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 학교의 소환천재 1283화 마일러 드 샤르모는 명문 후작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늘 입버릇처럼 말했다. -민중은 우매하고 자기 자신밖에 모른단다. 그러니 우리가 민중을 가르치고 일깨워야 한다. -왜 그렇게 해야 하죠? -그것이 귀족의 의무이기 때문이란다. 그런 아버지의 철학에 입각하여, 마일러는 엄격한 가문 교육을 받아 성장했다. 덕분에 어떤 일이든 곧잘 해냈고, 그의 자존감은 단단해져 갔다. -바보 같아. 왜 이런 것도 못해? -허허, 모든 사람들이 도련님만큼 금방 잘하게 되는 건 아닙니다. -나도 처음부터 잘하는 건 아냐. 못하면 그만큼 노력해서 잘해지는 거지. 뭐든지 노력을 기울이면 못 할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마일러가 성인이 되어 주위를 둘러보니, 열심히 노력하지 않는 민중들이 보였다. 이상했다. 세상은 노력하면 노력한 만큼 보상이 주어지는 공정한 시스템인데, 왜 노력하지 않는 걸까? 왜 불만만 터뜨릴 뿐 자기 처지를 바꾸려고 하지 않는 걸까? 다른 귀족들이 이런 민중을 비웃고 넘어갈지라도 자신은 다르다. 민중에게 자신처럼 하면 된다는 걸 알려주는 것이 귀족이고 샤르모다. 쏴아아아아아! 차가운 바닷물이 얼굴에 튀며 마일러는 정신을 차렸다. 튀어 오른 물거품이 코에 들어가는 바람에 쿨럭 쿨럭 기침을 한 그가 흔들리는 갑판 위에서 균형을 잡았다. ‘멍하니 있을 때가 아냐.’ 검은 함대의 활약 덕분에 아군의 상황이 좋아졌다. 여기서 쐐기를 박아야 한다. 물론 그 역할은 자신이 해야 한다고 생각한 마일러가 통신 수정구를 들었다. “샤르모 함대는 들어라! 적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서 우리가 적진을 통과해 들어간다! 이후 적의 후방을 잡고 타격할 것이다!” 마일러의 지시를 들은 샤르모의 함장들이 말렸다. -함장! 굳이 위험을 무릅쓸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나가면 아군 진형과 멀어집니다! 적에게 포위당할 겁니다! 이 중요한 때에 답답한 소리를 하고 있다. 검은 함대의 활약에 적이 혼란에 빠진 지금, 정면을 뚫고 후미를 잡으면 놈들을 아무런 피해 없이 격퇴할 수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불가능하다’, ‘위험하다’는 소리만 늘어놓는다. 왜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려고만 하는가. -민중은 우매하고 자기 자신밖에 모른단다. 마일러가 목소리를 높였다. “파고드는 우리 함대의 규모가 적보다 크고, 적들은 다른 함대의 포격에 정신이 팔려 있다. 그 틈을 이용해야 해!” -말씀은 이해하지만 너무 위험합니다! “위험부담을 감수하는 게 전쟁이야! 이 전술은 시기적절하고, 심지어 올바르다! 하면 되는데 왜 안 하려 하는 거지?” -우리가 민중을 가르치고 일깨워야 한다. “너희가 망설이겠다면 본선이 선두에 서겠다! 모두 따라와라!” 콰콰콰콰콰콰! 마일러가 탄 본선을 중심으로, 샤르모 함대는 아군 진형에서 빠져나와 적진을 향해 강행돌파했다. 그의 말대로 죽음의 함대들은 한바탕 들쑤시고 다닌 시몬의 검은 함대 때문에 혼란에 빠진 상태라, 마일러의 기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봐봐! 내가 된다고 말했잖아!” -여기는 3군단 선단 작전실! 샤르모 함대는 돌아오십시오! 무모합니다! 말리는 3군단 측 통신이 있었지만 마일러는 거절했다. “검은 함대는 개별 기동하고 있는데 왜 우리만 안 된다는 겁니까! 샤르모 함대는 함장인 제 지시만을 듣습니다!” 안 되는 이유를 찾을 시간에 움직여야 한다. 그가 부하들에게 외쳤다. “결정적 승리가 눈앞에 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서둘러라!” 마일러가 올라탄 본선이 바다를 가르며 적진을 관통했고, 마침내 적진의 후방으로 빠져나가는 데 성공했다. 그가 갑판에 쿵! 발소리를 크게 내며 뒤를 돌아보았다. “다들 아주 잘했다! 이제 여기서 우회하면……!” 순간, 마일러는 심장이 멈추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아.’ 아무도 없다. 뒤에 배들이 따라오지 않았다. 조금 더 고개를 들자, 본선을 줄줄이 따라오던 샤르모 함선들이 다른 죽음의 함대에 부딪혀 공격당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나마 무사히 따라오고 있던 한 척이 또 다른 죽음의 함대 선미에 부딪히며 고립되고 말았다. 타락한 인간들이 아군의 배로 뛰어드는 모습이 보인다. -으아아아악! -사, 살려주……! 커흑! 샤르모의 선원들이 죽어간다. 배가 불타간다. ‘이, 이럴 리가 없는데? 내 전술은 분명 옳았어.’ 그의 시선이 후방으로 향했다. 마일러의 명령을 거부하고 본대에 남은 샤르모 함선 몇 척만이 겨우 전력을 유지하며 포격으로 적들을 섬멸하고 있었다. ‘……그래, 나는 틀리지 않았어. 실행자들이 제대로 따라주지 못한 거야. 모두가 따라왔으면 해낼 수 있었어!’ -함장! 아군 함선을 도와줘야 합니다! 함장! 통신구로부터 항해사의 외침이 들렸다. 그 말을 들은 마일러가 한차례 눈을 꾹 감더니, 절망적인 후방을 외면하듯 고개를 돌려 앞을 보았다. “본선만이라도 작전을 감행한다. 한 척이라도 적의 후위를 잡으면 큰 압박이 될…….” 마일러의 말은 채 이어지지 않았다. 쿠쿠쿠쿠쿠쿵! 갑자기 선체가 크게 기우뚱하며 거칠게 진동했다. 어느새 사각에서 불쑥 나타난 죽음의 함대 한 척이 강하게 샤르모 함대 본선 옆구리를 틀어박은 것이다. 이를 본 마일러의 동공이 흔들렸다. ‘바, 바다 아래에서 나타났다고?’ -키기기기기! -께게게게! -께르르르르르륵! 본선의 움직임이 멈추고, 즉시 타락한 인간들이 샤르모의 본선으로 올라오며 백병전을 걸어왔다. “저, 적이다!” “맞서라!” 무장한 샤르모의 선원들이 갑판 위로 몰려들어 병장기를 휘둘러 댔다. 마일러는 몇 걸음 뒤로 물러나다가 이내 욱신거리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말했다. “한 척쯤 상대하는 건 문제없다! 이들을 처치한 뒤에 우회해서 적을 공격하자!” 저벅 저벅! 그때 본선의 항해사가 마일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마일러가 그를 돌아보며 외쳤다. “항해사! 왜 여기 있는……!” 퍼억! 항해사가 냅다 주먹으로 마일러의 얼굴을 후려쳤다. 얼떨결에 맞아서 갑판에 나가떨어진 마일러가 당혹스러워하며 얼굴을 붙잡았다. “가문의 도련님이라고 보자 보자 하니까, 아직도 정신 못 차렸냐!” 그가 팔을 뻗어 뒤를 가리켰다. “전부 네놈이 한 짓이다!” 그가 가리킨 곳에는 무리하게 본선을 따라오던 샤르모의 함선들이 점점 불타고 가라앉는 모습이 보였다. “네놈의 독선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어야 정신을 차릴 거냐!” “독…… 선?” 얻어맞은 마일러의 눈가가 떨렸다. 그의 머릿속에 주전자 끓는 소리가 났다. ‘내가 독선적이었다고?’ 감정의 홍수가 그의 뇌로 쏟아졌다. 뇌는 자아를 지키기 위해 모든 감정을 하나의 강렬한 감정으로 응축시켰다. 그 감정은 분노였다. “너희들이 내 전술을 못 따라준 거다! 내 계획은 완벽했어! 그렇게 비좁은 시야로 전황이 보일 리가 있나!” 마일러가 역으로 달려들어 냅다 항해사의 안면을 후려갈겼다. 항해사는 한참을 날아가 갑판 바닥을 나뒹굴며 괴로워했다. “왜 못 해? 왜 다들 그것밖에 못 하냐고! 내 지시에 즉각 따랐어야 했어! 더 훈련하고 노력했었어야 했어!” 아득바득 소리 지르는 마일러가 눈물을 줄줄 쏟고 있었다. 자신이 하는 소리가 올바르지 않다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인지는 하고 있었지만, 그는 그 감정을 제어할 힘조차 잃은 상태였다. “미친…… 새끼……!” 코가 부러진 항해사가 바들바들 떨며 상체를 간신히 일으켰다. 그의 눈에는 분노보다는 피로감이 뒤섞여 있었다. “후작 놈……! 자기가 뛰어날수록 자식 교육은 개판이라더니 딱 그 꼴……!” 퍼억! 그때 항해사의 허벅지에 화살이 날아와 꽂혔다. 항해사가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지르곤 갑판을 나뒹굴며 괴로워했다. -끼긱! 끼긱! 끼긱! 마치 이빨이 갈리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타락자 중에서도 유독 거대하고, 상반신 일부가 불가사리로 대체되어 있는 남자가 석궁을 든 채 서 있었다. 몸 곳곳에 선혈이 묻어 있는 걸 보니 갑판의 아군들을 모두 죽이고 온 것 같았다. “크윽!” 딱 봐도 외형이나 체형, 의복 등이 대륙민은 아니었다. 아주 오래전에 타락한 것으로 보였으며, 지금까지 본 타락자들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손에 든 석궁이 마일러를 향해 겨누어졌다. 푸확! 의문을 품을 틈도 없이 마일러가 몸을 날려 석궁에서 발사된 볼트를 피했다. 그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흑마법을 발동시켰다. <샤르모 가문 고유기 – 쇠진화원(衰盡花園)> 쏴아아아아아아아아! 그의 칠흑이 퍼져나가서 갑판을 온통 칠흑의 꽃밭으로 만들어 버렸다. 다른 타락자들의 몸에도 꽃이 자라나며 그들이 털썩 털썩 쓰러졌지만. -끼긱! 끼긱! 끼긱! 그러나 보스 격으로 보이는 이 남자는 아직도 움직이고 있었다. 꽃을 헤치며 걸어가던 그가 손에 든 석궁을 내던지고, 등 뒤의 사브르를 뽑으며 마일러에게 뛰어들었다. “빌어먹을!” 마일러가 다급히 두 손바닥을 맞부딪히자, 연꽃 하나가 올라와 우산처럼 펼쳐졌다. 그러나 불가사리 남자의 일격에 연꽃이 찢겨 나가고, 그대로 그의 팔이 쏜살처럼 다가와 마일러의 목을 붙잡았다. “커흑!” 마일러가 피를 토했다. ‘내가……!’ 숨을 쉴 수가 없다. 점점 의식이 흐릿해진다. ‘내가 이런 곳에서 당할 수는……!’ 마일러가 하늘로 시선을 둔 채 고통스럽게 발버둥 치는 순간. ‘!’ 그 하늘에서 새하얀 무언가가 떨어져 내렸다. 투콰아아아악! 불가사리 남자가 급히 마일러를 손에서 던져 버리고 사브르를 머리 위로 세우는 방어 자세를 취했다. 대검과 사브르가 충돌하며 맹렬한 충격파가 일어났다. 콜록 콜록! 마일러가 기침을 하며, 어느새 자신의 옆으로 내려온 남자를 바라보았다. 무형의 망토를 늘어뜨린 채, 뼈로 만든 갑주를 입은 남자가 검푸른 안광을 뿜어내며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마일러는 그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배, 배신의 군단장! 어째서 여기에?’ 아아아악! 그때 한 외침이 들렸다. 다리에 볼트를 맞아 제대로 도망치지 못하는 항해사를 향해 타락자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피어, 여긴 제게 맡기고 저분을 구해주세요.] [그러지!] 촤라라라라락! 그 한마디에, 남자의 몸을 둘러싼 뼈들이 벗겨지더니 언데드의 형태로 바뀌어 항해사 쪽으로 향했다. 그렇게 드러난 남자의 정체를 확인한 순간, 마일러가 눈을 부릅떴다. “유, 유리?” 유리 미그일이 배신의 군단장이었다니! 아니다. 생각해 보니 그럴 리가 없다. 아무래도 이 군단장이 유리로 분장한 것 같았다. “물러서십시오, 마일러.” 시몬이 지시했다. 유리에게서 들어본 적 없는 강렬한 카리스마가 담긴 음성, 마일러는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다급히 물러났다. 그리고 불가사리 남자가 이빨 가는 소리를 내며 시몬을 경계한 채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이에 시몬이 하늘로 손을 뻗었다. “라미아, 순차적으로 물벼락을 보내줘.” 퍼어어어어어어엉! 그 한마디에 수면으로부터 물의 벼락들이 하늘로 승천했다. 그러다 고공에서 방향을 바꾸더니 시몬을 향해 떨어지기 시작했다. 스읍. 후우우우- 경건하게 심호흡을 마친 시몬이 두 손바닥을 하늘의 물벼락을 향해 뻗었다. 터업! 이내 자신에게 떨어지는 물벼락을 맨손으로 붙잡더니, 몸을 빙글 회전시키며 날렸다. 차악! 촤아아악! 물줄기가 푸른 직선을 그리며 날아가 불가사리 남자의 갑옷에 파고들며 가슴과 어깨에 꽂힌다. 어떤 물줄기는 그대로 남자의 몸을 관통하기도 했다. 꽈드드득! 꽈득! 시몬의 움직임이 점점 현란해지고 불가사리 남자의 몸에 물줄기가 고슴도치처럼 박혔다. 그의 두 발등에 물줄기가 꽂혀서 기동성을 차단하고, 무릎에 떨어뜨려 그대로 갑판에 박아 넣었다. 시몬이 이제 공중으로 뛰어올라 물줄기의 결을 빠르게 잡곤 허공에서 여러 개의 물줄기를 하나의 형태로 엮어냈다. <시몬 & 라미아 연계기 – 취연성뢰>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그대로 커다란 물벼락이 푸른 일격을 그리며 날아갔다. 마일러의 입이 벌어졌다. ‘이럴 수가!’ 자신은 티끌만 한 상처도 내지 못한 불가사리 남자의 몸 한복판에 커다란 도넛 구멍이 생겨났다. 그대로 그가 무너지며 움직임을 정지했다. 타악. 탁. 느긋하게 갑판에 착지한 시몬이 손바닥을 한 차례 터는 모습이 보였다. 명성 그대로의 강함. 그때 마일러가 시몬의 뒤를 보고는 다급히 외쳤다. “뒤, 뒤를 조심하십시오!” 쿠우우우우우우웅! 또 하나의 죽음의 함선이 마일러의 본선에 들어박혔다. 그것의 선미가 들리더니, 우글거리는 타락자들이 낄낄거리며 건너오기 시작했다. ‘이, 이건 이길 수 없어!’ 역시 대륙민이 아니다. 그 이전의 존재들이었다. ‘이젠 다 죽었…….’ “구원자가 이 배에 타고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 태연히 그렇게 중얼거리는 시몬은 웃고 있었다. 마일러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외쳤다. “여. 여기서 도망쳐야 합니다!” “?” 그 말을 들은 시몬이 얼굴에 물음표를 띄우더니, 이내 픽 웃으며 팔을 옆으로 뻗었다. 처어어어억! 피어의 손뼈가 시몬의 몸에 장갑처럼 달라붙고, 그 뒤로 파멸의 대검이 들려와 그의 손에 잡힌다. 이내 몸 곳곳으로 뼈 파츠가 연결되어 다시 피온 모드가 된 시몬이 파멸의 대검을 기울이며 자세를 잡았다. “상대가 너무 많아! 피해야……!” 그 직후. 마일러는 입을 다물었다. 스릉- 일자로 매끈한 순백의 직선이 배와 허공을 긋고, 세상을 양단했다. 너무나 아름답고 완벽한 선. 소리와 시간이 멈춘 지금 이 순간, 시몬이 대검을 든 손을 한 차례 털고는 대검을 어깨에 짊어지는 시늉을 취했다. 쩌어어어어어어어어어엉! 몰려드는 모든 타락자들과 저 거대한 함선이 반으로 갈라지며 바다에 가라앉기 시작했다. 마일러는 전신에 소름이 돋는 기분을 느꼈다. 아마 자신은 평생 노력해도 이르지 못할 경지. [왜 이 정도도-] 그때 시몬이 마일러를 돌아보며 말했다. [못 하지?] 털썩. 마일러는 망치에 머리가 깨진 사람처럼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 하늘 위에는 하늘이 있을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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