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1284화 시몬은 몰려드는 죽음의 함대를 베어 넘긴 뒤, 멍해 있는 마일러를 배 안으로 들여보냈다. [데드나가들, 이 함선을 아군 진형 쪽으로 옮겨줘.] -꾸룩! 데드나가들이 선체에 다닥다닥 달라붙어 본대 쪽으로 배를 옮기기 시작했다. 중간에 공격당한 다른 샤르모 함대 전력도, 시몬이 이끄는 검은 함대가 구해낸 뒤 본대까지 무사히 돌아갈 수 있도록 호위해 주었다. 전황을 지켜보던 피어가 크흐흐! 웃었다. [구원자를 잡으러 다니다가 갑자기 저 함장 동기를 구하러 달려갈 줄은 몰랐군! 소년!] ‘아무래도 구원자는 여기 없는 것 같아서요.’ 시몬이 바다를 응시하며 말했다. ‘여기서 저와 결착을 낼 생각은 아니었나 보네요. 언노운을 잡을 때 등장할지, 아니면 뒤에서 관망만 하는 타입인지는 모르겠지만-’ 불에 탄 아군선들을 바라보던 시몬이 주먹에 힘을 꽈악 쥐었다. ‘찾아내서 대가를 치르게 할 겁니다.’ 그렇게 샤르모의 함선이 하나둘 되돌아왔고, 아군 함대의 전세는 크게 안정화되었다. -열, 펼쳐! 부제독 아그라 지시에 따라, 모든 함대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일렬로 날개를 크게 펼친 진형을 구축했다. -전진! 뿌우우우우우우! 나팔 소리와 함께 전 함선이 일제히 전진하며 포격을 가했다. 뿔뿔이 흩어지거나 진형이 꼬여 버린 죽음의 함대가 각개격파당하며 바다에 가라앉았다. 시몬의 검은 함대도 이제 본진으로 합류하여 날개의 일부가 되었고, 함께 전진했다. 그 결과. -적선! 시야에 보이지 않습니다! 피해는 있었지만 대승. 함선의 체급과 머릿수로 상대를 완전히 찍어 누르며 무사히 안개 지대를 빠져나갔다. “피해 보고해!” 아그라의 본선 위로 선원들이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몇몇 작전부 직원들이 와서 보고했다. “전체 205척 중 32척 침수! 15척 반파! 작전 강행이 가능한 배는 총 158척입니다!” “1/4 정도가 줄었나.” 아그라가 쩝 하고 아쉬운 소리를 냈다. “그래도 교전 초에 함대 전체가 위기에 빠진 걸 생각한다면 충분히 선방했다. 전투 속행이 불가능한 배들은 가까운 해안으로 가서 정비를 받게 하도록.” “예!” 모든 배들이 전체적으로 항해 속도를 늦추며 정비를 진행했고, 그사이 아그라의 본선으로 각 함장들이 집결했다. 우선 아그라는 마일러를 불러들여 크게 질책했다. 사실상 입은 피해의 대부분이 샤르모 함대였고, 함장인 마일러의 무리한 작전 강행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아그라는 마일러의 해상 지휘권을 박탈한 뒤 일반 선원으로 강등시켰으며, 샤르모 함대의 전력은 갈라서 각 함대에 흡수하기로 했다. 더 큰 처벌을 내릴 수도 있었지만, 지금은 작전 중이고 군의 사기를 위해서라도 이 정도로 그치기로 했다. 이후에는 앞으로의 방향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각 함장들이 의견을 말했다. “아그라 부제독! 15척이 반파됐다고 하지만 사실 상태가 안 좋은 배들이 훨씬 많습니다!” “격렬한 전투를 치렀지 않소. 정신 이상 증세를 호소하는 선원들이 많고, 포탄도 너무 많이 소모했소! 돌아갑시다. 큰 작전을 치르기엔 무리가 있소!” 아그라가 스읍 하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냄새가 나질 않나?” “?” “이 일을 꾸민 놈들의 몸이 달아 있는 냄새 말이다.” 그녀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상대의 저항이 강하다는 건 상대도 우리의 공격을 경계한다는 반증이다. 반드시 작전을 강행하겠다.” 옆에 앉은 늙은 함장이 푸핫 웃었다. “제독 옆에 콕 붙어 있더니 아주 똑 닮아지셨소.” “무슨 소릴 하시는 겁니까!” 그녀가 일순 당황한 기색으로 목소리를 높였고, 함장들이 아저씨 웃음소리를 내며 클클 웃었다. 그때 평정을 되찾은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왔군.” 모든 함장들과 선원들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저벅 저벅 저벅. 무형의 망토를 휘날리며, 하얀 대검을 어깨에 짊어진 남자가 갑판에 발을 딛고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배신의 군단장!’ ‘저자가 왜 여기에?’ 쿠구구구구! 압도적인 기백이 주위를 찍어 누른다. 갑판 위의 모두가 바짝 긴장한 표정을 지으며 칼자루에 손을 올렸다. 아그라는 그들에게 허튼짓하지 말라는 듯 손바닥을 펼쳐 보인 뒤 앞으로 걸어갔다. 다른 함장들도 땀을 삐질삐질 흘린 채 옆으로 물러났고, 시몬과 아그라가 마주했다. [의외로군.] 투구로부터, 피어의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군단이 타 군단의 영역을 침범한 셈이니, 다짜고짜 공격할 거라 생각했는데.] “얕보지 마라.” 아그라가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들었다. “너를 몰랐다면 그렇게 했겠지. 하지만 그동안 우리는 너를 지켜봐 와서 알고 있다.” 저 유리 미그일이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건 3군단 본선 선원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은밀히 지켜보고 있었다. “네가 얼마나 바다에 진심이었는지.” 2주간의 본선 훈련에 누구보다 적극적이고 열심히 배우던 모습. 사소한 물걸레질 하나하나에 진심인 모습. 본선에서 독립한 뒤로는 죄 없이 위기에 빠진 지방 선단을 구해냈으며, 보물섬에서는 재물 욕심 없이 조사만 하고 빠져나온 모습까지. 그리고 이번 전투에서도 정체를 드러내는 걸 마다하지 않고 압도적인 공헌을 세웠다. “뱃사람들은 눈으로 본 것만 믿는다. 네가 지상에서 어떤 위험한 존재였든, 우리는 바다 위에서 보여준 모습만 믿는다. 너는 우리의 동료다, 시몬 폴렌티아.” 스으. 그 말에 시몬이 피어의 투구를 손끝으로 밀어 올려 얼굴을 드러냈다. “그렇게 이야기해 주시니 다행입니다. 부제독.” 분위기가 풀어지자, 몇몇 얼굴이 익숙한 3군단의 선원들도 반갑게 시몬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전투가 벌어질까 긴장해 있던 다른 함장들도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는 모습이었다. “아잇!” 아그라도 시몬의 어깨를 툭 치며 장난을 쳤다. “사실 네가 군단장인 걸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외면한 것도 있다! 웬 대형 인재가 선단에 호박처럼 굴러들어 왔다고 얼마나 기뻐했는데!” “유감이네요.” 그녀가 쩝 하고 입맛을 다시고는 고개를 들었다.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 함장의 한 사람으로서 네 의견이 궁금하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잡아 죽이러 가야죠.” 시몬이 태연히 말했다. “언노운.” 아그라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들었지?’ 하는 눈으로 반대하는 함장들을 바라보았다. 부제독과 현역 군단장이 그렇다고 정한 이상, 그 결정에 반대할 간 큰 사람은 없었다. “결사 킬러라는 명성은 이 바다에도 알려졌지.” 그때 아그라에게 농담을 던졌던 늙은 함장이 시몬을 보며 말했다. “그대가 우리 앞에 나타났단 건, 이번 일에 결사가 연관되어 있다고 봐도 되는 거요?” “100%.” 시몬이 진중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것도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라 구원자와 관련된 건입니다.” 웅성 웅성 웅성! 함장들이 굳은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었고, 시몬은 모두의 앞에서 자신이 보고 느낀 것들을 설명했다. 보물섬의 정체, 그리고 죽음의 함대의 정체. 이로부터 예상할 수 있는 구원자의 능력까지. 결사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시몬의 이야기니 다들 순순히 받아들였다. “우리 함대만 이런 일을 겪은 게 아닐 수도 있다. 구원자가 이런 함정을 여러 개 파두었을 가능성이 농후하지.” 아그라가 팔을 들어 올렸다. “전속력으로 제독이 기다리고 있는 미스테리 킬 작전지를 향해 이동하겠다!” 쏴아아! 쏴아아아아아! 선상 회의가 끝나고 모든 배들이 한층 속도를 높였다. 함장들이 하나둘 자신의 배로 돌아가려는 모습을 본 시몬도 슬슬 녹티스호로 이동하려 하는데. 지이이이이- 함장들 중에서 말석에 서 있던 에스텔라 살롱 소속의 신입 함장들이 눈에 레이저를 쏘듯 시몬을 응시하고 있었다. ‘설명해 줘!’ 다들 그런 눈빛으로 시몬을 바라보고 있었다. 태연하게 서 있는 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크리스티나 셀린뿐이었다. 시몬이 하는 수 없다는 듯 미소 지은 뒤 그들에게 손짓했다. “잠깐 장소를 옮길까요?” * * * 선내로 들어온 시몬은 에스텔라 살롱의 함장들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 바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3군단 함장 시험에 참여한 것. 그를 위해 시험 자격을 양도하려는 유리와 만나 나눈 이야기. 그리고 자신이 유리에 대해 알아본 바와, 변경백 백작 부인의 음모, 그리고 로잘린 다르시아가 떠난 이유까지. 크리스티나 셀린, 알리라 헌트, 마일러 드 샤르모, 배질 포트시. 다들 어딘가 홀린 사람처럼 그 모든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게 여기까지 오게 된 겁니다.” 지독할 만큼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다들 고개를 숙인 채 뭐라 말을 잇지 못하는 모습. 유리가 우리를 속였다고 화를 내거나, 역시 유리가 그렇게 강할 리가 없다며 비웃거나 하는 반응은 없었다. 그들의 흔들리는 눈동자는 과거를 헤매고 있었다. “저, 정말로……!” 알리라 헌트가 입을 열었다. “백작 부인이 유리를 모함했다는 증거가 있어? 아, 아니! 있는 거예요?” 시몬은 말없이 메모리얼 수정구를 켠 채 바닥에 내려놓았다. -미안하지만 아버지는 처음부터 꿰뚫어 보고 계셨어. 내 동생을 변경백 자리에 세우려는 게 새어머니의 소행이란 걸. 시몬의 목소리가 들리고. -아니, 아니, 아니아니! 나는 그! 그그! 억울해! 난 억울해! 어머님이 아버님과도 이야기가 됐다고 해서! 두 분이 합의한 줄 알고……! 누가 봐도 선명한 로잘린의 목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 죄를 시인하는 음성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 증거로는……!” “믿어야지.” 놀랍게도. 그렇게 말한 건 마일러였다. 그는 죄책감에 입술을 꽉 깨문 채 파들파들 떨고 있었다. “우린 이미 거짓된 소문을 믿고 친구를 버렸어. 그런데 친구가 죄가 없다는 소문은 못 믿는 거야?” “아니, 그, 그런 말이 아니잖아!” 알리라가 당황해하며 말했다. 배질 포트시는 몸을 움츠렸다.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 그야 우리가 잘못했지! 나쁜 소문이 돌아도 친구로서 믿어줬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으니까! 그래도 유리도 엄연히 잘못한 부분이……!” 거기까지 말한 알리라 헌트가 이내 말을 멈추고, 자조하듯 중얼거렸다. “……없네.” “…….” 유리는 자신이 나쁜 소문과 관계없다고 선을 그었다. 적극적으로 해명하지 않았다는 것도 그들의 생각일 뿐, 유리는 소문을 부정했고 친우들이 그걸 믿지 않았다. 단지 그뿐인 이야기였다. “나 먼저 말할까?” 그때 크리스티나 셀린이 말했다. 모두가 고개를 들어 크리스티나를 보았다. “처음에 유리로 변장한 군단장님을 봤을 때 느낀 감정은 분노와 원망이었어. 그러다 유리가 대활약하는 모습을 보면서 놀라기도 했고 질투 나기도 했고…… 더 솔직히 말할까? 이렇게 유리가 잘 성장할 줄 알았으면 약혼을 파기하지 말걸 하고 후회했어.” 너무나 솔직한 이야기에 모두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나는 본질부터가 사람을 정쟁의 도구로만 보는 셀린가의 인간이니까. 로잘린이 했던 말이 옳아. 나는 쓰레기야.” “크리스티나…….” “그런데 이상하지. 그저 도구가 아까웠을 뿐이라면 내 선택이 잘못됐구나 하고 빠르게 체념했을 거야. 보통의 나라면 그랬겠지. 하지만 그 뒤에 점점 내 감정의 내면을 돌이켜 보고 또 돌이켜 보니까 말야.” 그녀가 가슴에 손을 올렸다. “내가 유리를 왜 좋아했었는지, 왜 아버지의 말씀을 어기면서 유리와 약혼했는지, 내 근간을 이루던 그 마음과 감정이 모두 기억나 버렸어.” “…….” “나는 유리한테 찾아가서 잘못을 빌 거야. 다시 유리가 사람의 신뢰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노력할 거야. 그가 나를 거절해도, 나를 다시는 보기 싫다고 하더라도 10년이고 100년이고 가만히 그를 바라볼 거야.” 알리라 헌트가 파르르 떨었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그럼 크리스티나 님의 인생은……!” “내가 유리의 인생을 망쳤어. 당연한 책임이야.” 그녀가 눈을 감았다. “모두가 외면했어도, 약혼자인 나는 그를 믿어줬어야 했어.” “나도.” 이번에는 마일러가 말했다. “유리에게 할 말이 있어.” -일단 표정부터가 간절함이 없어! 정신력도 약하고, 무엇보다 의지가 부족해! 노력해서 부족한 부분을 메우고, 아버지의 인정을 받으면 될 일을 왜 못 하는 거지? 이 쉬운 걸 왜 안 해? 왜 열심히 살지 않는 거야? 나는 너를 이해할 수 없어! 비록 유리가 아니라 시몬에게 한 말이지만, 가슴을 쿡쿡 찌른다. 마일러는 너무나 쉽게 입을 나불댔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확실히, 제대로 과오를 돌이켜 보고 용서를 빌어야겠어. 유리가 사과를 받아들이건 받아들이지 않건, 심지어 나를 평생 용서하지 못하더라도 제대로 사과해야겠어.” “저도 그렇습니다.” 배질이 울먹거리며 머리를 붙잡았다. “멋대로 유리 경을 추종하면서 따라다니고, 유리 경이 무너지니까 멋대로 혐오하고.” “나도 다를 바 없어. 소문이라고 덥석 믿고……!” 곳곳에 후회와 회한의 감정이 맴돌았다. 시몬이 가볍게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건방지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제3자의 입장에서 말씀드리자면요.” “?” “유리 경이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지만, 잘못을 뉘우치고 사과를 하겠다는 마음 자체는 잘못된 게 아니에요. 여러분은 그 점에서 훨씬 낫네요. 이 세상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거나 반성하지 않고 회피하는 사람들이 더 많으니까요.” 시몬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 전투가 끝나면 다 같이 유리 경에게 찾아가죠. 하지만 지금은 당장은 때가 아니에요. 이번 일을 매듭지어야 합니다.” 시몬이 창밖의 바다를 바라보았다. “이번 일이 잘못되면, 사과할 틈도, 대륙의 운명도 없을지도 모르니까요.” 모두가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후회는 미뤄두고, 아직 중요한 일이 남아 있었다. 쿠구구구구구구! 언노운과 가까워지는 것을 알리듯, 바다의 흔들림이 더더욱 격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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