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555화 다음 날 아침. 오전 수업은 저주학이었다. 시몬은 이상한 소문이 나 있을까 봐 잔뜩 긴장한 채 등교했지만, 강의실 분위기는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친구들도 시몬에게 평소처럼 인사하며 지나갔다. '다행이네. 그 애들이 소문을 안 낸 건가?' 시몬은 그런 낙관적인 생각도 해보았지만, 사실 그 여학생들은 근질거리는 입을 참지 못하고 방방곡곡에 소문을 다 내놓은 상태였다. 소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학생회장 시몬과 전체 4위 메리다가 야밤에 본관 건물에서 이불을 펴고, 서로 뒤엉킨 채 이상한 짓을 하고 있더라. 본디 소문이라는 건 적당히 신빙성이 있고 듣기 그럴듯해야 널리 퍼져나가기 마련인데, 이번 소문은 자극적이기만 하지 다소 뜬금없다는 인상이 강했다. 시몬과 메리다의 평소행실을 생각해도 그렇고, 무엇보다 굳이 사람이 많이 오가는 본관 건물에 떡하니 이불을 펴고 이상한 짓을 하고 있다는 행위 자체가 현실성이 없었다. 만약 장소가 아무도 없는 빈 강의실이었다면 소문은 더 크게 퍼졌으리라. 가십거리를 좋아하는 학생들도, 이 이야기를 꺼내면 바보취급만 당할 뿐이니 금방 관심을 잃었다. 직접 두 눈으로 본 여학생 둘만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물론. "야이 미친 변태 새끼야아아아악!" 믿는 사람도 있었다. 같은 수업을 듣는 메이린이 대뜸 시몬의 손목을 잡고 밖으로 데려 나오더니 쿠션으로 마구 얼굴을 내리쳤다. "메, 메이린! 잠깐! 읍!" "어, 어어, 어떻게! 학생들의 모범이 돼야 할 학생회장이란 놈이! 학교에서 여자애랑! 그, 그으런 파렴치한 짓을......!" 얼굴이 새빨개진 메이린이 아등바등 쿠션을 내리쳤다. 시몬이 그 쿠션을 붙잡으며 물었다. "잠깐만. 그 파렴치한 짓을 정확히 뭐라고 들었는데?" 시몬은 정확히 어떤 소문이 퍼졌는지 궁금했지만, 질문을 받은 메이린의 얼굴이 토마토처럼 벌게졌다. 뒷걸음질 친 그녀가 '그, 그러니까.' 하고 말을 버벅거리더니 이내 부끄러움이 한계치에 이르렀는지 빼액 소리 질렀다. "그걸 나한테 왜 말하게 하는데? 이 변태 자식아!" "......시몬." 그 옆에는 퀭한 얼굴의 카미바레즈가 손을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충격이에요. 우리보다 먼저 어른이......." "아니라니까 카미! 너까지 왜 그래?" 크크큭. 웃음소리가 들리는 곳을 보니 딕이 입을 틀어막은 채 웃고 있었다. 시몬이 그를 노려보았다. "네가 범인이구나, 딕." 말도 안 되는 소문이라도 딕이 각색하면 그럴듯하게 들렸으리라. "아~ 어쩌다 보니 재밌는 소문을 들어서 학생회 멤버들한테만 말해줬을 뿐이야. 이제 해명은 본인에게 들어야겠지?" "......알겠어." 시몬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메리다가 슬립을 걸었다고?" "그래서 뒤엉킨 자세가 된 거군요!" "......뒤엉켰다고 말하지 마, 카미. 기분이 이상해." 멋쩍게 볼을 긁은 시몬이 고개를 돌려 딕을 보았다. "부탁해." 대충 해명을 퍼뜨려 달라는 뜻이었다. 창가에 걸터앉아 있던 딕이 바닥에 내려와 어깨를 으쓱했다. "굳이 내가 손 안 써도 그 소문은 가라앉는 중이야. 긁어 부스럼 낼 필요 없이 그냥 내버려 두면 알아서 사라질 거야." "그랬으면 좋겠는데." "흐흐흐, 그래도 한두 달 동안은 재미 삼아 메리다랑 엮일걸?" 딕이 시몬의 팔뚝을 툭툭 건드렸다. "실화였으면 남자들의 영웅이 됐을 텐데. 상남자 시몬!" "......제발 조용히 해." 시몬은 누가 들을까 노심초사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메이린은 여전히 염려스러운 듯 쿠션을 끌어안고 말했다. "근데 시몬, 갑자기 메리다랑은 왜 엮인 거야?" "이번에 파견 파트너로 정해졌거든." "오?" 딕이 불쑥 튀어나왔다. "이야! 그럼 파견지에서는 그 소문이 현실이 될 수도......." 빠악! 딕이 메이린의 쿠션에 뒤통수를 맞아 나가떨어졌다. 카미바레즈가 말했다. "이제라도 정해져서 다행이에요 시몬! 파견지는 어디에요?" "아, 그게." 시몬이 옆머리를 긁적이며 메이린을 보았다. "상아탑이야." "어엉?" 메이린은 전혀 몰랐다는 눈치였다. 시몬은 어떻게 된 건지 이야기했다. "......시간의 축제. 그러네. 이제 곧 시작할 때긴 하네." "뭔지 알아?" "뭐래, 나 상아탑 소속인데 당연히 알지! 몇 번 내부에 들어가 보기도 했고."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막 위험한 장소는 아닌 것 같았다. 물론 당시의 메이린은 어리기도 했고 코어를 개방하기도 전이었으니, 위험성이 떨어지는 아래층 위주로 돌아다녔다. 상층부 쪽은 자신도 어떨지 모른다고 말했다. "대륙의 시간이 흐르는 곳이라니, 멋져요! 저도 언젠가 꼭 가보고 싶어요!" 이야기를 듣던 카미바레즈가 날개를 파닥거렸다. "부럽네. 누구는 파견으로 사막에 가는데, 누구는 축제를 즐기러 간다고? 차별이 너무 심한 거 아냐?" 딕이 투덜댔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는 사이, 시몬은 메이린 쪽을 곁눈질로 살폈다. -지금부터는 오로지 본부에서 학생회장에게 맡기는 비밀임무입니다. 일급기밀이었기에, 상아탑 소속의 친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임무. 이건 단순 파견이 아니었다. 키젠 본부에서는 학생회장인 시몬에게만 임무를 맡겼다. 간단히 말하자면, 시간의 탑 내부에서 상아탑의 정보와 데이터를 가져오는 내용이다. 즉, '스파이' 노릇을 하라는 거였다. 이때 시몬은 한 가지 확실히 했다. -임무를 거절할 수 없는 입장인 건 알지만, 저는 키젠과 상아탑의 알력 다툼에 끼고 싶은 생각은 없는데요. -아하, 그렇게 오해할 수도 있겠군요. 본부직원이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특급기밀이라 자세한 내용은 말씀드릴 수 없지만, 이번 건은 대륙의 평화가 걸린 문제입니다. -네? -상아탑주가 뭔가를 꾸미고 있습니다. 시몬은 어제 본부직원과 주고받았던 이야기를 상기했다. 메이린은 정말로 모르는 눈치다. 시간의 축제 자체는 알고 있지만, 시몬이 상아탑에 파견된다는 사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알고 있을 것 같은 한 사람. -곧 재밌는 일이 일어날 거예요. 세르네 아인다르크. 그녀는 상아탑의 공식 후계자이고, 조직 내부에서는 키젠에 적대적인 파벌에 속한다. 무엇보다 상아탑주가 그녀의 양아버지다. '으음, 부디 번거로운 일에 휘말린 게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시몬이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무사히 복귀해 듀라한을 배우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 * * 파견 당일, 저녁. 시몬은 나비 넥타이에 턱시도 차림으로 기숙사를 나섰다. 오랜만에 한껏 꾸몄다. 앞머리를 올려서 이마를 말끔하게 드러낸 스타일로 바꿨고, 이번에 새로 산 정장 구두도 가볍게 두들겨 신어보았다. [크흐흐! 이번 상아탑 일정은 기대되는군!] '잘 부탁해요, 피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이번 외부일정도 에이션트 언데드들을 대동하기로 했다. 아공간으로 직접 데려가는 건 피어와 헤르세바, 그리고 아케뮤스다. 현재 에르제베트는 시몬의 지시로 '화이트'의 꼬리를 밟고 있었다. 여차하면 헤르세바의 능력으로 부를 생각이었다. 그 외에 질병의 마수 '칼'은 피어의 검에 녹아 들어가 있고, 프린스는 좀비만 있으면 부를 수 있다. 언제든지 7군단 전체가 움직일 수 있다. 준비를 마친 시몬은 키젠에서 텔레포트 마법진을 타고 이동. 공간을 넘어 도착했다. "아." 별들이 촘촘히 박힌 밤하늘이 드러났다. 고개를 내리면 밝은 조명에 눈이 부셨다. 시몬은 대도시 한복판에 뚝 떨어져 있었다. 높다란 탑 건축물들이 경쟁하듯 하늘을 향해 뻗어 있었고, 곳곳에서 들리는 소음에 귀가 먹먹했다. 시몬은 다소 놀랐다. '상아탑이 이렇게 번화한 곳이었어?' 일반적인 대륙민들은 '상아탑'이라고 하면, 휑한 들판에 커다란 탑 하나만 덜렁 있고, 그 안에 틀어박혀 연구만 하는 괴짜들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하지만 탑의 기술력은 탑 밖으로도 전해지며, 자연스레 거대 광역권이 형성되기 마련이다. 뿌우우우우-! 심지어 도심 한복판에 열차도 있었다. '대단해! 신성연방도 아닌데 열차라니!' 아무리 네크로맨서의 시대라지만, 사람들의 생활에 밀접한 일상용품은 여전히 마나로 만들어지는 게 보통이다. 마정석, 마나 스크린, 통신 수정구, 메모리얼 수정구, 마나 전등, 마나 난로 등등. 물론 칠흑 기반 용품이 성능은 더 뛰어나지만 네크로맨서의 코어를 능가하는 생산수단이 특별히 없기에, 가격이 비싸다는 단점이 있었다. 반면에 마나 기반 용품은 대량생산도 가능하고, 가격도 저렴했다. 상아탑은 이런 마나 기술로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했으리라. '멋지긴 하네.' 랭거스틴을 뛰어넘는 첨단기술과 부의 도시. 그게 시몬이 상아탑을 처음 본 인상이었다. 건물의 양식도 그렇고, 그냥 길거리에 다니는 사람들만 해도 부자들인지, 입고 있는 복식부터가 달랐다. 시몬은 새로운 환경에 즐거움을 느끼며, 반짝이는 조명 아래에 지도를 펼쳐 들었다. '목적지까지 걸으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네.' 기왕 상아탑까지 온 거, 열차를 타고 가보기로 했다. 일반적인 열차 말고, 이번 '시간의 축제' 기간에만 운영하는 관광열차가 있었는데 500실버라는 다소 비싼 티켓값을 지불하고 탑승해 보았다. '오.' 열차는 천천히 달리고 있었고, 한쪽 벽면이 거의 유리처럼 되어서 도시의 야경을 훤히 볼 수 있었다. "상아탑에 오신 관광객 여러분! 환영합니다!" 열차 칸마다 가이드가 대동해 도시에 관해 설명해 주고 있었다. "상아탑은 2,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인류를 이끌어온 선구자 역할을 해왔으며......." 시몬은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열차 벽면에 붙어 있는 사진이나 그림을 구경했다. 대부분 상아탑의 유구한 역사를 찬양하는 작품들이었는데, 정글이나 사막, 빙하 위에 상아탑이 우뚝 솟은 사진도 있었다. '이런 곳에도 상아탑이 있었구나. 옛날에는 장소를 자주 옮겨 다녔던 걸까?' 그 옆에는 꽤 재미있는 작품도 하나 있었다. 아직 진화도 덜 된 듯한 발가벗은 유인원과, 로브를 입고 지팡이를 든 마법사가 어깨동무를 한 채 웃으며 V자를 그리고 있는 사진이었다. '이건 뻥이 너무 심하잖아!' 유인원과 마법사가 우정 사진을 찍는 게 말이 되고 안 되고를 떠나서, 그 당시에는 마력 촬영기 같은 것도 없었다. "이 사진요. 그 당시에는 마력 촬영기도 없었지 않나요?" 정확히 시몬이 생각했던 것과 질문을 입 밖으로 내뱉어주는 관광객이 있었다. 그러나 가이드는 뜨끔한 기색도 없이 근엄하게 답했다. "고대의 대륙에는 '마도문명'이라는 전설적인 마법 체계가 존재했답니다. 현대의 지식으로도 분석하지 못하는 이 비밀스러운 기술들은......." 가이드는 뭔가 이상하다 싶으면, 마도문명 이야기를 꺼내 무마했다. 마도문명은 일종의 치트키였다. 그래도 이런저런 자료들을 둘러보고 있으려니, 마도문명이란 게 실재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상아탑에서도 시간을 되돌리려는 연구를 시도했던 게 아닐까?' 그렇게 시몬은 관광도 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목적지인 역에 도착했다. '사실상 그냥 걸어오는 게 더 빨랐겠네.' 관광열차는 느린 속도로 빙빙 둘러 가니 제법 오래 걸렸다. 시몬은 다시 지도를 펼쳐 들었다. 도시 권역 전체를 보자면, 도시에는 두 개의 커다란 탑이 우뚝 솟아 있었다. 왼편에 보이는 상대적으로 크기가 작은 하얀 탑이 바로 상아탑의 본부. 그리고 오른편, 가장 크고 높으며 빛바랜 회색탑이 바로 옛 상아탑의 본부이자 현재는 '구탑'이나 '시간의 탑'이라고 불리는 장소. '여기구나.' 2,000년의 비중으로 치면 1,700년 동안 상아탑의 본거지로 쓰였던 그곳. 시간의 탑이 눈앞에 보였다. 우우우우우우우우-! 탑의 꼭대기에는 알 수 없는 기운이 휘감고 있었다. 네프티스의 이능과도 같은 황금의 띠 같은 게 시간의 탑의 몸체에 들어갔다가 사라지고 있었다. 과연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까? 시몬은 즐거운 긴장감을 느끼며 걸음을 옮겼다. "거기, 좀 지나갑시다!" 도시의 마차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시간의 탑 앞에 멈춰 섰다. 신사들과 귀부인들이 차례대로 마차에서 내렸다. "칼브라인 백작과 부인, 확인되셨습니다." 탑의 입구에는 초대객들을 확인하는 집사가 서 있었다. 그 뒤로는 무장한 병사들이 보이는데, 경비가 삼엄했다. '......무사히 도착은 했는데.' 파트너인 메리다가 보이지 않았다. 키젠에서 같이 출발할 줄 알았던 메리다는 굳이 다른 루트를 이용해 들어온다고 했었다. 시간에 딱 맞춰 목적지에 도착할 거라고 장담했지만 그녀의 모습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초조해진 시몬이 주위를 훑어보고 있는 그때. '!' 어두운 밤. 은은한 가로등 아래의 벤치에 앉아 있는 소녀의 모습이 보인다. 어깨가 드러나는 검정 드레스 차림인 그녀는 시몬이 잘 아는 얼굴이었다. '메리다?' 그녀는 벤치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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