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405화 리처드가 웃는 얼굴로 손을 척 세워 들었다. "오랜만이다 조카야!" 조카. 그 말을 듣는 순간 시몬의 머리가 기민하게 돌아갔다. 아버지는 로크섬에 당당히 들어올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네프티스 님이 손을 써준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뭐가 됐든 정체를 숨겨야 한다. 그렇다면 굳이 수석 학생의 아버지로서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것보다는, 적당히 거리감이 있는 친척이라는 설정이 더 편하리라. 시몬도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삼촌!" 두 사람이 만나 가볍게 포옹했다. 그때 얼굴에 홍조를 띤 메이린이 한 발짝 다가왔다. "시, 시몬! 이분은......." "아. 소개할게." 시몬이 팔을 펼쳤다. "우리 외삼촌이야. 이름은......." "헨리라고 합니다." 누가 봐도 즉석으로 지은 듯한 이름으로 소개한 리처드가, 허리를 꺾어 메이린의 손등에 키스했다. 그녀의 뺨이 사과처럼 발그레해졌다. "음." 그때 리처드는 메이린의 손등을 감싸고 있는 손수건을 발견했다. 그의 손이 천천히 손수건 쪽으로 향했다. "장미에 찔린 상처는 좀 괜찮은......." 덥석! "삼촌!"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든 시몬이 웃는 얼굴로 리처드의 어깨를 밀어냈다. "이쪽은 같은 조의 메이린 빌렌느라고 해요." "아, 그렇구나. 우연인걸." 리처드가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시몬의 귓가에 속삭였다. "멋지구나 시몬. 네 여자라고 챙기는 게냐." "제발, 아버지. 메이린은 누구의 것도 아니에요." 시몬이 그렇게 말하며 리처드의 어깨에 살짝 힘을 주었다. 하지만 리처드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가시지 않았다. '......아버지가 벌써 메이린에게 접근했을 줄이야.' 물론 리처드는 존경하는 아버지고, 훌륭한 영주고, 위대한 네크로맨서지만, 피어에게 들은바 이성 문제에서는 신뢰가 가지 않는다. 제발 내 학교에서는 자제했으면 좋겠다. 그런 시선으로 리처드를 한번 쏘아본 다음 고개를 돌렸다. 낯을 가리는 카미바레즈가 시몬과 리처드를 수줍게 번갈아 보고 있었다. "삼촌, 이쪽도 저랑 같은 조의 조원인 카미바레즈 우르슬라라고 해요." "아, 안녕하세요!" 어쩐지 긴장한 듯한 카미바레즈는 허리를 90도로 바짝 굽혀 인사했다. 그 뒤로 보이는 앙증맞은 박쥐 날개가 파닥파닥 흔들렸다. "그래, 반갑다. 우리 조카가 신세를 많이 졌겠구나." 이번엔 리처드가 카미바레즈의 손등을 붙잡으려 하자, 시몬이 살짝 손바닥으로 밀어낸 다음, 고개를 강제로 돌리게 했다. "그리고 이쪽은 같은 조의 딕 헤이워드라고 해요."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딕이 눈을 빛내며 소리쳤다. "시몬의 절친! 베프! 영혼의 파트너 딕이라고 함다! 하하핫!" "오, 그래. 시몬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다." 신이 난 딕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며 분위기를 유쾌하게 만들었다. 리처드도 딕이 꽤 마음에 들었는지 바로바로 맞장구를 쳐주는 모습이다. '휴우.' 시몬은 마음속으로 딕에게 감사 인사를 보내며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그리고 한편, 뒤로 물러난 두 소녀는 콩닥콩닥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속닥대고 있었다. "사, 삼촌인데 시몬이랑 엄청 닮았네요." 카미바레즈가 말했다. "그러게. 나도 당연히 아빠인 줄 알았어. 외가 쪽 유전자가 센 건가?" 그렇게 대답한 메이린이 시몬의 얼굴을 보았다. 저 녀석도 나중에 커서 나이를 먹으면 저렇게 되는 걸까? 저런 세월의 흐름이라면 대찬성이었다. 이제 시몬은 리처드에게 친구들의 가족들을 소개해 주고 있었다. 메이린의 아버지 다니엘라와 악수를 하던 리처드가, 뒤에서 훔쳐보던 여학생 무리에 눈을 찡긋하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쪽에서 꺄아악 요란한 비명이 튀어나왔다. 카미바레즈가 쓰게 웃었다. "......어쩐지 능글맞은 시몬 같은 느낌이네요." "그, 그러게. 저건 좀 깬다." 진중하고 차분한 시몬과는 달리, 가볍고 바람기 있어 보이는 모습은 좀 그렇긴 했다. 아무튼 마지막으로 리처드는 카미바레즈의 아버지인 디트리히와도 악수했다.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뱀파이어 로드." "아들 하난 잘 키웠더군, 인간." 디트리히가 목소리를 줄이며 말했다. 리처드가 웃는 얼굴로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뱀파이어 로드 앞에서 피를 속일 생각이냐." "비밀로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뻔뻔한 놈." 뱀파이어 로드라는 직위에, 머리 하나는 더 큰 디트리히 앞에서도 리처드는 일말의 주눅 드는 기세가 없었다. 허리를 곧게 펴고 품격을 유지한 채 미소를 잃지 않는다. 당당하게 악수하고 인사말을 주고받는다. 그를 대등한 관계로 여기는 모습이 행동에서 드러났다. "그래. 네 아들도 그렇게 뻔뻔했었지. 놈을 키운 아비도 만나보고 싶었는데. 과연-" 강자를 원하는 디트리히의 눈이 번쩍였다. "끝나고 아빠들끼리 한잔해야지? 안 그런가? 다니엘라." "그럼요." 다니엘라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리처드는 정중히 거절의 의사를 박혔다. "죄송합니다. 일이 바빠서, 식이 끝나는 대로 바로 영지에 돌아가 봐야 합니다." "쯧, 그거 아쉽군." 한편. 예상치 못한 리처드의 등장으로 시몬은 몇 년 치 수명이 빠져나간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하아아.' 조금 지쳐서 기둥에 등을 기대고 있는데, 메이린과 카미바레즈가 후다닥 달려왔다. "시몬! 시몬!" 카미바레즈가 주먹을 꼬옥 쥔 채 제자리에서 콩콩 뛰었다. "삼촌 분이 정말 멋지고 젠틀하신 것 같아요!" "그래? 고마워." "근데 진짜 삼촌이야?" 메이린이 수상쩍다는 듯 물었다. 딕도 불쑥 끼어들었다. "사실은 아빠 아니고?" 시몬은 심장이 철렁했지만, 애써 평정을 유지하며 말했다. "평소에도 그런 이야기 많이 들어." "삼촌이 저 정도라면......." 메이린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걸렸다. "네 아빠는 더더욱 궁금해지는데?" "저도 그래요!" 카미바레즈가 고개를 끄덕였고 딕이 기다렸다는 듯 외쳤다. "그럼 방학 때 시몬 집에 놀러 가자! 놀러 갈 사람!" "저요!" 메이린과 카미바레즈가 번쩍 손을 들었다. 시몬이 땀을 줄줄 흘리며 손을 휘저었다. "노, 놀러 와도 내가 없을 거야! 방학 때 바쁜 일정이......!" "시몬이 없어도 시몬 부모님께 인사나 드리고 오지 뭐!" "찬성!" 벌써 뭐 하고 놀지 논의하는 세 사람을 보며, 시몬의 뒤통수는 땀으로 흥건해지고 있었다. 진짜로 집에 쳐들어올 기세였다. "미안하지만." 그때 리처드가 성큼 네 사람 쪽으로 다가왔다. "잠시 조카를 데려가도 될까? 오랜만에 둘이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샤샥! 메이린과 카미바레즈가 엄청난 속도로 뒤돌더니, 두 손을 공손히 모은 채 예쁘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그럼요! 다녀오세요." "고맙구나." 리처드가 손가락을 까닥하자, 시몬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따라나섰다. * * * 두 부자는 대강당을 빠져나와, 인적없는 건물 뒤편을 걸었다. "좋은 친구들을 사귀었구나. 시몬." "네. 정말 좋은 애들이에요." 시몬이 고개를 들어 리처드를 바라보았다. "그보다 깜짝 놀랐어요. 로크섬에는 어떻게 들어오신 거예요?" "네프티스 님의 제안을 받았단다." 리처드가 차분하게 답했다. "이번 혈천교 사태 때 네가 큰 역할을 해줬으니, 괜찮으면 진급을 축하하러 오라고 하시더구나. 문제가 생긴다면 다 책임지시겠다면서." "......아." 리처드가 시몬의 머리를 가볍게 쓸었다. "장하다. 아들 잘 둔 덕에, 평생 밟아보지도 못할 로크섬에도 와보는구나." 시몬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오랜만에 모교에 와보니 어때요?" "......그립지." 리처드가 아련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모든 게 그립구나. 그 시절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해. 그래. 지금 우리가 있는 이 장소도 기억나는구나." "네? 여기도요?" "건물 뒤편은 인적이 드물고 으슥하지. 여자애들을 데리고 와서......." "아버지!!" 하하하하하! 리처드가 큰 소리로 웃어댔다. 반면 시몬은 냉랭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네 엄마에겐 비밀이다." "......아버지 하는 거 봐서요. 엄마는요?" "집에 있지. 안나는 잠시 소녀 시절로 돌아가 있단다." 시몬이 눈을 깜빡였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조금 이따 집에 와보면 알게 될 게다." 리처드가 그렇게 대답하고는 시선을 돌렸다. 그는 교복에 붙어 있는 피어의 분신을 보고 있었다. "......네게 말을 걸 자격조차 없다는 건 잘 알고 있다." 리처드가 회한에 젖은 눈으로 하늘을 보았다. "미안하다. 그리고 우리 아들을 잘 보살펴 줘서 고맙다." [크흐흐흐!] 어느새 피어의 웃음소리가 시몬에게 들렸다. 사실 피어도 쭉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리처드에게는 들리지 않을 사념의 목소리로 말했다. [많이 변하긴 했군. 리처드.] 시몬이 빙그레 웃었다. "피어가 말하길, 아버지가 많이 변하긴 했대요." [소년!!] 피어가 당황했고, 리처드가 묘한 미소를 흘렸다. "그리고 네게도 미안하다, 시몬." "......네?" "군단의 죄를 물려받게 해서 말이다. 네게는 태어나기도 전의 일일 텐데." "......." 시몬은 벽에 등을 기댄 채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적이 흐른 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버지의 군단을 거둔 건 제 의지였어요." 리처드는 시몬을 키젠에 입학만 시켰을 뿐, 군단에 대해선 입 한번 뻥긋하지 않았다. 애초부터 리처드는 시몬을 군단장으로 만든 생각이 조금도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시몬은 네프티스의 인도를 받아 자신의 의지로 기꺼이 군단장 자리를 물려받았고, 지금은 흩어진 에이션트 언데드들을 모으고 있다. "그리고 아버지." 물론 리처드의 행위는 다른 사람들에겐 배신이고, 악행일지 모르겠지만. "......엄마를 구하기 위해 한 일이었잖아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리처드를 비난한다고 해도, 시몬만큼은 그를 비난할 수 없었다. 바로 그 사건 덕분에, '내'가 태어났으니까. 가끔은 리처드가 지은 죄가 무겁게 느껴졌지만,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버지의 죄와 힘. 두 가지 모두 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구나." 리처드가 눈을 감으며 말했다. 그렇게 몇 마디 나누던 부자는 다시 대강당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어느 쪽이냐?" 리처드가 문득 장난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뭐가요?" "메이린과 카미바레즈. 어느 쪽이 네 여자냐고 물었다." 시몬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아, 아니!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하하하!" 리처드가 큰 소리로 웃었다. "둘 다 아름다운 레이디들이더구나." "......메이린이랑 카미바레즈한테 손대면 정말 가만 안 있을 거예요." "설마." 리처드가 시몬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그 숙맥 같은 성격은 네 엄마의 어린 시절을 빼닮아서 안심했다. 그런 부분은 날 닮지 않아서 진심으로 다행이야." "엄마요?" "그래." 리처드가 잠시 팔불출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 시절의 안나는 세상에 때 묻지 않은 깨끗한 순백. 그 자체였지." "지금은 아버지의 머리끝에 올라가 있잖아요." "......크흠." 드디어 아버지에게 한 방 먹였다. 레스힐의 영주가 부인에게 꽉 잡혀 산다는 사실은 영지민들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불러낸 이유는 이거다." 리처드가 등 뒤에서 뭔가를 꺼냈다. "2학년 수석 진급을 축하한다. 시몬." 그것은 받게 될 줄 기대도 하지 않았던, 풍성한 꽃다발이었다. 시몬이 감격한 얼굴로 꽃다발을 받아들고 활짝 웃었다. "고마워요. 아버지!" "그리고." 리처드가 앞서 걸어가며 손을 흔들었다. "학생의 본분은 공부고, 연애는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야. 앞으로도 수석 자리를 유지하는 데 전념하거라." 시몬이 픽 웃었다. '아버지가 하실 말씀이신가요.' * * * 시몬은 다시 대강당으로 돌아왔다. 이대로 헤어지기 아쉬워서 조원들, 그리고 헤이워드 형제들과 함께 열심히 수다를 떨었다. 이 일곱 명은 벌써 꽤 친해진 상태였다. "메이린 누나! 나도 키젠에 들어가고 싶어요!" "나도!" 넷째 빌과 다섯째 알이 말했다. 거의 평생을 상단 일만 하고 지낸 두 사람에게, 키젠 방문은 가치관의 지각변동이 일어날 수 있는 대사건이었다. "원래 이런 건 괜히 미련 못 가지게 딱 말해줘야겠지." 메이린이 귀밑머리를 쓸어 넘겼다. "너희들은 무리야." "왜요!" "너희 형제 중에 제일 재능 있다는 딕이 400명 중에 400등이잖아." "크흡!" 반박 불가인 일침에 딕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됐고, 모두가 왁자지껄하게 웃었다. "그, 근데 말야!" 딕이 잽싸게 화제를 바꾸었다. "내년 신입생들은 과연 누가 올까? 혹시 아는 사람 있어?" "사샤요!" 카미바레즈가 번쩍 손을 들었다. "중립지대에서 만난 사샤 기억하죠? 네년에 특례 입학생으로 입학한대요. 기대돼요!" 카미바레즈는 요즘도 펜타모니엄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사샤와 편지를 주고받고 있었다. 딕이 의아한 표정으로 턱을 쓱쓱 쓸었다. "근데 사샤가 특례를 받을 정도야? 코어를 막 개방한 뒤로 형태변화까지 몇 년 걸리지 않나?" "사샤는 엄청 특이한 케이스래요! 벌써 오리지널 저주까지 만들어 쓴데요." "와, 진짜? 특례 몇 번 달고 들어올지 궁금하네." 이번엔 시몬이 손을 들었다. "그러고 보니 내년엔 몰리 공주님도 입학하신다고 해." 그 말을 들은 모두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몰리 공주님이라면......!" "드레스덴 왕국의 그 막내 공주님?" 시몬은 몰리로부터 받은 편지내용을 공개했다. 왕비파의 격렬한 반대가 있었지만, 결국 최근에 국왕의 허락을 받아 코어를 개방했고, 형태변화도 입학일까지는 맞출 수 있을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왕실의 이름난 네크로맨서들이 모두 달라붙어 선행학습을 시킨다는 것 같았다. "이것도 궁금하지 않아?" 메이린이 운을 뗐다. "현 2학년들이 이제 곧 3학년에 오르잖아. 과연 누가 차기 학생회장이 될까?" "그러네." 시몬이 팔짱을 꼈다. "벤야 선배님이 됐으면 좋겠다." "누가 됐든 이다음 학생회장은 힘들 거다." 딕이 낄낄거리며 말했다. "역대급 학생회장이었던 전대 판타서스 선배님과 엄청 비교당할 테니까." "그, 그러네요." 판타서스는 현역 까마귀, 그 이상의 실력자라고 소문이 자자했다. 다소 부족한 행정능력은 부회장이 커버. 그들은 완벽하게 임기를 채우고 나갔다. "이야기하는 중에 미안한데, 잠깐만." 누군가 불쑥 대화에 끼어들었다. 눈에 익은 얼굴의 같은 A반 학생들이었다. "시몬, 헥토르가 로크섬 남쪽 해변 앞에서 기다리고 있겠대." 그 말에 시몬이 빙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기다리고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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