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1353화 잊을 수 없었다. -다르블렝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이렌 성녀님! -어서 오세요! 우뚝 솟은 건물들, 하늘에서 내려오는 꽃송이, 발을 딛고 있는 마차의 쾌적함. 수많은 환영 인파까지. -어깨를 펴세요! 이렌 님! 옆에서 시중을 들고 있는 동기 테레지아가 환하게 웃으며 속삭였다. -오늘부터 여기가 이렌 님이 다스릴 도시니까요! 그 말에 쭈뼛쭈뼛 손을 들어 사람들에게 화답했다. 환호성은 더더욱 커졌다. 살다 보니 이런 환대를 받게 되는 날도 오는구나. 정말로 잊을 수 없는 ‘첫날’이었다. 거리 행진이 끝나고 다르블렝의 수뇌부들이 기다리는 야외 연회장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원류의 성녀’ 동상이 자애로운 모습으로 우뚝 서 있었다. 그 옆으로 그녀의 계보를 잇는 세 성녀의 동상이 차례대로 나란히 위치했다. 만나서 반갑다고. 이 도시를 잘 부탁한다고. 위대한 선배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가장 끝에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는 동상. 그 아래에는 감격스럽게도 ‘이렌’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그라툴라 미 키빌리스! 동상을 구경하는 사이, 한 청년이 성큼 달려왔다. 라이카 로버트. 이 젊은 남자가 다르블렝을 떠받치는 또 하나의 축인 도시의 시장이었다. -여신의 가장 가까운 딸을 뵙습니다. 그는 무릎을 꿇고 정중히 손등에 입을 맞추고는, 감격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 다르블렝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야 짙은 그늘이 걷히고 광명이 보이는 듯합니다! 라이카의 눈빛은 순수한 열정으로 빛났다. 조금은 부담스러웠지만, 그런 열정이 존경스러웠다. -바, 반가워요 시장님. 제가 이 도시에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할게요. -하하! 무슨 말씀을! 라이카 로버트가 환하게 웃었다. -성녀님은 그 존재만으로도 이 도시에 도움이 됩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좌중을 향해 외쳤다. -다르블렝이여 영원하라! 그러자 모든 자리한 모든 사람들이 기립하여 외쳤다. -다르블렝이여 영원하라! -이렌 성녀님 만세! 너무나 행복했다. 우연히 성녀의 정수의 선택을 받았을 뿐이고, 운 좋게 성녀가 됐을 뿐인데. 이렇게까지 행복해도 되는 걸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다르블렝의 구세주라도 된 것 같았다. 이런 행복이 언제까지고 이어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사실이 착각이라는 건, 오래 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다. * * * 이렌이 다르블렝에 온 지 일주일이 지났다. 숨 가쁜 일정을 소화하고, 도시의 고위 관계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연회 자리에 참여했을 때. -슬슬 보여주시지 않겠습니까. 술기운으로 얼굴이 살짝 붉어진 라이카 로버트가 웃는 얼굴로 권유했다. -네? -성녀님의 권능 말입니다. 마침 내일이 천류식이기도 하니 간단히 연습 삼아서요. 라이카를 포함한 사람들의 기대 가득한 눈빛에, 결국 못 이기는 척 일어섰다. 긴장했지만, 권능에는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다. 허공에 손을 뻗어 가볍게 바람을 일으켰다. 흔히 성풍(聖風)이라고 부르는 바람의 권능. 이 성풍은 어떤 축복, 치유, 정화 효과일지라도 담아서 광범위하게 휘날릴 수 있었다. 한번에 군대 전체를 축복할 수도, 수백 명의 환자를 동시에 치유할 수도 있다. 에프넬의 교수들도 훌륭한 권능을 개화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짝짝. 라이카 로버트가 박수를 쳤다. -그럼 이제 진짜를 보여주시지요. -네? -하하! 성녀님께서는 농담도 잘하십니다! 네옴을 이용한 권능 말입니다! 네옴? 그건 에프넬에서 배운 적 없었다. 조금 당황해서 목소리가 흔들리는 걸 애써 가다듬으며 답했다. -이게…… 다인데요? 그 순간. 라이카 로버트가 짓는 그 표정을. -지금 진심으로 말씀하시는 겁니까? 평생토록 잊을 수 없었다. 네옴을 다루지 못한다. 그건 애초에 당연한 것이었고,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안 되는 걸 갑자기 하라고 말하니 곤란할 뿐이었다. 하지만 라이카 로버트의 반응은 달랐다.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이었다. 잠시 말을 잃고 있던 그가 갑자기 앞으로 튀어나와 흥분하며 외쳤다. -아, 아! 혹시 네옴을 모르시는 겁니까? 바람이 아닌, 액체입니다. 녹황색을 띤 신성 혼합물이죠. 원류의 계보를 이은 성녀들은 모두! 한 명도 빠짐없이 네옴을 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네옴은 세대가 갈수록 강해지는 거고! 당신도 그래야 해! 위협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굳이 묘사하라면, 그것은 목숨을 구걸하는 듯한 절박함에 가까운 외침이었다. -할 수 있을 겁니다! 자! 다시 한번 해봐요! -라이카! 성녀님께 이 무슨 무례한 추태냐! 라이카 로버트의 어머니와 가족들이 황급히 달려와 그를 뜯어말렸다. 그리고 몇 번이고 아들의 무례를 용서해 달라며 고개 숙여 사과했다. 하지만 사과를 들어도 그저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났다. 천류식에서는 바람으로 네옴을 공중에 띄워서 다룰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식으로 넘어갔고 시민들도 안심했다. 하지만 진실을 알고 있는 라이카 로버트는 심하게 마음고생을 하는 것 같았다. 그는 끊임없이 네옴 훈련을 도왔다. -성녀님은 아직 어리시니까요! 진정한 권능을 개화하지 못하신 걸 겁니다! 라이카는 그동안 수집한 자료들을 펼쳐놓고 침을 튀기며 설명했다. -신모의 성녀인 아르디 성녀님도 막 정수의 간택을 받았을 시기에는 이렇게 머리가 거무튀튀하고 지저분한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머리카락이 아름다운 백금발로 찬란하게 바뀌죠! 분명 이렌 성녀님도 아직 힘에 눈을 뜨지 못한 걸 겁니다! 그의 열정과 진심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것을 결코 외면할 수 없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 도시를 위해 제가 도움이 될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하겠어요. 이상하다고는 생각했다. 선배들이 모두 할 수 있는 것을, 하필이면 나만 못 하는 것이니까. 따뜻하게 맞아준 이 도시의 사람들의 기대에 반드시 부응하고 싶었다. 그렇게 훈련은 계속됐다. 몇 번이고 실패했지만 라이카 로버트는 끝까지 믿음을 보였다. 당시 세간에서 불리던 ‘천풍의 성녀’라는 이명을 굳이 정정하고, ‘난류의 성녀’로 공식 발표한 것도 그렇다. 다르블렝의 원류의 계보에 합류시킨 것이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나도, 몇 년이 지나도. -……. 여전히 네옴을 일으킬 수 없었다. 심지어 네옴에 권능을 부여하면, 갑자기 네옴이 부글부글 끓더니 그대로 폭발하거나 증발해 버리기까지 했다. 네옴을 다스리긴커녕, 오히려 상극인 힘. 다르블렝의 성녀가 네옴을 무력화시키는 권능을 개화한 것이다. 실망과 절망으로 하루하루 시간만 무심하게 흘러가던 어느 날 밤. -……오셨습니까. 라이카 로버트가 원류의 첨탑 앞으로 불러냈다. 그는 처음에 봤을 때보다 더더욱 초췌하고 야위어져 있었다. -원류의 첨탑에서 생성되는 네옴의 양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심지어 네옴의 불안정성이 커져서 폭발 사고 같은 원인 불명의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죠. 이대로는 3년도 채 버티지 못하고 네옴이 바닥날 것이며, 그때가 다르블렝이 멸망하는 때다. 라이카 로버트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사실. 라이카 로버트가 고개를 떨구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역대 계보의 성녀들은 모두, 한 달에 한 번 원류의 첨탑에 방문해서 네옴을 안정화시키고 보수해 주셨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랬다. 한 달에 한 번은 해야 하는 일을, 계보의 성녀들이라면 모두 하는 일을, 자신이 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도시에 이런 비극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건물 곳곳에 폭발이 일어나고, 사람들의 어지러운 비명이 들렸다. 사람들이 불안에 떨고 있다. 연방의 신문에서는 네옴은 위험한 힘이며, 이제 다르블렝의 찬란한 발전도 끝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저, 저는……. 목소리가 떨려왔다. -제, 제가 잘 못해서…… 전부 제 잘못……. -아닙니다! 성녀님도 언젠가 해내실 겁니다! 라이카 로버트가 목소리를 높이며 두 손을 덥석 붙잡았다. -지금 다르블렝의 모든 기술자와 과학자들이 힘을 합쳐서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3년이든! 5년이든! 어떻게든, 저희가 어떻게든 과학기술로 탑의 수명을 연장하며 시간을 끌겠습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희망과 간절함이 뒤섞여 있었다. -그러나 성녀님께서도 시간을 들여 네옴에 적응해 주십시오! 결국 마지막에는 성녀님의 힘이 필요합니다! -……아, 네! 제가 더 노력해 볼게요! 스스로를 끊임없이 책망하고 채찍질했다. 내가 더 노력해야 한다. 다른 성녀들은 하는데 나만 못하는 건 이상하다. 어떻게든 기대에 부응하고 싶다. 그렇게 죽을힘을 다해 수련을 거듭했다. 하지만 성풍의 힘이나 다른 신성마법의 수준은 극도로 높아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네옴 테크에 대한 이해도도 높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왜……? 여전히 네옴을 다룰 수는 없었다. * * * 지지부진한 성과를 보였던 이렌과는 달리, 라이카 로버트와 과학자들은 경이로운 성과를 냈다. 탑의 수명을 늘려 잠깐 시간을 끄는 정도가 아니라, 10년이 지나고 20년 가까이 지나도 탑은 무너지지 않았다. 기술의 극한 발전. 다르블렝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로버트사가 탑의 유지에 사활을 걸게끔 만들었고, 결국 과학의 한계점을 뚫은 것이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일에는 양면이 있는 법. 원류의 첨탑으로부터 공급되는 네옴에는 이제 복잡하고 위험한 각종 약물이 들어가게 되었다. 이제 전통대로 세례식에서 네옴으로 샤워하는 건 과거의 꿈 같은 일이 되었다. 지하세계는 오염된 네옴의 부산물로 더더욱 사람이 살기 힘든 곳으로 변해갔다. 네옴의 가격이 급등하고, 많은 사업자들이 길바닥에 내앉았으며, 하층민들은 네옴의 혜택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그 모든 문제가. -내 탓이야. 이렌은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로브를 뒤집어쓰고 정처 없이 거리를 걸었다. 다르블렝은 여전히 드높고, 화려하고, 발전하고 있다. 번영 속에 가려진 고독감과 무력감이 그녀를 짓누르고 있었다. 처음 만난 라이카 로버트가 해주었던 말. -성녀님은 그 존재만으로도 이 도시에 도움이 됩니다! 아니다. 내가 없어도 이 도시는 어떻게든 유지될 것이다. 나는 이 도시에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한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사이. -그라툴라 미 키빌리스. 거의 수년 만에 라이카 로버트가 이렌의 앞에 나타났다. 눈에 그늘이 가득하고, 몸이 비쩍 마른 환자 같은 그가 비틀거리며 다가와 인사했다. -성녀님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이렌은 울먹이며 외쳤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돕겠다고. 무엇이든 시켜달라고. 그러자 그가 서류를 내밀었다. -앞으로 성녀님께서 도시의 행정에 참여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의 입매가 비틀렸다. -네옴의 지속성을 위해, 간단한 실험에 협조해 주시길 바라겠습니다. * * * 로버트사 본사. 삐빅. 삑. 삑. 관리자 권한을 획득한 소르엘라. 아니, 이렌은 조용히 시스템을 조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이야기를 들은 시몬과 레테는 할 말을 잃은 채 우두커니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모든 건 내가 부족한 탓이다.” 삣. 그녀가 버튼을 누르자 작동을 정지한 네옴 승강기 하나에 불이 들어오더니 문이 덜컹 열렸다. 그녀는 네옴 장비를 어깨에 짊어지고 걸어갔다. “그러니 내가 가서 이 모든 사태를 끝내겠다.” “……이렌 성녀님.” 레테가 안쓰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시몬과 레테도 이렌의 뒤를 따라 승강기에 올라탔다. 철컹. 승강기 문이 닫혔다. 이렌이 장비를 조작하자 버튼을 누르지 않았는데도 승강기가 빠르게 올라가고 있었다. 잠시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스윽. 시몬이 고개를 숙였다. “그라툴라 미 키빌리스.” “됐다. 난 이제 성녀도 뭣도 아니다.” 그녀가 짧게 웃었다. 시몬이 고개를 들고 그녀를 응시했다. “바로 그 문제 말입니다만, 성녀님께는 더 이상 성녀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것 같은데, 어떻게 된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 “…….” 잠시 힘겨운 듯 목구멍을 꿀렁이던 그녀가 이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빼앗겼다.” “예?” “그걸 이제 되찾으러 갈 거다.” 철컹. 마침 이 건물의 정상층에 도달하고 승강기 문이 열렸다. 이렌은 그 말만 남기고는 앞으로 성큼 성큼 걸어갔고, 시몬과 레테도 뒤를 따랐다. 전체가 조명 하나 없이 어둠으로 뒤덮인 공간. 중앙으로 발을 내디딘 이렌이 강하게 외쳤다. “나와라! 여기 있는 거 알고 있다!” 그녀가 그렇게 말하는 그 순간. 삐빅! 들고 있던 네옴 아티팩트 기기에서 짧은 경고음이 울려 퍼졌다. <1급 관리자 라이카 로버트가 당신의 관리자 권한을 박탈합니다.> “!” 갑자기 철컹! 소리와 함께 승강기 문이 거칠게 닫히더니 아래로 내려가 버렸다. 시몬과 레테가 움찔하며 주위를 살폈고, 이렌이 다급히 아티팩트를 조작했지만, 한 층 더 높은 관리자에게 권한이 박탈당한 상태에서는 복구할 수 없었다. 철컹. 그때 전면의 천장에 작은 네옴 불빛이 들어왔다. 철컹. 철컹. 철컹. 철컹. 이어서 연달아 불빛이 들어오며, 방의 절반이 불이 밝혀졌다. 저벅 저벅. 드리워진 어둠 속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렌.” 어둠 너머로 안광이 일렁이고 있었다. “새로운 성녀의 탄생을 맞이할 적절한 손님들이 오신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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