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406화 '어젯밤에 너무 많이 먹었나.' 화장실에 다녀온 리처드가 배를 슥슥 쓸며 걸어가고 있었다. 어젯밤은 오랜만에 안나가 주방에서 폭주했었다. 더부룩한 속을 진정시키며 시몬이 기다리고 있을 대강당으로 향하는 그때. 쐐액! 허공에서 칠흑이 번뜩이며 날아왔다. 리처드가 급히 고개를 틀어 피했지만, 그 칠흑은 리처드가 아닌, 그의 앞에 펼쳐진 환상계 마법을 찢고 사라졌다. "계속 의아하다고 생각했소." 덥석. 뒤에서 나타난 누군가가 리처드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어디서 본 적 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오." 리처드는 눈동자만 굴려서 뒤를 보았다. 커다란 덩치와 극도로 단련된 몸, 상반신을 뒤덮은 화상. 그리고 불길함이 느껴지는 칠흑까지. 딱 봐도 보통 네크로맨서는 아니다. "......다짜고짜 이게 무슨 짓입니까." "그건 이쪽이 묻고 싶은 말이오." 남자의 눈빛이 번뜩였다. "키젠의 진급식 행사에, 굳이 '인식 장애 마법'을 쓰고 들어온 이유가 궁금하군." 인식 장애 마법은 얼굴을 바꾼다기보다는,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저주였다. 아는 사람에게 자신을 들키고 싶지 않을 때 사용하는 흑마법이기도 했다. "우리 어디선가." 남자의 목에 점점 핏대가 붉어졌다. "본 적 있지 않소?" 착! 남자가 리처드의 수염을 떼어내 눈앞으로 가져왔다. "이것도 가짜 수염이군." 리처드가 은밀하게 주먹에 칠흑을 끌어모았다. 여차하면 움직일 생각이었다. "적당히 하시지요." "적당히? 정체를 숨기고 로크섬에 들어오는 건 적당한 행위인가? 최근 키젠의 외부 보안 이슈를 생각하면 내 행동이 유별나다고는 생각하지 않소. 자, 이제 그 안경을 벗어볼 차례요." 남자의 손이 쭉 뻗어왔다. 리처드가 바로 그 팔을 쳐내고 상대의 옆구리에 주먹을 꽂으려는 순간. 와아아아아아! 대강당 쪽에서 왁자지껄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학생들이 나타나자 두 남자의 동작이 동시에 멈칫했다. "결투! 결투야!" "헥토르 무어랑 시몬 폴렌티아가 한판 붙는대!" "진짜? 어디서 하는데?" 리처드의 안경을 벗기려던 남자의 손이 내려갔다. 그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하며 핏줄이 툭툭 붉어졌다. "헥토르으으으으으!!" 벽력과도 같은 외침. 리처드는 인상을 살짝 찡그린 채 청력 마법으로 귀를 보호했다. 주위의 기둥이나 벽에 쩍! 쩍! 금이 가고 있었다. "가문과 아비의 얼굴에 얼마나 더 먹칠을 할 생각이냐!!" 쿵! 쿵! 쿵! 남자가 무서운 속도로 학생들 쪽으로 달려갔다. 리처드는 가볍게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바닥에 떨어진 가짜 수염을 다시 붙였다. '무어 가문이었나.' 절대로 배신의 군단장이란 사실을 들켜서는 안 되는, 가장 위험한 가문 중 하나. 그리고 무엇보다 시몬이란 이름도 들렸다. '또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 게냐. 시몬.' * * * 같은 시각, 시몬은 조원들과 함께 약속장소에 도착했다. 널찍한 해안가. 시원한 바닷바람이 불어오고, 부서지는 파도는 고즈넉한 분위기를 풍겼다. 바로 이 바다를 배경으로, 커다란 덩치의 한 남자가 뒤돌아본 채 서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다. 시몬 폴렌티아." 헥토르 무어. 그가 등을 돌려 시몬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 주위에는 헥토르의 파벌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허억! 허억! 결계는 깔끔하게 쳐놨어. 헥토르." "여기서 뭔 소리가 나도 대강당까진 안 들릴 거야." "수고했다." 시몬도 리처드에게 받은 꽃다발을 바위에 내려놓고는 팔을 빙빙 휘두르며 뻐근한 관절을 풀었다. "시몬, 정말로 싸울 거예요?" 카미바레즈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왔다. "응. 약속은 약속이니까." "내가 못 살아 진짜! 퇴원하자마자 무슨 싸움이야!" 메이린이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그 뒤에는 딕의 형제들. 단, 빌, 알이 흥분한 표정으로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그 유명한 키젠의 결투평가를 보게 되는구나!" "게다가 1위와 3위의 싸움이야!" "내가 로크섬 무조건 가자고 했지?" 키젠 학생들 간의 결투에 외부인들이 따라와 버렸다. 심지어 입이 너무나도 가벼울 것 같은 딕의 형제들. 메이린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내가 말려봐야, 들을 시몬이나 헥토르도 아니고.' 결국 그녀가 헤이워드 형제들에게 다가갔다. "딕 형제분들. 다들 아시죠? 첫째도 보안. 둘째도 보안이에요. 어른들 앞에선 입 한번 뻥긋하지 말아주세요." 그러곤 '부탁드리겠습니다.' 하고 살짝 고개까지 숙여 보였다. 프라이드 높은 귀족이 평민에게 고개를 숙이는 경우는 잘 없다.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헤이워드 형제들은 동시에 입에 지퍼를 채우는 시늉을 했다. 세 사람 모두 동작과 제스처까지 완벽하게 동일했다. "메이린, 입조심시켜 봐야 다 소용없어." 팔짱을 끼고 있던 딕이 낄낄거렸다. 메이린이 그를 째릿 노려보았다. "니가 왜 태평한 소릴 하고 있니? 지금 외부행사 중이야. 징계 처먹고 2학년 진급 취소돼야 정신 차릴래?"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딕이 손가락을 뻗었다. 이미 두 명의 어른이 들어와 있었다. "크하하하하하! 결투, 결투! 이런 구경거리는 절대 놓칠 수 없지!!" 카미바레즈의 아버지이자 뱀파이어 로드, 디트리히가 말했다. "저 아이들의 젊음과 낭만이 부럽군요. 제 학창시절은 저들에 비하면 밋밋한 무채색이었습니다." 그 옆에 있는 건 메이린의 아버지이자 상아탑 온건파의 거두, 다니엘라였다. "아빠!" "아빠!!" 카미바레즈와 메이린이 기겁하며 소리쳤다. 디트리히는 엄지를 척 세워 보이며 송곳니를 드러냈고, 다니엘라는 손을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벌써 죽이 잘 맞는 아빠들이었다. "그러게 소용없다고 했잖아." 딕이 팔을 보내 뒷머리를 받쳤다. "우리 딴엔 어른들 몰래 온다고 했지만, 저 괴물들의 눈을 피할 순 없다고." "......하아아." 메이린이 이마를 짚었다. "그래도 뭐 재밌는 이벤트로 봐주시는 것 같으니까 지켜보......." "헥토르으으으으!!!" 쩌렁쩌렁한 외침에 함께, 한 남자가 결계에 구멍을 내며 들어왔다. 열심히 결계를 펼치던 파벌 학생이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지금 뭐 하는 게냐! 이 아비 얼굴에 얼마나 더 먹칠을 해야 직성이 풀리겠느냔 말이다!" 이 남자는 헥토르의 아버지이자, 무어 가문의 가주. '다르코스 무어'였다. "아버지." 쩍! 달려온 다르코스가 다짜고짜 헥토르의 안면을 강하게 후려쳤다. 주위 사람들이 깜짝 놀라며 입을 벌렸지만, 헥토르는 익숙하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듣기 싫다 이놈! 네 엄마가 저택에서 귀환식을 준비하고 있다만, 전부 취소다! 당장 극기훈련부터 들어갈 줄 알......!" 그때 헥토르가 조용한 목소리로 아버지에게 뭐라고 말했다. "......." 다르코스 무어가 팔짱을 꼈다. "그런 거라면 좋다." 그러곤 홱 몸을 돌려 성큼성큼 돌아갔다. "헤, 헥토르?" 눈치를 보고 있던 파벌 학생들이 잽싸게 몰려들었다. 파벌 여학생이 휴지를 꺼내 그의 코에서 흐르는 피를 닦아주며 말했다. "뭐라고 말씀드렸어?" "무어 가문의 사내로서, 인생의 중요한 승부를 앞뒀다고 말했다." 헥토르의 시선이 움직였다. 저 앞에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의 시몬이 보였다. "시몬 폴렌티아에겐 비밀이다." "네~ 네~" 파벌 학생들이 키득거렸다. "시몬." 이번에는 리처드가 시몬의 옆에서 나타났다. 시몬이 목소리를 재빨리 낮췄다. "아, 아버지?" "방학을 앞두고 결투라니, 여전히 무모하구나." "......하하, 빨리 말씀을 못 드려서 죄송해요." "아니다." 리처드가 시몬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네프티스 님이 어째서 꼭 로크섬에 오라고 했는지 알겠구나." "......네?" "좋은 결투를 기대하마." 리처드는 그 말만 남기고 걸어가 아빠들 무리에 합류했다. 어느새 헥토르의 아버지인 다르코스 무어는 디트리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 리처드를 보고는 경계 어린 눈빛을 취했다. "뱀파이어 로드. 그래서 저 수상한 사람은 대체 누굽니까." 다르코스의 물음에 디트리히가 어깨를 으쓱했다. "시몬 폴렌티아의 삼촌이라더군." "키젠 수석의......." 다르코스 무어는 전혀 믿지 않는 듯한 눈치였다. 리처드도 딱히 말을 섞을 이유를 찾지 못했기에, 메이린의 아버지인 다니엘라 옆에 서서 팔짱을 꼈다. "자, 자, 그럼 우리들의 1학년 마지막 결평을 시작하겠슴다!" 딕이 확성 수정구를 들고 앞으로 나왔다. "심판을 맡게 된 딕 헤이워듭니다! 자랑은 아니지만 결투평가의 룰을 달달 외우고 있는 사람은 이 중에 나뿐이니까요! 기존의 결투평가와 완전 동일하게 진행할 것을 약속드림다! 그리고 제 옆에는 공동심판인 헥토르 파벌의 메아오 양이 나와 계십니다. 한 말씀?" 왜 불려왔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의 메아오가 시크하게 대꾸했다. "죽어." "네. 죽으랍니다. 그럼 시작하죠!" 시몬과 헥토르는 결투평가용 배리어 수트로 갈아입었다. 헥토르가 자신의 인맥을 이용해 구해온 물건이었다. 이내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섰다. 딕이 두 팔을 교차하며 말했다. "양 선수 악수." 헥토르가 인상을 확 구기며 딕을 노려보았다. 딕은 '어허!' 하고 짐짓 엄격한 표정을 지었다. "왜 꼬나봐? 니가 공식 결투평가대로 해달라며? 그냥 니 내키는 대로만 할 거면 관두시든가." "......쯧." 헥토르가 마지못해 시몬의 손을 붙잡고 대충 흔든 다음 놓았다. 시몬이 작게 미소 지었다. "뭘 처웃고 앉았나." 헥토르가 부글부글 끓는 속을 내리누르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냐." 시몬은 가볍게 받아치며 등을 돌려 걸어갔다. 헥토르도 '죽인다'를 연신 중얼거리며 뒤를 돌았다. 이내 거리를 두고 두 소년이 전투를 준비했다. 딕이 팔을 휙휙 흔들었다. "자, 영속 마법진도 포함해서 모든 마법진을 꺼두셔야 합니다. 알고 있죠? 먼저 준비하면 실격입니다!" "자잘한 건 다 알고 있으니 시작해라!" "예이 예이! 자, 그럼! A반의 시몬 폴렌티아와 A반의 헥토르의 결투평가를 시작하겠습니다!" 딕이 팔을 척 들었다. 공동심판 메아오도 뒤따라 팔을 들었다. "시작!" "죽어." 그들의 팔이 내려가며 시작 신호가 울려 퍼지는 그 순간. 두 소년의 안광이 언제 그랬냐는 듯 무서운 집중력으로 번들거렸다. 지켜보던 딕 형제들은 달라진 분위기에 헛숨을 들이켰다. 시몬은 즉시 허리에 혼돈 마법진을 쌓았고, 헥토르는 등 뒤에 드래곤폼 마법진을 준비했다. 피차 마법진의 기본을 쌓느라 소모되는 시간은 1분이 채 되지 않았다. 파박! 그리고 먼저 뛰어든 건 시몬이었다. 칠흑을 밟고 뛰어오른 그가 거칠게 쇄도하며 날아 차기를 가했다. 터엉! 칠흑의 파편이 타격지점을 중심으로 꽃잎 휘날리듯 튀었다. 헥토르는 어깨로 가드에 성공하며 시몬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대로 바닥에 메다꽂을 생각이었으나. <시몬 오리지널 - 파풍(爬風)> 시몬이 딱밤 자세로 손가락을 튕기자 헥토르의 이마에 충격파가 일어났다. 순간적으로 헥토르의 손에 힘이 빠지며 시몬은 바닥에 내려왔다. "쯧!" 이내 육탄전.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두 소년이 방어를 포기한 연타를 퍼붓기 시작했다. 주먹과 다리가 미친 듯이 오가며 사방에서 검은 불똥이 튀겼다. 가히 명품 마투전이었다. "우와아아!!" 헤이워드 형제들이 얼굴을 붉히며 흥분했다. "이게 네크로맨서들의 대결이구나!" "개쩌는데!" 두 소년의 팔다리가 서로 얽히고 부딪치기를 반복한다. 시몬의 주먹을 팔꿈치로 쳐낸 헥토르가 부르짖듯 말했다. "뭘 하는 거냐? 시몬 폴렌티아!" "?" 팔꿈치가 펼쳐지며 강렬한 헥토르의 스트레이트가 뻗어 나갔다. 시몬은 가뿐히 고개를 기울여 피했다. "어째서 정직하게 마투로 싸우나! 어서 그 거인 놈에게 썼던 그 '황금 리치'를 내게도 보여라!" "못 들었어?" 회피와 동시에 빙글 회전하며 가해진 돌려차기가 헥토르의 팔에 적중하며 쩍! 소리가 울려 퍼졌다. "헤르세바는 혈천교와의 교전에서 망가졌어." 그런 컨셉이었다. 물론 헤르세바는 망가진 게 아니라, 군단형 언데드가 되어 키젠에서 쓰지 못하게 된 것뿐이지만, 앞으로 왜 헤르세바를 안 쓰냐는 물음이 올 수도 있으니 네프티스와 키젠 본부 직원에게도 망가졌다고 대답해 두었다. "빌어먹을!!" 쩌어어억! 헥토르가 거칠게 내지른 주먹에, 가드 자세를 올린 시몬의 몸이 주르륵 밀려났다. 헥토르의 목덜미에 혈관이 불끈불끈 튀어나왔다. "만전의 네놈과 싸우고 싶다고 했을 터!!" 시몬과의 첫 번째 전투. 바다 테마의 BMAT에서 시험 후반이라 극도로 지쳐 있는 시몬과 싸웠다. 그것도 샤텔의 난입으로 승부는 나지 않았다. 두 번째 전투. 공성전 BMAT에서 시몬은 특례 5번 쥴과 싸운 뒤에 헥토르와 싸웠다. 그것도 다른 학생들의 난입으로 단체전이 됐다. 그리고 지금. 세 번째 전투. 시몬은 퇴원한 지 하루가 됐고, 가장 강력한 무기였던 헤르세바도 망가져 있었다. "나는!! 나 자신에게 변명하기 싫다!" 헥토르의 동공에 불이 붙었다. "너를 꺾은 뒤에, '만약'이라는 말이 붙는 게 싫다!" 만약 시몬의 체력이 충분했다면. 만약 시몬이 쥴과 싸운 뒤에 오지 않았다면. 만약 시몬이 여전히 헤르세바를 가지고 있었다면. "어째서!!" 헥토르의 기세가 폭발적으로 강해졌다. 양팔에 칠흑을 두르고 괴물처럼 휘둘러대자 시몬이 밀리기 시작했다. "왜 항상 이런 식이냐! 패배할 때를 대비해 빠져나갈 구멍이라도 만드는 거냐!" 쩍! 그때 헥토르의 중심으로 파고든 시몬이 올려차기로 헥토르의 턱을 때렸다. "자만이 너무 심해." "!" 헥토르가 주춤하며 물러났다. 시몬이 착 가라앉은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내 체력은 만전이야. 헤르세바를 대체할 무기도 준비해 왔어. 네 발언은 내 준비에 대한 모욕이야." "......." "그리고 뭣보다 왜 네 승리가 전제인데?" 시몬의 몸에 칠흑이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만전이 아닌 나를 상대로 패하는, 그런 상황만은 막아야겠단 생각은 안 들어?" 우뚝. 헥토르가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푸핫!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 말이 맞다! 시몬 폴렌티아!" 헥토르의 전신에도 칠흑이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1학년의 마지막! 내 모든 것을 쏟아부어 네놈을 꺾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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