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1361화 다르블렝 광장에서는 두 성녀의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고 있었다. 어느 쪽이 불리한지는 명백했다. 산발이 된 머리카락에, 넝마처럼 찢어진 옷, 몸 곳곳이 시뻘겋게 물든 이렌의 모습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성녀를 상징하는 성의도 거의 다 닳아 없어지고, 이제는 오른팔 소매만 겨우 남아 있을 뿐이었다. 허억! 허억! 거친 숨소리가 텅 빈 광장에 울려 퍼졌다. 비틀거리는 몸을 간신히 지탱하며 두 팔을 들어 올리는 그녀의 모습은 처절하기 그지없었다. 반면, 공중에 떠 있는 기계 성녀는 처음의 완전무결한 모습 그대로였고, 실금 하나 없었다. 그 위에 올라타 있는 라이카 로버트 또한 정돈된 외모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이제는 제발 좀 쓰러져라!” 오히려 이쪽이 더 초조한 모습이었다. 라이카 로버트가 시뻘게진 얼굴로 외쳤다. “그냥 죽어서 편해지라고! 그러면 다 끝이잖아!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지?” 라이카 로버트의 조급함이 담긴 외침과 함께, 저 멀리서 기계 성녀가 조종하는 집채만 한 건물이 연달아 날아왔다. 이에 이렌이 힘겹게 두 팔을 휘둘렀다. 권능이 담긴 성풍이 건물에 부딪히자, 네옴 기반의 화학물질로 지었던 건물이 녹아내리며 허물어졌다. 광장은 이미 모든 것이 파괴된 상태였다. 대부분의 구조물들은 전부 기계 성녀가 이용했고, 반경 수십 킬로미터까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황량한 벌판으로 변해 있었다. “나는 이미…… 한 차례 내 의무에 눈을 돌렸었다.” 앞머리 사이로 흘러내리는 핏물에 한쪽 눈을 감은 이렌이 묵묵히 말했다. “다 포기하고 도망치면 편해질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사람들이 고통받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무기력하게 지켜봐야 했을 때가 가장 괴로웠다.” 그녀가 이빨을 한껏 드러내며 히죽 웃었다. “그때에 비하면 발버둥이라도 치는 지금이 낫다! 내가 드디어 이 도시에 도움이 되고 있구나! 절대로 죽지 않고, 죽어서도 너희들의 발목을 잡겠다!” “도움이 된다고? 너는 도시의 발전과 진화를 가로막는 장애물일 뿐이란 말이다!” 라이카 로버트가 시뻘게진 얼굴로 한 차례 일갈하고는, 이내 화를 가라앉히듯 후우우 긴 숨을 내뱉었다. “……그래, 좋아. 누가 이기는지 끝까지 해봐. 어떻게든 네 시신을 시청 꼭대기에 걸어놔야 속이 풀리겠구나!” 스으- 그때 하늘에 부유하고 있던 기계 성녀가 이렌을 외면하듯 등을 돌렸다. 당황한 라이카 로버트가 말했다. “서, 성녀님!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이제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이렌을 끝장낼 수 있을 겁니다!” [중대 바이러스 개선에 지나친 시간 소요 예측.] 기계 성녀의 아래로 네옴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원류의 첨탑 결계 손상 확인. 지금 바로 원류의 첨탑으로 이동해야 합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성녀님! 저 툭 치면 쓰러질 것 같은 너덜너덜한 것을 그냥 두고 떠나잔 말씀이십니까!” 라이카 로버트가 이렌을 손끝으로 가리키며 외쳤다. “저 여자만 제거하면 놈들이 무슨 짓을 하든 우리의 승리……!” [1급 관리자 라이카 로버트.] 기계 성녀의 무미건조한 눈동자가 라이카를 응시했다. [도시의 주요 판단에 감정적 개입 감지. 당신도 도시의 오류입니까?] 라이카 로버트는 일순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오싹한 감각을 느꼈다. 당황한 그가 입을 오물거리다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무, 무슨 말씀을……. 성녀님의 뜻대로 하시지요.” [원류의 첨탑으로 이동을 시작합니다.] 후우우우우웅! 기계 성녀가 하늘을 날아올랐다. 라이카 로버트는 속이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설마 방금…… 내 통제를 벗어나려고 한 건 아니겠지?’ 그는 처음으로, 자신이 만든 창조물이 공포스럽게 느껴졌다. “크윽!” 기계 성녀가 후퇴하는 모습을 본 이렌이 두 팔을 높게 들었다. “나는 여기 있다! 도망치지 마라!” 휘오오오오오오! 이렌의 권능인 성풍이 회오리의 형태로 날아갔지만, 이번엔 역으로 기계 성녀가 도시의 구조물을 끌어 올려 성풍에 던졌다. 네옴 구조물이 성풍의 에너지를 빠르게 소진시키며 허물어졌고, 그사이 기계 성녀는 더 높은 상공으로 날아오른 뒤였다. “도망치지 말…….” 털썩. 이렌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미 몸도 마음도 아득히 한계에 다다랐다. 상대가 공격해 주지 않으니, 억지로 각성하던 정신이 더 이상 일하지 않는다. 기계 성녀가 구름 너머로 사라지는 모습이 점점 흐릿해져 갔다. 그녀의 고개가 직선으로 떨구어지고, 이내 몸 전체가 기울어지며 바닥에 박힌 날카로운 금속 파편 쪽으로 쓰러졌다. 덥석! “성녀님!” 그 순간 한 여자가 뛰어들어 넘어지려는 이렌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무너져 내리는 이렌의 몸을 단단히 부축해서 바닥에 가지런히 눕혔다. <솔리스 성가 - 아다지오> <힐링> 뒤이어 식탁보를 뒤집어쓴 성령들이 성령학 계열의 치유마법을 사용했다. 이렌의 몸에서 흐르던 핏물이 멈췄고, 그녀의 숨소리가 조금씩 안정되었다. “당신은……?” 이렌이 간신히 눈을 떠 그녀를 바라보았다. “소관은 하미엘입니다! 시온, 레나 탐정의 동료죠!” 그 말에 이렌이 안심한 듯 눈을 감았다. “두 사람의 동료로구나. 고맙다. 그리고 기계 성녀를 놓쳐서 미안하다.” “무슨 말씀을! 지금까지 버틴 것만으로도 대단하십니다! 그리고…….” 하미엘이 조금 굳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치료를 받으시면서 말을 들어주세요. 꼭 들려 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녀가 이곳에 온 건 시몬의 부탁 때문이었다. -하미엘, 이렌 성녀님께 가서 네가 알아낸 정보들을 말해줘. -네? 이제 와서 제 정보가 무슨 도움이……. -성녀님께 큰 힘이 될 거야. 이렌은 여전히 자신이 무력하며, 이번 일이 자신의 무능으로 일어났다는 죄책감에 갇혀 있다. 일단 그것부터 바로잡아야 한다고 시몬은 말했다. 하미엘도 그 말에 동의했다. “이번 일들은 성녀님과는 관계없이, 원래 일어났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 * * 같은 시각, 원류의 첨탑. 뽀각! 결계 위에 올려둔 신수의 알이 금이 가며 깨지기 시작했다. 시몬이 깜짝 놀라며 알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설마……!” 알 내부에서 눈부신 빛무리가 터져 나오며 점점 더 많은 실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마침내. 빠각! 알의 옆부분을 깨뜨리며, 희고 통통하며 둥그스름한 팔 하나가 튀어나왔다. ‘작다!’ 그동안 다르블렝에 와서 쭉 안고 있던 생물이 탄생하는 순간에, 시몬은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뽀각 소리와 함께 두 번째 팔이 튀어나오고, 이어서 알의 밑부분이 깨지며 짧은 다리 두 개가 나타났다. 생물이 아닌 것처럼 끝이 둥글고 말랑했다. 어느 쪽이 다리고 어느 쪽이 팔인지 쉽게 구분이 가지 않았다. 콩콩콩. 신수의 알은 다리가 생긴 것이 신기한 듯, 결계 위를 이리저리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자, 잠깐만! 떨어지겠어!” 식겁한 시몬이 가까스로 알을 붙잡아 다시 제자리에 놓았다. 여기는 여전히 직사각형의 결계 꼭대기고, 아래로 떨어지면 바로 낙하였다. 이내 신수의 알은 바닥에 굴러다니며 짧고 앙증맞은 팔다리를 흔들며 몸부림쳤다. ‘갑갑해하는 것 같은데……?’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시몬은 손을 대지 않았다. 신수가 처음으로 알에서 태어나는 건 성스러운 의식이고, 결코 누군가 도와줘서는 안 된다. 자신이 극복해야 하는 일이었다. 시몬이 숨을 참고 기다렸고, 마침내. 뽀각-! 알의 윗부분이 깨지며 알껍질을 마치 모자처럼 쓴 채 둥글고 말랑한 머리가 튀어나왔다. 작은 두 귀가 쫑긋 펴지며 까만 눈동자가 깜빡거렸다. 뭐가 뭔지 모르는 듯 주위를 둘러보던 그것이, 이내 시몬을 처음으로 발견했다. -피이잇! 신수가 시몬을 보고 환하게 웃는 순간, 시몬은 가슴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태어났구나!” -피루루! 짧은 두 팔을 흔들며 안아달라고 보채기에 시몬이 신수를 조심스럽게 안아 올렸다. 여전히 알껍질 일부를 몸에 두르고 있었는데, 연약한 피부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것 같았다. 알 밖으로 빠져나온 몸통이 무척이나 말랑해서 깨물어 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확실해. 최소 낙원의 여섯 신수급이야.’ 태어나자마자 이 정도로 선명하고 순수한 신성을 일으키는 신수는 극히 드물다. 여기서 잠시 어미가 누군지 생각해 보자면, 낙원의 여섯 신수 중 아록에 있었던 건 세 마리였다. 날개 달린 새의 형상을 하고 있던 아우레본, 땅에 얼굴만 내놓고 가시를 일으키던 이름 모를 사자 신수, 그리고 기린과 비슷한 외형에 시몬을 도와줬던 지라타스까지. 이 신수는 그 셋 중에서 ‘새’의 형상을 하고 있는 아우레본에 가까웠다. ‘……시, 신성을 너무 많이 먹인 건가?’ 그런데 새보다는 통통한 육상동물이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 신성을 너무 많이 먹어서 알로 감싸진 배가 불룩했다. 마치 살찐 아기새 같은 느낌. 잠시 신수의 머리를 쓰다듬던 시몬이 퍼뜩 지금 상황을 깨닫고는 신수를 양손으로 들어 올린 채 말했다. “혹시 이 결계를 어떻게 해줄 수 있을까?” -피이? 신수는 시몬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듯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이내 신수가 결계를 보더니 ‘피루! 피루루!’ 하고 짧은 두 팔을 바둥거렸다. “배고픈 거야?” -피루우! 시몬이 신수를 결계에 내려놓자, 신수가 곧바로 결계에 찰싹 달라붙었다. 옴뇸뇸뇸뇸! 그러고는 작은 손으로 결계를 꼬옥 붙잡고 엄청난 속도로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결계 전체가 출렁이며 신수의 입속으로 들어갔다. 뇸뇸뇸뇸뇸! 마치 물리적인 결계를 붙잡고 물처럼 들이켜는 듯한 모습. 결계의 강도가 약해지면서 발밑이 출렁이며 불안정해졌다. 시몬이 얼른 자신의 몸에 부유 효과가 있는 축복을 걸고 신수를 안아주었다. 신수는 아무것도 모르고 결계를 먹어치우기 바빴다. ‘좋아! 잘하고 있어!’ 이대로 신수가 결계를 먹어치운다면 무사히 원류의 첨탑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저기 신수사제가 결계에 이상한 짓을 하고 있다!” 그 모습을 목격한 적대 크리쳐들과 경관들이 네옴 블래스터를 겨누었다. “공격 개시!” 투콱! 투콰악! 녹황색의 네옴 빔과 탄환이 연달아 쏟아지기 시작했다. 시몬이 급히 고개를 낮추며 신수가 맞지 않도록 이리저리 움직여야 했다. -피잇! 자꾸 먹는 걸 방해받아서 화가 난 신수가 결계를 입에 문 채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물리력이 있는 결계의 일부가 종이처럼 찢어져 휘어지더니, 네옴 블래스터를 쏘던 사람들과 크리쳐들을 그대로 결계에 부딪히게 한 채 벽면에 틀어박아 버린 것이다. “이, 이게 무슨!” “움직일 수 없습니다!” -피루웃! 방해꾼들을 처리한 신수가 다시 옴뇸뇸 결계를 먹는 데 집중했다. 원류의 첨탑 전체를 이루던 결계의 강도가 눈에 띄게 약해지며 기둥이 빠진 천막처럼 허물어지더니 기어코 신수의 입안으로 모두 들어갔다. ‘이럴 수가.’ 원류의 첨탑으로 내려온 시몬이 벙찐 표정을 지었다. 결국 저 많은 결계를 홀로 먹어치운 신수가 만족스러운 듯 더욱 빵빵해진 배를 통통 두들겼다. 시몬이 난감한 미소를 흘렸다. “……알에 있던 때부터 식욕이 심상치 않더니, 대단하네.” -피루피루! 신수가 두 짧은 팔을 흔들어댔다. 그때 시몬의 품속에서 통신 수정구가 웅웅 소리를 내며 진동했다. 시몬이 그것을 작동시키자마자 빈트로드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시온 탐정! 기계 성녀가 오고 있네! 콰콰콰콰콰콰쾅! 거대한 폭발음이 연달아 울려 퍼졌다. 시몬이 고개를 돌리자 저 멀리서 기계 성녀가 살벌한 속도로 날아오고 있었다. 지상에 있던 이렌 측 시민들이나 크리쳐들이 네옴 탄환이나 블래스터를 날렸지만, 모든 공격이 그녀에게 닿기 전에 굴절되어 다른 방향으로 날아갔다. “기계 성녀가 여기 왔다는 건……! 이렌 성녀님은요?” -하미엘이라는 자매분에게서 연락이 왔는데, 다행히 무사한 듯싶네! “그건 다행이네요.” 시몬이 신수를 끌어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부터 네 이름은 피루야. 싸울 수 있지?” -피루피루! 피루가 당당히 짧은 두 팔을 흔들었다. 시몬이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아록에서 온 진짜 낙원 신수의 힘을 다르블렝에서 보여주자!” -피루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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