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1307화 찌이- 찌이- 풀벌레 소리 울려 퍼지는 고요한 밤. 시몬은 안내소 앞 야외 테이블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저녁에는 전령이 돌아온다고 했으니 마중 나갈 생각이었다. 잠에 약한 모제는 먼저 자러 들어갔고, 하미엘도 지쳤는지 꾸벅꾸벅 졸고 있었기에 시몬은 그녀를 깨우지 않고 홀로 나왔다. 이제 자리에 있는 건 시몬과 안내원, 그리고 밤중에 조용히 지나가는 몇몇 수련자들 정도였다. “올 시간이 한참 지났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안내원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전령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닌지 걱정이 되는군요.” 시몬이 고개를 기울였다. “무슨 일 있겠어요? 아록은 평화로운 곳이잖아요.” 아록은 평화의 땅이다. 대륙 전역에 득실거리는 몬스터들조차, 아록 인근의 몬스터들은 모두 신성의 영향을 받아 공격성이 사라지고 온순하다고 한다. 딱히 문제가 생길 부분이 없었다. “네, 물론입니다. 다만 최근에는 조금…….” 안내원이 말꼬리를 흐렸다.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상한 일이라뇨?” “설명하기 참 어려운데요 그것이…….” 그때 시몬이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잠깐, 누군가 이리로 오고 있어요.” 스슥. 슥. 풀밭을 가로지르는 발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가만히 들어보니 당사자의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다. 발을 절뚝이는 것 같은 소리다. ‘다친 건가?’ 시몬이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갑자기 ‘풀썩!’ 하는 소리와 함께 발소리가 멈췄다. 시몬이 그 소리에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순간. 스슥. 슥. 다시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뭔가 이상해.’ 스슥 슥. 스슥 슥. 불규칙적인 발소리. 시몬과 안내원은 등불을 들어서 앞을 비추었다. 잠시 후 어둠 속에서 누군가 발을 절며 걸어오는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풀썩! 그가 다리를 헛디뎠는지 바닥에 쓰러지며 이마를 강하게 찧고 말았다. 그러나 벌떡! 하고 거의 불가능한 각도로 몸을 꺾어 일어난 채 다가오고 있었다. 이마에 피를 철철 흘리면서, 너무나 불안정한 발걸음으로. “저, 전령님!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안내원이 서둘러 달려갔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혹시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덥석! 전령이 갑자기 안내원의 두 어깨를 꽉 붙들었다. 안내원은 화들짝 놀라며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어깨를 붙든 전령의 팔이 서서히 움직이며, 선명한 핏자국이 도복 위로 번져갔다. “나…….” 전령의 입술이 떨리기 시작했다. “나, 나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말씀을 해보세요!” 전령의 눈에서 검은 피눈물이 쏟아졌다. “나는, 봤어……!” 께에에에에에에에에엑! 그리고 전령의 입천장이 괴물처럼 갈라지며 입이 쩌어어어억 벌어졌다. 돌발 상황에 대비하고 있던 시몬이 안내원을 끌어당긴 뒤 전령을 강하게 걷어찼다. 전령은 휘청거리며 한 차례 크게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푸확! 팍! 온몸에서 검은 피를 콸콸 뿜어내더니, 털썩 무릎을 꿇었다. 치이이이이이이! 이내 그의 몸이 그대로 검은 물로 녹아내려 사라져 버렸다. 시몬과 안내원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멈춰 있었다. “무, 무슨 소란입니까!” “방금 뭐야?” 소란을 듣고 수련자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이어서 그들이 본 건 덜렁 남은 옷가지와, 먹물처럼 시커먼 물웅덩이뿐이었다. “어떻게 된 거요!” 다른 한 수련자의 외침에, 안내원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소식을 가지고 온 전령이, 저희가 보는 앞에서 시커멓게 녹아내렸습니다.” 곳곳에서 두려워하는 표정이 보였다. 도복을 입은 수련자 한 명이 쪼그려 앉으며 이마를 쓸어 올렸다. “벌써 세 번째인가.” 그 말을 들은 시몬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 번째라구요? 그럼 이전에도…….” “그렇소.” 수련자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현재 아록으로의 접근은 완전히 폐쇄되었고, 그나마 속세의 소식을 전할 의무가 있는 전령들도 안으로 들어갔다가 모두 저 모양이오.” 시몬은 성큼성큼 걸어가 가방을 뒤졌다. 각종 명령서나 보고서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아록 내부로 전달되는 문건들, 심지어 그중에는 모제가 성물을 들고 방문하겠다는 서신까지. ‘그렇다면.’ 전령은 서신을 아스페리아에게 전달하지도 못하고 돌아왔으며, 그 과정에서 정체 모를 끔찍한 일을 겪은 것이다. 분명히 아록 안에서 뭔가가 잘못되고 있었다. * * * 다음 날 아침. 밤의 소란이 무색하게도 아록 외곽은 극도로 평화로웠다. 부드러운 바람, 흐르는 강과 폭포, 흩날리는 꽃씨들. 목을 축이러 온 동물들과, 드문드문 몸을 드러냈다가 사라지는 신수들까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했다. “…….” 수련자들은 평소와 같이 폭포 아래에서 물을 맞으며 수련 중이었다. 평정과 마음의 평화를 수련의 덕목으로 삼고 있어서 그럴까, 그들은 이번 일에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관심을 가지려 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물론 아록 외곽의 모두가 이 상황을 무심하게 넘기는 것은 아니었다. “세 명! 벌써 세 명째야!” 공격적으로 삐쭉삐쭉 솟은 머리. 하얀 도복 소매를 찢어서 단련된 어깨와 무릎을 드러내고 있는 남자. 목에는 태양빛을 받아 반짝이는 금목걸이를 둘렀다. 세속적인 물건과 수련자의 도복이 이질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탈로크’라고 밝혔다. “아록에 들어간 전령들이 모두 그 꼴이 나고, 이번에 죽은 전령의 마지막 말은 ‘나는 봤다’였어! 수련자들 중에서도 실종자가 생기고, 신수들마저 불안해하고 있다고!” 탈로크의 말에 동의하듯 몇몇 수련자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또 몇몇 수련자들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아스페리아 성녀와 아록은 우리에게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고 있다! 아록에 더 큰 문제가 생기기 전에 우리가 움직임을 보여야……!” “우리가 움직여서 뭘 할 수 있다는 겁니까.” 그 말에 모두의 고개가 돌아갔다. 이야기를 듣던 시몬의 고개도 움직였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길고 아름다운 백금색 장발의 남자가 수련자 무리를 이끌고 다가오고 있었다. 피부는 티끌 하나 없이 깨끗했고 향긋한 꽃향기가 나고 있었다. 몸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와 퍼지는 신성의 기운이 그의 힘을 짐작하게 했다. “아리우스.” 탈로크가 이를 갈았다. 아리우스라 불린 남자가 두 손을 모은 채 ‘라우스’라고 인사를 한 뒤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아록의 인간들에게 있어 우리는 한낱 미물에 불과합니다. 우리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지혜롭고 현명한 분들이니, 만에 하나 문제가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잘 해결하셨을 겁니다. 더 솔직히 말하면…… 우리가 나선다고 해서 도울 만한 부분도 없겠죠.” 피아트 룩스. 피아트 룩스. 곳곳에서 동의하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반면 탈로크는 혀를 차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아리우스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아록은 성녀님의 허가가 없으면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입니다. 하늘섬의 교황조차 함부로 발을 들일 수 없는 그 신성한 곳을, 아록을 추종하며 그곳에 소속되길 원하는 우리 같은 수련자가 감히 넘보겠다는 겁니까.” “하.” 이야기를 들은 탈로크가 이죽거렸다. “아록은 네놈이나 가라지! 나는 신수만 얻으면 여긴 볼일 없거든! 아록이 아니라 하늘섬으로 올라가서 평생 떵떵거리며 살 거다!” “그렇게 정신 수양이 덜 되었으니 아직 한 마리 신수의 인정도 얻지 못하는 것 아닙니까.” “인정을 못 받은 건 피차 마찬가지면서 왜 지랄이야!” 웅성 웅성! 두 사람이 대립하는 모습을 보며 수련자들이 술렁였다. 멀찍이서 구경하던 시몬과 하미엘도 시선을 맞추었다. “별로 좋은 사이는 아닌가 보네.” “그러네요.” 그때 아리우스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다면 탈로크 형제의 계획을 듣고 싶군요.” “뭐?”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요? 조사 권한도 없이 경계를 뚫고 들어가 아록을 넘보겠다는 겁니까? 그러다 만약 아록에 아무 일도 없는 게 드러나면? 아스페리아 성녀님께 이 사실을 들키면 어떻게 할 건가요?” 아스페리아의 이름이 나오자 수련자 중 일부가 불안하게 꿀꺽 침을 삼켰다. “그들에게 있어, 우리는 그저 아록 근처에 붙어 있는 기생충 같은 존재입니다. 아록에서 흘러나온 낙원의 부스러기와 신수들에 의존하며 기회를 엿보는 우리가, 만약 침입자로 간주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 모두가 여기서 쫓겨날 수도 있겠죠. 탈로크 형제는 수련자 전체를 위험에 빠뜨리려 하는 겁니다.” 맞아요! 옳소! 동조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흘러나왔다. 탈로크는 입술을 씰룩거릴 뿐, 정작 아리우스의 말에 뾰족하게 반박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결국 탈로크가 자기 화를 참지 못하고 동료들과 함께 자리를 떴다. 이어지는 회의에서는 아리우스의 주장대로 다음 전령을 보내고 기다려 보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앞으로의 방향을 논하는 과정에서, 수련을 방해하고 번뇌를 일으킨 점은 대단히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아리우스가 두 손을 모았다. “모두 각자의 수련에 충실하며, 아록을 목표로 노력합시다.” * * * 그렇게 다시 수련자들의 수련이 진행되는 사이, 모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성자님 말씀대로, 이번 사태에 대해 하늘섬에 알리고 수사관을 요청했습니다.” 모제가 뒷목을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다만 빨리 와도 사나흘은 걸릴 거예요.” “그 정도면 빠르네.” 모제가 자세를 낮추고 눈을 반짝였다. “그냥 아록에 쳐들어가는 건 어떠신지요? 저와 성자님 둘의 힘이라면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겁니다.” “잠깐! 왜 둘이에요!” 하미엘이 소리 질렀다. 시몬은 쓰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무모해. 나는 군단의 힘을 쓰지 못하니까 룬 리그에서만큼의 전력을 낼 수는 없어.” 당연한 말이지만, 여기서 군단의 힘을 쓰면 바로 전쟁이었다. “그리고 다시 상기시키지만 우리의 목적은 전쟁이 아니야.” 이번 일은 어떻게 본다면 강경파 성녀인 아스페리아에게 협조를 구해야 하는 상황이다. 시몬이 지금까지 ‘성녀의 정수’를 얻게 된 계기를 생각해 본다면, 결국 정수들은 시몬과 자신들의 목적이 일치할 때 힘을 빌려주었다. 적으로서 성녀를 상대한다면 정수들도 시몬을 외면할 가능성이 높았다. “성녀를 돕는다.” 시몬이 손에 깍지를 꼈다. “그게 시작이고, 기본 지침이야.” “그렇죠. 아록의 역사를 봐도 알 수 있어요.” 하미엘도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이곳의 성녀의 정수는 늘 아록의 소녀들에게만 깃들었어요. 이 지역에 깊은 관계가 있는 만큼, 정수의 잔재를 얻으려면 우리는 좋든 싫든 성녀님의 편이 되어야 해요. 이 정도 계산도 못 하다니! 교황 후보라는 명성이 울겠네요!” “뭐? 감히 범재 따위가 날 평가해?” “네! 평가했는데 뭐요!” 시몬이 두 팔을 뻗어 으르렁거리는 두 사람을 제지했다. “그럼 이렇게 하자. 수사관이 올 때까지 각자 아록에서 활동하면서 최대한 정보를 수집해 보는 거야.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있으면, 해결법도 금방 찾을 수 있을 테니까.” 시몬의 말에 두 사람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록의 신비와 문제를 알아내는 게 가장 우선이었다. * * * 시몬은 안내원에게 찾아가 자신도 ‘수련’을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안내원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수련은 누구나 할 수 있으며, 꼭 이곳의 신수를 얻어 아록으로 가지 못하더라도 프리스트에게 무조건 도움이 되는 수행이라고 말했다. 매해 성당에서 일하다가 수련을 위해 정기적으로 이곳을 찾는 프리스트들도 있다고. 그렇게 안내원은 한 수련자에게 부탁해 시몬에게 붙여주었다. 그는 다름 아닌. “라우스, 여신의 은총이 형제님과 함께하시길. 아리우스 세올라라고 합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탈로크의 논리를 반박해 버린 아리우스였다. 시몬은 땀을 삐질 흘리며 두 손을 모으고 인사했다. “직접 저를 지도해 주신다고 들었는데, 괜찮으신가요?” “물론입니다.” 아리우스가 빙긋빙긋 웃었다. “본래 처음 수련을 받는 형제자매님들은 제가 가르치니까요. 그리고 아록은 모두가 평등하니 편하게 말해주셔도 됩니다.” “아, 알겠습니다.” “신수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시몬은 적당히 진짜 정보와 가짜 정보를 섞어서 이야기했다. 에프넬 교수로부터 신수학 강연을 들은 적이 있고, 그 외에는 대부분 독학을 했다. 사용하는 신수는 세 마리에, 정령학도 조금은 배워두었다. 아리우스는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가 되어 있으시군요.” “…그런가요?” “수련자는 인내심과 신수에 대한 깊은 이해, 그리고 번뇌를 쫓으려는 노력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근래에는 아록의 신수를 손에 넣어 한몫 잡으려는 사람들이 아무런 각오 없이 이곳에 들어오곤 하죠.” 그가 빙긋 웃었다. “물론 그들은 일주일을 버티지 못하고 나가떨어지지만요. 형제님은 생각보다 아록의 신수의 인정을 금방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아리우스의 안내를 받아 시몬이 도착한 곳은 방대한 호수 한복판이었다. “오오오!” 시몬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이 절로 나왔다. 수련생들이 어디 있나 했더니 여기 다 있었다. 첨벙 첨벙! 얕은 호수 위에서 신성 마법진을 펼치거나, 자리에 앉아 물속에 잠겨 얼굴만 내민 채 수련에 몰두하는 수련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호수에 쉬러 온 백로나 홍학 같은 날짐승들은 수련자들을 전혀 경계하지 않고 기웃거리고 있었다. 수백 명의 수련자들이 이 넓은 호수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수련을 하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크륵! -키키키키. 몇몇 수련자들은 자신의 신수들을 뽐내듯 데리고 다니고 있었다. 팔에 앉은 하얀 오리나, 옆에서 나란히 걷고 있는 백색의 표범이 눈에 띄었다. ‘신수학의 성지라더니. 과장이 아니었구나.’ 시몬은 고개를 휙휙 돌리며 신수들을 신기한 듯 구경했다. 신성 브레스를 뿜는 신수까지 보였다. “이게 다 아록의 신수인가요?” “아닙니다. 저들은 일반 신수들이죠.” 아리우스가 미소 지었다. “수련자들이 일반 신수를 데리고 다니는 이유도 결국 신수에 대한 이해력을 높이고 조화를 수련하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이들 역시 궁극적으로는 최고 중의 최고인 ‘아록의 신수’를 손에 넣는 걸 목표로 하고 있죠.” 참방 참방. 얕은 호수에 들어간 아리우스가 이내 등을 돌려 시몬을 시험하려는 듯 눈을 반짝였다. “그럼 어디 한번, 형제님의 실력을 알아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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