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1285화 부제독이 이끄는 연합 함대는 꼬박 이틀을 최고속도로 이동했다. 낮이 밝다가, 어두워지기를 반복했다. 이제 두 번째 밤. 그 분홍색 안개 이후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해양 몬스터의 공격 또한 여전히 없다. 그것이 폭풍전야의 적막임을 알기에, 모두가 긴장한 얼굴로 전투를 준비했다. 시몬도 갑판 위로 나와서 지켜보고 있었다. 쏴아아아아아- 흐린 하늘에서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출렁거리는 밤바다에 만들어지는 무수한 물결들.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시몬의 귓가에 문득 통신구의 음성이 들렸다. -본대가 보인다! 다들 그 말을 들었는지, 갑판 위로 선원들이 우르르 뛰쳐나와 앞을 응시했다. 정말이었다. 시야를 가리던 큰 파도가 한 차례 가라앉고, 그 너머로 바다를 뒤덮는 방대한 암흑연합의 함대가 모습을 드러낸다. “와아아아아!” “많은데!” 각 깃발마다 서로 다른 함대, 가문, 선단의 상징이 휘날리고 있었다. 남부제독 라즌 맥밀런이 직접 이끄는 전군, 400척. 로바르딘 함장이 이끄는 후군, 82척. 백전노장 키노르 함장이 이끄는 좌군, 240척. 그리고 지금 다가오고 있는 부제독 아그라가 이끄는 우군, 158척. 도합 880척, 사실상 이것이 지금 당장 바다에 쥐어짜 낼 수 있는 마지막 전력이다. 두 번은 없다. 이번에 모인 전력이 무너지거나 언노운을 잡지 못한다면 대륙의 패배였다. 각기 다른 세력의 함대가 군말 없이 모이는 건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리라. -뭐야, 예정된 수보다는 적은데? 당황한 듯한 함장의 통신이 들렸다. 본래 문서로 받은 바로는 1,000척은 아득히 넘었던 대연합 함대였다. 그때 한 함장이 말을 받았다. -막상 작전에 참가하려니 두려워서 꽁지를 뺐거나, 보물섬 소문을 듣고 그쪽으로 갔거나, 혹은 우리처럼 공격당했겠죠. 크리스티나 셀린으로 추정되는 똑 부러진 목소리였다. 그녀의 말대로, 배들이 성한 구석이 없었다. 다들 한바탕 큰 전투를 펼친 듯 포탄의 흔적이나 몬스터의 이빨 자국 따위가 새겨진 모습이 보인다. ‘다들 구원자의 방해를 한 차례씩 받았구나.’ 시몬이 눈을 감았다. 우군과 전군은 각각 시몬과 제독이 있어서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겠지만, 다른 쪽은 아니었던 모양. -우리는 지금부터 우군이다! 우측 날개로 간다! 아그라의 명령에 따라 시몬의 검은 함대를 포함한 전 함대가 우측에 자리 잡았다. 그래도 눈으로 보면 여전히 압도적으로 많은 수. 바다 위에 목재로 이루어진 육지가 둥둥 떠 있는 것 같다. 그런 와중에도 이 수많은 배들 중에, 거의 움직이는 섬과도 같은 방대한 크기의 3군단의 본선 타이달러스는 확연히 눈에 띄었다. -나는 제독을 뵈러 본선에 다녀오겠다. 전체 대기하라! 어떤 상황에서든 싸울 태세를 갖춰라! 아그라의 목소리를 들은 시몬이 턱을 짚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 * * 3군단 본선, 타이달러스의 갑판 위. 쏴아아아아아! 비가 더 내리기 시작했다. 낡은 목제 의자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코트 차림의 남자는 장화 신은 두 다리를 쭉 뻗은 채 밤바다를 응시하고 있었다. 딸칵. 손에 든 철제 수통의 뚜껑을 열어서 입으로 가져갔다. 꿀떡 꿀떡 목구멍이 움직이고, 알코올 냄새가 진한 물방울이 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내 수통을 느슨하게 내려놓은 그가, 다른 한 손으로 파이프 담배를 입에 물고 라이터를 꺼냈다. 찰칵 찰칵, 부싯돌 튀기는 소리가 들렸지만 비가 내리는 바람에 좀처럼 불이 붙지 않았다. 스으- 그때 한 손바닥이 비를 막는 그늘을 만들어주었다. 제독은 태연히 파이프에 불을 붙인 뒤 연기를 후우우 내뿜었다. 옆을 돌아보지도 않고, 그가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제 정체를 숨길 생각도 없는 건가. 풋내기.” 쏴아아아아- 어느새 제독의 옆으로 다가온 건, 피어의 본 아머를 갖춰 입은 시몬이었다. 그가 피어의 투구를 올리며 얼굴을 드러낸 채 답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더 숨길 필요는 없겠죠.” “…….” 잠시 정적이 흘렀다. 두 남자는 대화를 나누지 않고 밤바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추적 추적 비가 내려서 딱 좋은 정적이었다. 그때 제독이 손에 든 수통을 쓰윽 시몬 쪽으로 내밀었다. “안 먹습니다.” 시몬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지금 당신 어깨에 얼마나 많은 목숨이 걸려 있는지 알면서도 술이 넘어가십니까.” 클클. 벌써 술에 취하기라도 했는지, 작게 웃음을 흘린 제독이 말했다. “그래서 네가 아직 풋내기라는 거다, 풋내기.” 잠자코 듣고 있는 시몬의 이마에 작게 혈관이 도드라졌다. “전투의 컨디션에 술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오히려 긴장을 푸는 데 도움을 주지.” “변명으로밖에 안 들립니다.” “전에 주점에서 만났을 때는 꽤 남자답게 굴더니, 그사이 가랑이 사이에 달린 게 쪼그라들기라도 했나 보구나.” 파악! 시몬이 제독에 손에 든 철제 수통을 거칠게 빼앗아 들더니 입으로 가져갔다. 그러나 입에 그것을 대기 무섭게, 푸확! 하고 내뿜고 말았다. ‘너무 독해!’ 이건 술이 아니라 독이다. 별야의 독극물 수업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제독은 소리를 내지는 않았지만, 어깨를 여러 차례 들썩이는 걸 보니 재미있어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시몬이 그를 뚱한 표정으로 노려보았다. “네놈이 육지에서는 영웅이라고 불릴지 모르겠다만, 한 명의 남자가 되려면 아직 멀었다.” ‘……남자 되는 거 참 어렵네요.’ 대화를 나누다 보면 자꾸만 이 인간의 마이페이스에 말린다. 슬슬 일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시몬이 어깨를 한 차례 주무르며 입을 열었다. “언제부터 계속 이 자리에 죽치고 대기만 하고 있었던 겁니까?” “이틀.” “여기서 언노운이 나타난다는 건 확실하겠죠?” 스으읍. 푸우우우. 한 차례 담배 연기를 빨아들이다 내쉰 제독이 주위를 한 차례 쭉 둘러보다가 말했다. “확실하다. 이렇게 비 내리는 밤 한 대 빨고 있으려니 토르먼 함대를 이끌고 놈에게 덤볐을 때가 생각나는군.” “전멸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게 말한 시몬이 잠시 멈칫했다. ‘토르먼?’ -제독은 이미 실패했지 않습니까. 호라이즌 함대가 전멸한 사태, 제독이 직접 지휘했다고 들었습니다. 시몬이 퍼뜩 고개를 돌려 제독을 바라보았다. “호라이즌 함대가 아니고요?” “그때도 전멸했지.” 푸우우- 제독이 담배 연기를 구름처럼 내뿜으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지금 이 자리에 있기까지, 나는 놈에게 8번 패배했다.” “!” “너희들에겐 첫 전투지만 나는 이번이 9번째다. 8번째 패배에 규모 있는 전력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고, 이렇게 전력을 끌어모아서 놈에게 덤비는 거다.” 시몬이 이마를 텁 소리가 나게 덮었다. “그 중요한 사실을 왜 이제 말하는 겁니까! 다른 함장들은 알고 있어요?” “모를 거다.” “왜……!” 제독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 사실을 아군이 아는 게, 승리에 도움이 되는가?” 시몬이 지끈거리는 이마를 매만지며 눈을 감았다. 후우욱- 그러다 시몬은 문득 제독이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밤바다를 응시하는 모습을 보았다. “이미 8번이나 졌으면서 참 태연하십니다.” “승리의 반대말이 뭔지 아나?” “패배겠죠.” “아니.” 그의 의안이 일렁였다. “도전하지 않는 것이다.” 남부제독 라즌 맥밀런의 기록은 패배의 역사였다. 얼마나 졌는지 셀 수조차 없다. 등에 상처는 무수히 많고, 눈도 잃었다. 동료들의 목숨을 발판 삼아 추하고 비참하게 살아남았다. 하지만 꺾이지 않는다. 포기하지도 않는다. “이런 나를 불패의 제독이라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만, 왜 그런 소문이 퍼졌다고 생각하나?” 그가 이를 드러냈다. “나를 한 번이라도 이긴 놈들은 끝끝내 내가 죽여버렸으니, 내가 패배한 걸 아는 놈이 거의 없는 거지.” “……!” “내가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즉.” 그가 손끝을 세웠다. “나의 승리를 뜻한다.” 그건 진심이었다. 그의 눈에는 동요도 흔들림도 없다. 지금까지 이기고 또 이겨오기만 했던 시몬과는 그야말로 정반대의 역사를 쌓은 인물. ‘이 사람이라면.’ 시몬이 지금까지 몰랐던, 아주 귀한 것을 배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우우- 재차 담배 연기를 뿜은 제독이 바다를 보다가 말했다. “곧 놈이 나타날 테니 네 배로 돌아가라 시몬 폴렌티아.” “그러죠.” “배신의 군단은 늘 이긴다지?” 그의 말에 시몬의 걸음이 척 멈췄다. “만약 이번 전투에도 승리한다면, 그건 네놈이 우리를 승리로 이끌어서가 아니라, 내 8번의 패배가 있어서다.” 시몬이 픽 웃었다. ‘나 참.’ 네크로맨서들은 조금씩 미쳐 있는 경우가 많다지만, 이런 종류의 미친 인간은 처음이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가급적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은 종류의 인간이었다. * * * 시몬이 검은 함대의 녹티스호로 돌아올 즈음, 비는 더 거세졌다. 비가 쏟아지는 것으로 해무가 두텁게 피어올랐고 파도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았다. 번개가 번쩍이며 안개 내부의 모습이 하얗게 변했다가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전선 전투 준비! -전투 준비하라! 모두가 잔뜩 긴장하며 화포에 방수포를 씌우고, 포탄을 점검했다. 더 말하지 않아도 시몬도 알 수 있었다. 곧 전쟁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어디 있다는 걸까요?] [여기서 싸우는 거 맞아? 코빼기도 안 보이는데!] 본선에 와 있던 에르제베트와 프린스도 한마디 했다. 그때 통신이 들렸다. -보, 보였다! -우와악! 곳곳에서 놀라며 식겁하는 비명이 들렸다. 880척 함대 전체가 떠들썩해졌다. -전방의 바다 이상 없음! -어디에 나타났다는 거야? 시몬처럼 아직 적을 찾지 못한 사람들이 되물었고, 이내 한 강렬한 외침이 들렸다. -정면이 아니라 위! 위를 봐! 비로소 시몬은 고개를 들어 시커먼 바다가 아니라 위를 올려다보았다. 소리 없는 번개가 내리치며 안개 속을 비추고. 고오오오오오오오! 그 안개 너머로 형언할 수 없이 거대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저게 바로……!” 그때 제독의 외침이 들렸다. -전선, 전방을 향해 최고속도로 전진하라. 촤아아아아! 촤아아아아아아아아! 880척의 모든 함선이 안개가 있는 곳으로 돌진했다. 이내 번개가 다시 한번 치면서 안개 속의 거대한 굴곡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어?’ 그때 시몬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동작이 바뀌었어?’ 번개가 칠 때마다 그것의 모습이 보였고, 그것이 어떤 동작을 수행하는지 명확해졌다. 가만히 걷는 동작. 멈추는 동작. 거대한 팔을 드는 동작. 그리고 마지막으로. -온다아아아아아! 거대한 팔이 바다를 내려치는 순간, 맹렬한 해일이 일어났다. “대비해라!” “키를 잡아!”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 안개가 모조리 걷히며 폭풍우가 쏟아지고 해일이 넘실거렸다. “크윽!” “아아악!” 곳곳에서 바람에 휘말려 날아다니는 선원들이 속출했다. 빗줄기가 상당히 거셌다. 몇몇 배들이 그대로 뒤집히는 등 난리가 났다. ‘피부가 따가워!’ 시몬이 두 다리에 칠흑을 일으켜 버틴 채 전면을 보았다. 마침내 안개가 걷히고. 고오오오오오오오오오! 신적인 존재. 한 세계를 무너뜨린 괴물. 언노운이 그들의 눈앞에 출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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