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238화 로체스트에 도착했다. 딕에게 빌린 바지에, 윗옷은 그냥 흰 셔츠를 입고 나왔다. 이른 아침부터 나와서 그런지 피곤했다. 시몬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하품을 한번 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엄청나네.' 역시 주말 로체스트답게 어딜 가든 커플들이 보인다. 남학생과 여학생이 서로 딱 붙어서 알콩달콩 좋아 죽는 모습에, 지켜보는 사람이 괜히 낯간지러워졌다. 그런데 정작 세르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약속장소도 제대로 말 안 해줬지 않나?' 편지를 꺼내서 다시 확인해 보니, 로체스트에 정오까지 내려와 달라는 말 외에 따로 어디서 만나자는 이야기는 없었다. '......나 여기서 왜 이러고 있냐.' 시몬이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는 그때. 팔랑! 순백의 깃털 하나가 날아와 시몬의 발 앞에 떨어졌다. 잠시 후 또 팔랑! 하고 깃털이 내려와 바닥 타일에 떨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세르네의 깃털이네. 이쪽으로 오라는 건가?' 시몬은 순순히 깃털들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시몬이 가는 곳마다 깃털이 떨어져서 가야 할 위치를 알려주었다. 그렇게 좁은 골목을 지나서 마차 도로가 나 있는 큰길로 나왔다. '사라졌다.' 어느새 깃털이 끊겨 있었다. 길가에 멈춰서 깃털을 찾아보려는데, 갑자기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낯선 여학생이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못 본 척하기엔 위험천만했다. 시몬은 그녀가 넘어지지 않도록 잡아주었다. "괜찮아요?" 그녀는 정신을 잃은 듯 눈을 감고 있었다. 시몬이 뭐라고 다시 말을 걸려는 그때, 그녀가 불쑥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사랑이란 무엇인지 아시나요♪" 대뜸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자꾸 그대가 떠올라 하루 종일 두근거려요♬" 엄청 이상한 사람이다. 시몬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에게 떨어졌다. 여학생은 발레리나처럼 현란하게 춤을 추다가 뒤에서 걸어오던 남학생과 손을 맞잡았다. "사랑이란♩" "사랑이란~" 이제는 두 사람이 듀엣으로 노래를 부른다. 갑자기 근처에 있던 사람들도 두 사람을 따라서 노래를 시작했다. "사랑은 때로는 시련을 주죠♬" "그림자처럼 항상 나를 따라와요♩" 갑자기 로체스트 거리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합창. 곳곳에서 자기 일을 하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합류했다. 노랫말은 점점 더 커진다. 벌컥벌컥 주거지 2층에서 문이 열리며 빨래를 개던 아줌마가 노래를 부르고 부부싸움을 하던 부부가 언제 그랬냐는 듯 입을 벌렸다. "우리는 어디로 왔다가 나가는 걸까요♪" 척. 척. 척. 아이들도, 거지들도, 신문을 돌리던 신문팔이도 모두 박자에 맞춰 춤을 춘다. 시몬은 그저 어안이 벙벙해서 멍하니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시몬의 등을 툭 밀었다. "우왓!" 시몬이 휘청거리며 마차 도로 쪽으로 향했고, 타이밍 좋게 마차 한 대가 멈춰 서며 문이 덜컥 열렸다. "사랑은 우리를 인도하는 것♪" 마차에 앉아 있던 처음 보는 여자가 시몬의 팔을 끌어당겨 마차에 앉히고는 노래를 불렀다. 마부가 즉시 마차를 출발시켰다. "사랑은 광내고 갈고닦는 것♪" 마차는 금방 멈췄다. 시몬이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골목 앞에 똑같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악기를 연주하고 춤을 추며 시몬을 안내했다. 시몬은 이제 상황 파악을 마치고는 굳은 표정으로 그들을 따랐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식당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합창을 했다. "사랑은~♪" 현란한 피아노 건반 소리가 들린다. 시몬은 그 소리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나만의 달콤한 착각이라도 상관없어요♪" 남자 직원과 여자 직원이 손을 맞잡으며 노래를 불렀다. 이내 2층의 끝에서 현란한 손동작으로 피아노를 치는 여자가 보인다. "사랑은~" 그녀가 노래하며 피아노를 연주하자 그것에 맞춰 모든 사람들이 따라 춤을 춘다. "신비롭고 아름다워요♬" 단단단단단단. 단단. 따-란. 음악이 멈추는 순간, 모든 직원들이 열렬히 박수를 친다. 그 열화와 같은 박수 속에서 피아노를 치던 소녀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치맛단을 붙잡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가볍게 짝! 하고 손뼉을 쳤다. 움찔. 움찔. 눈이 풀려 있던 직원들의 동공에 서서히 빛이 돌아왔다. 그들은 아무렇지 않은 듯 다시 본인이 하던 일로 돌아갔다. 빗자루로 바닥을 쓸고, 서빙을 했으며, 주방에서 패티를 구우러 갔다. "어서 와요. 시몬." 피아노 소녀가 검지를 입술 위에 올리며 생긋 미소 지었다. 상아탑 정식 후계자이자, 깃털을 이용한 정신지배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소녀. "......세르네." 방금까지 춤을 추던 남자 웨이터가 다가와 두 사람에게 고개를 숙였다. "몇 분이신가요?" 그는 마치 세르네를 처음 본 사람처럼 말하고 있었다. "두 명이요~" "이쪽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두 사람은 가장 좋은 피아노 뒤편 좌석으로 안내받았다. 간단한 식전의 차가 나왔고, 그녀는 우아하게 커피잔을 들어 올렸다. "제가 준비한 이벤트는 어때요? 근사하죠?" "하아." 시몬이 복잡한 표정으로 이마를 덮었다. "......넌 내가 아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극도로 이상한 사람 중 하나야." "그런 건 숙녀를 칭찬하는 말이 아닌데." 그녀가 눈을 찡긋했다. "너무 걱정은 하지 마세요. 그냥 길가는 사람들을 1분 정도 조종해서 만든 이벤트일 뿐이니까. 후유증이나 사고 위험은 없을 거예요."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그래서 그래서! 이벤트는 어땠어요?" ......글쎄. 소감을 말하자면 연극의 한 장면 같았고, 자신이 그 극에 들어온 주인공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두렵기도 했다. 이런 일을 간단히 연출할 수 있는 세르네의 힘이 두려웠다. 그녀가 마음먹으면 도시 하나를 수렁 속으로 빠트리는 건 일도 아니리라. 그녀는 대체 키젠에 남아서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는 걸까. "영광으로 알라구요." 그때 세르네가 긴 다리를 쭉 뻗어 왼 다리 위에 올리고는 미소 지었다. "나랑 이렇게 단둘이 마주할 자격을 가진 사람은 별로 없으니까." 품격 있는 목소리와 몸짓, 까마득한 카리스마. 무엇보다 그녀에게서만 느껴지는 특유의 아우라. 만민의 위에 올라설 여왕의 운명을 타고날 사람이 있다면, 바로 그녀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그녀가 C반을 장악한 것도 이해가 된다. 하나같이 대단한 권력자의 자제들이 모여 있는 키젠에서, 하나의 반을 장악하는 건 쉽지 않다. 확실히 그녀는 정신지배나 상아탑 후계자라는 배경 그 이상의 뭔가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튼 결론은. '더럽게 부담스러운 사람.' 시몬도 그녀를 따라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말했다. "날 부른 이유가 뭐야?"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손가락을 다듬는 척했다. 그때 웨이터가 다가와 식탁보를 하나씩 깔아주었다. 그러곤 '실례합니다.' 하고 말하더니 시몬에게 편지 하나를 건넸다. 웨이터가 사라지자 시몬이 인상을 썼다. "굳이 남을 이용하는 이런 거, 하지 않았음 좋겠는데." 그녀가 쿡쿡 웃었다. "깃털을 쓴 게 아니라 그냥 부탁한 건데요~ 식탁보 깔면서 남자분한테 편지 전해주라고." "......." 아주 날 가지고 노는구나. 시몬은 속으로 한숨을 쉬며 편지를 열었다. "응?" 난데없이 편지에서 왕실의 문양이 보이는 순간, 시몬은 깜짝 놀랐다. 실수로 팔꿈치로 찻잔을 쳐서 차가 쏟아질 뻔했다. "이, 이거 뭐야?" 시몬이 당황하며 편지를 보였다. "드레스덴 왕실에서 온 편지를 왜 네가 가지고 있는 건데?" 그녀가 뭘 그런 걸 묻느냐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전해달라고 부탁받았으니까요." "??" 상아탑은 자치주이기도 해서 어떤 왕국의 간섭도 받지 않는 곳이다. 상아탑과 드레스덴 왕국이 친하다는 소리는 또 처음 들어본다. "드레스덴의 몰리 공주님. 아시죠?" 아는 사람의 이름이 나오자 시몬의 긴장감이 한층 내려앉았다. "알지." 아직도 선명히 기억난다. 그녀와는 결투평가 때 만났다. 그것도 오버로드의 데뷔전. 특례 10번이자 도플갱어 마법을 쓰는 '말콤 랜돌프'와의 결투평가. 그때 2학년인 '안드레' 왕자는 시몬이 자신의 동아리 '노블'의 가입 권유를 거절했다는 이유로, 흑기사의 아티팩트를 상대인 말콤에게 빌려줬었다. 그런데 시몬은 천 명이 보는 결투평가에서 말 그대로 흑기사 갑옷을 입은 말콤을 때려눕혔다. 이에 격분한 안드레가 시몬을 불러내 손찌검하려 했지만, 몰리 공주가 등장해 그를 연행해 갔다. 그 사건 이후 안드레가 왕자의 권력으로 저지른 비리들이 전부 밝혀졌고, 결국 안드레는 키젠에서 퇴학당한 걸로 알고 있다. -저희 오라버니나 드레스덴이 앞으로 시몬 님을 귀찮게 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제 이름을 걸고 약속드립니다. 저도 몰래 나온 거라, 나중에 정식으로 사과할 시간을 마련하게 해주세요. 그리고 마지막에 그녀는 이렇게 말했었다. 편지의 내용도 이 상황과 이어졌다. 친히 몰리 공주가 직접 쓴 편지였는데, 그때의 사과도 하고 싶고, 왕실에서 벌어지는 무도회에 시몬을 초대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세르네가 설명을 곁들였다. "공주님으로부터의 지명의뢰랍니다~ 키젠에 돌아가면 바로 관계자들이 시몬을 부를 거예요." '지명의뢰!' 학생이 기숙사 게시판에서 의뢰서를 가져가는 일반적인 의뢰와는 달리, 의뢰자가 직접 학생을 지목하는 게 지명의뢰였다. 키젠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권력자들만 가능한 걸로 알고 있다. 그리고 편지 내용을 보니 명목은 로열패밀리 경호였지만, 실상은 놀러 와서 자리를 빛내달라는 이야기였다. 드레스 코드까지 상세하게 적혀 있었으니까 말이다. "물론 저도 초대받았죠!" 세르네가 품에서 왕실 인장이 찍힌 편지를 흔들며 말했다. "키젠에서 가장 잘나가는 남학생과 여학생을 초대! 대충 그림은 그려지시죠?" 시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왕실에서의 초대장, 심지어 몰리 공주가 직접 보냈다면 거절한다는 선택지는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왕국과 척져서 좋을 게 하나도 없으니까. 주로 궁전 안에서만 돌아다닐 테니 매그너스도 걱정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다만 시몬은 뭔가 찝찝한 기분이었다. 셋째 왕자 안드레의 꼬장을 막아준 몰리 공주에게 인사를 드리러 가야 하는 건 맞지만, 굳이 또 자신들의 권력을 과시하는 용도로 키젠 학생들을 부르는 건 그렇게 탐탁지 않....... "그리고 이거! 지명의뢰비만 2,000골드래요." 탐탁지 않게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시몬은 아니었다. '감사합니다 공주님!' 안 그래도 슬슬 리처드에게 받은 용돈이 떨어져 가던 상태였다. '친위대'라는 강력한 신기술도 습득했겠다. 스켈레톤 구매에 좀 더 힘을 실어줘 보고 싶었다. 의뢰비 받으면 바로 로체스트에 가서 스켈레톤 아처를 좀 더 충원하고, 비싸겠지만 메이지도 준비해 보고 싶었다. 소환학은 돈 먹는 하마니까 예산은 많을수록 좋다. 시몬이 벌써 받지도 않은 돈을 어떻게 쓸지 상상에 빠져 있는데, 세르네가 불쑥 말했다. "그래서 할 거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시몬이 세르네를 보았다. "임무와는 별개로 질문이 하나 있는데." "말해봐요." "굳이 이거 말해주려고, 그 빚 도장까지 쓰면서 날 로체스트에 부른 거야?" 그냥 키젠에서 공부하다 보면 어련히 알아서 지명의뢰가 왔다고 이야기 해줄 텐데 말이다. 그때 세르네가 쿵! 소리를 내며 테이블에 팔꿈치를 올려 꽃받침을 하고는, 슬쩍 미소 지었다. "무도회에 가서 입을 옷 있어요?" "......." 있을 리가 없다. 시몬이 머뭇거리는 걸 캐치한 세르네가 눈웃음을 지었다. "그러니까 같이 쇼핑하러 가요~" 이쪽이 진짜 목적이었던 모양이다. 시몬이 미심쩍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냥 쇼핑만 같이하면 돼?" 그녀가 손바닥을 펼쳐 가느다란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대신 나 오늘 하루 에스코트해 주기. 짐 들어주기. 피팅하면 예쁘다고 해주기. 스킨쉽 해도 인상 안 찡그리기." 이야기만 들었는데 현기증이 났다. 딱 봐도 임무보다 이쪽이 더 힘들 것 같다는 강한 직감이 들었다. "빚 쿠폰 두 개 쓰면 생각해 볼게." "우와아~ 꼴랑 하루 여자애 비위 맞춰주는 게, 목숨 걸고 에프넬 성녀랑 싸우는 거랑 같은 취급이라구요? 양심이 있으신가요?"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어림도 없었다. "그 대신! 쇼핑에서 드는 돈, 시몬이 살 무도회복까지 전부 제가 지불할게요! 어때요?" 무도회복 비싸다고 들었는데. 또 쇼핑하면서 은근슬쩍 원하는 거 하나씩 사도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이쪽이 손해 보는 거래는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 알았어." "준비해요. 그럼 바로 출발하죠!" * * * 같은 시각. 학생들이 이른 아침 놀러 가든 공부하러 가든 바쁜 와중에도, 여전히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는 사람도 있었다. 크림색 컬러와 핑크 컬러가 어우러진 디자인의 방, 한편에는 프릴 달린 커튼이 보였고, 그 옆으로는 아기자기한 동물 인형들이 전시된 진열대가 보였다. 그리고 침대에 누워 있는 건 파자마를 입은 소녀였다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던 그녀는 책상에서 울린 통신 수정구의 진동 소리에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이 아침부터 뭐야." 잠이 덜 깬 눈으로 터벅터벅 걸어간 그녀가 통신 수정구를 작동시켰다. "네." -로레인 아가씨, 세르네 아인다르크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졸림 가득하던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순식간에 진지하게 변했다. "위치는?" -로체스트입니다. 현역 키젠 학생인 동행자도 한 명 있습니다. "또 세뇌했나 보네. 누구죠?" 통신 수정구에서 굳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시몬 폴렌티아 학생과 같이 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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