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1324화 모제와 하미엘은 모두 물러나고, 이제 시몬만 욕탕에 몸을 잠근 채 기다리고 있었다. 차박 차박. 젖은 계단을 걸어오는 소리가 점점 선명해졌다. 누가 오는지 알고 있으면서도, 시몬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 계셨군요. 나의 영웅.” 잠시 후 부드러우면서도 사람을 홀리는 듯한 음성이 귓가에 스며든다. 시몬은 그녀를 돌아보지 않고 입을 열었다. “그라툴라 미 키빌리스. 직접 눈을 마주하고 인사드리지 못하는 점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러자 그녀의 살랑거리는 웃음소리가 응답하듯 돌아왔다. “몸은 가운으로 가렸으니 돌아봐도 괜찮아요.” 그 말에 시몬이 뒤를 돌아보니, 정말로 그녀는 긴 머리를 늘어뜨린 채 가운으로 몸을 감싸고 있었다. 그녀가 으흠- 하고 은근한 눈웃음을 흘렸다. “본녀도 탕에 들어가도 될까요?” “그, 그렇게 하시죠.” 시몬이 뻣뻣하게 답했다. 조용한 적막 속에서 차박 차박 발소리가 들리더니, 곧 옆에서 참방- 하고 물소리가 울려 퍼진다. 탕 안으로 들어온 그녀가 ‘하아-’ 하고 나른한 음성을 흘렸다. “전투를 마치고 푹 쉬고 계셨을 텐데, 본녀가 괜한 방해를 한 건 아닌지 걱정이네요.” “무슨 말씀을.” 시몬은 긴장되는 감정을 가라앉혔다. 아스페리아와 같은 권능을 가진 자를 상대로, 감정을 드러내는 건 약점을 드러내는 것과 같다. 평정을 되찾듯 차분히 숨을 고른 뒤, 이내 한결 또렷해진 눈동자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감사합니다. 성녀님께서 절 믿어주신 덕분에, 가짜 성녀를 쓰러뜨릴 수 있었습니다.” “그건 본녀가 드리고 싶은 말씀이에요.” 그녀가 가슴에 손을 얹고 우아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위기에 빠진 아록을 구해주어서, 아록의 지배자로서 진심 어린 감사의 말씀을 올려요.” 현역 성녀, 그것도 세상 두려울 게 없는 베테랑 성녀가 이 정도의 격식을 차리는 건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시몬도 황급히 따라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녀가 홍조 띤 얼굴로 시몬을 올려다보았다. “목숨을 구해주셔서, 본녀 개인적으로도 감사드려요.” 흔들리지 말자. 시몬은 연신 머릿속으로 되뇌이며 입을 열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성녀님께 몇 가지 여쭈어도 괜찮겠습니까?” “물론이죠.” “어쩐 연유로 가짜 아스페리아에게 붙잡혀 힘을 빼앗기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그녀가 눈을 살짝 감으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부끄러운 일을 들추시네요. 하지만 영웅께서 원하신다면…….” 아스페리아의 말에 따르면, 가짜 성녀는 처음엔 성녀의 집행자로 변장해서 아록에 잠입했다고 한다. 아스페리아를 무력화시키는 데 사용한 것은 독 같은 게 아니라 바로 ‘탕’이었다. 수면 효과가 있는 약제를 탕에 입욕제와 함께 넣어두었고, 하필이면 그 전날 교황의 지시로 큰 전쟁을 치르고 돌아온 아스페리아는 경계심 없이 그곳에 들어갔다가 뜨거운 온기와 함께 깊은 잠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다 눈을 뜨니 두 팔은 잘려 있었으며 유적 깊은 곳에 유폐된 꼴이 됐다고. “이 평화로운 아록에서 그런 일을 당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모든 건 힘을 소진한 본녀가 방심해서 벌어진 일이에요.” “……그렇게 된 거군요.” 그로부터 그녀는 거의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갇혀 있었다고 한다. 가짜 성녀는 하늘섬의 차출 명령을 이런저런 핑계로 거부하며 아록에 틀어박혔고, 반드시 싸워야만 하는 경우에만 나섰는데, 대부분 결사와 관련된 일만 도맡아 했다. 결사와 가짜 성녀는 한통속이었으니, 그녀가 움직이면 결사가 도망치는 것으로 승리하는 연출은 충분히 가능했으리라. “그렇다면 성녀님. 혹시…….” “나의 영웅.” 그녀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시몬의 말을 가로막았다. “등 밀어드릴까요?” 시몬은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 지금 뭐라고? “거두어주십시오. 그런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는……!” “몸은 충분히 덥히신 것 같아서요.” 그녀가 가져온 목욕 바구니에서 자연 재료로 만든 타월을 꺼냈다. “아록에서는 이 대나무로 만든 타월로 몸을 미는 게 관례랍니다. 이건 본녀 개인적인 감사의 의미예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녀가 촉촉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수건으로 몸을 가려도 좋아요.” ‘그런 문제가 아니라니까!’ 시몬이 이마를 짚었다. 설마 이렇게 나올 줄이야. * * * 사실 선택권이 없는 문제였다. 일개 프리스트 신분인 시몬은 성녀가 까라면 까야 하는 입장. 결국 시몬이 수건으로 하반신을 가리고 탕 밖으로 나왔다. 아스페리아가 여기 앉으라며 뒤집어놓은 바구니 위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스륵- 그녀는 풀어헤친 머리가 방해되지 않도록 느긋하게 묶은 다음, 시몬의 등 뒤에서 다소곳이 무릎을 대고 앉은 뒤 정성스럽게 타월로 시몬의 등을 밀어주기 시작했다. “시원하신가요?” “……네, 넵! 감사합니다!” 성녀가 일개 신도의 목욕을 돕다니, 누군가 봤다면 천인공노할 일이라며 신성연방 전체가 뒤집힐 문제였으리라. 시몬도 그 상황을 생각하자 어쩐지 기분이 이상해졌다. 샤악 샤악- 시몬의 등을 밀어주며 그녀가 입을 열었다. “본녀도 한 가지 영웅께 용서를 빌고 싶은 게 있어요.” “네?” “영웅을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은 마음에, 영웅이 소속된 카톤 지방의 프리스트들을 전부 조사해 보았어요. 그런데-” 그녀의 목소리가 나긋하게 울려 퍼졌다. “시온 마르칸토니라는 이름만 서류상으로 존재할 뿐, 실제로 활동하는 분은 아니더군요.” 시몬의 심장이 덜컹했다. 머릿속의 피가 역류하는 기분이 들었다. “죄송해요. 마음대로 조사해서.” ‘……역시 예사내기가 아니네.’ 겉보기엔 젊어 보이지만, 시몬보다 나이나 경험도 훨씬 많고 오랫동안 아록을 통치해 온 거물 중의 거물. 지금 이렇게 등을 밀어주고 있는 것도, 결국은 그녀가 자신의 직위를 이용해 시몬을 정신적으로 불리한 상황에 몰아놓고 밀어붙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정체를 드러내라는 거겠지.’ 시몬은 속으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시몬도 그동안의 경험으로 담은 충분히 커져 있었다. “저 또한 정체를 숨긴 점, 성녀님께 용서를 구하겠습니다. 성녀께서도 예상하셨다시피 저는 하늘섬에서 온 수사관입니다.” 시몬은 잠시나마 하늘섬에서 레테와 함께 수사관으로 활동했던 경험을 살려 설명했다. “최근 아록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전령 실종 문제에 대해 보고받았고, 해당 사건을 수사하러 아록에 잠입한 겁니다.” “그랬군요.” 그녀는 태연한 반응이었다. “수사에 이어서 사건까지 직접 해결하시다니, 정말로 대단하세요.” 믿어주는 건가 하고, 안심하는 사이 시몬은 움찔했다. 갑자기 그녀의 두 손바닥이 시몬의 등에 살짝 닿았다. “영웅께서 본녀의 권능을 잠시 빌려달라고 하셨을 때 많이 놀랐어요. 그건 빌려준다고 해서 빌려 쓸 수 있는 힘이 아니니까요. 그런데 그 힘으로 가짜 성녀의 권능을 무력화했다는 말을 듣고 정말 놀랐어요. 영웅께서는 대단한 ‘그릇’을 가지고 계시네요.” “성녀님.” 스륵. 시몬이 천천히 등을 돌아서 똑바로 그녀를 보았다. 돌발적인 시몬의 행동에 그녀가 깜짝 놀라며 빨개진 얼굴로 제 가슴께를 가렸다. 하지만 시몬의 흔들림 없는 시선은 똑바로 그녀의 얼굴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시몬은 그녀의 몸에도, 민망함으로 붉어진 얼굴에도 관심이 없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상기시켜 드리기 위해 감히 한 말씀 올립니다. 성녀님께서는 저희 수사관들이 수사 중이던 최중요 용의자를 살해하셨습니다.” “…….” “그렇기에 저희는 성녀님께 진술을 요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제야 아스페리아도 부끄러운 표정은 그만두고 두 팔을 늘어뜨린 채 시몬과 똑바로 눈을 마주했다. 이내 시몬이 말했다. “왜 그녀를 죽였습니까?” * * * 아록의 궁전에도 접견실은 있었다. 외부인들에게 개방되어 묵을 수 있는 일종의 숙소 같은 장소였다. 바로 이곳에서. “하하하하!” “마셔라!” 수련자들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자리 앞에는 온갖 호화스러운 음식과 향기로운 술들이 가득했다. 수련에 집중하며 재산과 욕망에 거리를 두던 수련자들도 오늘만큼은 승리를 만끽하고 있었다. “살다 보니 이런 일이 다 있네!” 이 자리에서 가장 신난 탈로크가 잔을 높게 들어 올리며 외쳤다. “무욕의 성지 아록에서 술이라니! 두 번 다시 없을 기회니까 다들 맘껏 즐기자고!” 술잔을 기울이며 환호하는 수련자들 사이로, 늘 수련자들을 업신여겼던 성녀의 집행자들이 직접 음식을 나르고 있었다. “이거 맛있는데!” 탈로크가 파이를 맛보고는 웃었다. “이봐 집행자 형제들! 그렇게 명분을 중시하던 댁들도 이런 세속적인 걸 몰래몰래 즐기고 있었던 거야?” [……아록에 온 속세인을 접견할 때 쓰는 음식일 뿐이다.] “거짓말! 바로 준비한 거 보니 몰래 자기들끼리 먹었겠구만!” 하하하하! 탈로크의 농담에 모두가 웃으며 술자리의 분위기는 한층 달아올랐다. 성녀의 집행자들 또한 최근 일이 수습된 만큼 겸연쩍게 웃으며 농담을 넘겼다. 근래 유독 살얼음판 같던 아스페리아가 사실은 가짜였고, 이제는 진짜가 돌아왔으니 다시 그들에게도 마음의 여유가 생긴 듯했다. 앞자리에 앉은 모제와 하미엘도 술자리에 동참하긴 했지만, 분위기만 맞출 뿐 서로 은근히 시선을 주고받으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 신나는 자리에 시온 형제님이랑 아리우스 형제님은 어딜 간 거야?” 한 수련자의 물음에, 하미엘이 찔끔하며 말했다. “시, 시온 형제님은 다친 곳이 도져서 다시 아록 측에 치료받는다고 하네요!” “아, 그래? 그렇군.” “아리우스 형제님은 아록에 있는 가족을 만나러 갔다고 하구요!” 그렇게 모두가 왁자지껄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이. 슥- 마침 시몬이 조용히 소리 없이 접견실로 들어왔다. 모제와 하미엘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맞이했고, 시몬은 자리에 앉았다. “어, 어떻게 됐습니까? 성자님. 아스페리아를 떠보셨습니까?” 모제가 소리 죽여 물었다. 시몬도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녀는 여전히 같은 논리로 해명했어.” 아스페리아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몰랐으며, 십 년 만에 탈출할 기회를 얻었기에 오로지 가짜 성녀를 없애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고 진술했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아록인들도 여전히 가짜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었기에, 가짜를 제거한 자신의 판단에는 틀린 점이 없다고 밝혔다. 이에 시몬도 더 물어보지 않고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늘섬에서 괜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도록, 수사관인 제가 아록과 성녀님의 입장을 최대한 대변하겠습니다. -감사해요 영웅님! 물론 거짓말이다. 시몬이 시끌벅적한 주위를 둘러보다가 은밀하게 속삭였다. “축제가 열리는 동안 정보 조사를 시작하자.” 모제와 하미엘도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도 알겠지만 이 이상 아록에서 시간을 할애할 수는 없어. 바로 다음 성녀를 찾으러 가야 하니까. 그러니 우리의 목적은 아스페리아가 죄가 있든 없든, 이번 사건의 진실과 관련된 ‘증거’를 최대한 많이 모을 것.” 시몬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그 뒤는 레테와 이스라필 이모가 해결해 주실 거야. 움직이자.” 세 사람이 슬그머니 자리에서 빠져나가 아록으로 향했다. ‘그러려면 그 사람부터 찾아야겠지.’ 아리우스의 형이자, 아록에서 처음 만난 정상인인 보우스. 그가 이번 사건의 열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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