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1328화 별의 성녀, 레테 샤르데나가 참전했다. 아스페리아가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반가워요~ 당신이 요즘 신성연방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다는 별의 성녀로군요. 우리는 초면이네요. 그렇죠?” “…….” 레테는 대답하지 않고 경계하는 눈빛으로 뒤로 물러나 시몬 쪽으로 다가갔다. 시몬이 그녀의 귓가에 상황을 빠르게 요약해서 이야기했고,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영원의 성녀, 아스페리아.” 그녀가 무거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직영지로서 권리를 양도받은 아록에 대한 불법적이고 기만적 통제, 그리고 그걸 조사하러 온 수사관의 입을 강제로 다물게 하려 한 정황까지.” 그녀의 눈빛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당신은 이 땅을 다스릴 자격이 없어요. 하늘섬으로 가서 조사를 받아주셔야겠슴다.” “으흠-?” 아스페리아가 눈을 흘기며 입꼬리를 올렸다. “같은 성녀끼리 이야기해 보지도 않고, 단순히 수사관의 말만 듣고 모든 걸 판단하다니요. 두 분은 아주 신뢰하는 관계인가 보네요.” “닥치고.” 레테가 팔을 뻗었다. 밝았던 아록의 하늘이 갑자기 그림 같은 밤하늘로 바뀌며 무수한 별들이 번쩍이기 시작했다. “결정해. 맞고 갈지, 그냥 갈지.” 고고고고고! 전의를 불태우는 레테를 보며 시몬은 땀을 삐질 흘렸다. 왜 이렇게 화가 난 것 같을까. “본녀가 조사를 거절하면 어떻게 되는 거죠?” 아스페리아가 빙글빙글 웃으며 묻자, 레테가 즉답했다. “전쟁.” 시몬이 자세를 낮추고, 시몬을 돕는 낙원의 여섯 신수인 지라타스도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때 아스페리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가소롭긴.”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 그녀의 전신에서 방대한 신성이 폭발하며 홍색 잿가루가 광풍처럼 휘몰아쳤다. 아록 전체를 뒤덮을 듯이 퍼져 나간 잿가루는 그녀의 지배를 받는 두 낙원의 신수들은 물론, 다른 숲의 모든 신수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신수들이 모두 잿가루의 영향을 받아 눈을 번뜩이기 시작했다. 시몬의 이마에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어이가 없네. 지금까지도 전력이 아니었던 거야?’ “시몬.” 레테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제 뒤에 붙어 있어요.” 시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테, 그리고 불안정한 성자가 된 자신. 수적으로는 2:1이지만, 여기는 아스페리아의 홈그라운드인 아록. 승산을 장담할 수 없었다. “후훗.” 아스페리아가 공격을 준비하듯 서서히 손을 들어 올렸다. 두 사람이 신성을 일으켜 대응하려는 그 순간. 따악― 그녀가 손가락을 튕겼고, 세계를 뒤덮을 기세로 퍼져 나가던 홍색 잿가루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만두죠.” “아……?” “하늘섬의 의심을 받게 된 지금, 감정에 휩쓸려 전쟁을 벌인다고 해서 본녀에게 이득이 되지는 않으니까요.” 어느새 두 낙원의 신수에서 흘러나오던 홍색 빛깔도 사라지고, 본래의 외형으로 돌아왔다. 시몬도 심장을 옥죄는 듯한 압박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주위를 가득 채우던 아스페리아의 힘이 흐려지는 것을 감지한 레테도 팔을 내렸다. 그녀의 얼굴에 의외라는 표정이 떠올랐다. “조사를 받으시겠단 검까?” “네에.” 아스페리아가 태연히 미소 지으며 두 팔을 벌렸다. “나는 결백해요. 에프넬과 하늘섬이 어떤 의심을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그 의심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는 영원히 확보하지 못하겠죠.” “…….” 아스페리아는 죄를 시인하지 않고, 여전히 죽은 결사의 일원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운 채 혐의에서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그녀는 이미 만반의 준비를 마친 듯 보였다. “물론, 나에게도 타격이 있겠네요. 아록인들의 정신을 지배했다는 몇 가지 직접적인 죄는 적용될 테고, 나는 아록의 지배권을 잃게 되겠군요. 그 또한-” 그녀가 턱에 손을 얹었다. “감당할 만한 리스크. 라고 해둘까요?” “…….” 그녀가 시몬을 바라보았다. “잘됐네요, 나의 영웅. 당신의 뜻대로 아록을 해방하게 돼서요.” 시몬이 눈에 힘을 주었다.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당신의 진짜 목표는 뭡니까? 아스페리아.” “목표?” 그녀가 손뼉을 쳤다. “그야 ‘행복’이죠!” 시몬은 어처구니가 없는 표정을 지었다. 결국 행복으로 귀결되는 것인가. “나는 남들보다 행복의 기준이 아주아주 높아요! 더 많은 돈, 더 많은 권력, 더 많은 명성! 나는 고작 성녀 따위로 끝날 사람이 아니에요!” 그녀의 눈빛이 번들거렸다. “가장 높은 곳까지 가겠어요. 그게 내가 행복해지는 유일한 길이에요.” 그녀의 야망이 어느 정도인지 시몬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즉각 반발심이 치고 올라왔다. “당신의 행복을 위해 계속 다른 이들의 행복을 짓밟겠단 겁니까?” “오, 나의 영웅. 그건 오해예요.” 그녀가 가슴에 올렸다. “이건 ‘행복의 교환’이에요. 아록에 오는 사람들은 모두 자기 힘으론 행복하지 못하는 불쌍한 자들이죠. 행복을 모르는 자들에게 행복을 가르쳐 주고, 그 대가로 돈을 받아 본녀도 행복해지죠. 단지 그뿐인 이야기예요.” 그녀가 시몬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본녀의 행복을 위해 필요한 것들에, 당신도 들어가게 됐어요. 나의 영웅.” 이건 또 무슨 헛소리야. 시몬이 눈을 깜빡이며 그 말을 곱씹고 있을 때. 화르르륵!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옆에서 따끔거리는 송곳 같은 시선이 느껴졌다. “당신, 그 잠깐 사이에 또……!” “레테, 오해야.” 시몬이 재빨리 말했다. 아스페리아가 오호호 웃었다. “무슨 말이에요, 나의 영웅. 대뜸 본녀의 힘이 필요하다면서, 움직이지 못하는 본녀의 가슴에 손을 올리거나, 입술을 훔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잖아요? 그 전에 목표를 이뤄낸 것 같아서 유감이지만.” “그건……!” 시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고오오오오오! 옆에서 노려보는 레테의 눈빛에는 경멸과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 시몬은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럼 패자는 자리를 비워야겠죠.” 아스페리아가 등을 돌려 걸어갔다. “조사에서 도망칠 생각은 없어요. 본녀가 제 발로 직접 하늘섬에 행차하겠습니다.” 두 거대한 낙원의 신수가 울음소리를 내뱉으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 외의 그녀를 충실히 따르는 다른 신수들도 하나둘 아스페리아에게 합류했다. 아스페리아의 뒷모습은 어쩐지 홀가분해 보였다. “레테, 이대로 놔줘도 괜찮아? 만약 도망치면…….” “그럴 리는 없슴다.” 레테가 팔짱을 꼈다. “도망치면 성녀의 좌를 박탈당하고, 모든 연방의 전력이 아스페리아를 추격할 테니까요. 목격자인 우리를 전부 죽이거나, 조사를 받거나.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어요.” “자, 잠깐만요!” 그때 벌거벗은 아록인들이 퀭한 눈으로 우르르 뛰어 들어왔다. 아스페리아가 완전히 아록에서 힘을 거두어들이자 정신을 차린 사람들이었다. “아스페리아 님! 저희를 버리지 마십시오!” “같이 데려가 주세요! 목적지가 아록이 아니어도 상관없습니다!” “행복! 부디 행복을!” 그들은 아스페리아에게 세뇌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그녀를 따라가겠다고 쫓아온 사람들이었다. 그 수는 아주 많지 않았지만, 아스페리아는 친절하게 웃었다. “그럼요. 우리 함께 서로가 원하는 행복을 위해 노력해 봐요.” 홍색 잿가루가 그들의 머리 위로 흩날리자, 아록인들은 황홀한 표정이 되어 아스페리아를 따랐다. “……아스페리아 혼자 가는 건 문제없지만, 저들까지 보내면 유리한 증언을 하게 될 검다.” 레테의 그 말에 시몬은 고개를 저었다. “어쩔 수 없어. 본인의 선택이야.” 그의 시선이 옆으로 향했다. 아스페리아의 권능에서 완전히 해방된 아록인들이 다른 수련자들과 얼싸안으며 기뻐하는 모습이 보였다. “아버지! 어머니!” “그래!” 그중에는 아록의 안내원도 있었다. 아스페리아의 권능에 종속되는 길을 택한 사람이 있었지만, 그것을 포기하고 자유를 되찾으려는 사람이 더 많았다. 그 사람들이 아스페리아의 재판에서 증언을 해줄 것이다. “아 참, 나의 영웅.” 그때 아스페리아가 뒤를 돌아보며 시몬을 향해 미소 지어 보였다. “본녀의 힘을 재현한 그 정체불명의 힘, 인상적이었어요. 본녀가 본 것들은 비밀로 할게요.” “?!” 시몬은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의아함을 느꼈다. 그때 그녀가 미소 지었다. “그쪽이 본녀에게 ‘이익’일 것이라고 판단했으니까. 경쟁자가 늘어나면 곤란하겠죠?” “…….” 레테의 입술이 댓 발이나 튀어나왔다. * * * 며칠의 시간이 더 지나고, 아록 사태가 비로소 수습되었다. 아록은 완전히 개방되었고, 모든 아록인들이 정신을 차리고 깨어났다. 다만 상처를 입거나 정신적 후유증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일단은 수련호수 인근에서 휴식을 취하도록 했다. 아스페리아가 사라지자, 숲에는 다시 정령들이 돌아오기 시작했으며 신수들도 자유를 되찾았다. “네, 뭐. 알겠습니다. 네.” 통신 수정구를 내려놓은 신의 손 모제가 시몬을 향해 말했다. “성자님, 아스페리아가 하늘섬의 좌동성당에 스스로 출석했다고 합니다.” “응. 다행이네.” 시몬은 과도한 힘을 사용한 탓에 침대에 누워 있었다. 여기는 수련호수의 천막. 이제 아록의 율법과 규칙이 사라졌으니, 주거 시설을 갖는 게 허용되었고 이렇게 천막도 칠 수 있었다. 거울을 보며 머리를 정돈하던 하미엘이 뒤를 돌아보았다. “아스페리아 성녀님은 성녀직을 박탈당할까요?” “그건 아닐걸.” 모제가 눈을 감았다. “모든 건 결사의 짓이고, 본인의 믿음에 근거한 일이라고 끝까지 잡아떼겠지. 성녀에게는 처벌을 피할 방법이 많고, 애초에 그 정도 경력의 고위 프리스트는 쉽게 처벌받지도 않아. 아록의 지배권을 뺏기고, 당분간 하늘섬의 명령에 따라 전장을 떠돌아다니는 정도일 거다.” “그래도 다행이네요.” 하미엘이 말을 받았다. “어쨌든 아록에 박혀 있는 성녀를 끄집어내서, 앞으로 결사와의 전쟁에서 사용할 전력으로 삼은 거잖아요.” “전력이 될지, 독이 될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 워낙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니.” 모제와 하미엘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시몬도 외출 준비를 마쳤다. 며칠간 계속 잠만 잔 탓인지 슬슬 몸을 움직이고 싶었다. 수련자들과 아록인들의 동태도 확인해 봐야 했다. 물론 그 전에. “레테는 어디 있어?” * * * 째액 짹 짹! 한적한 아록 외곽은 여전히 호수가 잔잔히 물결치고 새들이 지저귀는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전과는 달리 천막이 여러 개 설치되어 있었고, 여러 아록의 신수들이 물을 마시며 이곳에서 쉬고 있었다. ‘찾았다.’ 그곳으로 들어온 시몬은 눈처럼 하얀 머리를 뒤로 묶은 레테를 발견했다. 평소의 단정한 에프넬 교복 차림이 아닌, 편안한 셔츠와 반바지 차림이다. 간만의 또래 소녀들 같은 발랄한 의상이었다. 그녀는 이번 일로 상처가 난 신수의 몸에 붕대를 감아주고 있었다. “이제 괜찮을 거야.” 레테가 신수의 등을 두들기자 하마 신수가 고맙다는 듯 ‘뿌우우!’ 하고 소리를 내며 다시 호수를 지나 아록 내부로 돌아갔다. 그녀가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그녀가 다니는 곳마다 신수들이 넘쳐났다. 새들이 그녀의 머리 위에서 지저귀고, 어깨에는 다람쥐처럼 생긴 신수가 밤을 갉아 먹고 있었다. 레테는 신수들을 쓰다듬거나 보살피다가 옆 천막으로 걸어갔다. “몸은 좀 어떠세요?” 그곳에는 정신적 후유증을 치료받는 아록인들이 누워 있었다. 정신을 맑게 해주는 힘을 가진 신수가 힘을 일으켜 아록인들을 치유하고 있었다. “정말 고맙습니다. 살아갈 힘을 얻었습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은혜라뇨. 성녀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레테는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언니! 성녀 언니!” “나 종이 접어서 토끼 만들었어!” 아록에서 태어난 아이들도 활짝 웃으며 레테에게 달려왔다. 레테는 쪼그려 앉아 화사하게 웃으며 아이들과 놀아주었다. 영원의 성녀 아스페리아가 떠난 뒤의 아록을, 별의 성녀 레테가 돌보고 있었다. 덕분에 아록은 빠르게 상처가 아물어가고 있었다. “흠흠.” 그리고 시몬이 인기척을 내며 레테에게 다가왔다. “저기, 레테.” 그러나 레테는 말을 못 들었는지, 아니면 시몬을 본체만체하는 건지 아이들과 놀기에 바빴다. 그리고 아이들을 부모에게 보낸 뒤에도, 레테는 옆에 있는 신수들의 붕대를 갈아주는 데 집중했다. “레테?” “…….” 쌀쌀맞다. 사람들을 맞이할 때는 웃고 있었지만, 그녀의 이마에 어딘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시몬이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말했다. “저기, 레테. 있잖아…….” “이야기는 들었슴다.” 자리에서 일어난 레테가 뒷짐을 지며 걸어갔다. 이내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두더니 아록의 얕은 호수 위를 맨발로 참방참방 걸었다. “성녀의 정수 잔재를 모두 모아서 성자가 되기 위해, 성녀들을 만나는 여정을 벌이고 있다면서요.” “맞아.” “……헤실헤실.” 그렇게 말한 그녀가 새침하게 입술을 삐쭉였다. “착각하지 마십쇼. 성녀들이 당신을 주목하고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아마도 그 성자의 힘 때문일 검다.” “응, 그럴지도 모르겠네.” “그러니 잘난 척하지 말라는 검다! 저는-” 그녀의 목소리가 아주 작게 줄어들었다. “성녀가 되기 전에도……!” “응. 되기 전에 뭐가?” 시몬이 눈을 깜빡이며 묻자, 한참을 물끄러미 시몬을 응시하던 레테가 고개를 대차게 돌려 버리며 소리쳤다. “아무것도 아님다!” ‘아니, 왜 화를 내.’ 시몬이 쓰게 웃으며 레테를 따라갔다. “무슨 말 하려고 했어? 레테.” “몰라!” 그녀가 빽 소리 질렀다. 시몬은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일단 화를 가라앉힐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참, 레테.” “?” 시몬이 미소 지었다. “다음 성녀를 찾으러 가기 전에 시간이 조금 남았는데, 혹시 가보고 싶은 곳 있어?” 그 말을 들은 레테가 비로소 눈을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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