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1375화 “으으음-” 공중에 둥둥 뜬 채로 누워 있던 민트색 머리카락 소녀의 눈이 떠졌다. 제4군단장, 유령왕녀 메리다 휴 이켈. 본래는 밝은 연두색이었지만, 이제는 어두운 녹색에 가까워진 눈동자가 멍하니 시몬을 응시했다. 이내 그녀가 잠꼬대 같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시…… 몬?” “응, 안녕.” 시몬이 인사하기 무섭게 메리다가 갑자기 사라졌다. 당황한 시몬이 눈을 깜빡이고 있는데, 등 뒤에서 깃털같이 가벼운 무게감이 느껴졌다. 쿠울- 어느새 메리다가 시몬의 등 뒤에 등껍질처럼 찰싹 달라붙어 졸고 있었다. 메이린이 어이없어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야! 갑자기 뭐 하는 거야?” “메리다, 할 이야기가 있어.” 이제는 메리다의 기행에 초탈한 시몬이 태연하게 말을 걸었다. 그러자 메리다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응’ 하고 답했다. “학우들의 안전을 위해 너와 4군단의 도움이 필요해.” “응.” “도와줄 거지?” “응.” “고마워! 네가 도와준다면 든든하네.” 생각보다 쉽게 약속을 받아냈다. 시몬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메이린과 카미바레즈는 신경 쓰이는지 시몬의 등을 힐긋힐긋 바라봤다. “헤이, 얘들아! 이것 좀 봐.” 딕이 메리다가 앉아 있던 반대편 의자에 놓인 재킷을 들어 올렸다. “우리가 오기 전에 누구랑 같이 있었던 것 같은데?” “늦어서 미안해! 메리다!” 바로 그 재킷 주인으로 보이는 빨간색 양갈래 머리의 소녀가 헐레벌떡 카페로 들어왔다. 양손 가득 빵 봉투를 든 채 숨을 헐떡이는 모습. 다름 아닌 유령함대의 엘리사 셀린이었다. “허억! 헉! 가게 앞에서 한참 기다려서 사 왔어! 이제 사령학과 과대표는 내가 계속하는 걸로 교수님께 말씀드리는 거다?” “…….” 그러다 그녀는 뒤늦게 시몬과 학생회 멤버들이 떡하니 서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엘리사의 얼굴이 토마토처럼 빨개졌다. “시, 시몬이랑 학생회! 너희가 어떻게 여길……!” “안녕, 엘리사.” 시몬이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메이린은 흥 하고 코웃음 쳤다. “너도 진짜 마지막 학기까지 대단하다 대단해. 명색이 Top10이라는 애가 언제까지 남 빵 셔틀이나 할 거야? 그리고 뇌물 공세는 우리 학생회가 문제 삼을 수 있는 거 알지?” “뇌물이라니! 그런 거 아니야악!” 엘리사가 버럭 소리 질렀다. “나, 나는 그저!” “그저?” “인간은 다른 인간에게 고개를 숙이는 게 아니라 그 인간이 가진 권력 구조에 순응하는 것뿐이다!” “……갑자기 왜 정치원론 같은 내용을 읊고 있니?” 그때 카미바레즈가 얼른 앞으로 나왔다. “마침 잘됐어요 엘리사! 엘리사에게도 협력을 부탁드리고 싶어요!” 카미바레즈가 빠르게 상황을 설명했고, 그제야 엘리사가 턱을 치켜들며 으스대기 시작했다. “어머, 그렇구나! 그러니까 너희 학생회는 내게 ‘부-탁’을 하러 왔다는 거지?” “솔직히 넌 메리다의 덤으로 겸사겸사…….” “넌 입 다물어, 딕 헤이워드.” 딕의 말을 끊은 엘리사가 다시 정치 가문의 영애로 돌아온 듯 거드름을 피웠다. 정치적 관점에서 누군가의 ‘부탁’이란, 권력의 비대칭적 작동을 가능하게 하는 암묵적 허락의 신호로 간주된다. 더 간단히 말해 부탁하러 온 상대를 마음껏 유린해도 된다는 허용. 그녀가 정치적 수사를 현란하게 내뱉기 시작했다. “일단 너희들의 ‘부탁’ 방식은 내가 기대하는 협력적 대화의 수준에 미치지 못해! 다행히도 내가 마침 개인적인 피로감을 느끼고 있거든? 맛있는 디저트를 준비해 준다면 긍정적인 방향으로 논의가 진전될 여지가 생길지도 모르지!” 그때 시몬의 등 뒤에 졸고 있던 메리다가 느릿하게 눈을 떴다. “……참고로 나는 협력할 거야.” “진짜? 메리다가 하면 나도 할게!” 메리다에게 잘 보이고 싶다는 마음이 앞섰던 엘리사가 그렇게 외쳤다. 그러다 실수했다는 걸 깨닫고 뒤늦게 입을 텁 막았지만, 이미 엎지른 물이었다. 딕과 메이린이 웃음을 참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엘리사가 말을 바꾸기 전에 카미바레즈가 얼른 서류와 깃펜을 내밀었다. “협조해 줘서 고마워요! 두 분 다 여기 서명해 주세요!” * * * 시작부터 Top10 두 명의 협력을 받아내는 데 성공한 학생회 멤버들은 바로 다음 장소로 향했다. 도착한 곳은 도시 내의 작은 파티룸이었다. “어머, 얘들아!” 문이 열리자 드레스 차림의 여학생이 환하게 반겨주었다. 범생이 안경을 눌러쓴 그녀는 1학년 A반 시절부터 통칭 ‘반장’으로 불리는 제이미 빅토리아였다. “다들 안녕.” 그 뒤로는 뱀처럼 구불구불한 연두색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Top10이자 맹독학과 대표, 클라우디아 멘지스가 여유롭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왔어?” 소파 위에는 무방비하게 누워 있는 건 만두 머리의 여학생, 사령학과의 신디 비바체였다. 모두가 1학년 A반 원년 멤버들이었다. “다들 팔자 좋다?” 핑크 핑크한 파티룸에 드레스 코드까지 맞춘 채 놀고 있는 동기들을 보며 메이린이 헛웃음을 흘렸다. 소파에 누워 있던 신디가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어, 메이린, 카미. 배신자들이다.” “누가 배신자야!” “시몬네랑 논다고 우리 모임도 거절했잖아.” 물론 실실 웃고 있는 신디의 얼굴을 보니 장난을 치는 뉘앙스가 강했다. 옆에 있던 클라우디아는 남자애들 본다며 담요를 끌어다 신디의 몸에 덮어주었다. 메이린은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정말 미안하지만 내겐 학생회가 더 중요해.” “우와, 상처.” “그리고 우리 놀고 있는 게 아냐. 문제가 생겼어.” 메이린이 현재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키젠 학생에 대한 테러 조짐이 보이고 있고, ‘개학식이 장례식이 될 것이다’라는 위협적인 메시지까지. 반장 제이미는 펄쩍 뛰면서 분노했다. “학생을 노리는 범죄는 용서할 수 없어! 당연히 우리도 협력하…….” [나는 반대.] 사령마법을 사용했는지, 신디가 자기 육체에서 스르륵 벗어난 유령 상태로 말했다. [학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테러범들과 싸우다 다치면 누가 책임질 건데? 키젠 졸업자는 딱 100명뿐인데, 부상으로 첫 단추가 꼬이는 건 다들 피하고 싶을걸. 리스크가 커.] “…….” 그 말에 메이린은 반박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신디의 말이 틀리진 않았고, 거절한다고 해서 비난할 수 없었다. 잠시 정적이 내려앉은 사이 신디가 빙긋 웃으며 다시 본래 몸으로 들어갔다. “물론 반대로 혜택이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져.” 그녀가 상체를 일으키며 말을 이었다. “명분이 필요해. 큰 걸 바라지도 않아. 3학년 2학기에 남들보다 아주 조금이라도 앞서갈 수 있는 가산점을 준다면 너도나도 하려고 싸울 것 같은데?” “저,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카미바레즈가 멤버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우리는 학생회니까 나서는 게 당연하지만, 다른 분들은 아니니까요.” 시몬도 고개를 끄덕였다. “임무에 참여하면 가산점을 받을 수 있을지 건의해 보자.” “그럼 내가 스테이시 교수님께 연락할게!” 메이린이 통신 수정구를 작동시켰다. 그녀가 벽을 보고 ‘네, 네!’ 하고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화를 이어나가고 있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숨죽인 채 기다렸다. 이내 통신을 종료한 그녀가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성적 가산점은 무리지만, 3학년 임무 과정에서 메리트를 부여할 수 있도록 네프티스 님께 건의해 보겠대. 스테이시 교수님이 직접 약속하셨어.” 모두가 큰 소리로 환호했다. 그렇게 Top10인 클라우디아와 1학년 A반 멤버들 모두 이번 테러 방어 작전에 합류하기로 했다. * * * 생각보다 시간이 지체됐다. 학생회 멤버 네 사람은 각자 흩어져서 개학을 앞두고 랭거스틴에 머물고 있는 3학년 학생들을 찾아가 협력을 구하기로 했다. “메리트 건의가 사실이라면 나서야지. 안 했다가 손해 볼 순 없으니.” “조, 조금 무섭지만 학생들이 위험에 빠졌다면 뭐라도 돕고 싶어!” 딕의 설득에 따라 소환학과의 피츠제럴드 잉겔스와 토토 아모리가 합류했다. “시몬에게는 빚이 있소. 말만 하시오.” 뒤이어 Top10이자 마투학과 총대표인 ‘마검 사용자’ 쥴이 카미바레즈의 설득에 합류하기로 했다. 그 밖에도 당장 연락이 되는 선도부장 말콤 랜돌프, 편입생 알리자린 자크, 맹독공장의 제시카 카나노르 등 네임드급 학생들이 대거 작전에 합류했다. 마지막으로 시몬이 향한 곳은 한 어둡고 그늘진 골목길이었다. -하하하하! 어두운 골목길 옆으로 시끌벅적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한 무리의 학생들이 삐딱하게 앉아 오크통을 테이블로 쓴 채 카드 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다 한 명이 벌떡 일어났다. “시, 시몬 폴렌티아다!” “뭐?” 학생들이 하나둘 경계하며 자리에서 벌떡벌떡 일어나기 시작했다. 급기야 칠흑을 일으키며 싸울 태세를 갖춘 학생도 있었다. “이 자식! 여긴 왜 왔냐!” “로크섬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 다리라도 분지르러 온 거 아냐? 자기랑 친한 놈들 한 명이라도 더 졸업시키려고…….” 그 이야기를 들은 시몬이 머리를 긁적이며 무안한 웃음을 흘렸다. 이 녀석들 사이에서 자신의 이미지가 나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저런 말까지 나올 줄은 몰랐다. 시몬은 웃는 얼굴을 유지하며 말했다. “헥토르 여기 있지?” “네가 알 필요는 없……!” 버럭 소리 지르는 학생의 이마를 손으로 툭 치며 한 남학생이 나섰다. “낮술 했다고 오버들 하지 좀 마.” 시몬에게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소환학과에서는 4위, 헥토르 파벌의 중심인물이자 오른팔인 피에르 버클러였다. “헥토르는 잠깐 자리 비웠어. 적당히 근처의 숲에서 훈련하고 있을걸? 로크섬으로 돌아가기 직전에나 돌아올 거야.” ‘개학 직전에 훈련? 진짜 열심히 하네.’ 시몬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헥토르와 너희들에게 제안하고 싶은 게 있어.” 시몬이 이번 일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고 피에르는 묵묵히 이야기를 들었다. 곳곳에서 불만스러운 말소리가 들려왔지만 피에르가 적당히 중재했다. 그렇게 이야기가 끝나고, 주위 학생들의 의견을 듣고 종합한 피에르가 시몬에게 돌아왔다. “헥토르에게 이야기는 전해줄게.” “고마워 피에르!” “하지만 너무 기대하진 마.” 피에르가 눈을 나른하게 감은 채 뒷목을 주물렀다. “우리는 한 명이라도 더 우리 동지들을 ‘100명’ 안에 넣어서 키젠을 졸업시키는 게 최우선이야. 너희처럼 아량을 베풀고 남을 돕기에는, 우리 사정이 급해서.” “이해해. 어떤 결정을 하든 존중할게.” 시몬이 등을 돌렸다. “그럼 답변 기다리고 있을게.” * * * 랭거스틴 지하. 정체불명의 공간. 저벅. 저벅. 어두운 지하 공동 안, 수많은 로브 입은 사람들이 자리에 엎드려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들 모두 보통의 인간과는 조금 거리가 먼 외견이었다. 몸 곳곳이 보석으로 이루어져 있는 그들은 어둠 속에서도 빛이 번쩍였다. 그리고 그 사이로 한 인간이 걸어오고 있었다. 다름 아닌 아보 벨스만 교수였다. [왔느냐.] 어둠 속에서 구원자 코르비니스가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보 교수가 걸음을 멈추며 인사했고, 어둠 속에서 음침한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이제 기다린 답을 들을 때가 됐다.] “그 전에.” 아보 교수가 천천히 고개를 들며 답했다. “딱 한 가지만 약속해 주십시오.”
Please login to track progr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