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498화 "혹시 엡룬도 '공범'인가?" 카쟌의 공범이라는 적나라한 표현에, 영주는 식겁하며 손사래를 쳤다.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말씀이 너무 지나치십니다!" "타라도스를 쥐고 있는 정체불명의 조직, 그리고 키젠. 둘을 놓고 줄다리기를 하는 것 같다만." 카쟌이 스윽 몸을 일으켰다. "우리가 온 이상 변화는 시작됐다. 줄을 잘 잡아야 할 거다. 그 첫 번째가 포로와 납치된 사람들의 처우다. 현명하게 판단해라." 카쟌은 그 말만 남기고 떠났다. 시몬도 그 뒤를 따랐다. "영주를 몰아붙일 때 대단하던데요, 카쟌!" 문밖으로 나와 복도를 걸으며 시몬이 말했다. 카쟌은 무표정한 얼굴로 흉터를 슥슥 긁었다. "포로가 제대로 압송되고, 납치된 사람들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이 정도의 압박은 어쩔 수 없었다. 이미 정보를 차단한 전적이 있는 놈들이니, 키젠인 우리가 왔다는 정보도 잘 차단하겠지." [잠깐! 잠깐! 잠깐!] 그때 시몬의 목에 걸려 있던 목걸이에서 소리가 들렸다. [니들 혹시 우선순위를 착각하는 거 아니지? 어서 내 본체를 찾아내야 할 거 아냐!] "너무 서두르지 마. 칼. 정보만 수집하고 바로 떠날 테니까." 카쟌도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직접 감옥의 도적들을 취조해서 정보를 얻어보겠다." "네, 부탁해요." * * * 목적지인 타라도스와, 엡룬 영지 사이는 커다란 산맥이 가로막고 있었다. 산에는 당연히 몬스터들이 바글거리고, 인력과 물자가 이동하기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타라도스가 폐쇄적인 이유는 지형학적인 이유도 컸다. 그리고 그 산맥의 골짜기에 위치한 동굴. 타라도스가 번영하던 시절, 영지 외부로 광물을 옮기기 위한 비밀 터널이 뚫려 있었다. 물론 지금은 이곳을 아는 사람도 얼마 없고, 현재는 도적 떼의 소굴이 되었다. 타라도스를 주름잡는 '가네스 길드'라는 이름의 도적들. 그리고 늦은 새벽 이곳에, 두 명의 도적들이 동굴 앞에 도착했다. "암구호!" "솔방울!" 암구호를 무사히 댄 두 명의 도적들은 동굴 안으로 들어왔다. 무척 큰 규모의 동굴이었다. 도적들은 각자 자리에 퍼질러 앉아 술을 퍼먹거나 벽에 기대어 자고 있었다. 두 사람은 10분 정도를 더 걸어서 동굴을 지키는 대장격 인물의 앞까지 왔다. 그는 마른 육포를 질겅질겅 씹고 있었다. "뭐야, 왜 너희 둘만 왔나?" 도적대장이 물었다. "다른 놈들은 어딨어? 외부에서 조달한 실험체랑 무기들은?" "아, 그, 그게......!" 도적 한 명이 삐질삐질 진땀을 흘리며 옆 도적의 눈치를 보았다.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도적이 입을 열었다. "미안, 다 털렸어." 쾅! 도적대장이 나무상자를 주먹으로 내리치며 몸을 일으켰다. "털렸다고?" "그래." "누구한테?" "다른 도적단. 우리가 상단으로 위장하고 있으니까 덤벼들더라고." 도적대장이 고개를 쭉 빼 밀어, 수염남의 눈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가네스 길드다. 타라도스와 이 근방을 꽉 잡은 걸 알고도 덤비는 새끼들이 있다고?" "여기 온 지 얼마 안 된 놈들인가 봐. 우리 이름을 밝혀도 이판사판이었어." "......." 도적대장은 등을 홱 돌려 멀어져 갔다. 그러고는 마시던 맥주잔을 들어서 꿀떡꿀떡 마시기 시작했다. "크으." 그가 입가를 대충 쓱 닦고는 말했다. "이것들 묶어." "!" "말하는 꼬락서니 보니까 뭔가 숨기고 있네. 거꾸로 매달아서 물 좀 먹이면 말할 생각이 들겠지." "예!" 도적들이 주위를 포위하며 다가왔다. "이, 이, 이제 어떻게 할 겁니까!" 같이 온 도적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수염이 덥수룩한 도적은 생긋 웃더니, 다리를 쭉 뻗어서 교차시키고 팔짱을 끼고, 검지를 입술 위에 올리며 말했다. "난 묶이는 쪽보단 묶는 쪽인데~" 그 말에 도적대장이 오만상을 찌푸렸다. "뭔......." 촤르르륵! 촤륵! 다가오던 도적들의 몸이 천장에서 내려온 거미줄에 휘감기더니, 그대로 공중으로 치솟았다. "으아악!" "이, 이게 뭐야?" 순식간에 번데기처럼 변해서 대롱대롱 매달린 도적들, 그리고 천장의 위에는 거미들이 입가에서 독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다. "어, 어느 틈에!" 요염한 포즈를 취하고 있던 수염남의 몸이 출렁거리더니, 이내 전신이 실처럼 벗겨지고 그 안에서 바짝 마른 여인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녀가 입술을 혓바닥으로 핥으며 말했다. [길게 말할 필요는 없지? 이 동굴은 이제 우리 거야.] 쿠우우우웅! 이번엔 동굴 한쪽 벽이 허물어지며 빛바랜 머리카락에 창백한 회색 피부, 그리고 귀족옷을 입은 소년이 툭 튀어나왔다. 한 손에는 왕관을 흔들고 있었다. [귀찮아! 이것들 다 좀비로 만들면 안 돼?] 도적 하나가 겁도 없이 그에게 달려들었으나, 소년이 대충 내지르는 주먹의 풍압에 수십 미터를 날아갔다. 지켜보던 모두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크흐흐! 만들 거면 스켈레톤이 더 좋지 않겠나!] 그들의 고개가 돌아갔다. 키가 큰 스켈레톤이 망토를 휘날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잘 자라!] 스켈레톤이 들고 있는 하얀 대검이 움직였다. * * * 몇 시간 뒤. 한적한 새벽의 숲에 마차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들린다. 앞에는 공포에 질린 마부가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마차를 몰고 있었고, 뒷좌석에서는 시몬과 카쟌이 편하게 앉아 있었다. "키, 키젠 학생분들. 진짜로 이쪽 루트로 갑니까?" "네." 시몬이 빙그레 웃었다. "잘 부탁드려요." "크, 크흡!" 공포에 질린 마부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이렇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어제만 해도 타라도스에 데려다 달라는 소년들의 억지는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날 줄 알았지만, 시몬과 카쟌은 기어이 마부의 집까지 찾아왔다. 그리고 천금 만금을 줘도 목숨이 더 소중하다고 말한 마부의 앞에, 두 소년이 들이민 건 키젠 2학년 학생증. -부탁이 안 된다면, 명령하는 수밖에 없네요. 그렇게 마부는 겁도 없는 두 키젠 소년들을 태우고, 도적 떼들이 우글거리는 동굴터널로 가는 중이었다. "두, 두 분을 못 믿어서 하는 말이 아니라! 거기엔 도적들이 몇백, 몇천 명이 있을지 모릅니다! 어지간한 영지도 쑥대밭으로 만드는 놈들이에요! 정 타라도스에 가시겠다면 차라리 산으로......." 하지만 시몬과 카쟌은 듣고 있지 않았다. 시몬은 이런 상황에도 밀린 소환학 과제를 하는 중이었고, 카쟌은 도둑길드로부터 들어온 자료를 취합하고 있었다. '하, 당장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판에 숙제라니! 이래서 귀족 학생들은!' 속이 타들어 가는 건 마부뿐이었다. 그렇게 도적 떼들이 지키는 동굴터널 앞까지 도착했다. 다행히도 입구에 경비는 보이지 않았다. "지, 진짜로 들어갑니까?" "네." 시몬이 깃펜을 끄적거리며 말했다. "제가 정보를 하나 들었는데, 오늘 도적들이 단체로 어딜 가서 자리를 비웠다고 하더라고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라고 마음속으로나마 소심하게 항의하는 마부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무슨 일이 있어도 저희가 지켜드릴 테니까요. 아, 카쟌! 여기 11번 문제에, 크립트가드가 본인 무덤을 지키려는 성질이 있어요?" "길드의 정보에 따르면, 크립트가드는 무덤도굴꾼들이 작업 도중에 방해를 받아서 그렇게 이름 붙였을 뿐이라더군. 무덤을 지킨다는 성질은 없다. 정답은 4번이겠지." "틀린 보기가 아니라 맞는 답을 찾는 거예요." 세상 평화롭다. 마부는 눈물을 머금고, 도적 떼들이 지키는 지옥의 아가리를 향해 마차를 몰았다. '한 많은 인생이 이렇게 가는구나. 어머니, 곧 따라갑니다.' 그렇게 그들은 동굴 안으로 들어갔고. '???' 단 한 명의 적도 마주치지 않고 동굴 반대편으로 빠져나왔다. "뭐, 뭐여 이게." 그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허탈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동굴 반대편, 타라도스 영지의 모습이 보인다. 이제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수고하셨어요." 시몬과 카쟌이 마차에서 내렸다. "이렇게 태워주셔서 감사해요. 여기 약속드린 보수입니다." 짤랑- 동전 주머니를 얼떨떨하게 받으며, 마부는 헛웃음을 흘렸다. 진짜 도적들이 단체로 피크닉이라도 갔나? 아니, 그럴 리가. 외부로의 이동을 차단하는 데 주력하는 타라도스에서 이런 요지를 비워둘 리가 없다. 이유는 짐작할 수 있었다. '이 두 사람이 미리 손을 써둔 거야.' 마부가 손에 쥐어진 돈을 꾸욱 쥐었다. '......키젠이라면.'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고개를 들었다. "타, 타라도스의 어디까지 가실 생각입니까." 카쟌이 말을 받았다. "여기서 동쪽으로 더 가면 나오는 할렘가. 그곳부터 가볼 생각이다." "타라도스는 길이 험하고 복잡해서, 초행에는 많이 헤매실 겁니다. 다행히 여긴 제가 어릴 때부터 살던 고향입니다." 마부가 고개를 돌려 웃었다. "요금을 좀 많이 받았습죠. 바가지 소리를 듣긴 싫으니, 양심상 거기까지는 모시겠습니다." 시몬의 얼굴이 환해졌다. "감사합니다! 그래 주시면 저희야 좋죠!" 두 사람은 다시 마차를 타고 이동하기로 했다. 그리고 동굴터널에서는. 읍읍- 수백 명의 도적 떼들이 거미줄에 묶인 채 버둥거리고 있었다. 그 앞에는 피어와 에르제베트, 그리고 프린스가 있었다. -키리리! 송장거미들이 조용히 하라는 듯 다리를 들며 위협하자, 도적 떼들은 순식간에 얌전해졌다. [크흐흐! 소년은 계속 마차로 이동할 생각이군!] 에르제베트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우리도 어서 뒤따라가죠!] [알겠다!] 피어가 등을 돌렸다. [프린스! 넌 잠시 남아서 이곳을 지켜라!] [싫어! 왜 하필 나야!] 프린스가 두 주먹을 붕붕 흔들며 항의했다. [군단 최고의 기동력을 가진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싸움이 시작되면 소년에게 말해서 그쪽 좀비에게 강림할 수 있도록 준비하지!] 그 말에 프린스가 으스댔다. [음흐흐! 군단 최고의 기동력이 필요하다면 어쩔 수 없지! 빨리 가버려!] * * * 한때는 번영을 누리며 수많은 모험가들로 북적이던 곳. '자유의 보석'이라고 불리던 대영지, 타라도스. 아이러니하게도 현재는, 외부로의 이동과 내부로의 이동 모두를 통제당한 채 왕국에서 가장 자유가 억압된 장소가 되어버렸다.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마차에서 다리를 쭉 펴고 앉아 있던 시몬은 품에서 의뢰서를 펼쳐 들었다. 제대로 알리지도 못하고, 암호로 도움을 구하던 한마디. 「살려주세요」 이건 다시 생각해도 의미심장했다. [잠깐! 잠깐! 그런 게 왜 중요해?] 목에 맨 목걸이가 마구 흔들리고 있다. 칼의 분신이 발버둥 치고 있었다. [인간은 어차피 죽잖아! 좀 일찍 죽는 거에 뭐 그리 진지해? 내 본체! 빨리 내 본체를 구해달라고!] 뿌루퉁한 표정이 된 시몬이 팅- 하고 목걸이를 튕겼다. 그제야 칼이 좀 조용해졌다. "맞사와요! 지금 그런 게 중요해요?" 이번에는 향긋한 향기와 함께, 시몬에게 들러붙는 분홍색 머리의 소녀가 있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여성과 마차 데이트를 하는 중이온데." 진지해지려고 해도 이 녀석들 때문에 좀처럼 몰입이 안 된다. 시몬이 에르제베트를 팔에서 떼어냈다. "넌 정말 나중에 봐. 에르제." 같이 마차를 타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합류하는 방법이 어이가 없었다. 대뜸 비싼 옷을 입고 있는 분홍색 머리카락의 소녀가 마차 앞에서 튀어나와 '히치하이킹'을 외치며 포즈를 취했다. 아무리 그대로 일반인도 있는데 조심성이 없어도 너무 없다. "자연스럽지 않았사와요?" "자연스럽긴!" 시몬이 이마를 짚었다. "여긴 타라도스야. 현재 대륙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고 몬스터도 많은데, 여자 혼자 황야를 돌아다니다가 마차 히치하이킹을 하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마부에게 그럴듯하게 말하느라 혼을 쏙 뺐다. 하지만 에르제베트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 되는데요? 충분히 있을 법한 상황이온데." "전혀!" * * * 같은 시각, 타라도스. 말을 탄 가네스 길드의 도적 떼들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위협적으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어휴, 아가씨! 이 위험한 곳에 홀로 어딜 가시나!" "이대론 몬스터들에게 잡아먹힐 텐데." "귀족! 귀족이지? 몸값은 얼마 정도 할까?" 흙먼지가 몰아치는 황야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짧은 치마에 스타킹을 신은 소녀가 상앗빛 머리카락을 흩날리고 있었다. "흐아암-" 모래를 막을 만한 로브도 터번도 없다. 이곳의 지형과 너무나도 안 어울리는 모습. 그녀는 손바닥을 펼치며 하품을 하고 있었다. "그,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물론 도적 떼 중에도 머리가 굴러가는 사람이 있었다. "저렇게 귀티 흐르고 반듯한 귀족 영애가, 타라도스에 뚝 떨어지듯 서 있다는 게요! 저기 보세요! 옷에 모래도 안 묻었잖습니까?" "아, 뭐 어때!" 도적대장이 걸걸하게 웃었다. "그냥 하늘이 날 위해서 여자를 뚝 떨어뜨려 준 거라고 생각해! 지금부터 이 여자는 내 거다!" 대장의 선언에 다른 도적들이 술렁였다. "보, 보스한테 안 바치고요?" "노예로 잡아서 팔아야지! 몸값이 얼만데!" "혀, 형님! 나도 조금은 즐길 수 있는 거지? 그렇지?" 소녀의 처우를 놓고 여러 의견이 부딪히는 가운데. "흐으음-" 소녀 또한 이들의 처우를 저울질하고 있었다. "시몬이 붙잡힌 날 구하러 와주는 걸로? 이럼 너무 수동적인가? 아니면, 놈들 목을 선물로 주고 쿠폰을 요구하는 걸로? 이건 또 너무 잔인해 보이고." 음- 음- 당장 수십 명의 기마병에게 둘러싸인 상황에도, 소녀는 고개를 까닥까닥하며 자신의 고민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봐." 도적 떼 중에 우두머리로 보이는 남자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다가왔다. "헛소리 그만 중얼거리고, 넌 이제부터 내 신부다. 뒷자리에 타. 괜히 몸에 상처라도 나면 가치가 떨어지니까 얌전히 구는 게 좋을 거야." "어머." 소녀가 두 손을 맞잡으며 웃었다. "죄송하지만 제 배우자 자리는 조금 비싼지라~" 스릉! 우두머리가 검을 꺼내 그녀 쪽으로 겨누었다. "비싸다? 아무리 비싸다 해도 네 목숨값이면 충분하지 않겠어?" "후훗." 바람이 불어왔다. 빛을 머금고 있는 하얀 깃털들이 그녀와 도적 떼 주위로 휘날렸다. 도적들의 눈동자가 하나둘씩 맛이 가기 시작했다. "세상에는 참- 자살하는 방법도 가지가지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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