳤고, 시몬은 그의 품에 안기듯 얼굴을 묻었다. 펄럭! 두 날개가 시몬의 몸을 빈틈없이 감쌌다. [꽉 잡으십시오! 도련님!] 아케뮤스의 입이 쩍 벌어졌다. 께에에에에에에엑! 괴조(怪鳥)의 울음소리와 함께 아케뮤스가 날아올랐다. 검은 깃털을 휘날리며 90층으로 향하는 원형계단을 향해 전진했다. "뭐야 저건!" "일단 쏴!" 지상에서 네크로맨서들의 흑마법이 쏟아졌지만 아케뮤스는 몸으로 받아내며 비행을 계속했다. * * * 원형계단의 꼭대기. 90층. -치직! 괴생명체가 원형계단으로 가고 있습니다! 비행이 가능한 개체입니다! 시몬의 예상대로 이곳에는 방어 병력이 많았다. 보고를 들은 선임 네크로맨서가 통신 수정구를 들고 말했다. "시몬 폴렌티아인가?" -아닙니다! 시몬 폴렌티아는 여전히 경비들이 쫓고 있습니다! 경비가 고개를 슥 들이밀었다. "선배, 그럼 그 괴생명체는 뭘까요?" "알 필요도 없다." 선임 네크로맨서가 통신 수정구를 껐다. 마침 원형계단의 아래, 70층에서 방대한 칠흑이 느껴졌다. "책임은 내가 진다. 뭐가 올라오든 전 화력을 쏟아서 격추해라." "예!" 90층을 지키는 경비들이 일제히 아래쪽으로 지팡이를 향했다. 지팡이 끝에 각양각색의 원소 마법이 펼쳐졌다. "옵니다!" 촤아아아아아아악-! 뭐라 생김새를 형용할 수 없는, 새까만 까마귀 깃털이 뭉쳐진 것 같은 뭔가가 원형계단을 날아오고 있었다. 선임 네크로맨서가 명령했다. "발사." 수백 가지의 마법들이 눈부신 빛을 일으키며 쏘아지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그것들이 검은 깃털뭉치에 연신 내리꽂히며 자욱한 연기를 일으켰다. "맞았다!" "분명 가루가 됐을......!" "계속 쏴. 쉬지 말고 날려라." 선임 네크로맨서의 명령에, 경비들은 연기에 앞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상황임에도 흑마법을 쏴댔다. 폭발의 여진이 계단을 무너뜨리고 탑 전체를 뒤흔들었다. 그러나. 화아아아아아악-! 모든 화력을 견디고, 폭연을 뚫고 튀어나온 깃털뭉치는 멈추지 않았다. 경비들이 아찔한 표정을 지었다. "80층을 넘어섰습니다!" "벌써 몇백 발은 때려 부은 것 같은데......!" "비켜라." 시간의 탑을 지키는 경비들은 상아탑 본부의 네크로맨서들보다는 한 수 떨어진다고 알려져 있지만, 상아탑주가 직접 데려온 강자들도 있었다. 선임 네크로맨서가 손짓하자 은빛의 액체가 장창의 형태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 * * "......큭!" 어마어마한 화력이다. 아케뮤스의 몸으로 감싸진 시몬에겐 타격이 오진 않았지만, 아케뮤스의 몸으로 전해지는 충격만으로도 정신이 아찔할 지경이었다. '아케뮤스! 괜찮아요?' 아케뮤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습니다, 도련님 이대로 90층까지......!] 꽈드드득! 그 어떤 흑마법으로도 뚫리지 않던 아케뮤스의 몸이 관통됐다. 은빛의 창이 내리꽂히는 것을 신호로 아케뮤스의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아케뮤스!" [이런, 수은인가!] 아케뮤스에게 약점인 물질이었다. 시몬에게 피해가 가진 않았지만 아케뮤스는 제대로 창이 꽂혔기에 타격이 커 보였다. "괜찮아요?" [송구합니다, 도련님! 시간이 있으면 몸을 복구하겠지만 더 이상의 비행은......!] 그 말에 시몬이 급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떤 결단을 내릴지 고민하는 찰나, 88층에 토끼 가면이 떡하니 붙어 있는 게 보였다. '시간의 유령이 보낸 신호야!' 시몬이 아케뮤스를 붙들었다. '절 88층으로 던져주세요! 아케뮤스는 이대로 후퇴해서 몸을 추스르시고요!' [예, 죄송합니다! 무운을 빌겠습니다!] 아케뮤스가 힘껏 시몬을 내던졌다. 동시에 90층에서 다시 한번 흑마법이 쏟아져 내리며 그가 추락해 갔다. '아케뮤스......!' 시몬이 난간을 붙잡은 채 떨어지는 아케뮤스의 모습을 보았다. [크흐흐! 너무 걱정 마라, 소년! 놈의 재생능력이라면 괜찮을 거다.] 90층의 경비들도, 90층을 지키는 게 최우선인지 아케뮤스를 뒤쫓거나 하지는 않았다. 시몬은 속으로 안도하며 고개를 돌렸다. 88층에 붙어 있는 토끼 가면. 시몬은 주위를 샅샅이 둘러보았다. 여기에 뭔가가 있다는 걸까? 혹시 90층으로 향하는 비밀통로라도? '아.' 정면을 응시한 시몬이 어이없는 웃음을 한 차례 흘렸다. 그러곤 팔을 옆으로 치켜들었다. '피어, 부탁해요.' 아공간이 열리고 피어가 나타났다. 순식간에 뼈로 분해되더니, 시몬이 입은 로브 안으로 쏙쏙 들어가 단단하게 몸을 지탱했다. 착. 파멸의 대검을 들어 올린 그가 정면을 응시했다. 시간의 유령이 제시한 방법은, 비밀통로 같은 게 아니었다. '저 사람을 이용하라 이거지?' 저벅- 저벅- 저벅- 느릿한 발소리와 함께, 어둠 속에서 쇠 긁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키젠 놈의 냄새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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