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1323화 모든 상황이 정리됐다. 가짜 아스페리아는 무력화됐다. 하미엘이 죽지 않을 만큼만 회복마법을 걸어준 뒤 봉인마법을 걸었고, 그 뒤에 모제가 성물 감옥을 꺼내 그녀를 가두었다. 이제는 액체화 상태가 되지 못하는 그녀가 쇠창살을 흔들며 바락바락 화를 쏟아냈지만, 감옥에 걸어둔 결계 때문에 소리가 들리진 않았다. 시몬이 그 모습을 보며 모제에게 물었다. “저거 튼튼한 거야?” “물론입니다, 성자님. 제가 가지고 다니는 몇 안 되는 진짜 성물입니다.” 그렇게 답한 모제가 신앙심 가득한 얼굴로 시몬을 올려다보았다. “그런 것보다 이번 위대한 전투는 어떻게 기록해서 후세에 알려야 할지 고민이군요. 후세 사람들이 성자의 위대함을 조금이라도 더 깨우치길!” “……그만둬.” 여전히 모제는 이전 전투의 여운이 짙게 내려앉아 있는 모양이었다. 가짜 아스페리아가 무력화되자, 공격해 오던 아록인들도 행동을 멈추었고 폭주하던 신수들도 진정했다. “고생하셨습니다, 시온 형제님! 여러분!” 상당히 격렬한 전투였다는 걸 방증하듯, 도복이 엉망으로 찢어진 상태의 아리우스가 웃는 얼굴로 다가왔다. 탈로크는 풀밭에 벌러덩 누운 채 두 팔을 펼치고 있었다. 몸에 난 상처도 빠르게 조치한 듯했다. “진짜 죽는 줄 알았다! 어우!” 바닥에 쓰러진 채 숨만 쉬던 수련자들이 비로소 한마디씩 농담을 던지며 풀어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악몽 같던 아록에 평화가 찾아왔다. 저벅, 저벅. 그때 누구보다 피 칠갑을 한 성녀의 집행자들이 시몬에게 다가왔다. 마지막 힘까지 쥐어짜 냈는지 몸을 감싼 축복 마법도 거의 희미해질 지경이었다. 수련자들이 경계하는 눈초리로 그들을 지켜보았다. [전체-] 그중에 선임자로 보이는 집행자가 목소리를 높였다. [아록의 영웅들께 예를!] [비트라 벤 라우스!] 화아아아아악! 그들의 몸에 신성이 뿜어져 나왔다. 경례를 주도한 집행자도 몸을 숙였다. [비트라 벤 라우스, 아록을 구해준 영웅분들께 진심 어린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이제 와서?” 어느새 풀밭에서 상체를 일으킨 탈로크가 날카롭게 말했다. “가짜 말에 휘둘려서 사람 몸에 구멍이나 뚫어대고 말이야! 네놈들도 다 공범자라고!” […….] 앞에 서 있는 성녀의 집행자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는 듯 고개를 떨구었다. [저 가짜가 성녀님의 힘을 똑같이 재현했기에 저희로서는 믿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녀의 권위를 감히 의심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모든 건 우리의 잘못이니, 죗값은 반드시 치르겠습니다.] 그 말에 하미엘도 불쑥 끼어들었다. “죗값은 우리한테 치러야 할 게 아니라, 여러분이 모시던 진짜 성녀님께 치러야 할 것 같은데요! 자기 주인도 못 알아보다니!” 시몬도 고개를 끄덕였다. “성녀님을 보러 가자. 그 전에-” 시몬이 감옥 앞에 쪼그려 앉았다. 결계가 펼쳐져 있었기에 가짜 아스페리아가 뭐라 말하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 들어야겠지.” 모제가 하늘섬 측에 연락해 ‘수사관’을 불러두었다. 자세한 취조는 수사관과 신성연방 측에서 알아서 하겠지만, 시몬은 아직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그가 하미엘을 향해 고갯짓을 했고, 하미엘이 손뼉을 치자 감옥의 방음 결계가 사라졌다. “자, 결사. 묻는 것에만 답해.” 시몬이 냉정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름과 신분, 이곳에 온 목적, 어떻게 아스페리아 성녀님을 무력화한 건지 전부 샅샅이 말해.” “자, 잠깐! 잠깐! 잠깐!” 가짜 아스페리아는 뭔가 혼란에 빠진 표정이었다. 머리를 붙잡고 마구 고갯짓하던 그녀가 이내 발악하듯 소리 질렀다. “이상해!” 모제가 인상을 썼다. “뭐가 이상하단 거지?” “나, 나! 이렇게까지 잘될 줄 몰랐어! 이 정도를 원한 건 아니었어! 어떻게 내가 이렇게……!” 횡설수설 내뱉는 그녀의 음성. 그리고. 푸우우우우욱! 지면에서 가시가 솟구치며 그녀의 가슴이 꿰뚫렸다.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전에 탈로크를 꿰뚫었던 바로 그 가시였다. 그녀의 몸이 가시에 관통당한 채 높게 솟구치며 감옥의 천장에 머리를 강하게 부딪혔다. 피가 쏟아지고. 그녀의 두 팔이 축 늘어져 덜렁덜렁 흔들렸다. “여러분의 노고에 찬사를.” 부드러운 목소리와 함께 사뿐거리는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모두의 시선이 돌아갔다. 긴 머리를 휘날리는 나체의 여성이 걸어오고 있었다. 영원의 성녀. 진짜 아스페리아 본인이 유적에서 빠져나와 걸어오고 있었다. 두 손이 잘려 있었고, 가슴에 구멍이 뚫린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모습이었다. 막 속박에서 빠져나온 듯했다. “너무나 고생 많았어요. 가짜의 힘이 약해지자 본녀도 나올 수 있었답니다.” 성녀의 사자들이 눈을 부릅뜨더니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그라툴라 미 키빌리스!] [저희를 죽여주십시오!] 수련자들도 다급히 엎드렸다. “여신의 가장 가까운 딸을 뵙사옵니다!” 그녀는 가히 참담한 몰골이었다. 두 손이 잘리고 가슴의 상처가 커 보였지만, 일단은 큰 무리 없이 걸을 수 있었다. 그녀가 감옥 안의 가짜 아스페리아를 바라보았다. “우선 빼앗긴 걸 되찾아야겠네요.” 스릉! 또 하나의 날카로운 가시가 튀어나와 가짜 아스페리아가 기워 붙인 두 손을 정확히 절단했다. 그것이 감옥 밖으로 굴러떨어졌고, 그녀가 자신의 잘린 손을 팔에 가져다 대고 신성마법을 사용했다. 우우웅! 베테랑 성녀답게 회복마법의 수준도 상당한 모양.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거의 새것같이 손이 몸에 달라붙었다. 그녀가 주먹을 가볍게 쥐었다 펴고는 ‘음’ 하고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손끝을 움직였다. 샤아아아아아아! 그녀의 몸에 성녀를 상징하는 ‘성의’가 입혀지며 신성으로 휘감겼다. 비로소 시몬도 진짜 성녀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가짜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격과 정순함이었다. 마침내 힘을 되찾은 아스페리아가 두 팔을 펼치자, 홍색 기운이 파장처럼 퍼져 나가 아록 전체를 뒤덮었다. 포근한 기분이 드는 힘. 그러자 고장 난 것처럼 멍해 있던 아록인들의 뺨에 생기가 생기고, 다시 제정신을 되찾은 듯 활짝 웃으며 달려왔다. [경하드리옵니다!] “아스페리아 성녀님!” 아록인들이 아스페리아를 보고 우르르 몰려들었다. 아스페리아가 미소 지으며 두 팔을 벌렸다. “모두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그녀가 그렇게 말하고는 가슴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사과드려요. 면목 없게도 아록을 다스리는 본녀가 간악한 흉계에 당해 여러분을 위험에 빠뜨리고 말았어요.” “무슨 말씀을!” “무사하셔서 정말로 다행입니다!” 모두가 환호하고 있는 가운데, 아스페리아가 고개를 돌려 시몬 쪽을 바라보았다. 생긋. “?” 시몬에게 눈웃음을 친 그녀가 주위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한 뒤 천천히 걸어왔다. “나의 영웅.” 그녀가 가까이 다가와 시몬의 두 손을 붙잡았다. 시몬은 그 순간, 몸에 있는 성녀의 정수 잔재가 일렁이는 걸 느꼈다. “그때는 바빠서 이름도 듣지 못했네요. 이름을 여쭈어도 괜찮을까요?” “시, 시온 마르칸토니입니다.” “……시온.” 푹 빠진 그녀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들어갔다. “격조 높은 이름이네요.” 시몬이 ‘그런가?’ 하고 생각했다. “탈출을 위해 가짜의 힘을 소진시키는 정도만 기대했는데, 그녀를 직접 잡아내다니. 이 은혜를 어떻게 갚을지 헤아릴 수조차 없네요.” 그렇게 말한 그녀가 귀밑머리를 쓱 넘기더니 까치발을 들었다. 시몬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갑자기 잿가루가 일렁이며, 그녀의 입술이 시몬의 이마로 향했다. “실례지만.” 텁! 시몬이 갑자기 뒤로 순간이동한 것처럼 밀려났고, 어느새 시몬을 뒤로 끌어당긴 모제가 싸늘한 표정으로 앞으로 나와 있었다. “왜 가짜 성녀를 살해했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녀가 주춤하며 다시 까치발을 내리고는 모제를 바라보며 웃었다. “또 하나의 영웅님. 이름은?” “신의 손, 모제 델 베아투스.” 시몬과는 달리, 전적으로 정체를 드러낸 모제였다. 이제는 신의 손인 걸 모르는 사람이 없었기에 그는 당당히 정체를 밝히고 앞으로 나와 입을 열었다. “그녀는 교황청의 죄수였습니다, 성녀님. 모든 죄를 샅샅이 조사했어야만 했습니다.” “…….” 아스페리아는 부드럽게 웃어 보이며 뒤를 돌았다. “본녀가 직접 당한 일이니, 궁금한 게 있다면 본녀가 대신 진술할게요. 그리고 가짜를 서둘러 죽인 이유는…….” 그녀의 시선이 아록인들에게로 향했다. “그 가짜가 여전히 아록인들을 세뇌시킨 당사자였기 때문이에요. 봉인하고 감옥에 가두어두는 걸로는 권능의 힘을 완전히 억제할 수 없어요. 본녀의 시민들을 위해 빠른 결단을 내린 것뿐이에요.” 그녀가 두 손을 모으고 두 눈썹을 내렸다. “혹시 섣불렀을까요?” ‘네!’라고 답하려던 모제를 시몬이 팔로 가로막아 막은 뒤, 입을 열었다. “성녀님의 판단을 존중합니다.” 단호하게 말하는 시몬의 말에, 입이 딱 벌어진 모제의 표정이 나라 잃은 사람처럼 충격으로 굳어졌다. 옆에서 하미엘이 왠지 고소하다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영웅의 따뜻한 대답에 감사를.” 그녀가 감정이 물씬 묻어 나오는 목소리로 두 손을 모았다. “해방의 축제를 열겠어요. 전투 직후일 테니 여독을 푸시지요.” * * * 가짜 성녀가 죽었다. 그리고 본래의 아스페리아가 다시 아록의 주인이 되며 아록은 평화를 되찾았다. “하아아아아-” 그리고 시몬과 모제, 하미엘은 수건으로 몸을 감싼 채, 영원의 궁전에 있는 노천 온천 중 하나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뜨끈하다.’ 뜨거운 탕에 몸을 담그니 몸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흐어어어어어- 좋다!” 하미엘은 이상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러다 시몬을 보며 말했다. “일도 잘 마무리되어서 다행이에요! 부상자는 성녀님이 직접 치유해 주셔서 모두 무사하고, 이번에 가시덤불을 넘어 아록을 위해 싸워준 아리우스 형제님과 수련자들 모두 ‘아록인’이 될 자격을 얻었다고 합니다!” 눈을 감고 온천을 즐기던 시몬이 눈을 떠서 바깥을 보았다. 아록은 축제 준비로 시끌벅적했다. “잘됐네. 다들 아록에 남겠대?” “의외로 반반이라네요.” 하미엘이 말했다. “예전이라면 고민도 안 하고 수락했을 텐데, 조금 나쁜 꼴을 봐버렸으니까요.” “…….” 그 말에 시몬이 쓰게 웃었다. -아하하하하하! -깔깔깔깔깔! 그 행복의 광기에 빠진 모습을 봤다면 당연히 충격이 컸을 것이다. 잠시 멍하니 있던 시몬이 고개를 돌렸다. “모제, 화 좀 풀어.” “…….” 모제는 여전히 시무룩한 표정이었다. 양 떼를 자처하는 자신의 편을 들지 않고, 성녀의 편을 들어줘서 그런 모양이다. “성자님. 저는…….” “알고 있어.” 시몬이 팔짱을 꼈다. “진짜 아스페리아가 뭔가를 숨기고 있을 수도 있단 거지?” “!” “그걸 확인하려면 아스페리아 성녀에게 경계심을 갖게 할 필요는 없어. 우리에 대한 신뢰를 심어준 뒤 조사하는 게 나아.” 그 말을 들은 모제가 첨벙 하고 물살을 일으켜 몸을 바로 세우더니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이 신의 손 모제, 성자님의 큰 뜻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광신도가 다 됐네요 아주. 이단심문관한테 신고할까 봐.” 하미엘이 웃으며 장난을 쳤다. 그때 멀리서 인기척을 느낀 시몬이 귀를 쫑긋하고 세웠다. 하미엘도 말을 멈추고 자신에게 다가온 정령의 이야기를 들었다. “크, 큰일 났어요!” 하미엘이 벌떡 일어났다. “아스페리아 성녀님이 직접 여기로 오고 있어요!” “다른 사람은?” “혼자예요. 어, 어쩌면 좋죠?” 그녀가 당황해하며 물었지만, 시몬은 태연한 반응이었다. “그럼 올려보내도 좋아. 너희 둘은 물러나 있어.” 시몬이 손깍지를 끼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직접 떠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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