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1355화 레테와 기계 성녀의 격렬한 전투가 진행되고 있는 사이. 시몬은 이렌을 데리고 조심스럽게 벽을 기어 내려가고 있었다. 쿠쿵! 콰콰콰콰쾅! 하늘에서는 강렬한 섬광이 연신 번쩍이며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고 있었다. 공격과 방어의 대치. 레테가 손을 내리그으며 수많은 별빛을 내려보냈고, 백룡 란을 비롯한 신수들까지 모두 아공간에서 나와 총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이에 대응하는 기계 성녀는 방어형 네옴 마법진을 펼쳐 묵묵히 공세를 막아내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레테가 밀어붙이고 있는 것 같지만…….’ 전세는 불리하다. 레테는 이 좁은 공간에 큰 별을 불러오는 게 불가능했고, 기계 성녀는 도시 전체로부터 네옴을 끌어다 쓰며 싸우고 있었다. 애초에 건물을 덮고 있는 물질부터가 전부 네옴이었다. 네 개의 계보를 거쳐 쌓인 성녀의 힘을 토대로, 역사상 가장 강력한 네옴을 컨트롤하는 기계 성녀. 이건 단순히 ‘홈그라운드’의 이점 정도의 문제가 아니었다. 다르블렝 안에서만큼은 힘의 차이는 절대적. 레테는 지금 도시 전체와 홀로 싸우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레테도 나를 믿고 시간을 벌어주는 거야. 서둘러야 해!’ 그렇게 시몬이 부지런히 아래로 내려가는 동안, 함께 내려가고 있는 이렌은 거의 넋이 나간 상태였다. 성녀의 자리를 내려놓고 정신이 피폐해진 그녀는 이곳에 오면서 다시 싸울 각오를 했지만, 예상했던 것 이상의 절망을 마주한 것 같았다. 타악. 시몬은 마침내 이 공간의 바닥에 두 발을 디뎠다. 기계 성녀의 발밑이라고 할 수 있는 이곳은 무수한 파이프의 숲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이렌 성녀님. 괜찮으십니까?” 시몬의 물음에 뒤이어 바닥에 착지한 이렌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몬이 앞장서서 살금살금 걸음을 옮겼다. 파이프들은 별다른 반응이 없다. 기계 성녀가 아래에서 다가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한 시몬이 조금 더 과감하게 접근했다. 이렌도 그를 따라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촤아아아아아악! 갑자기 파이프 숲이 격렬히 움직이더니, 총구로 끝부분의 형태를 바꾼 파이프들이 이렌을 조준하기 시작했다. 극도로 날이 선 움직임이었다. ‘음?’ 그런데 파이프들의 총구 방향은 시몬을 지나쳐 이렌에게만 집중되어 있었다. 시몬이 이렌을 지키러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니, 정면으로 총구를 겨누던 파이프들이 마치 시몬은 쏠 수 없다는 듯 좌우로 물러나 다른 각도에서 이렌을 노리는 모습을 보였다. 반면 이렌이 한 걸음 내디디려 할 때마다 파이프들은 격렬하게 반응했다. ‘이런 상황, 어디선가 겪어봤는데.’ 그때 시몬의 머릿속에서 팟 하고 한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대상자 식별 완료. 침입자에서 협력자로 정정. 그랬다. 고아 마빈을 찾으러 공장에 들어갔다가 크리쳐들에게 공격당할 뻔했던 순간, 자신이 구해준 크리쳐가 시몬의 신분을 침입자에서 협력자로 바꿔주었고, 그 뒤로 모든 크리쳐들의 위협에서 자유로워졌던 기억이 떠올랐다. 지금도 비슷했다. 기계 성녀가 이러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시몬을 협력자로 인식하는 것 같았다. 잠시 머리를 굴리던 시몬이 뒤를 돌아보았다. “이렌 성녀님.” 시몬이 새하얀 벽을 손바닥으로 툭 치며 말을 이었다. “이 네옴벽을 뚫고 혼자 밖으로 나가실 수 있죠?” “그, 그거야 가능하다만…….” 시몬이 그동안의 상황을 녹화한 메모리얼 수정구를 꺼내 그녀의 손에 건넸다. “앞으로 도시의 상황은 점점 더 심각해질 겁니다. 지금 본 모든 것들을 시민들에게 전해야 해요. 이걸 가지고 홈츠 탐정님이나 그 휘하의 탐정님들을 찾아가서 여기서 본 모든 걸 이야기해 주세요. 그게 힘들다면 로버트사의 영향력이 닿지 않는 언론사라도 좋아요.” “나 혼자 도망칠 수는 없다!” 그녀가 외쳤다. “이건 내 싸움이다. 죽어도 내가 죽어야 한다!” 그녀가 목소리를 높이는 걸 위협으로 감지했는지, 파이프의 총구 하나가 불을 뿜었다. 깜짝 놀란 이렌이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총탄을 받아냈고, 그녀의 손에 닿은 총탄이 말끔하게 녹아 사라졌다. “저희에게 모든 걸 떠넘기시는 게 아닙니다. 각자의 역할이 있는 팀플레이죠.” 시몬이 차분하고도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탁드립니다.” “…….” 망설이듯 동공을 흔들던 이렌이 저 멀리 파이프의 숲 너머 어딘가를 슬픈 눈으로 바라보았다. 결국 그녀도 동의했다. 등을 돌려 두 손으로 벽면을 짚었다. 주르륵- 그녀가 손을 짚은 벽면을 중심으로 권능이 무력화되며 네옴이 줄줄 흘러내렸다. “조심해라.” “네!” 그녀가 벽 너머로 서서히 사라져 가고, 시몬은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완전히 모습을 감추니 파이프들도 경계를 풀고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후우우.” 시몬은 긴장감에 억눌렸던 숨을 내쉬었다. 도박은 좋아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다. 시몬이 셔츠의 목 부분을 느슨하게 풀어헤친 뒤 앞으로 나아갔다. 꾸물꾸물- 온갖 금속 파이프들이 하늘 높이 솟아 있는 파이프의 숲을, 시몬은 틈을 찾아 몸을 밀어 넣으며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절대 자극하지 않아야 하니 최대한 파이프에 몸이 닿지 않으려고 애썼다. 워낙 빼곡하게 얽혀 있어서 사람이 통과할 만한 틈이 나오지 않으면 돌아가서 다른 길을 찾기를 반복했다. 시몬은 포기하지 않고 땀을 흘리며 앞만 보고 나아갔다. ‘확실히 느껴져.’ 성녀의 정수가 저 앞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을 확신했기에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다. 걸음을 옮길수록 숨도 트였다. 외곽 쪽은 빼곡했지만, 내부로 갈수록 파이프 간의 거리도 넓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아.’ 중앙에 도착했다. 이것이 핵심. 마치 물탱크를 연상케 하는 커다란 금속 저장고가 바닥에서 살짝 뜬 채 위쪽의 다른 파이프들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는 중앙 부분에는 무엇인가 갇혀 있는 모습이 보인다. ‘이렇게 강렬하다니.’ 눈부신 빛 덩어리. 시몬이 그것이 성녀의 정수라는 사실을 즉각 알아차렸다. 텅- 텅- 시몬은 그것이 마치 도움을 요청하는 것처럼 보였다. 여기서 꺼내달라는 듯 기계 내부에서 저장고를 두드리고 있었다. 시몬이 그쪽으로 다가가려는 순간. “더 이상 가까이 접근하시면 곤란합니다. 탐정.” 한 목소리가 그를 막아 세웠다. 어느새 몸 일부를 기계화한 다르블렝의 시장, 라이카 로버트가 시몬을 제지하듯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당신은 대체 정체가 뭡니까. 어째서 공격을 받지 않고 여기까지 들어올 수 있는 겁니까? 왜 성녀님이 당신을 총애하는 거죠?” “나도 잘 몰라.” 시몬이 태연히 대꾸하며 주먹을 꾹 쥐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지. 너는 네 욕심으로 성녀와 그 정수를 모독하고 있어.” “모독이라니요.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라이카 로버트의 목소리에는 다소 화가 깃들어 있었다. “성녀님은 연약한 인간의 육신과 정신을 넘어 한 단계 진화하신 겁니다! 더 발전할 가능성을 알고도 가만히 내버려두는 것이야말로 신성에 대한 모독.” 그가 팔을 뻗자, 기계화된 팔 끝에서 네옴으로 이루어진 칼날이 스릉! 튀어나왔다. “성녀님께서 당신을 해하지 않겠다면, 그 신도인 제가 막는 수밖에요.” “한번 해봐.” 시몬이 손가락을 까닥였다. 라이카 로버트가 네옴으로 이루어진 칼날을 바닥에 대고 질질 끌며 걸어오더니, 어느 순간 속도를 한번에 확 높였다. 전신의 핏줄에 마나 대신 네옴이 일렁이는 게 느껴진다. 부웅! 그가 거칠게 네옴 블레이드를 휘둘렀고, 시몬은 재빠르게 몸을 틀어 피해냈다. “방금 내 욕심을 위해서라고 하셨지요! 이게 쉽게 내린 결단으로 보이십니까?” 라이카 로버트가 네옴 블레이드를 맹렬히 휘둘러 댔다. 녹황색 검기가 번쩍이고 대기가 찢어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뉴 오더 프로젝트에 참여한 모든 로버트사 직원들에게 자살 명령을 내렸습니다! 신이 만들어졌다는 증거를 대중이 알게 해서는 안 되니까! 신은 만들어진 것이 아닌 완전무결한 존재여야 하니까!” 부아아아아아앙! 시몬이 허리를 숙이며 몸을 틀자, 녹황색 칼날이 머리카락 몇 가닥을 스치며 지나갔다. “내가 자고 나란 다르블렝을 혼란과 폭력 속으로 몰아넣은 것도 어쩔 수 없는 결단이었습니다! 질서는 혼란 위에 성립되는 법이니까요! 모든 것은 성녀와, 그녀가 세울 새로운 질서를 위해!” 다리에 힘을 주고 성큼 전진한 시몬이 고개를 들더니, 그대로 상대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절구 찧듯 부딪혔다. 뼉! 둔탁한 충격음과 함께 라이카가 커흡 소리를 내며 휘청거렸다. 시몬이 맥이 풀린 듯 한숨을 쉬었다. “어처구니없네.” “크훕!” 비틀거리던 라이카가 다시금 네옴 블레이드를 내지르자, 시몬이 발에 신성을 모은 채 다가오는 네옴 블레이드의 끝을 아래로 쳐냈다. 텅! 네옴 블레이드가 바닥에 박히며 움직임이 멈추고, 이어진 시몬의 발에 짓밟혔다. 라이카가 힘주어 빼내려고 했지만 시몬은 태연한 얼굴로 주먹을 움켜쥔 뒤 허공을 향해 내질렀다. <성투기 - 투광(投光)> 터어어어어엉! 포탄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날아간 그가 반대편 벽에 부딪히며 축 늘어졌다. 시몬이 손을 한 차례 탁탁 털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좋은 무기를 들었어도, 전투 경험을 극복할 수 있는 건 아니야. 시장.” “뭐, 좋습니다.” 벽에 기댄 그의 몸이 갑자기 벽면으로 주르륵 빨려들기 시작했다. “당신은 나의 성녀에 대해 아무것도 모릅니다. 하고 싶은 대로 한번 해보시죠.” 그의 몸이 벽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고, 방해꾼을 물리친 시몬이 비로소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금속 저장고가 파이프에 매달린 채 있었고, ‘텅! 텅!’ 하고 내부에서 두드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시몬이 철근 파이프를 붙잡고는 성큼성큼 그쪽을 향해 올라갔다. “웃차.” 방해가 없으니 어렵지 않게 그 저장고 위로 올라가는 데 성공했다. 여전히 이 기계 안에서 강렬한 신성의 힘이 느껴지고 있었다. ‘부수기는 힘들어 보이네. 부술 수 있다고 해도 위험부담이 너무 커.’ 시몬이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저장고의 몸체를 붙잡았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나는 다르블렝의 평화와 이렌 성녀님을 위해 이곳에 왔어. 부디 힘을 빌려줘.” 샤아아아아아아아- 주위가 점점 하얀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눈을 감은 시몬의 눈썹이 한 차례 꿈틀했다. ‘어째서?’ 시몬은 느낄 수 있었다. 성녀의 정수가 힘을 빌려주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설마 정수가 이 안에 갇혀 있기를 스스로 원하는 건가?’ 그때 시몬이 눈을 크게 떴다. 바로 위에서 송곳처럼 튀어나온 파이프가 시몬의 머리로 내려오고 있었다. 촤아아악! 시몬이 간신히 몸을 날려 그 공격을 피하고는 다시 바닥으로 내려왔다. 이내 모든 파이프들이 꿈틀거리더니 시몬에게 적대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최악이네.” 시몬이 옷소매로 입가를 슥 훔쳤다. 성녀의 정수가 성녀를 부정하는 경우는 전례가 없는 일이다. 어떤 경우에도 정수는 성녀를 버리지 않는다. 성녀가 죽기 전까지는. 그만큼 정수가 이렌에 대해 실망했다는 뜻이었다. ‘둘의 사이를 좋게 만들어야 해.’ 잠깐 그런 생각을 한 시몬이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카운슬러도 아니고, 정수와 성녀의 사이를 좋게 만들어야 한다니. 하지만 시몬은 정수에게는 사람처럼 일종의 ‘의지’가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남들이 미쳤냐고 비웃을지 몰라도 시몬은 해내야 했다. 그것이. 성자의 일. 시몬이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우리, 이야기 좀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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