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1356화 “네가 이렌 님께 실망했단 건 알아.” 시몬이 성녀의 정수를 향해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렌 님도 그런 일을 겪은 직후에는 차라리 성녀의 힘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게 진심은 아니었을 거야.” 키릭. 키릭. 파이프들이 위협적으로 흔들리며 총구를 겨눈 채 올라오고 있었다. 시몬은 꿋꿋이 말했다. “나는 순간의 실수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정의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이렌 님은 후회하고 있어.” 타앙! 총구에서 날아온 네옴 탄환이 시몬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뺨에 주륵 붉은 실선이 그어지며 핏물이 흘렀지만 시몬은 눈 한번 깜짝하지 않았다. “널 되찾기 위해 목숨 걸고 여기까지 온 것만 봐도 알 수 있잖아. 이렌 님은 진심이야. 오랫동안 그분과 함께한 너라면 느낄 수 있지 않아?” 그 말에, 금방이라도 공격할 듯 다가오던 파이프들의 총구가 살짝 흔들리기 시작했다. “언제까지 그 차가운 곳에서 갇혀 있을 생각이야? 거기 갇힌 채로 있으면, 점점 네 의지와는 다르게 행동하게 될 거야. 그건 네가 원하는 모습이 아니잖아.” 시몬의 목소리가 호소력 있게 울려 퍼졌다. “나를 믿어. 내가 모든 걸 바로잡을게.” 그 말이 끝나는 순간. 모든 파이프들이 스르륵 총구를 내리더니 마치 머리를 숙이듯 시몬의 발밑으로 내려왔다. 시몬이 조심스럽게 그 위에 올라섰다. 촤촤촤촤촤촤촤― 파이프들이 그를 금속 저장고 바로 앞까지 데리고 갔다. 팅- 팅- 내부에서 두들기는 소리는 여전히 울려 퍼지고 있다. 시몬은 저장고에 손을 얹고 눈을 감았다. 그러자 팅- 팅- 하는 소리가 멎어 들었다. 세상이 새하얗게 물들어간다. ‘됐다.’ 하얀 세상에서 보이는 다섯 개의 왕좌들. 그리고 가장 왼쪽 텅 빈 공간에 소용돌이가 치고 있었다. 여섯 번째 왕좌가 만들어지려 하고 있다. [어머, 너 해냈구나!] 시몬과 처음으로 함께했던 정화의 정수가 웃는 얼굴로 다가왔다. [그런데 아직 안심하기엔 너무 이른 거 아냐?] ‘!’ 그녀의 말대로, 여섯 번째 왕좌는 네 개의 다리가 형성되고 있었지만 너무나 느리게 만들어지고 있었고 아직은 형태가 미약했다. 정화의 정수가 입술에 검지를 올렸다. [아마 내 생각엔-] 그녀가 더 말을 잇기도 전에, 하얀 공간이 깨졌다. 위잉! 위잉! 위잉! 갑작스럽게 현실로 돌아왔다. 어느새 이 장소 전체가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고, 거친 사이렌의 경고음이 귓가를 때리고 있었다. 상념에서 깨어난 시몬이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긴급 오류 발생.] 스으- 레테를 상대하던 세 개의 머리 중 하나가 천천히 내려와 시몬을 내려다보았다. [오류를 일으키는 가장 위협적인 바이러스 발견. 제거 개시.] 키이이이이잉! 사방에서 마법진이 펼쳐지더니 온갖 종류의 물리형 신성마법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큭!’ 시몬이 급히 몸을 날렸다. 팔과 다리에 날카로운 것이 지나가며 쓰린 통증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네옴으로 물든 파이프 하나가 시몬의 복부를 후려쳤다. 쿵! 간신히 두 팔을 들어 방어했지만 시몬의 몸이 크게 뒤로 밀려나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핵심 시스템 보전 개시.] 기계 성녀는 성녀의 정수를 지키기 위해 움직였고, 파이프에 연결된 금속 저장고를 떨어뜨렸다. 동시에 바닥이 커다랗게 벌어지며 밖으로 통하는 구멍이 생겼다. “아!” 시몬이 다급히 달려들어 팔을 뻗었지만, 한발 늦었다. 바닥에 생긴 구멍으로 정수가 든 금속 저장고가 빠져나갔고, 아래에는 끝없는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빌딩 전체가 하늘을 날고 있었어?’ 어느새 다르블렝 상공이었다. 기계 성녀의 힘으로 이 건물을 통째로 들어 올린 것이다. 저 멀리 저장고가 지상으로 떨어져 가는 모습이 보이고, 그 아래에 다르블렝의 경관이 까마득하게 펼쳐져 있었다. ‘이대로는 정수를 놓치게 돼. 하지만……!’ 위에서는 레테가 싸우고 있었다. 웅- 웅- 마침 통신 수정구가 진동했다. 시몬이 그것을 붙잡아 연결하자 레테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가요 시몬! “하지만!” -저는 괜찮아요! 저 고철덩이는 결판을 내려는 게 아니라 저를 여기 봉인해서 붙들어두는 게 목표인 것 같슴다! 그 말대로였다. 기계 성녀는 점차 화력을 줄이고, 온갖 종류의 봉인마법으로 빌딩 전체를 묶어두려 하고 있었다. 레테를 건물째로 봉인하려는 의도였다. ‘……그래, 저 기계는 자신을 진짜 성녀라고 생각하게끔 프로그래밍되어 있어.’ 기계 성녀의 입장에서, 지금 레테와 사생결단을 내고 에프넬을 적으로 돌릴 이유가 없다. 그녀가 원하는 건 다르블렝을 완전 점령하고, 다음은 신성연방의 전 주민들로부터 성녀로서 인정받는 것.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시몬이 입술을 깨물었다. -제가 누군지 알죠? 그 한마디에 시몬은 픽 웃으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이내 고개를 들며 짧게 대답했다. “믿을게, 레테.” -빨리 가요! 점점 저장고를 내려보냈던 틈이 좁아지고 있었다. 시몬이 망설임을 털어내듯 자신도 좁아지는 틈으로 몸을 던졌다. 휘오오오오오! 몸이 아래로 떨어지는 감각과 함께 눈을 쉽게 뜰 수 없는 강렬한 맞바람이 거칠게 불어닥쳤다. 시몬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 아래를 살피자, 구름을 지나 저 멀리 떨어지고 있는 금속 저장고가 보인다. ‘그런데 이렇게 대책 없이 떨어뜨려도 괜찮은 건가? 기계 성녀의 본체는 위에 있을 텐데.’ 그렇게 생각한 시몬이 위쪽을 돌아보았다. 이제는 공격과 방어의 싸움이 아닌 봉인 대전인 듯, 레테와 기계 성녀의 봉인마법이 경쟁하듯 앞다투어 빌딩을 뒤덮고 있었다. ‘저쪽은 레테에게 맡기고, 나는 내가 할 일에 집중하자.’ 시몬이 다시 저장고 쪽으로 고개를 되돌렸다. 그때 하늘에서 위잉- 하는 네옴 엔진 특유의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촤촤촤촤촤- 바로 인근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건지, 네옴 전투기 여섯 대가 날아와 시몬을 포위했다. [포기하십시오.] 라이카 로버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성녀님의 재림은 여신의 뜻, 어떤 힘을 가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일개 개인이 막을 수 있는 흐름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 일개 개인이 만들어놓은 성녀 따위.” 하늘에서 자유낙하하는 시몬이 등 뒤에 매고 있던 흰색과 흑색의 차크람을 꺼내 교차시켰다. “인정할 생각 없다고.” 촤아아아아아-! 두 차크람이 바퀴의 형태로 변하더니 빠르게 시몬의 몸을 둘러싸며 전차의 형태로 변했다. 그다음으로 목걸이에서 소환된 곰 신수 아칼리온이 앞으로 향했고, 시몬이 고삐로 아칼리온을 붙잡았다. “난 지금 기분이 안 좋으니까.” 시몬이 고삐를 잡아당겼다. “방해할 거면 목숨을 걸고 덤벼.” 쿠르르르르르르르릉! 전차가 천둥소리를 내며 빛줄기처럼 쏘아져 나갔다. 즉시 네옴 전투기도 녹황색 꼬리를 남기며 따라붙었다. 번개와 네옴의 불꽃이 격렬히 뒤엉키는 공중전이 다르블렝의 상공에서 벌어졌다. * * * 이렌이 로버트 본사로부터 탈출하고 4시간 뒤. “하아, 하아.” 이렌은 정신없이 도시 곳곳을 헤매고 있었다. 시몬이 준 메모리얼 수정구를 붙든 손에 힘이 꾹 들어갔다. ‘탐정…… 탐정……!’ 어서 이 메모리얼 수정구를 홈츠 휘하 탐정들에게 전해주어야 하건만, 도시는 혼란에 빠져 있었다. 불타는 거리, 분노한 군중들, 고장 난 네옴 기계들, 도저히 탐정들이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퍽! “이봐, 조심해!” 손에 방망이를 든 한 사내와 부딪힌 이렌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정신을 차린 그녀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미, 미안하다.” 콧방귀를 뀐 사내가 다시 몸을 돌려 군중들 속으로 사라졌다. 그녀가 고개를 들자 군중들이 어느 한 방향으로 몰리는 모습이 보였다. 귓가에 사람들의 이런저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버트 사장의 중대 발표래요.” “본사 빌딩을 하늘에 띄웠다길래 그대로 도망칠 줄 알았는데.” “이제 와서 무슨, 어떤 핑계를 대도 끌어내려야지.” 웅성 웅성! 라이카 로버트의 중대 발표 예고. 시민들은 모두 그것을 들으러 도시 광장으로 가는 것 같았다. ‘또 무슨 짓을 벌이려는 거지?’ 이렌의 동공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녀가 바닥에 손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그때. [존경하는 다르블렝 시민 여러분.] 마침 발표가 시작하고 말았다. 도시 곳곳에 있는 네옴 스크린이 번쩍이며 빛을 발하더니 라이카 로버트의 모습이 화면에 나타났다. [우리 모두는 중대한 위협에 직면해 있습니다.] 이렌이 이를 빠드득 갈았다. ‘라이카 로버트! 공중에 있는 줄 알았는데 언제 여기까지……?’ 화면 속 라이카가 서 있는 위치는 분명 도시 광장의 중앙 무대였다. 그녀가 사람들을 헤치고 달리기 시작했다. [전 성녀 이렌이 행정 결정권을 확보한 지 불과 3년도 채 지나지 않아 다르블렝은 멸망의 위기에 처했습니다.] 라이카 로버트의 목소리가 냉정하게 울려 퍼졌다. [그녀의 능력 부족으로 원류의 첨탑을 제어하지 못하여 네옴의 불안정성이 급증했고, 지반이 갈라지고 가스가 새어 나와 사람이 살지 못하는 위험지역이 늘어났습니다. 도시가 좁아지며 많은 시민들이 터전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네옴의 가격이 급등하여 많은 시민들에게 혜택이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고, 부의 양극화는 심각해져만 갔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수군거림이 일어났다. “전 성녀라니? 이렌 님을 두고 하는 말인가?” “무슨 말이야 저게.” 이렌은 입술을 꾹 깨물고 군중 사이를 헤치며 계속 뛰었다. [이전에 발표한 <지속 가능한 다르블렝을 위한 협치>는 그에 따른 자구책이었습니다. 시민 여러분의 분노는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우리는 늘 그랬듯―] 그의 목소리에 환희가 섞였다. [해결책을 찾았습니다.] 웅성 웅성 웅성! 시민들이 급격히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다르블렝의 모든 이익과 좌절은 네옴으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로버트사는 바로 그 네옴을 완벽하게 통제할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더 이상 불안정한 인간 성녀에게 의존하지 않아도 됩니다. 모두가 고루 네옴의 혜택을 받게 하겠습니다!] 시민들이 의아한 얼굴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초기에는 다소간의 ‘불편’과 ‘이질감’이 있겠지만, 그것만 감내한다면 우리는 훨씬 더 좋은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겁니다.] “입발림 소리만 하지 말고 그 해결책이란 걸 공개해라!” “어쩌겠다는 거냐!” 화면에 나온 그가 씩 웃으며 옆으로 비켜섰다. [네,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다르블렝의 새로운 성녀를 소개합니다!] 절컹. 절컹. 쥐 죽은 듯이 조용한 정적 속의 광장에서,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가 들린다. 이내 녹이 슨 기계 하나가 천천히 광장의 연단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것은 자애로운 여성의 얼굴이 조각되어 있고, 몸체에는 좌우로 열 수 있을 것 같은 문이 굳게 닫혀 있다. 그 차갑고 냉랭한 기계의 외관을, 모두가 의아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설마…….” “저게 성녀라는 거야?” 모두가 하나둘씩 입을 열려는 순간. 키이이이이이이이잉! 바로 그 기계로부터 강렬한 신성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시민들은 놀라며 눈을 가린 채 뒤로 물러섰다. 여성의 형상을 한 기계가 천천히 하늘로 떠오른다. 찬란한 빛의 고리가 그녀의 뒤에서 펼쳐지고, 성녀를 상징하는 성의가 그 금속의 몸통 위를 포근하게 뒤덮는다. 그 순간 모두가 알았다. 저건 성녀의 힘이라고. [경배하십시오. 새로운 다르블렝의 성녀님이십니다!] 시민들은 라이카 로버트의 그 말을 미치광이의 헛소리라고 생각했지만, 기계 성녀에게 내려오는 성의와 하늘에서 내리쬐는 광명을 본 순간 사고가 멈추고 말았다. ‘어떻게…… 해야 하지?’ 성녀는 여신의 선택을 받은 존재. 그 점에서 교리적으로 절대적인 위치와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만약 그것이 인간이 아닌 사물에 깃들었을 경우, 그 또한 성녀인가? 그것을 받아들이고 섬겨야 하는가? 라이카 로버트는 바로 그 질문을 대중에게 던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모두의 머릿속이 뒤죽박죽으로 변했다. 그때 앞줄에 있던 몇몇 사람들이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그라툴라 미 키빌리스.” 그들은 독실한 데바교도들이었다. 그들은 사고하지 않았다. 인간의 편협한 틀로 현상을 분석하는 것 자체가 신의 뜻을 곡해하는 죄악이었니까. 하지만 일반인들은 아직 우두커니 자리에 서 있었다. 여전히 쇳덩어리에 고개를 숙이는 것에 거부감을 느꼈다. [뭘 망설이는 겁니까.] 라이카 로버트가 재촉했다. [여신의 선택을 받은 새로운 성녀님께 고개를 숙여 예를 보이십시오. 그녀는 네옴을 완전하게 통제하고 있으며, 불변하고, 가장 합리적인 방식으로 다르블렝을 영원히 다스릴 것입니다.] 화아아아아아아아악! 그의 말을 증명하듯 도시 전역의 집이나 사무실 공장 곳곳에서 네옴이 튀어나와 기계 성녀를 중심으로 거대한 원을 그리며 서서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자, 장비들이……!” 심지어 사람들이 들거나 소지하고 있던 네옴 아티팩트도 공중으로 떠올라 그녀에게 모이기 시작했다. [경배하십시오.] 그것은 공포였다. 시민들의 머리 위에 돌아다니는 네옴이 금방이라도 방향을 돌려 머리를 깨뜨릴 것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사람들이 덜덜 떨며 하나둘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멈춰라!” 모두의 시선이 돌아갔다. 관중들 사이를 비집고 뛰어나온 이렌이 시뻘게진 눈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허억! 헉! 어쩌자고 앞으로 튀어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이렌……!” 뒤이어 그녀를 발견한 라이카 로버트의 표정도 험악하게 구겨졌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만나 교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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