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335화 두 시간 뒤, 성을 둘러보며 물자와 성벽 상태 등을 체크한 학생들은 다시 회의실에 모였다. 가디언들을 위해 국왕이 마련해 준 장소였다. "다들 모였어?" 딕이 앞으로 나와 말했다. 직접 수를 세 보던 한 여학생이 대꾸했다. "아직 한 명 안 왔네." 그 말에 메이린이 주위를 슥 둘러보고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맨날 늦어, 얘는.' 빠진 사람은 역시나 시몬이었다. "이제 곧 칸 왕국이 쳐들어올 거야. 시간 없으니까 먼저 시작하자. 다들 한 명씩 돌아가면서 성에서 본 것들을 설명......." "잠깐만." 그때 한 남학생이 손을 들었다. 머리의 반을 밀어버리고, 두툼한 눈썹에 전체적으로 선이 굵직굵직한 남학생이었다. "요우라고 한다. 일단 같은 팀이 되어서 반갑고, 한 가지 의문점이 있는데." 그가 딕을 노려보았다. "왜 네가 당연하다는 듯이 대장 노릇을 하지?" 다른 학생들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메이린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입을 뻐끔거렸다. '내가 나대지 말랬지!' 딕이 얼른 웃는 얼굴을 만들어 보이며 두 손을 휘저었다. "난 대장 같은 건 생각 없어. 공성전은 3회차라 나름 노하우는 있으니 책사 역할이나 하려고." "......그 말 반드시 지켜라." 요우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일단 대장부터 뽑고 지휘체계를 갖추는 게 맞다고 봐. 그리고 3회차라고 했는데, 이 자리에서 뭐 경험자 아닌 사람도 있나." "맞아!" "나도 3회차야." 몇몇 학생들이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갑자기 위기감이 든 메이린이 슬쩍 옆자리의 피츠제럴드를 보며 물었다. "설마 너도 경험자니?" 피츠제럴드가 안경을 추켜올렸다. "난 이번이 2회차." 공성전 테마는 한번 맛본 사람들은 꼭 계속한다더니, 경험자들이 대다수였다. 성벽 위의 카드를 찾아서 들어가는 것도 해본 사람들이 더 잘했던 모양이다. '설마 나랑 시몬만 초심자인 건 아니지?' 메이린이 걱정하고 있는데, 회의실 분위기는 어느새 딕에게 쏠려 있었다. "그리고 딕 너! 저번 수성 때 거하게 말아먹은 기억 안 나냐? 북문에 온다고 병력 집중시켰다가 낭패 봤잖아!" "맞아!" 딕은 낯 한번 안 바꾸고 '어허!' 하고 윽박질렀다. "별걸로 다 꼬리 잡네! 전쟁에서 패배한 원인이 어디 한둘이야? 니들 얼굴 다 익숙한데 잘못한 거 하나하나 따져봐?" "조용!" 요우가 큰 목소리로 윽박질렀다. 역시 회의장에서는 일단 목소리가 크고 봐야 했다. "그딴 걸로 싸울 시간 없으니 총사령관부터 뽑자. 명패는?" "여기." 딕이 국왕에게서 받은 명패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이게 바로 '총사령관'의 상징. 엔돌라스의 게임 안에서는 외부에서 가져온 모든 수정구가 무용지물이 된다. 하지만 이 명패를 단 사람은 모든 가디언들에게 통신이 가능하며, '전군'을 통솔할 권한을 얻는다. "가타부타할 것 없이, 이번 게임의 총사령관은 내가 하고 싶다." 요우가 그렇게 말하며 명패에 손을 가져갔다. "의의 없으면-" "어딜." 스윽 하고. 테이블에 올라온 발이 명패를 옆으로 밀었다. "은근슬쩍 가져가려 하시나." 테이블에 다리를 올린 건 장발의 남학생이었다. 전형적인 뱀상 얼굴에, 눈과 눈 사이가 넓고 실눈을 뜨고 있는 것처럼 눈이 가늘었다. "공성전 테마에서는 항상 '최고 공로자'가 뽑혀. 게다가 이번 게임은 엔돌란스의 빵빵한 선물까지 걸려 있는데 총사령관 자리는 쉽게 양보 못 하지~ 난 브위네야." 이번에는 테이블을 뚫고 불쑥 튀어나온 손이 명패를 가져갔다. "펭겔이라고 해요." 이내 테이블을 뚫고 여학생이 나타나 테이블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사령관의 덕목은 생존능력이에요. 저번 게임도 지휘권을 가진 총사령관이 빠르게 잡혀서 수성 측이 꼬여 버렸죠. 당연히 사령학 지망생이 가져가는 게 낫......." "아니. 사령관의 덕목은 판단력." 언제 나타났는지 피츠제럴드가 펭겔의 손에 들린 명패를 집어 들었다. 펭겔의 표정이 굳었다. 저주라도 당한 건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나는 R반의 피츠제럴드. 지식과 판단력은 누구 못지않다고 자부해." "판단력이 좋다는 건 누가 판단하는데?" 이번엔 피츠제럴드의 몸이 멈췄다. 팔이 얼음으로 얼어붙어 있었다. 그가 명패를 떨어뜨렸고 아래에서 붙잡은 메이린이 하늘색 머리카락을 넘기며 미소 지었다. "실기평가 전교 2등. BMAT 10위 두 번. 특례 애들 없다고 자꾸 듣보잡들이 껴드는데, 총사령관은 실적이 있는 사람이 하는 게 맞다고 봐." 처음 말을 꺼냈던 요우가 그녀를 노려보았다. "메이린 빌렌느. 공성전은 몇 번이나 경험했지?" 그녀가 뜨끔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슬쩍 눈을 피했다. "......처, 처음인데." "이거 봐라. 이거 봐." 요우가 입꼬리를 올렸다. "총사령관만 다른 가디언들에게 통신이 가능해. 이렇게 중요한 자리를 아무것도 모르는 애들한테는 줄 수는 없어." "맞아! 게임 할 줄 모르면 나대면 안 되지." "아! 듣자 듣자 하니까 진짜아!" 메이린의 눈에도 불똥이 튀었다. "많이 해본 것도 아니고! 몇 번 더 해본 걸로 왜 이렇게 생색인데?" "경험이 가장 중요하지~" "넌 빠져! 뱀남!" "역시 내가 가장 적격자로 보여요!" "아니, 나야!" 웅성 웅성 웅성! 서로 총사령관 자리를 놓고 싸우느라 회의가 난장판이 되고 있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딕은 등을 돌려서 쪽지와 깃펜을 꺼냈다. 그러곤 뭐라고 슥슥 휘갈겨 쓰기 시작했다. <야, 회의 개판됐다. 빡세게 등장해, 빡세게.> 그러고는 아공간에서 스켈레톤을 꺼내 밖으로 내보냈다. 다들 싸우느라 딕이 무슨 짓을 하는지 신경 쓰지 못했다. 쿵! 요우가 격분한 얼굴로 테이블을 내리치며 소리쳤다. "아, 답답해! 그럼 공성전 하기 전에 한판 붙......!" 꽈아아앙!! 난데없이 회의실의 문짝이 날아갔다. 그것은 정확히 요우의 뒤편 벽을 뚫고 들어갔다. "꺄아아!" "허억!" 회의실 전체가 들썩였다. 벽에서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먼지를 보며 요우는 '허억!'하고 뒷걸음질 쳤다. 모두의 시선이 문 쪽으로 향했다. 문을 박살을 낸 누군가의 다리가 보였다. 이내 다리가 내려가며 그 인물이 안으로 들어왔다. 저벅- 저벅- 곳곳에서 침 삼키는 소리가 들린다. 모두를 입 다물게 하며 등장한 푸른 머리의 소년. 무거운 정적 속에서 그가 입을 열었다. "늦어서 미안. 시몬 폴렌티아라고 해." 그렇게 수성 측의 사령관은 시몬으로 결정됐다. * * * 전쟁의 때가 다가온다. 이제 모든 아온 왕국의 병력들이 성벽에 배치되어 준비를 마쳤다. 외성에는 네 개의 성문이 있다. 그중에서는 시몬은 딕, 메이린과 함께 남문을 맡기로 했다. '숨쉬기도 힘든 분위기네.' 팽팽한 긴장감이 주위에 감돌았다. 무거운 갑옷을 입고 투구를 착용한 수인들의 눈에서 수많은 감정들이 아른거렸다. 긴장감, 두려움, 흥분, 공포, 그리고 체념. 그 세밀한 감정표현에는 소름마저 끼친다. 이게 정말 한 사람이 창조한 세계라는 게 맞나 싶을 정도였다. 시몬은 정신을 차리고 성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생각했던 것만큼 썩 높지는 않았지만, 적을 막는 데는 나름대로 효과적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10배에 전력 차인 이상, 최대한 성을 활용해서 싸워야만 했다. "근데 시몬." 딕이 병사들의 화살통에 인챈트를 걸어주며 말을 걸어왔다. "뭐 한다고 이렇게 늦었냐?" "스켈레톤 메이지도 화염계로 돌려놓고, 성도 이곳저곳 둘러보면서 세팅하고 왔어." "그러니까 뭔 세팅?" "그게......." 시몬이 목소리를 줄이고 은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절그럭. 시몬의 대답을 들은 딕이 인챈트를 걸던 화살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와이 씨, 너 진짜 미친 거 아냐? 그걸 여기서 쓰려고?!" "최후의 수단이긴 해." 시몬이 옅게 웃었다. 딕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여간에, 생긴 건 멀쩡하게 생겨놓곤 전략 짜는 거 보면 미친놈 같다니까." "칭찬이야 욕이야." "네크로맨서한테는 극찬이지!" 딕이 그렇게 말하며 병사들의 병장구에 인챈트를 걸어주러 갔다. 시몬도 스켈레톤 메이지 배치를 끝내고는 기지개를 쭉 켰다. "아." 메이린의 모습이 보인다. 그녀는 성벽에 몸을 쭉 기댄 채 턱을 괴고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쩐지 심각한 표정이라, 시몬이 느긋한 걸음걸이로 다가갔다. "무슨 생각해?" "와앙!"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움츠린 어깨를 떨었다. 그러곤 시몬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아, 쫌! 놀라게 하지 말라고!" '......진짜 잘 놀라네.' 가만 보고 있으면 메이린도 은근 쫄보 같은 구석이 있었다. 시몬이 피식 웃으며 메이린의 옆에 서서 성벽 밖을 바라보았다. 그녀도 입술을 샐쭉거리다가 이내 시선을 돌려 밖을 응시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하늘 예쁘다." 메이린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러게." "카미가 없어서 아쉽네." "응." "......." "......." 갑자기 어색한 바람이 불었다. 오랜만에 둘만 있어서 그런가? 어색하다고 느껴서 어색한 걸까? 뭔가 이야기를 계속 이어 나가보고 싶었다. "아까 세르네랑 무슨 이야기 했......."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던 그녀의 표정이 순식간에 분노로 타올랐다. 시몬은 스스로 입을 한번 주먹으로 때리고 싶다고 생각하며 얼른 고개를 되돌렸다. "여기서까지 그 여자 얘긴 하지 마라?" "미, 미안." 메이린이 한숨을 푹 쉬었다. "그냥 별 시답잖은 대화였어." -메이린! 바로 그 순간, 세르네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시몬을 상아탑에 데려올 수 있다면, 어르신들이 널 보는 눈도 바뀌지 않을까? -나도 못 한 일을, 메이린 네가 해낸 거야. 안 그러니? 메이린이 짜증스러운 한숨을 쉬었다. 자기가 타인의 머리 꼭대기까지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태도가 너무나도 짜증 났다. "벌써 2학기도 끝나가네." 한편 시몬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얼른 대화 화제를 돌리려 시도하고 있었다. "2학년이 되면-" 이번엔 시몬의 목소리에 살짝 힘이 풀렸다. "우리도 다 흩어지겠지?" "어쩔 수 없지 전공이 다르니까." 그렇게 대답한 메이린의 귓가에 또 세르네의 음성이 들렸다. -난 2학년 때 소환학 전공으로 시몬이랑 붙을 건데! 1학년인 지금이 유일한 기회라고 생각 안 해봤......! "아오!!" 메이린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시몬이 움찔하며 거리를 벌리자 메이린이 뒤늦게 말했다. "아니, 너한테 하는 말 아니...... 아." "왜 그래?" 두 사람의 시선이 앞으로 향했다. 한 무리의 새까만 군대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적이다! 칸 왕국의 병사들이 나타났다!" "전투 준비!" 순식간에 진지해진 시몬이 명패에 손을 올렸다. "다들 준비해. 특별한 변수가 없는 이상, 정한 담당구역을 이탈하는 일 없이 최대한 지켜." 곳곳에서 파란 깃발이 들어 올려진다. 오케이라는 신호였다. '......어, 엄청 긴장되네.' 새까만 병력들이 성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시몬은 각오를 다졌고, 등 뒤에 도열한 스켈레톤 메이지들의 안광은 번뜩였다. 이제 곧, 전쟁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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