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237화 네프티스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었다. 이번 시험은 맨몸으로 진행되어서 그런지 크고 작은 부상자가 많았다. 벌써 환자의 수가 50명이 넘어섰는데, 다행스럽게도 사망자는 없었다. 무기에는 원격 통제 흑마법이 걸려 있어서, 대상자의 머리나 심장, 명치 등 중요한 곳에 날붙이가 부딪히기 직전에 멈추고, 해당 학생은 '사망으로 인한 탈락자' 처리되어 병동으로 텔레포트 되는 시스템이었다. 네프티스는 그런 병동의 상황을 둘러보러 왔고, 그런 김에 시몬에게 들렀다. 그러다 배고파져서 피어를 물어뜯었다는 게 그녀의 설명이었다. 피어는 여전히 화가 안 풀렸는지 시몬의 머릿속으로 노발대발하는 중이었다. "갸하항!" 네프티스는 속도 모르고 시몬의 병실 침대를 놀이터 삼아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있었다. 엄청나게 정신 사나웠지만 시몬은 애써 신경을 두지 않으며 병동의 마나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알고 보니 이번 시험은 898명 전부 진행하는 게 아니라, 300명 정도씩 나누어서 진행 중이었다. 화면에는 마지막 세 번째 그룹의 학생들이 1단계를 막 시작하는 중이었다. "혹시이~" 이불보에 들어가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던 네프티스가 고개만 쏘옥 내밀어 시몬을 보았다. "요즘 뭐 걱정거리 있어?" 시몬은 뜨끔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답했다. "키젠 학생이 걱정거리가 없다면 거짓말이라고 생각해요." "무서운 아저씨!" 맥락 없이 튀어나온 말에 시몬은 눈을 깜빡거렸다. "무서운 아저씨가 로크섬에 들어오려 하더라고!" "......!" 시몬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이번엔 참관자로 들어오려고 하길래 내가 빠꾸 먹였거든?" 대굴대굴 구르던 네프티스가 시몬의 다리 위로 올라왔다가 다시 굴러떨어졌다. "하지만 나도 막 전능한 신이 아니라서~ 모든 걸 막을 순 없어. 키젠은 복잡한 곳이고, 나도 키젠 일에만 온전히 신경을 쓸 수는 없거든! 내일 또 신성연방에 싸우러 가야 하고!" 그녀가 침대 아래로 폴짝 뛰어내리려고 했지만, 두르고 있던 이불이랑 옷이 같이 내려와서 고치처럼 되어 풀썩 쓰러졌다. 긴장했던 시몬이 작게나마 웃음을 터뜨렸다. "에프넬과는 휴전 중이지 않아요?" "그런 건 진작에 깨졌어. 지금 유지되고 있는 평화는 결국 또 누군가가 흘리고 있는 피 덕분에 만들어진 평화야." 이불의 덫에서 벗어난 그녀가 시몬의 침대로 '웃차' 소리를 내며 이불을 올려주었다. "결론은 무서운 아저씨를 조심하란 거야! 무서운 아저씨는 무서우니까!" "......아, 넵. 명심하겠습니다." 그녀가 팔을 척 세워서 '안뇽!'을 외치고는 병실 밖으로 나갔다. 시몬도 손을 흔들어주었다. 문이 닫히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네프티스 님이 지켜주신 거구나.' 아직 매그너스와 싸워서 이길 가능성은 요원하다. 만약에 배신의 군단이 전 세상에 알려지게 되면, 아무리 네프티스라고 해도 도울 방도가 없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 소년! 결국 정체가 드러나는 건 필연이다!] 피어의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가는 상황에 집착할 필요 없다. 중요한 건 너 자신이다! 네가 군단장이란 게 만천하에 알려졌을 때 네가 어느 위치에 올라갔고! 어떤 실력과 인맥을 갖췄으며! 어떤 업적을 세웠느냐에 따라 세상이 너를 대하는 취급도 달라질 것이다!] 이거야말로 백번 맞는 말이었다. 시몬이 고개를 끄덕이며 주먹을 꾸욱 쥐었다. "더 열심히 공부할게요. 피어." * * * 병실에서 안정을 취하는 김에 다른 친구들의 경기도 쭉 지켜보았다. 이번 방학 동안 누구보다 성장한 카미바레즈는 감탄이 나오는 활약을 했다. 무기가 무한히 떨어지는 3단계 난관에서, 그녀는 피의 회오리를 일으키고 그 안에 본인이 들어가 빠르게 이동했다. 날아오던 무기들은 회오리에 휘말려 날아가고, 그녀는 힘이 떨어지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붉은 버저를 누르고 3단계를 당당히 통과했다. 딕은 역시나 명불허전이었다. 그는 이 3단계 시험의 시스템을 이용했다. 3단계는 지나가는 모든 마나가 있는 생명체에게 마나 센서가 반응해 무기가 떨어지는 방식이었다. 딕은 도착하자마자 움직이는 태엽 장난감들을 보내서 함정의 원리를 파악한 다음, 안테나처럼 생긴 피뢰침을 꺼냈다. 주위의 마나를 끌어모으는 발명품이었다. 딕 본인은 마력 차단 망토를 몸에 뒤집어쓰고, 피뢰침을 바닥에 딱 붙인 채 뒤로 걸어갔다. 마나 센서가 작동하고, 무수한 무기들이 딕이 쥐고 있는 피뢰침 쪽으로 떨어져 내렸다. 정작 딕 본인은 멀쩡했다. 센서가 마력이 감지되는 안테나 쪽으로 우선 공격을 시도하기 때문이었다. -하하하하! 이게 바로 딕 스텔스 모드다! 그렇게 꼼수로 통과해서 빨간 버저를 누른 딕은, 마지막 4단계로 갈 건지 여기서 시험을 멈출 것인지 묻는 물음에 일말의 고민도 없이 활짝 웃으며 시험종료를 선택했다. '딕은 참 한결같다니까.' 지켜보던 시몬은 웃음만 나왔다. 그렇게 모든 시험이 끝나고, 세 그룹의 결과가 합쳐져 순위가 정해졌다. 시몬 폴렌티아 - 10위. 카미바레즈 우르슬라 - 98위. 메이린 빌렌느 - 220위. 딕 헤이워드 - 564위. 시몬은 3단계에서 블러드 골렘을 소환하느라 30분이나 소모해 버린 게 컸지만, 마지막 4단계에서 놀라운 뒷심을 발휘하며 당당히 최상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메이린은 페이스 조절이 아쉬웠다. 3단계에서 본인의 모든 힘을 쏟아붓는 바람에, 4단계에서 칠흑을 회복하느라 시간이 걸려서 순위가 급락했다. 반면에 첫 번째 시험에서 중위권이었던 카미바레즈는 당당히 Top100을 거머쥐며 크게 발전한 모습을 보였다. 이렇듯 시험 테마에 따라 학생들의 순위는 큰 폭으로 변동했다. 이번 시험에서는 사령학과 칠흑역학 지망생들이 전체적으로 높은 성적을 따냈고, 맹독학 지망생들은 상대적으로 성적이 떨어지는 경향을 보였다. 그리고 이번 시험의 최종 1위는 역시나 거인 혼혈 '샤텔 마에르'. 키젠 최고의 방어력이라고 평가받는 그가, 방어와 유지력의 테마인 이번 시험에서 1위를 차지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2위와의 격차도 심했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로레인과 세르네는 시험 순위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두 사람 다 3단계만 통과하고 시험을 끝내 버렸다. 두 사람은 항상 시험 외에 다른 목적이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렇게 모든 시험이 끝났고, 3단계 난관을 통과하지 못한 탈락자 48명에 더해, 가장 늦게 3단계를 클리어한 2명, 총 50명의 학생이 키젠 교복을 빼앗기고 퇴학이 확정되었다. '......진짜 키젠의 수준이 높긴 높구나.' 좀 심하지 않나 싶을 정도로 어려웠던 3단계 시험을 대부분의 학생들이 통과했다. 다들 3단계에서 많이 헤매고 상처도 입긴 했지만, 딕의 경우처럼 어떻게든 해결책을 만들어냈다. 사실은 숨겨진 요소도 하나 있었다. 시몬은 미친 듯이 달리느라 전혀 몰랐지만 중간중간 무기가 떨어지지 않는 '휴식구간'도 있었다. 이 구간을 침착하게 잘 활용하면 어떻게든 통과하는 게 가능했다. 휴식구간을 사용하지 않고 그냥 무식하게 한 방에 통과한 사람은 시몬을 포함해 키젠 내에 딱 세 명뿐이었다. 그렇게 2차 종합 흑마법 평가도 엄청난 호응과 이슈를 불러일으키며 성황리에 종료되었다. 이번 키젠 세대는 '역대급'이라는 기사들이 암흑연합 전체에 퍼져 나갔고. 벌써부터 2년 뒤의 스카웃 전쟁은 과열될 기미를 보였다. * * * 시몬은 바로 다음 날 퇴원해서 기숙사로 돌아왔다. 오늘부터는 주말이고, 키젠에서는 '임무평가' 시즌을 선언했다. 주말 2일을 포함해 평일 2일까지 최대 4일짜리 임무평가였다. 키젠에서는 이렇게 큰 시험이나 훈련 뒤에, 학생들의 피로를 풀 의도로 임무평가 시즌을 배치하곤 했다. 미리미리 어려운 임무를 클리어해 둔 학생들은 가벼운 로크섬 쪽 임무를 맡으면서 쉴 수 있었지만, 그동안 쉬운 임무만 맡은 학생들은 다소 컨디션이 안 좋더라도 슬슬 파란색 의뢰서나 빨간색 의뢰서까지 고려해야 할 상황에 놓였다. 그간 착실하게 임무평가를 수행해 온 시몬은, 이번 시즌만큼은 로크섬의 간단한 임무를 하면서 푹 쉬기로 했다. 부상에서 막 회복한 뒤였고, 무엇보다 로크섬 밖으로 나가면 매그너스 군단의 위협이 있을지도 모른다. 네프티스와 키젠이 지켜주는 안전한 로크섬에 있는 게 최선이었다. '당분간 훈련은 좀 쉬고, 기숙사에서 저주학이랑 필기 위주로 공부하자.' 오랜만에 마음이 편했다. 반면 딕은 퀭한 눈으로 아침 일찍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 샤헤드 왕국 갔다 온다." "와, 멀리 가네." 그동안 로크섬 임무만 했던 딕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번에 좀 어려운 걸 맡아야 다음 임무평가 때의 부담이 줄 것이다. 그리고 메이린과 카미바레즈는 둘이서 파티를 맺고 상단 호위 임무를 맡기로 했다. 시몬은 로크섬 임무를 맡을 생각이었기에 계속 여기 남기로 했다. "......으으 귀찮아. 그럼 나 먼저 씻으러 간다." "응." 그렇게 딕은 화장실로 향했다. 카쟌도 비공개 임무를 수행하러 떠났다. 시몬은 홀로 책상에 앉아 바힐의 저주학 책을 펼쳤다. 팔랑! '응?' 그런데 열어둔 창가로 팔랑거리며 편지 한 장이 들어왔다. 겉 포장지부터가 귀티가 철철 흐르는 편지였다. 왕의 칙서 같은 게 이런 느낌일까. 시몬이 편지 봉인을 뜯고 종이를 꺼내 보았다. <나한테 빚진 거 잊지 않으셨죠? 쿠폰 도장 하나 사용! 로체스트 정오까지 내려와 주세요. 기다릴게요.> <추신 : 이런 것도 굳이 말해줘야 하나 싶지만, 센스 없게 교복 입고 오지 마요.> 시몬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이거 설마.' 편지를 뒤집자 하얀 깃털이 편지 봉투에 달려 있었다. 세르네가 보낸 게 틀림없다. '정말 안 가고 싶다.' 세르네라는 이름만 들어도 부담스럽다. 요즘은 같이 접촉할 일이 많아서 좀 나아지긴 했는데, 기왕이면 그렇게 엮이고 싶지 않은 게 솔직한 바람이었다. 계속 공부나 하기로 한 시몬은 깃펜을 꺼내 책에 밑줄을 그었다. 스윽 스윽. ......신경 쓰인다. 편지를 신경 안 쓰려고 했지만 일단 양심에 찔렸다. 이대로 세르네의 말을 묵살해 버리기엔 그녀에게 많은 도움을 받아왔다. 섬 생존평가에서도. 체내 칠흑 분화를 배울 때도. 그리고 성녀 사태에서도. 그녀의 도움이 없었다면 위험천만했을 상황도 있었다. "헤이~ 뭘 그렇게 한숨을 푹푹 쉬고 있냐?" 대충 빠르게 씻고 나온 딕이 시몬의 편지를 홱 빼앗아 읽었다. 장난스럽게 편지를 읽어내리던 그의 표정이 어느 한순간을 기점으로 딱딱하게 굳어져 갔다. "......크, 크윽!" 편지를 든 딕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누가 봐도 여자 글씨체잖아! 주말에 로체스트? 교복 입지 말라면 뭐, 남친룩으로 세팅하란 건가? 와 씨......!" 질투와 배신감에 사로잡힌 딕이 달려들어 시몬의 머리에 헤드락을 걸었다. "야 이 치사한 놈아! 사귀는 여자애 없다며! 순순히 불어! 누구야!" "윽! 아파 딕!" "누구는 샤헤드까지 가는데 누구는 여자 만나러 가냐? 연애애애? 커프으으을?! 커플은 다 뒤져야 해! 커플에겐 응징뿐이다아!" "아프다니까! 빨리 풀어줘!" 하지만 질투에 눈이 먼 딕은 전혀 풀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때 딕이 헤드락을 건 사이로 시몬의 팔이 불쑥 튀어나왔다. 동시에 시몬의 다른 쪽 팔이 딕의 오금을 붙잡았다. 부우웅! "!" 딕의 시야가 180도로 빙그르르 회전했다. 어느새 정신 차리니, 딕은 자신의 침대에 내팽겨져 있었다. "하지 말라고 했지." 시몬이 가볍게 손을 탁탁 털며 말했다. '크윽!' 역시 힘으로는 저 무식한 촌놈을 이길 수 없었다. 옷을 입으면 야위어 보이는 타입이라 곱게 자란 귀공자처럼 보이는 거지. 사실 옷 안에는 탄탄한 근육질이었다. 딕이 허망한 표정으로 침대의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흑흑. 더러운 세상! 외모 지상주의!" 딕이 주먹으로 침대를 팡팡 치며 오열하자 시몬이 한숨을 쉬었다. "그만해. 너 오늘 빨리 가봐야 한다며." "......더러운 세상! 확 멸망해 버려라!" 딕이 투덜거리며 일어나 여행 때 입을 옷가지를 챙겼다. 시몬도 자신의 장롱을 열었다. '교복 말고 다른 옷은.......' 키젠 교복, 모험가 복장, 일상용 로브, 신성연방에서 산 로브, 외출용 로브. 초라한 라인업이었다. "......딕?" "뭐." 딕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시몬은 무안한 미소를 흘리며 옆머리를 긁적였다. "나 오늘 하루만 옷 좀 빌려주면 안 될까?" 딕이 분노하며 달려들었다. 남자는 질 줄 알면서도 싸워야 할 때가 있는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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